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Purity RAW novel - Chapter 1
프롤로그
“저하고 동거하실래요?”
드디어 말했다. 며칠 동안 벼르고 별렀던 그 말이 내 입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순간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의국은 시베리아 벌판보다 더 삭막해졌고 북극의 빙하만큼 싸늘해졌다.
12월 24일 저녁 8시.
오늘은 온 세상이 은혜로워진다는 크리스마스이브다. 연인들은 행복하고 가족들도 행복하고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더 행복한 그런 날이다. 물론 오프를 받지 못한 레지던트들은 빼고. 아,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헐벗고 가난한 사랄들도 제외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행복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많은 날에 나는 지난 몇 달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최선이라고 결론 낸 일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최경훈, 그가 군복무를 하느라 만나지 못했던 공백기를 넘어 다시 시작된 시간으로 따지면 짧게 2년이다. 하지만 처음 시작된 시점부터쳐서 길게 잡으면 장장 8년이다. 그동안 내내 최경훈이라는 남자 하나에 목을 매며 진상을 떤 건 아니었지만 헛된 미련을 끊지 못해 질척거린 건 사실이니까 이젠 그 끝을 봐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 할 것 없이, 하물며 교수진들까지.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긴 모든 병원 관계자들은 환자들을 위한 크리스마스이브 공연이 열리는 1층 로비로 몰려갔다. 하지만 저 남자는 오늘 하루, 네건의 수술에 참가한 것도 모자라 담당 교수의 지시로 장기 기증을 신청한 뇌사자의 키드니(kidney, 신장)를 받아와야 했다.
원래 적출된 장기 운반은 고참 레지던트가 주로 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집도의의 특명을 받은 것이다. 길은 오고 가는 차들로 꽉 막혀 있었고 사람들은 흥청망청 유흥가로 몰려드는 이런 날, 최악의 도로 사정을 뚫고 최단시간 안에 적출된 장기를 가져올 사람이 필요했다. 제한된 시간 안에 반드시 장기를 가져올 수 있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투철하며 능숙한 경험자여야 했다. 그래서 그가 뽑혔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돌아와 기다리던 장기 이식 환자의 수술을 무사히 마치자마자 또 그를 기다린 건 복강경 수술 환자. 결국 2시간여의 수술을 마치고 마침내 의국으로 돌아와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지쳐 있는 남자에게 폭탄을 터트렸다.
오늘은 최경훈에게 지난 1년의 시간 중 최악의 날로 기록될 정도로 바쁘고 끔직한 날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원인 제공에 나 또한 한몫을 하는 셈이다. 평소 썩 친하다고 할 수도 없었던 후배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동거하자는 말을 들은 그가 얼마나 황당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 뒷목을 주무르며 배고프다고 중얼거리던 그가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빛은 복잡했다. 처음에는 충격으로 뇌가 정상적인 작동을 거부했을 터지만 지금은 그 단계는 지난 듯 보였다.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농담? 진담? 농담이라고 해도 복잡하고 진담이라면 더 복잡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농담이라면 이제 곧 레지던트 2년차가 되는 후배가 3년차에서 말년차로 넘어가는 하늘같은 선배에게 감히 농담을 하다니 이걸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깟 농담 하나 못 받아들이는 ‘노땅’ 소리 듣기 싫어서 쿨하게 웃어 넘겨야 하는건 아닐지에 대한 갈등도 될 것이다.
진담이라면… …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이 될 것이다. 이 기집애가 왜 이런 말을 하나? 자길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되짚어 볼 것이고 그렇게 되짚어 보다 보면 좋아하는 건 아닐 거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왜냐하면 난 그동안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그에게 나의 마음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또 다른 고민으로 넘어갈 것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동거’를 제안하는 내가 당차 보이기도 하겠지만, 나이 차5년이 이토록 큰 세대 차이를 느끼게 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을 것이다.
어쨌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복잡 미묘했다. 여러 가지 혼란과 의문과 난감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빛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난 한 달간 그가 보일 반응을 무수히 예상했고 그중에서 가장 유력하게 보일 반응에 대한 리스트에 순위를 매기고 분석과 대응 방안까지 철저히 연구했다. 그래서 웬만한 반응에는 끄덕도 안 할 자신이 있었다.
“밥 먹었냐?”
움찔, 나는 허를 찔렸다. 이건,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수많은 반응을 예상했지만 이런 건 절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즉각 분석에 들어갔다. 밥 먹었냐고? 이 말은 지금의 상황을 회피하겠다는 건가? 그러니까 가장 무난한 방법인 모르쇠로 어물쩍 넘어갈 심산인 건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입에서 단내가 난다. 뭐, 먹을 거 없어? 숨겨 놓은 거 있으면 좀 내놔 봐.”
어쩌면, 그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너무 피곤해서, 너무 허기가 져서 자기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또박또박 분명한 어조로.
“선배님과 동거하고 싶어요.”
그의 짙은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다. 조금은 심각하면서도 평소보다 진지한 모습. 친구나 후배들에게 쉽게 보이는 장난기나 환자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최경훈, 본연의 모습. 내가 그를 좋아하기 시작하게 만든 그 표정이었다.
그가 이번에는 나의 질문에 진지하게 응할 자세를 취했다. 의자 등받이에 한껏 기대앉았던 몸을 바로 세우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보아하니, 농담은 아닌 것 같고… ….”
“농담 아닙니다.”
시종일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너, 지금 나 동정하냐?”
이건 예상했던 반응이다. 물론 유력한 예상반응 리스트의 순위에 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 봤던 반응이었다. 그는 요 근래 심각한 실연을 맛보았다. 우리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본과 3학년 때부터 사귀었던 동기 여자가 같은 병원 내과 펠로우(전문의)와 두 달 전에 결혼하는 바람에 그는 졸지에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연인에게 차인 불쌍한 남자가 돼 버린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건 절대로 아니니까. 그 일은 동정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남자를 가질 생각도 해본 적이 없지만 그 여자가 이 남자를 가지는 것만은 결사반대다. 강문희는 이 남자를 가질 자격이 없었다. 그 여잔 지극히 속물적이고 욕심 많으며 못된 이기주의자였다. 최경훈은 절대로 그런 여자에게 인생을 저당 잡힐 이유가 없었다. 그는 좀더 나은 여자를 만날 자격이 있었다.
“그럼, 내가 만만하냐?”
이건 예상 반을 순위권 안에 드는 반응이다. 그래서 곧장 대답했다.
“아닙니다.”
물론 사실이다. 사심은 있지만 그가 만만한건 아니다. 아니, 그는 어려운 남자였다. 대하기 쉬우니까 감정 정리도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외과 레지던트 1년차로 근무하던 그와 마주친 건 내가 본과 4학년 때 임상 실습을 나왔을 때였다. 물론 그 전에도 스치듯 만난 적은 있었지만, 어쨌든 제대로 다시 만나서 함께 병원 생활을 하게 된 건 그때부처니까. 그때부터 다시 시작된 감정이 인턴 생활 내내, 레지던트 1년차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적당히 쉬웠고 적당하게 편안했으며 때로는 무진장 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상한 선배였다. 하지만 남자로서의 최경훈은 어려웠다. 편안하지도 않았으며 자상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그에게는 여자인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어차피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그럼, 내가 우습냐?”
그가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린다. 화가 난 거다. 아마도 이번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단정 짓는 듯했다. 하니만 그것 또한 답이 아니었다. 난 절대 저 남자를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과대 1학년에 입학해 여름방학 때 처음 그를 본 이후로 단 한번도 그를 우습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최경훈에 대한 마음을 수년간 미련하게 끌고 온 내가 우습지, 그는 우습지 않다.
“아뇨, 절대 아닙니다.”
“그럼 뭐야?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농담하냐? 크리스마스이브 분위기 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못 내니까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미친 척,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수술실에 처박혀 있던 선배나 놀려 보자, 이런 심보야? 아니면, 네 눈에 내가 산타로 보여? 네가 뭘 해도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겠지, 하는 마음에 괜히 찔러 보는 거냐? 그런데 어쩌냐, 난 지금 미친 1년차를 상대해 줄 여유가 없는데. 우선, 배가 고파서 당장 쓰러질 것 같고 29시간째 제대로 잠을 못 자서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다. 조금 전 수술실에서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크리스마스이브, 이런 엿 같은 날을 누가 만들어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나, 그런 생각 했다.”
“그건 선배님이 너무 과하게 오지랖을 펼쳐서 그런 것 같습니다.”
또 사고를 쳤다. 안 그래도 심기 불편한 그를 또 건드린 셈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건 내 성격이 아니다. 게다가 이건 그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호 선배 사정 봐주려고 당직 대신 서 준다고 나선 것도 모자라서 인턴이 할 일까지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일이 배가 된건 순전히 선배님의 그 광대한 오지랖 때문입니다.”
오늘 안 만나면 애인과 헤어질 판이라고 사정을 하는 2년차 지호 선배를 대신해 그는 당직을 서고 있었다. 게다가 너무나 힘들어서 돌아가실 지경이라며 몇 시간이라도 바깥 구경 좀 하고 싶다고 엄살을 피우는 인턴 두 명의 일도 대신 떠맡았다. 남들은 행복해 죽겠다고 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에 치여서 죽을 것 같은건 그 자신이 만든 것이다.
늘 그렇듯 선배들이 보기엔 싸가지 없지만, 감정 빼고 계급장 떼고 객관적으로 판단할때 더없이 완벽한 내 반론에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이내 귀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에게서 논길을 돌려 버린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널 괜히 빅리버라고 하겠냐?”
빅리버(big liver), 즉 간이 크다는 뜻의 이 별명은 상대가 선배이든 치프든, 설사 교수라해도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반론하고 거부하는 내 간이 엄청나게 클 것이라며 전 치프가 붙여 주었다. 아무리 아랫사람이라 하지만 부당한 요구와 지시까지 따를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특히 지휘관계가 조금도 휘어지지 않고 수직적으로 적립된 병원 내에서는 나의 이런 생각이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나를 ‘싸가지 없고 저만 아는 개인주의자’로 결론 내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내 생각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든,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은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한 달 내내 준비했던 말을 계속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쯤부터 병원 근처에서 살 집을 구하신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가 다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복잡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 다음 말이 궁금한 표정, 딱 그것만이 존재했다.
“3월이면 4년차 되실 거고 그러면 전문의 시험 준비도 하셔야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 병원에서 가까운 아파트를 구하려고 하신다는 거, 이 간호사한테서 들었어요. 그런데 현재 이 근처 아파트 전세는 씨가 말랐고 그나마 가끔 나오는 월세 매물도 가격이 턱없이 비싸서 화가 날 지경이라는 말도 들었어요. 제가 알기론 내년 봄까지 적당한 매물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일 거예요. 선배 깨끗하고 단정한 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인데 전세 매물이라고 나오는 것이 허름하고 구질 구질한 집뿐이라 무지하게 고민하고 있으시다는 것도요.”
“그래서? 너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본론만 말하라는 듯 재촉하는 어투였다. 하지만 이건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다. 왜 내가 ‘동거’를 하고 싶은 건지 내가 만들어낸 이유를 그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했다. 그것이 비록 거짓된 이유이긴 하지만 그가 충분히 납득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다른 의문 따위는 품지 않도록.
“지금 지내고 있는 영규 선배 아파트에서 하루 바삐 나오셔야 하잖아요. 영규 선배, 한 달 후면 결혼하는데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나와야 하시잖아요.”
영규 선배와 함께 지내고 있는 아파트에 걸린 전세금도 1년 후에 받게 돼 버렸다는 사정은 아는 체하지 않았다. 영규 선배가 사정상 그의 몫인 아파트 전세금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금액을 만들지 못했다는 건 아주 은밀하게 취득하게 된 정보였다. 그래서 그것까지 알고 있다고 말해서 정보 제공자가 누구인지 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사는 아파트가 꽤 넓어요. 병원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고 깨끗하고 조용한 아파트 단지예요. 방은 세 개고 화장실도 구 개예요. 가장 넓은 안방을 쓰는 사람은 안방에 딸린 화장실을 쓰면 되고 나머지 두개 방을 쓰는 사람은 침실과 서재로 활용하면 될 거예요. 곧 2년차가 될 저와 4년차가 될 선배님이 같은 시간에 집에 머물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설사 같은 시간에 집에 있게 된다 하더라도 밥 먹고 자는 시간이 전부일 거예요.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조금 더 많은 선배님에게 더 유리한 조건이에요. 전 집보다 병원에서 보낼 시간이 더 많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둘이 동거를 한다고 해서 어색하게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거라는 거죠.”
준비한 대로 거의 완벽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내가 아는 최경훈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지만 맺고 끊는 것만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의 이런 완벽한 이론에 터무니없는 반응은 보이지 않을것이다. 대놓고 반대부터 하거나 화부터 내거나 신경질 같은 건 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잠시 대꾸가 없던 그가 삐딱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난 집을 구하는데 마땅한 집이 없고 살고 있는 곳에서는 하루 빨리 나와야 하는 개 같은 상황이지. 게다가 수중에 가진 돈은 얼마 없는데도 불구하고 깨끗하고 단정하며 조용한 아파트를 원해. 네가 말한 그걸 한다면 나한테는 확실히 좋은 조건이야. 그런데 넌 뭘 얻지?”
그거… … 그는 ‘동거’를 ‘그거’라고 칭했다. 크게 어려운 말도 아니고 외설스러운 말도 아니며 속물스러운 말도 아닌데 그는 그 단어가 입에도 담기 뭐하다는 표정으로’그거’라고 지칭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완전히 보수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개방적이지도 않은 어정쩡한 한국 남자이기 때문이리라. 노는 여자는 섹시하면 할수록 좋지만 진지하게 미래를 함께 설계할 여자는 정숙하고 참한 여자이길 바라는 일부 이기적인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대다수의 평범한 한국 남자들처럼.
“집주인이 전세를 올려 달라는데 돈이 없어요. 선배님 수중에 있는 돈의 일부가 필요해요.”
새빨간 거짓말이다.
“집에 말해서 도와 달라고 해.”
“지금 사는 아파트 전세금도 새어머니가 해주신 건데 다시 손 내밀기 싫어요.”
그냥 어머니도 아니고 새어머니라는 말에 그가 놀라는 눈치다. 하지만 섣부른 동정 따위는 내세우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에게 구질구질한 가정사를 시시콜콜히 말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럼 좀 작은 아파트로 이사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근처에서 아파트 자체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건 선배님이 더 잘 아실 거예요. 전 앞으로 이 병원에서 3년을 더 레지던트로 근무해야 해요. 집 때문에 고민할 시간도 없고 지친 몸 이끌고 들어간 집이 안락하고 편안하지 않다는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지친 몸 이끌고 들어간 집에서 남자하고 같이 사는 건 괜찮고?”
결국 비꼬는 단계까지 왔다. 그는 점점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분명히 아니라고 대답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는 자신이 후배에게 우습고 만만하게 보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한 달을 벼르고 철저히 준비해 온 나는 그런 그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집에 있을 시간은 극히 짧을 겁니다. 그 짧은 어색함을 극복할 정도로 따라오는 유익한 점들을 생각해 보세요. 전 아파트를 빼지 않아도 되고 선배님은 깨끗한 아파트를 구할 수 있으니까 좋고.”
“네가 지금 잊고 있나 본데 난 남자야. 넌 여자고. 왜, 내가 남자로 보이기엔 너무 부실한가?”
절대, 절대 그는 남자로서 부실하지 않다. 만능 스포츠맨이라고 불릴 만큼 그는 운동을 좋아한다. 못하는 운동이 없고 거의 모든 운동 종목에 마니아라고 할 정도니 그 체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안 봐도 알 정도였다. 그렇게 체력을 길러 온 덕분에 웬만한 외과의사의 기본 체력보다 훨씬 강했다. 큰키에 체격도 좋고 친절한데다가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딸을 둔 환자나 환자 보호자들이 전부 사윗감으로 침을 흘릴 정도였다. 내게도 과년한 딸이 있다면 딱 최경훈같은 남자와 결혼시키고 싶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 딸이 생길 확률은 제로다. 난 절대적인 독신주의자니까.
“지금 제가 충동적으로 동거를 제안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선배님이 아파트를 구한다는 건 한 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고 그동안 아파트를 못 구해서 고민하는 선배님을 보면서 내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니까요. 그러니까 섣부른 설레발도 아니고 충동적인 계산 착오도 아니에요. 선배님도 저도 성숙한 인격체이고 무엇보다 병원 일이 아니면 지쳐서 잠드는 일밖에 모르는 레지던트들이니 섣불리 이성간에 있을 수 있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설사 서로가 뜻이 맞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건 두 사람이 충분히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해야겠죠. 제가 아는 선배님은 깨끗하고 단정한 분이세요.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분이시고요. 그러니까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고 해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룸메이트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세요. 영규 선배처럼 편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룸메이트와 함께 공간을 공유한다고 생각하시면 복잡하게 고민하실 필요 없으실 거예요.”
처음이 어렵지 적응되니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준비한 말을 훌륭하게 끝냈다는 판단이 들었다. 내가 막힘없이 말하는 동안 그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틈도 주지 않았지만 그 또한 별다르게 말하고 싶은 눈치도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참.”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은 그가 머리를 젖혀 의자 등받이에 떨어트리더니 눈을 감아 버린다. 나는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그런 그를 묵묵히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은 안다. 이 남자 입장에서는 너무나 갑작스러울 테니까. 난 한 달 내내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황당한 벽력일 테니까.
나는 기다렸다. 되도록이면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 것이다, 내가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얼마 후, 그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다시 자세를 바로 잡은 그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까지 한 말, 전부 진심이야?”
“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의심하는 눈치다. 나의 진정성을 못 믿겠다는 것인지, 나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없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좋아. 좀 황당하고 어이가 없긴 하지만, 네가 신중하게 고민한 끝에 하는 제안이라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노력하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겠다. 우선 위부터 채우고…….”
삐익, 삐익.
갑자기 그의 가운 주머니에서 호출기가 울렸다. 호출기를 확인한 그가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ER(응급실)이야.”
갑자기 미안해진다. 내가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을 뺏는 바람에 그는 허기도 달래지 못하고 응급실로 불려 갈 판이다. 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재빨리 책상 서랍을 뒤져 초콜릿 바 두 개를 꺼냈다. 2년차 선배가 숨겨 놓은 것이었다. 내가 이걸 훔친 걸 알면 죽이려 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겐 간당간당하는 내 목숨보다 최경훈의 비어 있는 위가 더 중요했다.
“가면서 이거라도 드세요.”
초콜릿 바 두 개를 건네받고 그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 갑자기 인상을 썼다.
“하나만 물어보자.”
“네.”
“혹시 말이야.”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가 몹시 말하기 그렇다는 표정을 지으며 망설인다. 알 것 같았다, 이 남자가 궁금해하는 것이 뭔지. 그래서 그의 난감함을 나서서 풀어 주기로 했다.
“선배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이건 순수하게 서로의 이익을 위한 제안이에요. 이런 걸 사람들은 계약동거라고 하죠. 제 제안도 그런 종류라고 생각하세요.”
그가 희미하게 안도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