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92)
“레, 레이나. 미아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요? 야, 약…….”
“약혼자요.”
“내가 그, 그걸 허락해 준 적이…….”
“없어요. 그냥 소문이 그런 거죠.”
“소문? 나는 그런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그러겠죠. 이럴까 봐 내가 일부러 당신 귀를 막고 다녔으니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한담 아닌 한담이 귓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유스틴은 여전히 화내는 건지 당황한 건지, 그도 아니면 웃는 건지 모를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곧이어 그가 정신을 차린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담은 그만하죠.”
오, 출력은 잘 되는 거 보면 고장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니, 때마침 남작 대리 역시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디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콜록, 전 그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를 따라 비틀대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좋아. 그럼 한 명씩 차근차근 깨워 보러 가 보실까.
* * *
지크프리트 씨의 꿈에서도 겪었지만, 저주에 걸린 사람의 꿈은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없다.
이는 곧 내 모습을 숨길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해서,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능력이 현실에서 탄로 나는 것을 감수하고 움직이기 vs 모른 척하기.
‘생각할 필요도 없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 아니겠어?
어쨌든.
다행히 지크프리트 씨의 꿈에서 한번 감을 잡은 덕에, 다른 사람의 꿈을 무너뜨리는 건 한결 수월했다.
저주에 걸린 사람은 반스 남작을 포함하여 그 부인과 아들, 딸.
아들과 딸의 꿈은 그 나이대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도련님, 이것도 한번 드셔 보세요. 최고의 파티시에를 초청해 만든 디저트랍니다.’
가령 그 아들은 반스 저택에서 저만을 위한 온갖 디저트를 먹는 꿈을 꾸고 있었으며.
‘아가씨께서 이 나라를 지키셨다! 이 용맹한 전사를 찬양하라!’
그 누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되어 세계를 멋지게 지키는 꿈을 꾸고 있었더란다.
반면에 성인의 꿈은 아이들의 것과는 달리 조금은 더 현실성 있으면서도, 현실에선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는데.
‘반스 남작 부인은 본인이 직접 본인의 가문을 이끄는 꿈을 꿨었지.’
‘반스’라는 성을 받는 대신 ‘필리프’의 가주가 되는 꿈.
그리고 반스 남작의 꿈은…….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가만히 생각하던 내 귓전을 때렸다.
나는 곧장 잡념을 비워 내고서 푸르른 하늘 아래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제가 직접 나가 잡아 온 싱싱한 녀석입니다. 이거 하나 잡겠다고 몇 날 며칠 밤을 새웠는지 몰라요!]윗사람에게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격식 없고 친근한 말투였다.
그러나 어부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듯.
[아이고, 그전에 제가 갓 재배한 양배추부터 드셔 보세요. 저 녀석이 잡아 온 것보다 몇 배는 더 싱싱하고 맛있을 겁니다!] [아니, 자네! 감히 채소를 생선과 비교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감히이이? 자네 지금 내 땀과 노력을 무시하는 겐가?]곧이어 두 사람 사이에 가벼운 설전이 벌어졌다. 그조차도 너무나 활기차고 보기 좋아, 보는 사람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다.
‘평화롭네.’
지금의 카타르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고 활기찬 풍경이었다.
고요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왁자한 소음, 영주에게 서슴없이 다가가는 아이들과 특유의 천진한 웃음소리.
코끝에 내려앉는 옅은 햇살과 철썩이며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평화로움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반스 남작이 바라는 건 영지의 평안함인가? 아니면 영지민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싶은 건가?’
혹은 그 둘 다일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곧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카타르타 마을인 건 맞는데,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마치 지크프리트 씨의 꿈을 통해 몇 년 전의 황도를 감상하는 것처럼, 내가 본 마을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들이 보이는…….
‘아.’
바로 그때, 이 평화로운 광경 속에 홀로 끼지 못하고 서 있는 소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저곳에서 영지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남자는…….
[영주님, 영주님!]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열띤 환대와 환호는 멈추지 않았다.
그 평화로움을 좇는 소년의 눈동자 역시 감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희, 대화가 필요할 것 같네요.]나는 곧장 소년의 앞에 걸어가, 그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꽃을 빼앗아 들었다.
반스 남작이 바라는 것은, 그의 욕망은…….
* * *
“주, 주인님!”
“주인마님에 이어 주인님께서도 눈을 뜨셨다!”
“어서 주치의를!”
몽롱한 정신 너머로, 누군가가 크게 기함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비단 한 명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쁨과 환희, 놀람의 목소리들.
나는 그 소란을 기상 알람 삼아 부스스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사람 수가 많았는데도 이전보다 더 일찍 깨는군요.”
그리고 거의 동시에, 저택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울려 퍼졌다.
당연하게도 유스틴 에버딘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유스틴이 여기 앉아 있을 줄이야.
“저어, 대공자님께선 원래라면 지금쯤 아버지와 함께 사태를 조사하고 있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배려를 받아 이곳에 남았습니다. 약혼자가 아픈데 일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요.”
“오.”
그런 것치고는 옆에서 뭔가 열심히 적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나는 협탁 옆에 놓인 편지지와 깃펜을 확인하고서 눈매를 가느다랗게 늘였다.
보아하니 에버딘 가문 인장이 찍힌 편지지인 것 같은데.
누구한테 보내려고?
“몸은 좀 어떻습니까.”
바로 그때, 유스틴이 내 쪽으로 상체를 쭉 기울이며 물었다.
나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깜짝이야, 갑자기 다가와서 놀랐네.
“몸이요? 평소랑 똑같죠. 특별히 나빠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러고서 그는 다시금 상체를 뒤로 물린 후, 이번에는 침실 문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덧붙여 말했다.
“덕분에 저택이 이렇게 소란스러워졌으니 수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지.
나 또한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안 그래도 남작님께 직접 드리고픈 말도 있어서 만나 뵙기는 해야겠죠.”
“그럼 슬슬 일어나야겠군요.”
“아, 그런데 제가 가는 것보다는 그쪽에서 저를 찾아오는 게 조금 더 신빙성을 줄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일단은 대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거든요.”
언제 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내 말에 유스틴이 ‘그게 무슨 해괴한 발언이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와중이었다.
“아이고, 주인님!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오우, 성격도 급하셔라.”
침실 밖으로 다시 한번 들려오는 소란에, 입술을 오므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떠날 생각은 없었으니 천천히 몸 회복한 후에 오셔도 괜찮았을 텐데.
“주, 주인님! 그 방에는 지금 손님께서……!”
곧이어 문 바로 앞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필사적인 음성을 들어 보니, 우리를 맞이했던 남작 대리가 분명했다.
나는 곧바로 큼큼 헛기침을 내뱉어 목소리를 정돈하고서 입을 열었다.
“들어오셔도 돼요. 괜찮아요.”
애초에 여긴 내 저택도 아니고.
“……당신 설마.”
유스틴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나지막이 말을 뱉은 순간이었다.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침실의 문이 열리더니.
“……정말로…….”
두 볼이 홀쭉하게 팬 남자가 문에 기댄 채로 멍하니 말을 내뱉었다.
나는 비로소 제대로 마주한 반스 남작을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남작님. 마침 기다리고 있었어요.”
“……?”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내게 쏠렸다.
심지어 남작 대리는 주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와 제 주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그래도 이런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실례지. 인사도 제대로 다시 해야 하고.
“시두스 가문의 미에나 시두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나는 곧바로 꾸물꾸물 침대에서 내려온 뒤, 이번에는 제대로 예법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반스 남작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 그, 결례를 저질러 미안합니다, 레이디. 그러니까, 나는…….”
그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이 더더욱 아리송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주인님께서는 왜 갑자기 이곳에 온 것이며, 저 어린 여자애에게 왜 경어를 사용하는 것인가!
……라는 궁금증이겠지.
나는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다시금 말을 내뱉었다.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엔 좋아 보이지 않은데,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떠실까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