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216
#닥터 플레이어 216화
“후계 계승에 대해 국왕 전하의 유지를 듣지 않았는데, 카이른 전하가 왕위를 계승하는 건 옳지 않다고 반대하고 계시네.”
레이몬드는 큰 사달이 났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국왕 전하는 왕자, 공주 중 누구도 왕세자로 지목하지 않았지.’
물론 왕위 계승 서열 1위는 카이른이다.
하지만 왕위는 계승 서열대로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
바로 왕세자.
계승 서열을 막론하고 왕세자로 책봉받은 이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카이른은 국왕 오든에게 왕세자로 책봉받지 못했다.
심지어 국왕 오든은 생전에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휴스톤 왕국을 가장 부흥시킬 이를 후계로 세울 것이다.’
즉, 논란의 여지가 있는 거다.
‘리머튼 전하는 왕권 계승에서 사실상 탈락했다고 치지만…… 아니, 이렇게 상황이 변한 이상 들고일어서려나? 소피아 전하도 변수구나. 소피아 전하도 왕위에 관심이 있었던 건가?’
레이몬드는 차분히 생각했다.
그래, 차분히.
다급한 상황이지만, 그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왕권 다툼은 왕자들과 공주끼리 피 튀기고 싸우는 거지, 그와 관계있는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왕이면 그나마 나에게 우호적인 소피아가 왕위에 오르는 게 좋겠지만.’
그때, 재상 갈먼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제발 부탁이니, 국왕 전하를 구해주게!”
레이몬드는 급히 재상 갈먼의 허리를 붙잡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각하께서 이러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그는 재상 갈먼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재상 갈먼은 항상 그를 도와주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런 호의만 가지고 승낙할 일이 아니었다.
“전 이제 일개 힐러가 아니라, 라팔드 지방을 책임지는 제후입니다. 쉽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이해하실 겁니다, 각하.”
재상 갈먼은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는, 냉철한 음성이었다.
재상 갈먼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누굴 탓하겠는가?’
피가 이어졌다고 모두 혈연의 정을 갖는 건 아니다.
서로의 행동에 따라 때로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레이몬드가, 누구보다도 선한 마음을 가진 저 아이가 저리 싸늘해진 건 모두 국왕 오든의 잘못이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 줄 수는 없겠나? 정말 미안하네.”
하지만 재상 갈먼은 염치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국왕 오든을 구할 수 있는 이는 레이몬드뿐이었으니까.
레이몬드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답했다.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기대하진 말아주십시오.”
“……고맙네.”
“쉴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재상 갈먼은 물러나기 전, 주저하다가 한마디 말을 하였다.
“국왕 전하께서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 자네에게 한마디 말을 남기었네.”
“…….”
“……자네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네.”
레이몬드의 얼굴이 굳었다.
감정을 참기 위해 그의 얼굴이 꿈틀했다.
“……쉬십시오.”
갈먼이 물러간 후, 레이몬드는 짓눌린 음성을 내뱉었다.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미안하다고? 웃기지 마.”
그는 외쳤다.
“웃기지 말라고!”
차라리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나았을 거다.
이렇듯 혐오감이 치밀어 오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빌어먹을.’
레이몬드는 그제야 깨달았다.
왜 국왕 오든을 치료하고 싶지 않은지.
치료 실패 후 위험성 때문에?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증오감 때문이었다.
오든이 죽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그게 레이몬드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 * *
‘나도 인간이니까. 치료하기 싫은 사람이 있는 게 당연하지.’
힐러는 환자가 누구든 최선을 다해 치료해야 한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지금껏 레이몬드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힐러의 의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다만, 레이몬드는 최종 결정은 유예하였다.
단순한 감정으로 거절하기에는 워낙 큰일이었으니까.
조금 더 차분히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감정을 떠나 냉철히 ‘손익’을 따져보기로 한 거다.
‘국왕 전하가 이대로 승하하면? 내게 어떤 영향이지?’
결론은, 좋을 건 없다는 거다.
‘결국, 카이른이 왕위에 오르게 될 거야. 그 사이코패스 놈이 날 가만히 내버려 둘 가능성은 적어.’
레이몬드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어린 시절.
카이른은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세이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극심한 괴로움을 주었고, 몇 번이나 자살 충동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 상처는 지금도 깊게 남아 있다.
‘카이른은 이상하게 내게 집착하고 있어. 왕위에 오르면 날 탄압하려 들 거야.’
물론 레이몬드도 이전처럼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커다란 곤란이 있을 건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라팔드 지방을 버리고 드로튼 왕국으로 망명해야 할지도.’
레이몬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껏 라팔드 지방에서 기반을 닦느라 얼마나 고생했는가?
그건 안 된다.
‘하지만 치료하고 싶지도 않은데. 제길.’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치료하는 게 이득이었다.
치료해 내면 단순히 카이른을 견제하는 걸 넘어, 커다란 보상도 받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감정이 따르지 않았다.
정말 치료하고 싶지 않았다.
‘젠장. 이제 결정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오늘 중 결정을 내려야 했다.
‘방법이 없을까?’
이대로 국왕이 죽게 놔두면 큰 곤란이 있을 거다. 하지만 순순히 치료해 주기에는 맺힌 울분이 안 풀린다.
레이몬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민했다.
* * *
그때, 휴스톤 왕국의 수도.
왕궁 어전.
카이른이 나른한 얼굴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아바마마의 상세는 어떠시지?”
헬리엔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역부족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듯합니다.”
“그런가? 안타깝군. 참으로 가슴이 아프군.”
말과 다르게 슬픔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수고가 많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주도록.”
“전하의 명을 받습니다.”
헬리엔 백작이 나간 후 귀족들이 우르르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일수록 전하께서 중심을 잡으셔야 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위를 계승할 준비를 하시옵소서!”
다들 이미 카이른의 왕위 계승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를 반대할 만한 리머튼과 세이틸은 이미 왕위 계승에서 멀어진 상태였으니까.
곧 국왕 오든이 사망하면 카이른이 왕위에 오르는 건 자명했다.
“왕위 계승이라니? 아바마마께서 아직 살아 계시는데 너무 이른 이야기네. 본 왕자는 아바마마께서 한시라도 빨리 쾌유하길 바랄 뿐이네.”
카이른은 짐짓 거절했지만, 본심이 아님은 누구나 안다.
‘헬리엔 백작의 말에 따르면, 국왕 전하는 회복되지 못할 거야. 한시라도 빨리 왕권 계승을 준비해야 해.’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여지를 주면 곤란해질 수 있다.
특히 카이른파의 귀족들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레이몬드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 사생아 놈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라이프 공작이 놈을 지지함은 익히 알려진 바다.
특히 백성들이 놈을 지지하는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 괜한 구설수가 나오기 전 빠르게 왕위 계승을 마무리 짓는 게 최선이었다.
수도의 치안과 방어를 책임지는 로든 백작이 앞장서 왕위 계승을 준비할 걸 청했다.
참고로, 그는 이전부터 카이른에게 포섭이 된 상태였다.
“국왕 전하께서 회복할 수 없는 병증에 빠진바, 수도의 백성이 커다란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위를 계승할 준비를 하여주십시오.”
“맞습니다! 백성의 불안을 잠재워주십시오.”
“통촉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카이른은 감회 어린 얼굴을 하였다.
이제 드디어 왕위에 오를 순간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그들’의 도움을 받아 1왕자 파이튼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인 후 수 없는 세월을 기다렸다.
그때, 그의 상념을 깨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그게 무슨 말들이지? 국왕 전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왕위 계승을 논하다니.”
“공주 전하!”
싸늘한 얼굴의 소녀.
소피아였다!
그녀는 귀족들을 얼음 같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지금 그대들의 발언이 역모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저, 전하. 저희는 왕국을 위해 나선 것일 뿐입니다.”
“닥쳐라. 내가 너희의 그 시커먼 속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소피아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친위대, 로열 나이츠가 소피아 공주를 따르고 있지.’
로열 나이츠!
휴스톤 왕국 최강 기사단.
친위대로서 국왕 전하가 승하하지 않은 상태에서 카이른의 독단적인 왕위 계승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터.
따라서 그들은 현재 카이른에 맞서는 소피아 공주를 지지하고 있었다.
“서운하구나, 사랑하는 동생아. 아바마마를 향한 내 충성을 그렇게 오해하다니.”
“충성이라고요?”
소피아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정말 충성을 표하고자 한다면, 그 왕좌에서부터 내려오세요.”
“……!”
“아바마마께서는 오라버니를 후계로 인정한 적 없으니까요.”
카이른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나가 있도록. 동생과 단둘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으니.”
“왕자 전하.”
“내 말 안 들리나?”
낮은 음성에 귀족들은 움찔하였다.
소피아를 호위한 로열 나이츠도 곤란한 얼굴을 했다.
단둘이 남았다가 카이른이 해코지를 할까 염려되었던 거다.
“공주 전하.”
“괜찮아요.”
단둘이 되자, 죽을 듯 무거운 공기가 어전에 내려앉았다.
“그러면 넌 누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보는 거지?”
“아바마마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죠. 휴스톤 왕국을 가장 번영시킬 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그래서 그게 누구지? 리머튼, 세이틸, 아니면 소피아, 너?”
카이른은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너, 레이몬드를 생각하고 있는 거냐?”
소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소한 당신은 아니겠죠. 당신이 휴스톤 왕국에 도움이 될 리가 없으니까요.”
카이른의 미소가 짙어졌다.
한없이 차가운 미소였다. 괴기스러울 정도로.
카이른은 왕좌에서 일어나 소피아에게 걸어갔다.
저벅저벅.
장내에 무거운 소리가 울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지만, 소피아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지엄하게 카이른을 노려볼 뿐이었다.
“네가 죽고 싶은가 보구나.”
“……!”
섬뜩한 음성.
하지만 소피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으며 말했다.
“원래부터 살려둘 생각 없지 않았나? 우리 형제들 모두 말이야.”
“그렇지. 큭큭. 맞아. 그러고 보니 어릴 때부터 우리 형제 중 소피아, 네가 가장 총명했지. 과연 똑똑해.”
카이른은 손가락을 들어 소피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뱀이 기어가듯 섬뜩한 소름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