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91)
어제 본 그 애잖아.
“어……?”
남자아이 역시 우리를 기억한 듯 나와 지크프리트 씨를 번갈아 바라보며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이맘때쯤의 아이들은 또래한테 괴롭힘당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끄러워하던데, 얘는 그런 기색이 없네.
“러셀 경, 가방에서 연고 좀 꺼내 주시겠어요?”
여기선 상처를 소독할 수 없으니 바로 연고를 바를 수는 없을 것 같고.
“조금 까진 정도라 금방 나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한동안은 이 연고 꾸준히 발라 줘.”
이내 지크프리트 씨에게 건네받은 연고를 손에 쥐여 주자, 아이가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다 말고 자그맣게 대답했다.
“……네에…….”
나는 그런 아이를 향해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루스를 닮았단 말이야. 이런 소심함도 그렇고 저 푸른 눈도 그렇고.
괜히 챙겨 주고 싶게.
“좋아, 그럼 내 손 잡고 일어나자.”
곧이어 아이에게 손을 뻗으며 입을 연 찰나였다.
“이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누군가 이쪽으로 허겁지겁 다가왔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어제 만났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당신들은…….”
이윽고 골목 입구에 멈춰 선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손자와 우리 일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곧바로 양손을 들어 올리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희가 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무해합니다.
* * *
아이의 집은 아담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지크프리트 씨의 오두막 같은 집과는 또 다른 분위기네.
‘환경에 따른 차이려나.’
나중에 루스 교육 자료로 써먹어야지.
“제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반을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집을 구경하고 있던 사이, 노인이 내게 컵을 건네며 말문을 열었다.
이름이 아론이라고 하셨지.
“아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세상에는 당연한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요.”
그러고서 그는 이반의 손에 쥐어진 연고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가문이라고 하기에는 변변찮지만, 저희는 오래전부터 주술사로서 이곳에 뿌리를 내려왔습니다. 요 몇 년 동안은 한 해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것 외에는 별일 없었으나…….”
“이번에 이런 일이 생겨서 곤란하셨겠어요.”
어쩐지 서슴없이 이번 일을 ‘저주’라고 평하더니, 정말 주술사셨구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내 맞은편에 앉은 아이를 흘긋거렸다.
‘여기서 내가 갑자기 저주를 해결해 버리면 괴롭힘이 더 심해지려나.’
물론 그렇다고 사람을 안 구할 수는 없지만, 이 부분은 주의가 필요하겠는걸.
어차피 나는 공치사에는 관심이 없으니, 여차하면 아론 어르신의 공으로 돌려 버리거나.
“그러고 보면 밤사이에 저주를 더 받은 사람은 없나요?”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내 물음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알기로는 더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기에는 당장 지크프리트 씨가 당하긴 했는데. 하지만 우리는 외지인이니 사정을 모를 수밖에 없는 것도 맞고.
‘돌아다니며 직접 확인하고 싶어도, 아마 문을 안 열어 주겠지…….’
카타르타 지역이면 아슬아슬하게 시두스 저택에서도 반경이 닿는 거리니, 돌아가서 꾸준히 살펴보는 수밖엔 없나.
이번에도 생각에 잠겨 눈을 되록되록 굴리고 있으려니, 곧 유스틴의 은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딱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허튼 생각하지 마세요.’
들켜 버렸잖냐…….
“저, 외람되지만 어째서 여러분들께서는 이곳에 다시 돌아온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사이 어르신이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나는 유스틴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산뜻하게 대답했다.
“이 저주를 해결하고 싶어서요.”
“누나는 저주를 풀 수 있어요?”
동시에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쑥스러워하더니, 신기하게 느껴졌나 보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잘 몰라. 그래도 시도는 해 보려고.”
“왜요?”
드디어 나왔구나, 어린아이의 순수한 ‘왜요’ 공격. 하지만 이번 공격은 쉽게 방어할 수 있지.
“그야 살리고 싶으니까.”
“모르는 사람인데도요?”
“모르는 사람이어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고 내게 도울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적어도 내게는 그게 이치니까.
“할아버지 말로는, 그 가문은 나쁜 짓을 많이 했댔어요.”
이반이 아리송한 얼굴로 우물쭈물 말을 건넸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설설 쓰다듬으며 답했다.
“지금의 반스 남작은 선대와 같지 않다고 들었어.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벌을 받는 건 슬픈 일이잖아.”
내 말에 이반은 잠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동그란 눈을 사르르 휘어 웃으며 툭 말을 내뱉었다.
“누나는 정말 착하네요.”
“음? 어어, 그런가.”
나는 떨떠름하게 웃음을 흘렸다.
애가 할아버지한테 이런 식으로 칭찬을 많이 받았나 본데.
“레이디께서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묘한 능력을 지니셨나 보군요.”
내내 나와 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어르신이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늙은이 역시 부름을 받아 직접 살펴보았지만, 마땅한 해주 방법은 찾지 못하였는데……. 레이디께는 묘한 확신마저 보이는군요.”
“그냥 시도만 해 보려는 거예요.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솔직히 나는 안 될 리가 없다고 보는 쪽이 맞지만.
“혹시 제가 주제넘게 나서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라면―”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레이디 말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마땅히 돕는 게 이치에 맞지요. 다만…….”
곧이어 어르신이 잠깐 말끝을 흐렸다가, 담담하면서도 진중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레이디께서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계속 그들을 도울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그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라면.
한 점 고민 없이 답을 내어놓자, 아론 어르신이 다시 한번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 사람이 살인자일지라도요?”
나는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순간 마담 아페르타의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만약 내가 살리려는 사람이 마담과 같은 범죄자라면, 그렇다면 나는…….
“어려운 주제군.”
바로 그 순간, 이곳에 온 뒤로 줄곧 입을 열지 않고 계시던 아버지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나는 순간 하던 생각을 멈추고서 멍하니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다정히 말했다.
“둘 중 어떤 선택을 내리든, 아이를 비난할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보다는 아이도 무사히 보호자에게 인계했으니, 우리는 이만 가 보는 게 좋겠네.”
이윽고 그가 내 손을 조심스레 그러쥐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여기서 언제까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서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이반 역시 나를 따라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잘 있어, 이반.”
아 참, 이 말을 깜빡할 뻔했네.
“다음에 또 누가 괴롭히면 그땐 가만히 맞지 말고 너도 맞서 싸워 버려. 걔네는 어차피 쪽수 싸움이나 하는 겁쟁이들이니까.”
“미친개처럼 죽기 살기로 달려들면 다들 안 건들더라.”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 역시 한마디 거들며 씩 미소 지었다.
이건……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군. 저 사람을 건들 정도로 배짱 넘치는 아이도 있었구나.
……이반은 저렇게 크면 안 될 텐데.
* * *
그렇게 이반 가족과 헤어진 우리는 곧장 반스 남작 저택으로 향했다.
어떻게 영지 출입 통제를 뚫고 왔는지 뭐라도 변명해야 하나 살짝 고민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
출입 통제가 개판으로 이루어져서?
아니.
“황제 폐하의 칙명으로 오셨다니, 저희 영지의 일이 이리 빠르게 전달되어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유스틴의 가문과 더불어 현란한 말솜씨(feat. 거짓말)가 이번에도 빛을 발했거든.
“아시다시피 영주님께서 지금 그런…… 상태이신지라,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연히 이해하네. 그걸 조사하기 위해 이리 직접 온 게 아닌가.”
남작 대리의 말에 아버지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내가 보기엔 아버지도 이런 일에 소질 있어.
“우선 남작의 상태를 상세히 살펴보고 싶은데,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더불어서…….”
“콜록, 퀄럭! 케엑, 켁!”
“보다시피 내 딸이 몸이 편치 않아서 조금 쉴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겠는가?”
“아, 물론입니다. 그럼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곧이어 남작 대리가 하녀에게 무언가 지시하는 듯 잠시 자리를 떴다.
나는 그 틈을 타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슬며시 농담을 건넸다.
“이러고 있으니까 저희 약간 가족 사기단 같지 않아요?”
동시에 유스틴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딴지를 걸었다.
“저는 시두스 가문이 아닌데도요.”
“그럼 부부 사기단? 아니지, 약혼자 사기단?”
어쨌든 사람들은 우리를 약혼한 사이로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의 표정이 요상하게 물들었다.
특히나 유스틴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아무래도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