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426
#닥터 플레이어 426화
‘특히 시넬 공작의 의향이 중요할 텐데.’
시넬 공작.
십국 중 어느 한 왕국에 속한 인물이 아닌, ‘황도’의 공작이었다.
참고로, 십자연맹제국에는 십국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영토가 하나 있었다.
바로 황도와 그 주변이었다.
시넬 공작가는 그 중립 영토를 근거지로 하는 대귀족으로 대대로 선출된 황제를 보필해 왔다.
그러한 가문의 특수성 때문에 황위 선출 때마다 십국의 왕가 못지않은 높은 표 권한을 지닌 선제후로 선정되었다.
시넬 공작가는 지금까지는 대세였던 광휘의 성자를 지지하다가, 이번 사건이 터진 후 레이몬드 쪽으로 갈아탔다.
‘시넬 공작의 결정이 가장 중요해. 과연 그가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을?’
그렇게 황도의 수많은 이의 시선이 캐스팅보트를 쥔 시넬 공작 일파에 향했다.
* * *
그때, 황위 선출의 키를 쥔 시넬 공작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대로 정말 가난의 성자를 지지할 겁니까, 각하?”
“글쎄, 어떨 것 같은가?”
지긋한 나이의 노인, 시넬 공작은 늙은 너구리처럼 웃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마주 웃었다.
“간을 보시는 거군요.”
“그래, 아직 누가 우리에게 이득이 될지 확실하지 않으니 말이야.”
레이몬드가 짐작한 것처럼 시넬 공작은 탐욕스러운 돼지였다.
자신에게 이득이 될 이를 황제로 뽑으려는 박쥐 돼지.
“그러면 광휘의 성자가 낫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금번의 일로 입지가 축소되긴 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어스 왕국입니다.”
그래도 기어스 왕국.
그 말이 옳았다.
끔찍한 잘못이 밝혀졌음에도, 꼬리를 자르는 것만으로 타국이 더 죄를 묻지 못하는 건 기어스 왕국이 십자연맹제국 최강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모두 기어스 왕국을 비난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비난도 사그라질 겁니다. 그 누가 감히 기어스 왕국을 거스르겠습니까?”
“무엇보다 가난의 성자가 우리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칠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시넬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그렇지.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빈민 봉사에 나섰다고 하더군. 마치 우리에게 보란 듯 말이야. 가난의 성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은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높아.”
“그런데 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겁니까?”
“왜 그럴 것 같나?”
밑의 일파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어스 왕국의 제의를 기다리시는 거군요.”
“기어스 왕국 측에서 더 비싼 값을 부를 때까지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들은 광휘의 성자를 지지하는 대신 커다란 대가를 받기로 약조를 받았었다.
하지만 뜻밖에 시넬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사실 난 정말 가난의 성자를 황제로 세울 작정이라네.”
수하들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째서입니까? 가난의 성자는 우리에게 달갑지 않은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지금껏 카트린느 황제 밑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카트린느 황제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일파가 백성들을 향해 사욕을 부리는 걸 견제해 왔다.
그런데 카트린느 황제보다 더한 인물일 게 분명한 레이몬드를 황위에 올리겠다니?
시넬 공작은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광휘의 성자보다, 가난의 성자가 더 뒤에서 휘두르기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
“생각을 해보게. 광휘의 성자 뒤에는 기어스 왕국이 있어. 그런데 우리가 광휘의 성자를 거스를 수 있을 것 같나?”
수하들은 그 말에 아 하고 경탄을 뱉었다.
시넬 공작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기어스 왕국이 뒤에 있는 한, 그들은 광휘의 성자를 절대로 거스를 수 없었다.
“카트린느 황제만 해도 뒤의 성 로제트 왕국이 신경 쓰여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 하지만 가난의 성자 뒤에는 고작해야 페닌슐라 왕국 정도야. 우리가 뒤에서 휘두르기 딱 좋다는 거지.”
그런데 한 인물이 조심스럽게 반론을 펼쳤다.
“배경은 약하지만, 가난의 성자는 보통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난의 성자가 지금껏 이룬 기적을 봤을 때 그를 다루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도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법정에서 카트린느를 도우며 보인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시넬 공작은 큭큭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 걱정은 했네. 하지만 이번에 가난의 성자의 빈민 봉사 소식을 듣고는 안심했어.”
“무슨 뜻입니까?”
“황위가 결정될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빈민을 향한 봉사나 하고 있다니 말이야. 이 얼마나 어리숙한가?”
시넬 공작은 레이몬드의 이번 빈민 봉사 소식을 듣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레이몬드는 황위 경합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다.
그러니 시넬 공작을 비롯한 캐스팅보트를 쥔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확실히 만들려 노력해야 옳았다.
그런데 레이몬드는 그 어떤 회유 작업도 하지 않았다. 시넬 공작은 물론, 다른 선제후 누구에게도.
그저 자신은 남들이 어떻게 나오든 말든 그저 백성만을 위한다는 듯, 빈민 봉사 활동에 나섰을 뿐이다.
그래서 시넬 공작은 안심했다.
레이몬드는 백성을 위한 이상은 높지만, 실제 정치적 감각은 떨어진다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꼭 정치 감각이 뛰어난 건 아니니까.’
원래 자신의 분야에서는 탁월해도, 정치적 감각과 능력은 떨어지는 인물들이 있다. 반대로 다른 분야에서는 부족해도, 정치만 잘하는 이들도 있고.
아예 다른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가난의 성자는 영웅에 걸맞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뱀 같은 간교함이 필요한 정치적 감각은 떨어지는 게 분명했다.
‘그런 이라면, 내가 뒤에서 휘두르기도 좋겠지. 정치는 단순히 백성을 위한 이상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야.’
시넬 공작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가난의 성자를 황위에 올리고, 난 그를 뒤에서 휘두르는 거야.’
완벽한 계획이었다.
시넬 공작은 앞으로 자신의 환한 미래가 보이는 듯 기분 좋게 말했다.
“자, 건배나 하지. 가난의 성자의 황위 선출과 우리의 부귀영화를 위해.”
“위하여!”
한창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흐를 때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강직한 인상의 앳된 남자였다.
“아버지.”
“무슨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사람들을 물려주십시오.”
시넬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네, 중요한 일입니다.”
시넬 공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람들을 물렀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께서 이번에 빈민가에 하신 일 알고 있습니다. 그만 멈추십시오.”
“뭐?”
“피해자가 많습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요.”
시넬 공작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문제냐? 어차피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 아니더냐?”
“아버지! 우린 시넬 공작가입니다. 황제 폐하를 보필하고 황도의 백성을 위하는 게 우리의 소명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시다니요?!”
“너야말로 정신 차려라! 그런 약해빠진 정신으로 어찌 가문을 이끌려고 하느냐?! 가문을 번창시키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독해져야 하거늘!”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모습에 앳된 얼굴의 남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버지께서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남들에게 아버지가 벌인 악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넬 공작은 비웃음을 지었다.
“누구에게? 카트린느 폐하께?”
그간 카트린느는 시넬 공작을 견제해 왔다.
그래서 시넬 공작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카트린느가 누명을 쓰고 권한이 제한되자, 그 기회를 노려 이번에 하나의 잘못을 저질렀다.
그런 상황이니 카트린느에게 이 이야기를 해봐야 변할 것은 없었다.
“이미 카트린느 폐하는 직무를 정지한 것 모르느냐? 네가 말해봐야 아무런 소용 없다.”
그런데 앳된 얼굴의 남자는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가난의 성자님께 말할 겁니다. 그분이면, 아버지의 잘못을 가만히 보고 계시진 않겠지요.”
“……!”
시넬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미쳤구나.”
“미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미쳤어. 망언하는 걸 보니 말이다. 네놈이 가난의 성자께 그 사실을 제보한다고 해서 뭐가 변하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강하게 이야기했지만, 시넬 공작은 속이 탔다.
‘가난의 성자가 이번 일을 알면 안 돼.’
가난의 성자 레이몬드.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지옥 불에라도 뛰어들 인물이라는 게 그를 만난 모두의 평이었다.
그러니 이번 일을 가난의 성자가 알게 되면, 일이 꼬이게 된다.
더구나 하필 빈민가에 가난의 성자가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한 일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덮일 거야. 최소 가난의 성자가 빈민가에서 봉사 활동을 끝낼 때까지는 이 일이 드러나면 안 돼.’
판단을 내린 시넬 공작은 밖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이놈을 당장 창고 방에 가두어라!”
“아버지? 무슨?!”
“닥쳐라! 내가 명령할 때까지는 이놈을 절대로 밖에 나오지 못하게 하여라! 누구랑도 연락하게 하면 안 돼!”
그렇게 앳된 남자의 반항은 빛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감금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앳된 얼굴의 남자는 감금되기 직전, 찰나의 틈을 이용해 쪽지를 심복에게 전해주는 데 성공했다.
“이 쪽지를 내가 가장 믿는 그 형님께 전해줘.”
“형님이면? 공자님과 의형제를 맺은 그분을 말씀하는 겁니까?”
“그래.”
하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쪽지를 남자가 말한 의형제라는 형님에게 전해 주러 달려갔다.
참고로, 그 형님은 리머튼이었다.
* * *
리머튼.
휴스톤 왕국의 왕자로 레이몬드의 배다른 형이었다.
그 리머튼이 생뚱맞게 시넬 공작가의 후계자의 의형이 된 건 이유가 있었다.
레이몬드를 판 것이다.
‘이래 봬도 내가 가난의 성자님의 친형으로…….’
‘난 어린 시절부터 가난의 성자님의 위대함을 알고 그분을 존경해왔지. 친형으로서 말이야.’
리머튼은 이런 식으로 레이몬드를 팔아 황도에서의 인맥을 넓혔다.
물론, 레이몬드와 관련한 이야기 대부분 되지도 않은 거짓말이었지만. 레이몬드도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리머튼이 인맥을 넓히는 게 결국 그의 인맥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넬 공작가의 후계자는 그런 식으로 리머튼의 레이몬드 팔이에 속아(?) 넘어가 의형제를 맺었다.
리머튼은 이런 식의 의형제를 여러 유력 대귀족의 자제들과 맺어, 수많은 의동생의 형님이 된 상태였다.
따라서 리머튼은 당연히 자신에게 구조 요청이 들어온 시넬 공작가의 후계를 돕고자 하였다.
“카림을 도와야 합니다.”
카림.
이번에 감금된 시넬 공작가의 후계의 이름이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반면, 레이몬드는 떨떠름했다.
냄새가 났으니까.
돈 안 되고, 골치 아프고 귀찮을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