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89)
와아, 표정 한번 살벌한데.
‘어린애가 이곳에 있어서 당황한 건 아닌 것 같고.’
그의 눈빛 속에 자리한 건 걱정이 아닌 혼란, 의아함, 그리고 막연한 깨달음이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확실히 도박장에 이런 어린애가 있는데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건 조금 이상하긴 하지.
‘계속 미친 사람 취급받으면서 쫓아다녀야 하나 싶었는데, 차라리 다행이야.’
이런 식으로 산통을 깨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언제까지고 흘러간 과거에 매몰되어 있게 놔둘 수는 없는 법.
[…….]이윽고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배경 사이에서, 나는 지크프리트 씨를 향해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다음 장소가 펼쳐졌다.
이번 풍경은 내게도 퍽 익숙한, 그러면서도 조금은 낯선 곳이었다.
[우리 집…….]저택 바깥을 둘러보며 지크프리트 씨가 있을 만한 곳을 살펴보려니, 곧 서재 안쪽에 서 있는 네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지크프리트 씨와 빅토리아 씨, 그리고 내 부모님이었다.
나는 창문 쪽에 찰싹 달라붙어 그들이 하는 말을 엿듣기 시작했다.
[……곧……, 딸이…….] [……형님…….]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잖아. 대충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긴 한데.
[……사냥제에서……, 우승…….] [폐하께서……, ……모르겠구나.] [……도움……, 알았죠?]아니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결국 엿들으려던 마음을 접고서 창틀에 팔을 올리고 그대로 턱을 괴었다.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꽤 친밀해 보이네.
빅토리아 씨가 건강했다면, 저 사이에 내가 낀 풍경도 볼 수 있었을까.
‘에휴, 이런 감상에 젖으면 안 돼.’
중요한 건 어쨌든 지크프리트 씨를 이 꿈에서 데리고 나가는 거니까.
하지만 대체 어떻게…….
[어?]그때, 어쩐지 이질적인 것이 내 눈에 띄었다.
‘빅토리아 씨의 머리 끈.’
정확히는 머리 끈에 달린 꽃장식.
장식 달린 머리 끈은 그렇게까지 희귀한 디자인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위화감이 든단 말이지.
마치 누군가 내 귓가에 ‘저게 정답이야’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은…….
“내 네게 행운을 빌어 주마.”
바로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람결처럼 고요하고 잔잔히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네 길을 잃지 않도록.”
그와 동시에 내내 막연하게 느껴지던 해법이 명쾌하게 정리되어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논리라기에는 차라리 본능에 가까우면서도, 직감이라기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저거다.]저 장식, 아니, 정확히는 저 꽃. 저걸 제거하면 깨어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익명의 드래곤님!’
갑자기 그 목소리가 들려온 걸 보면 어르신처럼 그녀도 내게 뭔가 능력을 심어 줬던 거겠지.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걸 예측한 건지, 아니면 그냥 ‘쓸 일이 있으면 좋고 아니면 됐고’ 식으로 도와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해결법을 알았으니 되는 일 아닐까? 자세한 건 다음에 어르신한테 물어보면 되고.
‘그러니 일단은 지크프리트 씨를 피해 빅토리아 씨한테 몰래 접근할 방법부터 찾…….’
아야 하는데.
나는 생각을 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서재 안의 지크프리트 씨가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러고서 그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을 꺼내는가 싶더니, 이내 성큼성큼 서재를 빠져나갔다.
[너!]이어 저택을 완전히 빠져나온 지크프리트 씨가 내게 다가오고서 두 어깨를 잡아챘다.
나는 그대로 꿀꺽 침을 삼키고서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러셀 경. 저는 이 저택에 침입한 게 아니고요, 따지고 보면 여긴 제 집인데요. 아직 기억이 없으실까 봐 정식으로 소개하자면, 제 이름은…….] [미에나.] [네, 제가 바로 그 미에……, 엥?]뭐야? 내 이름을 알고 있잖아?
[저 기억 나세요? 언제부터?] [방금 너 발견한 순간부터. 그전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긴 했었다만.]내 물음에 지크프리트 씨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하긴, 아무래도 우리 만남이 워낙 부자연스럽기는 했지.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왜긴 왜겠어요. 당연히 러셀 경 깨우러 온 거죠. 보기 좋게 러셀 경만 그 저주인가 뭔가에 걸린 모양이던데요.] [그 저주?]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직접 깨우러 왔어요. 생각했던 대로 전염병이 아니어서 다행이죠.] […….] [아직은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행복한 기억만을 떠올리게 해 계속 꿈속에 붙잡아 놓는 종류의 저주인 것 같아요.] [행복한 기억.] [꼭 행복한 기억만 되풀이하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 간절히 바라는 걸 꿈속에서나마 쥐여 주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지크프리트 씨가 담담히 덧붙였다. 시선은 서재 너머의 사람들에게 향한 채였다.
그 가벼운 말속에 담긴 깊이를 나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어, 나는 괜스레 말을 돌렸다.
[이제라도 절 알아봐서 다행이에요. 마침 방금 막 나갈 방법도 찾았거든요. 빅토리아 씨의 머리 끈에 있는 꽃을 떼어 내면 되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당장―] [당장은 안 돼.]하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이전보다 단호한 기색으로 내 말을 끊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 된다니?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지크프리트 씨. 여기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가늠할 수 없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장담해.] [러셀 경.] [그냥, 그냥 이대로 가기에는 아쉬워서 그래.]이윽고 그가 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탄하듯 말을 꺼냈다.
[비키, 니케가 그렇게 떠나고 나서. 니케가 나오는 꿈은 줄곧 떠나기 직전이나 투병할 때뿐이거든. 투병 기간이 길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 [언제 또 이런 꿈을 꿀 수 있을지 모르잖아. 한 번만 부탁한다, 응? 작별 인사만 할게.]아니, 그렇게 말하면 막을 수가 없잖아…….
[꾸, 꿈인 건 확실히 인지하셨으니까,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결국 한 수 접고서 우물쭈물 말하자, 지크프리트 씨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고맙다.]그리고 그 직후, 시야가 또 한 번 뒤바뀌었다.
이번 역시 내게는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타오를 듯한 주홍빛 노을,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는 붉은 꽃무릇.
빅토리아 씨의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배경에서, 그때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자세를 한 채.
[진지하게 할 말이 있는데.]지크프리트 씨가 그 누구보다 환하게, 섧게 미소 지으며 그때와 똑같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정말로 장난 아니야.] [항상 그렇게 말해 놓고 실없는 소리만 늘어놓았으면서.]당연하게도 빅토리아 씨 역시 그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대답을 내어놓았다.
[너는 언제나 허황한 말만 늘어놓지. 물론 그런 너를 좋아하지만, 지크. 지금은 그런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이 모든 건 이미 흘러간 과거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하듯이.
[빅토리아.]그 완벽한 레플리카 속에서, 지크프리트 씨가 이번에는 그때와 다른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니케.]추억의 끝자락을 붙잡아 비틀 듯.
[저 애 말로는, 당신은 항상 이곳에 있는 꿈을 꿨다고 하던데. 그래서 이왕이면 이곳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마지막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잖아, 우리.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작은 구름 떼처럼 쩍 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바람을 타고 흘렀다.
[바로 여기서, 그 끝이 설령 지옥일지라도 함께 도망가자고 했지.] [지크?] [어쩌면 우리는 도망치지 않았어야 했던 걸지도 몰라.]제 연인에게 도망가자 제안했던, 자신감 넘쳤던 남자가.
[도망친 후에도, 괜한 아집을 부리느니 다시 황도에 돌아왔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지.]그때와 똑같은 얼굴로, 제 연인의 손등 끝에 입을 맞추며 젊은 날의 오만을 괴로이 마주했다.
[네가 내내 이 약속을 후회했던 것처럼, 어쩌면 나 역시도…….]입가에는 여전히 빛나는 미소를 억지로 담아낸 채였다.
완벽하게 비틀린 꿈, 망가진 레플리카, 그에 따라 이지를 잃고 멈춰 버린 망령 앞에서.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꿈이자 행복이고, 사랑이자 삶이야.]내 숨이고, 빛이고, 생이지.
홀로 남은 사람이 닿지 못할 고백을 힘겹게 털어놓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러니까.] […….] [내가 네 순간을 짊어질게. 생을, 삶을 이어 나갈게.]그러고서 그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흐드러지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만큼 나는 이제 더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야.] […….] [그래서 네 곁에 머무를 수 없어.] […….] [이곳의 너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네 존재는.]내겐 한낱 저주일 뿐이니까.
말을 마친 그가 빅토리아 씨의 머리 끈을 거칠게 잡아당겨 꽃을 으스러뜨렸다.
[나중에 봐, 내 사랑.]동시에 이를 기폭제로, 언제까지고 견고할 것만 같았던 꿈이 차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에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너머로, 지크프리트 씨의 꿈에서는 마주할 리 없는 얼굴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현실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