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97)
“어,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말하자, 유스틴이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아이를 찾는 일에서 손을 뗄 수 없겠냐 물었습니다.”
“…….”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가만히 유스틴을 바라보았다.
오늘 자꾸 유스틴이 왜 이러지?
유난히 눈치를 살피지를 않나,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하질 않나.
고맙다는 인사에도 고마워하지 말라고 하더니, 이제는 루스를 찾지 말라고?
“제가 루스를 찾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유를 들을 수 없으면, 저도 포기할 수 없어요.”
“미에나.”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요.”
루스의 사정을 알고 있는데, 그 아이가 어떤 식으로 학대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데.
루스가 이미 나를 알아 버렸는데.
“대공자님.”
나는 무겁게 가라앉으려는 목소리를 애써 끌어 올리며 차근차근 말을 내뱉었다.
“저는 단순히 자선사업을 하고자 아이를 찾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애의 친구인걸요.”
학대당하는 아이,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넘어서.
내가 소중히 여기는, 지켜 주고 싶은 친구니까.
그런데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어떻게 루스를 포기할 수 있겠어.
설령 이유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 어떤 일도 소중한 사람을 포기해야 하는 명목이 될 수는 없어요.”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어.
내 말에 유스틴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일렁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곧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서 다시금 물었다.
“저를 봐서라도, 그렇게 해 줄 수는 없는 겁니까?”
“왜 그렇게까지 저를 말리시려는 거예요?”
나는 선뜻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그러자 유스틴은 이번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원래 명확한 근거를 대며 내 행동에 반박하거나 힘을 실어 주는 사람이 아니던가.
‘내가 뭔가 놓친 게 있나?’
이전에도 루스의 행방을 물으면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고는 했지.
‘마치 내가 루스를 찾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루스를 찾는 일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였으면, 내가 제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부터 거절했으면 되는 일인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나?’
이전의 일을 하나하나 따져 보며 이상한 점을 찾아내려던 찰나, 순간 망치에 맞은 것처럼 시야가 빙글 돌며 역한 구토감이 치솟았다.
나는 그대로 하던 생각을 멈추고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
“몸이 좋지 않은 겁니까?”
“아뇨,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나는 곧바로 혀끝을 살짝 깨물어 정신을 차리고서 대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사고를 방해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참에 확실히 하는 게 좋겠네요. 저는 제 대답을 들려드렸으니, 대공자님께서 이제 제게 대답해 주실 차례예요.”
일단은 이 이야기에 집중하자.
지끈거리는 고통을 한쪽으로 밀어 넣으며 딱딱하게 말하자, 유스틴이 곧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더 도와줄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음, 예상은 했지만 역시 그렇게 되는구나.
“……그래도 도와주겠다고 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어쩔 수 없지, 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답하자, 도리어 유스틴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곧바로 덧붙여 말했다.
“화를 내도 괜찮습니다.”
“제가 왜 화를 내겠어요? 따지고 보면 제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건데요.”
호의는 어디까지나 호의일 뿐이다.
그가 내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그를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어쩌겠어요. 제가 더 열심히 발로 뛰는 수밖에 없죠.”
이왕이면 도울 수 없는 이유까지 알려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심지어 일부러 내게 숨기는 듯해 보였으나, 괜히 그걸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아니, 사실 이유를 묻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 사이로도, 아주 어렴풋하게 이유를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다 도착했군요.”
그 순간 유스틴이 내 쪽으로 손을 뻗어 기울어진 몸을 지탱해 주며 말을 건넸다.
나는 다시 한번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택으로 돌아가면 며칠 더 휴식을 취해야 할 듯싶었다.
* * *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바깥공기 쐬니까 훨씬 낫네.
이제야 조금 맑아지는 정신에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앞서 걷던 유스틴이 살포시 인상을 찌푸리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역시 몸이 좋지 않은 거였군요. 지금이라도 양해를 구하고…….”
“황제 폐하의 명인데 그럴 수 있을 리가요. 그냥 빨리 일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게 몇 배는 마음 편해요.”
여기서 또 돌아가 버리면 그때는 미에나 인생 업적 하나 더 추가된다고.
내가 만약 게임 소설에 빙의했으면 분명 이런 상태창이 떴겠지.
System: ‘황제를 깐’ 칭호를 습득하였습니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아찔해.
“그나저나 본궁은 진짜 으리으리하네요.”
나는 다시금 유스틴의 뒤를 밟으며 본궁의 위용 넘치는 복도를 두 눈 가득 담았다.
지난번에 성황을 만나러 별궁에 갔을 때도 참 화려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곳과 비교하면 별궁도 별거 아니었구나.
‘저게 다 얼마야?’
저 그림, 부르는 게 값이라는 드 뷘터의 ‘창조의 날’ 아니야?
“와…….”
복도에 있는 물건이며 명화들을 합하면 과연 우리 집이 졌던 빚을 몇 번이나 청산할 수 있을까 계산하는 사이.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누군가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은발이라기엔 짙고, 청발이라기엔 물 빠진 색의 모호하게 푸른 머리카락, 그리고 그보다 훨씬 짙고 푸른 눈동자.
양 뺨과 이마에 ‘거만’을 덕지덕지 붙인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며 코를 막고 있었다.
“어디서 재수 없는 번견 냄새가 난다 싶더니, 너로구나.”
번견 냄새? 저 사람 지금 우리 보고 이야기하는 거?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곧이어 유스틴이 살짝 허리를 굽히며 더없이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저 사람이 황태자구나.’
그러고 보면 꽤 옛날부터 망나니로 소문이 났었지.
나는 곧바로 유스틴을 따라 고개를 숙이며 황태자의 첫인상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개망나니임.
“아, 옆에 있는 게 바로 그 소문 자자하신 약혼자인가?”
유스틴의 반응이 영 심심했는지, 이번에는 황태자가 내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고개 좀 들어 보지 그래?”
이 자식이 자꾸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네네, 황태자 전하시면 당연히 보자기로 보셔야죠.
나는 고개를 들어 권력의 비굴함에 몸을 맡기고서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잠시 멈칫거리다 말고 툭 말을 내뱉었다.
“오, 좀 귀…….”
“…….”
“……곧 죽을 것같이 생겼는데?”
이 자식이 아픈 곳을 찌르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전하께서는 언행을 특히 주의하실 필요가 있으십니다.”
그 순간, 내내 잠자코 있던 유스틴이 뾰족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유스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액셀을 밟으세요?
“오호라, 지금 나한테 선생질하겠다는 건가?”
“충언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제발 두 분은 저 빼고 대화 나눠 주십시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 이러고 있으니까 다시 두통 오는 것 같아.
“아, 됐다, 됐어. 애초에 난 저런 어린 뼈다귀는 취향도 아니야.”
곧이어 그가 설설 손을 내저으며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곧바로 헤실헤실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전하.”
“너도 정상은 아니구나. 하여간 미친놈들끼리 잘 만났어.”
그러고서 그는 질린다는 듯 휙 돌아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나는 바람처럼 사라진 미친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이 나라의 장래는 암담하구나.’
저런 망나니를 황제로 모셔야 한다니. 내가 만약 이번 겨울을 무사히 넘긴다면, 리넥스로 떠나야겠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드넓은 복도를 몇 분 더 걸어 나간 후.
“제가 함께 갈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이윽고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선 유스틴이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화려하게 양각된 알현실의 문을 일별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대공자님.”
“제가 한 말은…….”
“명심할게요.”
아무것도 티 내지 않을 것.
마지막으로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는 안내를 따라 알현실 내로 발을 디뎠다.
알현실 내부는 책에서 보았던 묘사대로 층고가 높고 전체적으로 밝고 화려한 편이었다.
중앙에는 파란 융단이 기다랗게 깔려 있었으며, 계단 위로는 모두를 굽어살필 수 있는 황제의 의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고개를 들지 못한 까닭에 의자 다리밖에 못 봤지만.
“시두스 가문의 영애, 미에나 시두스가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곧바로 예법에 맞춰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소문의 주인공을 이리 만나게 되어 영광이군.”
낮고 위압적이면서도, 어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섬뜩한 익숙함에 숨을 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대는 고개를 들라.”
루스의 꿈속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으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