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Purity RAW novel - Chapter 2
1. 동전의 양면처럼 그와 나는 다르다
“무슨 일이야?”
응급실의 콜을 받고 내려온 경훈은 자신을 호출한 내과 레지던트 2년차 민권을 향해 물었다.
“36세 남잔데 무단횡단 하다가 오토바이에 치었습니다. 체온 38.1도고 바이탈은 정상입니다. 술을 마셨는데 만취는 아니고 찰과상과 타박상 정도로만 보입니다.”
“뼈 손상도 의심해 봐야지.”
민권과 함께 환자가 있는 곳으로 향하며 경훈이 말했다. 그러자 민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 그래도 그렇게 설명하고 엑스레이 촬영했습니다.”
“사진은?”
“여기 있습니다.”
경훈은 민권이 내미는 필름을 받아들고 가까운 뷰박스에 걸어 보았다.
“골절은 없네.”
“예.”
필름을 다시 빼어 든 경훈은 곧장 환자를 향해 걸어갔다. 환자의 옆에는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배의 부푼 정도를 보아하니 만삭이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한 여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경훈을 쳐다보았다. 다친 남편보다 더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경훈은 우선 환자를 향해 말했다.
“다행히 뼈는 상하지 않았는데 상처부위 소독이 좀 까다로울 것 같습니다.”
“까다로워요?”
환자가 뭐라고 말도 하기 전에 옆에 있던 아내가 냉큼 끼어들었다.
“괜찮아. 뼈는 안 상했다잖아.”
누워 있던 남편이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기 직전이었다.
“선생님, 까다롭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수술해야 되나요? 입원도 해야 하고요? 어떡해요. 당신, 내일 중요한 공사 있다고 했잖아. 못 가면 절대 안 된다고 했잖아. 술은 왜 그렇게 먹어서…….”
경훈을 향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아내가 기어이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탓했다. 누워 있던 남편도 난감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상처 난 부분 오염물질 제거하는 게 좀 아픈 거 빼고는 괜찮습니다. 흙이나 각종 이물질이 붙어 있어서 깨끗이 제거하지 않으면 고스란히 흉터로 남거든요.”
아내의 얼굴이 훨씬 안도하는 듯하자 이번에는 다친 남편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많이 아플까요?”
“솔로 박박 문질러서 닦아내야 해서 많이 아플 겁니다. 최대한 덜 아프게 마취액을 뿌려 드리긴 할 건데 그래도 아픈 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깨끗이 소독하고 찢어진 부위는 몇 바늘 꿰매서 봉합할 겁니다.”
“예에…….”
경훈은 아직도 훌쩍이고 있는 아내를 향해 돌아섰다.
“입원까지는 안 하셔도 되는데 내일 일 나가시는 건 무리겠네요. 너무 걱정 마시고 앉아서 좀 쉬세요.”
“예. 감사합니다, 선생님.”
울먹이며 고개를 푹 숙이는 여자에게서 몸을 돌려 스테이션 쪽으로 걸어가며 경훈은 민권을 향해 물었다.
“용철이, 못 봤어?”
오늘 당직 근무인 1년차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호출했는데 아직 안 나타나는 걸 보니 어디서 자빠져 자고 있나 봅니다.”
“다시 호출해.”
“예, 선생님.”
그 후로 경훈은 두 명의 환자를 더 돌봐야 했다. 겨우 한숨을 돌리며 몸을 쉬게 된 건 그로부터 두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후미진 복도 끝, 비상구 계단에 드러눕듯이 쓰러진 경훈의 옆에 민권이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틀째 연당(연속해서 당직) 서고 있는데 죽을 것 같습니다.”
경훈이 피식 웃었다.
“고작 이틀 연당으로 죽을 것 같아? 1년차 때 100일 당직은 어떻게 견뎠어?”
“그땐 지금보다 젊었잖습니까. 그동안 당직 일수가 줄어서 좀 살 만하다 싶었는데, 사람 몸이 참 희한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딱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길이 드는지. 퐁퐁당(이틀 쉬고 하루 당직)할 때는 퐁당(하루 쉬고 하루 당직)만 돼도 살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퐁당하다가 퐁퐁당 하려니 돌아가실 지경입니다. 몰랐는데, 퐁당하다가 퐁퐁당 하려니 죽겠습니다.”
“왜 퐁퐁당이야?”
“꼴통 하나가 날랐습니다.”
“1년차?”
“예, 처음부터 아슬아슬하더라고요. 어찌나 엉성하고 느리던지. 일 시키는 제가 답답해서 미치고 팔짝 뛰겠더라니까요. 얼마 전에 그놈이 담당하던 환자 중에 하나가 익스파이어했는데 그때부터 낌새가 이상하더니 결국에는 안 나와요. 그래서 2년차인 저까지 퐁퐁당을 하게 된 겁니다.”
경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느 과이든지 도망가는 놈들은 꼭 하나씩 있다. 도망가려면 인턴 때 도망가든지, 꼭 1년차에 들어와서 도망가 버린다.
그런 놈들은 몸으로 힘든 건 견디겠는데 주치의가 되어 환자를 책임져야 하는 중압감이나 더 이상 초짜가 아니라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처음으로 맡아 정성껏 돌보던 환자가 사망하면 심각한 무기력증까지 겪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이겨내지 못할 경우, 열이면 열 탈옥을 감행한다. 과연, 레지던트 1년차 때 ‘도망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한 번도 안 품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뭐, 좀 더 캐보면 사적이 일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집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든지, 아니면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든지…….
고무신에 생각이 미치자 몇 시간 전 의국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저하고 동거하실래요?]한지원.
경훈은 옆에 앉아 있는 민권을 슬쩍 곁눈질했다. 내과지만 2년차라 한지원을 더 잘 알 것이다. 인턴 순환 근무 때 내과도 돌았을 테니까.
“한지원, 알아?”
“예?”
민권이 되묻는다. 못 들어서가 아니라 뜬금없는 그의 질문 때문에 의아한 반응일 것이다.
경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물었다.
“우리 과 한지원 말이야. 그 자식, 인턴 때 너희 과 돌았을 것 아니야.”
“돌았죠. 그런데 왜 물으시는지 몰라서요.”
“알아? 몰라?”
“알죠. 걔, 순환 근무할 때 제 담당 인턴이었는데요.”
역시.
“그 자식, 어때?”
“예에?”
이번에는 좀 더 강한 의구심이 묻어났다. 그리고 곧장 물어온다.
“GS(외과) 1년차를 왜 IM(내과) 2년차한테 물으십니까? 선배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같은 외관데.”
“넌 2년차고 난 3년차잖아. 너, 레지던트 1년 차이가 얼마나 넓고 깊은 줄 모르냐?”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관데…….”
“같은 팀이 돼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라서 그래. 또 내가 워낙 내 관심 분야 외에는 신경을 안 쓰잖아.”
실제로 한지원이라는 후배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신경을 써 본 적도 없었다. 한지원이 워낙에 모범적이고 말썽이 없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원래 선배나 교수나 말썽 많고 모자라는 놈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법이니까.
“좀 너무하시네요. 아무리 GS(외과)가 팀 위주로 움직인다고 해도 같은 과 후밴데…… 뭐가 궁금하신데요?”
놈은 뭐가 궁금하냐고 묻고 싶은 게 아니라 왜 그 애가 궁금하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경훈은 민권이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대꾸했다.
“한지원, 4차원이냐?”
“예? 아, 하하하하.”
갑자기 민권이 웃음을 터트렸다. 경훈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민권이 한참 웃더니 눈 끝에 맺힌 물기까지 닦아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난 또 뭐가 궁금하신가 했더니, 선배님도 당하셨나 보네요.”
“당해?”
경훈이 인상을 쓰자 민권이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
“걔, 4차원 맞아요. 선배님은 뭘로 당하셨어요? 무지막지하게 개겨요?
뭐 시켰더니 멀건 얼굴로 대들어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면서 조목조목 따지고 들죠?
그런데 뭐 하나 꼬투리 잡을 것 없이 완벽하게 맞는 말만 하죠?
그래서 더 미치겠죠? 기집애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냉정하지 않아요?
제가 그 기집애 인턴 때부터 딱 알아봤잖아요. 걘 타고나길 칼잡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하거나 허둥거리는 걸 본 적이 없다니까요. 어찌나 침착하고 담담한지 눈앞에서 사람이 피를 철철 흘려도 끄덕도 안 한다니까요.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인턴이 그러기 쉽습니까?
인턴 땐 그저 멍청하게 당황하고 허둥거리고 빼먹고 실수하는 게 일상이 잖습니까.
오죽하면 인턴을 멍턴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한지원은 안 그러더라고요. 실수를 해도 딱 할 만한 건만 해요.
자기가 배우지 못한 것만 실수하지, 시킨 건 철저하게 해냈어요.
야단맞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 그건 야단치는 사람의 주관적인 견해 때문이지,
반드시 그 애가 잘못한 것만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제가 두 달 동안 그 기집애 담당하면서 살이 2킬로나 빠졌다니까요.
그 애가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제가 후배 앞에서 실수할까 봐 긴장하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빅리버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절대 아니라니까요.”
대부분 바람결에 한번쯤 전해 들었던 내용들이다. 경훈도 한지원이 어떤 녀석인지 웬만큼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일처리 하는 걸 보고 감탄한 적도 있었고 워낙 바른 말만 해대서 동기나 후배들, 선배들까지 가까이하길 꺼려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직접 겪은 바가 아니니 별로 상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젠 문제가 다르다.
그 잘난 ‘빅리버(큰 간)’께서 나에게 ‘동거’를 제안하지 않았는가.
“일 말고 개인적으로는?”
“싸가지가 없죠.”
경훈의 질문에 즉각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민권이 쿡쿡, 웃으며 부연설명을 했다
.
“교수든 선배한테든 지 할 말은 반드시 하고야 마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는 유아독존처럼 보이죠. 동기들 중에서도 실력이 월등하니 보기엔 잘난 척의 고수로 보이고 후배들에게는 워낙 완벽함을 추구하니 재수 없게 느껴지죠. 그러니 싸가지 없다는 한 마디로 모든 게 표현이 되잖습니까.”
경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싸가지 없음의 극치인 한지원이 나에게 동거를 제안했다면 이 자식은 뭐라고 말할까?
그것이 궁금해서 더 웃음이 났다
.
“냉혈한이에요.”
다시 나온 민권의 말에 경훈이 눈길을 돌려 쳐다보았다.
“얼굴도 하얘 가지고 안 그래도 차가운 성격이 더 차가워 보이잖아요.
그래서 저희끼리 한지원은 심장도 차가울 거라고 말했었어요.
예쁘게 생겨서 선배나 동기들 중 누군가는 그 애한테 작업을 걸기도 했다는데 어김없이, 단칼에 거절당했답니다.
또 누군가는 그 앨 짝사랑하기도 했다는데 워낙 틈을 안 주니까 근처도 못 갔다는 소문도 있고요.
이런저런 소문은 많은데 실체는 하나도 없어요. 대부분 검증되지 않은 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에 깔끔한 한지원의 행동거지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났다가도 금방 진화됐어요. 물론 지금도 그 앨 잘 모르는 누군가는 그 애 외모만 보고 가슴이 설렐 수도 있지만 백의 백은 전부 헛삽질하는 겁니다.”
”
“왜?”
경훈은 물었다.
아무리 차갑게 보이는 한지원이라 할지라도 피는 뜨거울 텐데, 심장은 움직일 텐데, 그 아이도 이성 때문에 설레기도 할 것이 아닌가.
민권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이 돼요. 한지원은 워낙 이성적이라 가슴의 영향은 안 받을 것 같거든요.
모르죠, 진짜 임자를 만나면 그 차가운 기집애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이성보다는 심장의 지시를 받게 될지도.
하지만 지금까지 봐서는 진짜 안 그럴 것 같아요.”
동의한다. 경훈은 민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국에서 ‘동거’를 제안하던 그 자식을 떠올려 보면 쉽게 민권의 말에 동조할 수 있었다.
‘동거할래요?’라는 말을 ‘음료수 마실래요?’처럼 쉽게 말하던 한지원의 얼굴은 정말로 담담했었다.
“혹시 허한 마음에 한지원한테 흑심 품으시는 거면 말리고 싶습니다.”
경훈은 가소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민권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소문은 들었습니다.”
문희 결혼 얘기다. 경훈은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 민권을 일별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자 민권이 주저주저 말끝을 늘였다.
“오래 사귀었는데 끝이 안 좋아서 마음이 허하시겠죠.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아무나 하나 사귀어야겠다,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사람한테서 치유 받아야 한다는 요런 마음으로다가 한지원을 생각하시는 거라면 진심으로 그만두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한지원, 그 기집애는 상처 치료는커녕 도리어 상처에 소금만 뿌릴 앱니다.
허한 마음 채우려다가 마음이 아주 만신창이가 되는 수가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아예 시작도 마십시오.
혹시 여자 사귈 마음 있으시면 그냥 참한 간호사들 중에 하나 찾아보세요.
아니면 제가 이번에 들어온 인턴들 중에서…….”
“입 다물어라. 시끄럽다.”
그러자 민권이 즉각 입을 다물었다. 하늘같은 선배의 명령인데 어기면 사망이라는 걸 알 만한 2년차인 것이다.
삐삐, 삐삐.
민권의 호출기가 울리는 동시에 경훈의 호출기도 울렸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욕설을 지껄이며 일어섰다.
호출기를 확인해 보지 않아도 응급환자 발생 건이라는 걸 안다는 듯 두 사람은 동시에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돌아 버리겠다.”
의국에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동혁이 탁자 위에 엎어지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마침 의국을 지키고 있던 2년차 성민이 그런 동혁을 보며 물었다
.
“왜? 또 사고 쳤어?”
1년차 동혁은 윗년차의 질문에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바로 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곧 칠 것 같습니다.”
풀이 팍 죽은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
그건 또 뭔 소리야?
매일 사고 치다 보니까 이젠 예언도 하냐?
막 예감이 와?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사고를 칠지도 알 것 같아?”
“장난 아닙니다. 이번엔 진짜 대형사고 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한쪽에서 담당 교수에게 노티할 내용을 작성하고 있던 지원도 동혁의 굳은 목소리에 힐끔 눈길을 주었다.
같은 1년차인 신동혁이 사고 치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주의가 산만하고 침착하지 못해서 늘 이것저것 사소한 실수를 해대는 친구였다.
도대체 저런 사람이 왜 외과를 지원했는지, 어떻게 외과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궁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왔었다.
의학 분야의 3D라는 외과는 요 근래 늘 정원 미달이었고 그래서 원하는 과에 떨어진 사람도 차선책으로 외과를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신동혁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동혁을 쳐다보는 지원의 눈이 일그러졌다.
스스로가 산만하고 침착하지 못하다면 노력해서 실수를 줄일 생각을 해야 하는데 동혁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늘 한심스러웠다.
매번 윗년차들과 전문의, 교수들의 질책을 받으면서 뭔가 깨닫는 것이 없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뭔데?”
동혁이 하도 죽을상을 한 채 앉아 있자 성민이 다시 물었다.
지원은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 버리고 하던 일에 집중했다.
외과 2년차 이상 선배들 중 김원철 선생만 빼고 전부 마음이 너무 좋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가지고 걱정부터 하고 있는 동혁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성민도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사람들이 왜 냉정하고 이성적이지 못할까?
“김 쌤이 저더러 강철우 환자 c-line 잡으래요(중심정맥관 삽입).”
노트에 고정되었던 지원의 눈빛이 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동혁을 바라보았다.
성민의 인상도 찌푸려져 있었다.
“너한테?”
동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도 완전히 축 처지고 고개를 너무 숙여서 이마가 곧 탁자와 부딪칠 것 같았다.
그럴 만 했다. 동혁은 중심정맥관 삽입에 유달리 약했다.
처음에 시도했던 삽입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었는데 그 여파가 오래갔다.
1년차가 끝나 가는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C-Line 잡는 일에 있어서는 두려워했다.
두려움이 앞서니 당연히 신중하지 못했고 그래서 더더욱 성공할 수 없었다.
“야, 인마. 한번 해봐. 두렵다고 자꾸만 피하면 되냐? 극복해내야지. 계속 못한다고만 하면 어쩔 거야? 결국엔 해야 할 일이잖아.”
성민이 위로하듯 말하자 동혁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무섭습니다. 또 와이어 놓쳐서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어쩝니까.”
중심정맥관 삽입은 꽤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쇄골 아래지점으로 두꺼운 주사바늘을 찔러 넣는 이 작업은 각도가 중요했다.
폐를 찔러서도 안 되고 잘못해서 동맥을 찔러서도 안 된다. 카테터를 넣을 때는 뇌 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심장 쪽으로 내려가도록 방향을 잘 잡아야 했다. 잘못하면 혈관이나 폐가 다칠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신동혁은 치명적인 실수를 할 뻔했었다.
주사바늘이 낸 구멍을 통해 와이어를 집어넣어 정맥을 지나 대정맥으로 밀어 넣던 동혁이 순간적으로 와이어를 놓쳐 버릴 뻔한 것이다.
만약 그때 와이어를 놓쳤다면 와이어는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떠내려갔을 것이다.
결국엔 멀쩡한 흉부를 열고 빼내야 하는 미친 상황이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혁이 와이어를 놓치고 당황하는 그때 치프 선생이 조금 남아 있는 와이어 끝을 재빨리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을 것이다.
그 일로 동혁은 씨 라인 잡는 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서전(sergeon, 외과의사)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었고 반드시 마스터해야 할 기술이었다.
두렵다고 안 해도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인마, 그러니까 이번에는 성공하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하란 말이야. 설마 또 그런 실수를 하겠어? 이번에는 와이어 꽉 잡고 놓치지 않으면 될 것 아니야.”
성민의 말에 동혁이 울 것 같은 얼굴을 들었다.
“물론 이젠 절대로 와이어, 안 놓칠 겁니다. 그런데 다른 실수를 하면 어쩝니까?
정맥을 찢어서 과다출혈이 발생한다든지, 카테터 삽입하다가 심실세동을 유발시킨다든지…….”
“야! 이 자식아! 왜 그런 상상을 해? 그러니까 겁부터 나는 거지! 그런 상상만 하면 어떻게 제대로 라인을 잡아?
성공하는 걸 상상하란 말이야. 그걸 제대로 해내고 난 후에 느낄 뿌듯함을 생각하란 말이야.”
달칵.
한창 성민이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그때에 의국 문이 열렸다.
그다.
지원의 눈이 의국으로 들어서는 경훈에게 고정되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동요한 것에 반해 최경훈의 눈은 너무 평온했다.
마치 며칠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는 태연했다.
“무슨 일 있어?”
경훈은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는 동혁과 성민을 흘깃 쳐다보고 컴퓨터 앞에 앉아 무심하게 물었다.
그러자 성민이 자신을 도와줄 지원 병력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어투로 재빨리 상황 보고를 시작했다.
“김원철 쌤이 동혁이한테 씨 라인 잡으라고 지시했답니다.”
그러자 경훈의 눈길이 동혁에게 향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원은 인상을 썼다. 동거하자고 말한 자신에게는 태연했던 그가 신동혁의 일에는 동요한다는 것이 기분이 상했다.
자신의 제안이 동혁이 처한 난관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어째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가지고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동혁보다 내가 더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지?
“해야지 그럼.”
경훈이 동혁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동혁이 울상을 지은 채 경훈을 쳐다보았다.
“선배님, 아시잖아요.”
“알아, 인마. 그래도 해봐. 이번엔 잘할 수 있을 거야.”
“선배님…….”
“언제야?”
“김 선생님 수술 끝나시면 바로요. 한 시간 정도 걸린답니다. 세팅해 놓고 호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시간 좀 있네. 연습해 보자.”
“예?”
연습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동혁이 눈을 크게 뜨자 경훈이 미소 지었다.
“일어서.”
경훈이 일어서자 동혁과 성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올려다보았다.
지원도 덩달아 경훈을 쳐다보았다.
경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미리 연습 좀 해보면 낫지 않겠어?”
최경훈은 넓은 오지랖만큼이나 돈독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의과대학 해부실에 기증된 해부용 카데바(시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다.
어떻게 담당자를 구워삶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원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깊고 넓은 인맥관계를 유지해야만 이런 일이 가능한지도 알 수 없었다.
신동혁을 데리고 가는 경훈을 따라나선 성민의 행동까지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원이 따라나서자 동혁과 성민의 눈길이 놀란 빛을 띠었다.
“너도 가려고?”
성민이 묻자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최경훈이 그녀를 잠시 쳐다보고는 그냥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동혁과 성민이 진짜 놀란 듯 쳐다보았지만 지원은 상관치 않고 따라왔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최경훈을 비롯한 세 남자와 함께 해부실 해부대 위에 누워 있는 카데바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카데바가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성민이 묻자 경훈이 씨익 웃었다
.
“약 30분 후에 복강경 조절형 위밴드 수술과 복강경하 위소매절제술을 주제로 한 강의가 있다는 소릴 들었거든.”
“예에? 그, 그럼 정원복 교수님의 그 조절형 위밴드 삽입술에 대한 강의가 여기서 열린다는 말씀이세요?”
성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지원도 놀란 눈으로 경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일을 벌인 당사자는 태평, 그 자체였다.
필시, 정 교수의 허락을 받지도 않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자신의 강의를 위해 준비한 카데바를 한낱 레지던트의 씨 라인(C-Line) 연습용 따위로 내줄 정 교수가 아니었다.
“그래. 동혁인 씨 라인 준비물 챙겨 봐.”
“선배님.”
경훈이 동혁에게 연습할 준비를 하라고 시키자 성민이 가로막고 나섰다.
만약 성민이 안 나섰다면 지원이 나섰을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원리원칙 주의인 정 교수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강의용으로 쓸 카데바 가슴팍에 구멍이 숭숭 뚫린 걸 알면 노발대발할 것이 틀림없었다
.
“그냥 가시죠. 이거, 말 안 되는 일입니다.”
성민이 인상을 쓰며 말했지만 경훈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말이 왜 안 돼? 괜찮으니까 넌 비켜.”
“선배님.”
성민이 더 강하게 말했다.
“안 들켜.”
“들킬 겁니다. 구멍 숭숭 난 카데바를 정 교수가 모를 리 없습니다.”
“이미 나 있어.”
“예?”
순간 경훈이 카데바를 덮고 있는 하얀 천을 홱 들췄다. 그러자 죽은 남자의 맨몸이 드러났다. 성민과 동혁처럼 지원의 눈길도 곧장 카데바의 쇄골 지점으로 향했다.
있다!
최경훈의 말대로 카데바에는 이미 몇 개의 바늘구멍이 나 있었다.
“콜론 캔서(colon cancer)로 사망한 환자야.”
경훈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콜론 캔서, 즉 대장암으로 죽은 환자였다. 그렇다면 이 바늘구멍은 말이 된다. 암환자였다면 분명 살아있을 때 항암제 투여를 위해 씨 라인을 잡았을 것이다. 그 말은 이미 나 있는 바늘구멍을 잘 맞추어 연습하면 정 교수가 모르게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성민과 동혁이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경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경훈이 동혁을 향해 인상을 썼다.
“뭐 해? 빨리 준비해서 시작해. 시간은 30분뿐이야.”
순간 동혁이 후다닥 준비해 온 도구들을 꺼내어 세팅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대단한 사람이야.”
지원은 종이컵에 담긴 검은 액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성민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라면 그런 강의가 있다는 걸 사전에 알았다고 해도 엄두도 못 냈을 거야.
아니, 그런 생각조차 못했을 거다. 경훈 선배, 진짜 겁이 없어.”
“무모한 거죠.”
혼잣말처럼 나직한 목소리가 지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성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지원은 자신보다 1년 선배인 성민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경훈 선배는 무모했다고요. 그러지 마셨어야 했어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잖아요.”
“야, 그건 동혁이가 워낙 겁을 내니까…….”
“그건 그 애 문제예요. 신동혁, 스스로가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요. 앞으로 씨 라인 잡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도 많을 텐데 그때마다 경훈 선배가 나서 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지원의 냉정한 말에 성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
“네 말도 맞지. 그러니까 네 말은 사과를 따주지 말고 사과나무 심는 방법을 알려 주라는 거, 아냐?
그런데 한지원. 넌 경훈 선배가 신동혁한테 사과를 따준 것 같냐?”
“…….”
지원이 아무 말이 없자 성민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말을 이었다.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너나 나나, 전공의나 인턴들 전부 사과를 얻어먹고 있는 셈이잖아.
선배 서전(외과의사)들이 심어 놓은 사과나무 아래서 사과 따는 법만 배우고 있지.
인턴 때는 입 벌리고 서서 사과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떨어지면 허둥지둥 달려가서 줍기 바쁘지.
그러다 전공의 1년차가 되면 겨우 막대기로 나무 가지를 흔들어서 사과를 떨어트릴 정도로 머리를 쓰게 되지.
그렇게 2년차, 3년차를 거치다 보면 나무에 오르는 법도 배우게 되고 나무를 잘 가꾸는 법도 배우게 되잖아.
그렇게 다들 단계별로 배우는 거야.
처음부터 사과나무 심는 방법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선배 의사들이 다 가꾸어 놓은 사과나무에서 사과만 따먹고 있는 거야.
그러다 진짜 전문의가 돼서 나무도 심을 능력이 되면 그땐 자신만의 나무를 심을 수도 있겠지.
만약, 동혁이가 1년차가 아니었다면 경훈 선배도 그렇게 위험까지 감수하며 나서서 연습까지 시키지는 않았을 거야.
아직 1년차니까. 조만간 2년차가 되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1년차니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싶었던 거지.
방법이 조금 무모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봐.
저 자식, 제법 자신감을 되찾은 것 같지 않아?”
지원은 눈길을 들어 복도 저 끝에서 중심정맥관 삽관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 동혁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훨씬 침착한 모습이다.
“그래도 너무 무모했어요. 만약 정 교수님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경훈 선배는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자신의 일도 아닌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는지 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원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라면 절대 그런 일은 못할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에게 위해가 가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런 위험감수를 왜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 너는 이해 못하겠지.”
성민이 커피를 다 마신 종이컵을 구기더니 기댔던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걸음 앞으로 가더니 문득 지원을 돌아보았다.
“한지원, 넌 절대로 최경훈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 이유가 뭔 줄 알아?”
지원은 성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성민이 씨익 웃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해할 생각도 없으니까. 원래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싶지도,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은 게 사람 심리잖아. 그러니까 애써서 경훈 선배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 물론 그럴 마음도 없겠지만 말이야. 먼저 간다.”
너무 다른 사람…….
지원은 성민이 던진 그 말을 곱씹었다.
그래. 최경훈과 나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성민 선배의 말대로라면 나와 너무나 다른 최경훈이라는 사람에게는 작은 신경도 쓰이지 않아야 하고 이해할 노력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그토록 오랜 시간을 아닌 척하고 지내왔지만 결국에는 포기하고 내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왜 좋아하는 건지,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을 그를 신경 쓰는 건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지금껏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려는 것이다.
동거.
곁에 두고 그 남자의 어떤 점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지, 왜 내가 이토록 그 사람에게 신경 쓰는 건지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할 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결론을 얻게 된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끊어낼 것이다.
어떤 어려운 병도 원인을 알게 되면 치료 방법을 개발할 수 있고 예방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내 심장을 병들게 하는 최경훈이라는 존재도 결국에는 완전히 치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왼쪽으로 좀 당겨. 좀 더. 그렇지.”
담당 교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지원은 교수님이 2년차 선배에게 카메라가 달린 관의 방향을 일러 주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카메라가 보여 주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현재 환자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더 깊이, 더. 안으로.”
직장에서 발생된 암이 복막까지 진행된 환자였다.
배를 절개하지 않고 작은 구멍만 내어 모니터를 통해 수술을 진행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잡고 있는 2년차의 역할이 중요했다. 오퍼레이터(집도의)의 시야를 확보해야 했고 오퍼레이터가 지시하는 방향을 재빨리 인지해 정확한 각도로 움직여야 했다.
이제 곧 그녀가 할 일이었다. 곧 있으면 지원도 2년차가 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현재 2년차들이 하는 역할을 신중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트로카 좀 더 빼. 좀 더. 그렇지.”
이번에는 4년차 김원철 선생에게 지시를 내린다.
지원은 다시 모니터를 보며 김원철 선생이 기구의 위치를 조절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직장과 복막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암 덩어리들이 빠르게 제거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마무리가 다 되어 갈 즈음이었다.
“한지원.”
모니터와 수술대를 바쁘게 오가며 수술 장면을 눈에 담고 있던 지원은 문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교수님.”
집도의는 여전히 모니터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지원은 직감적으로 교수가 자신을 테스트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잔뜩 긴장한 채 교수님의 질문을 기다렸다.
“키드니(kidney, 신장) 근처에 가면 블리딩(Bleeding, 출혈)이 자주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어떤 베셀(vessel, 혈관) 때문인지 아나?”
지원은 재빨리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공부했던 내용이다. 차분하게 신장과 연결된 혈관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렇게 몇 초를 흘려보낸 그녀는 빠르게 답을 기억해냈다
.
“메조유레터(요관간막)입니다.”
교수의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끄덕여졌다. 옆에서 어시스트를 하고 있던 4년차 김원철 선생의 눈 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간다.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지원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동기들이나 후배들, 심지어 윗년차 선배들도 때로는 집도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 당황하기 때문이다.
아는 문제도 갑작스럽게 던져지는 바람에 당황하니까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
수술실의 긴장감에 눈길만 마주쳐도 어렵게만 느껴지는 교수님과 이하 전문의, 윗년차들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당황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면에서 지원은 유리했다. 그녀는 냉철했고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했다.
그래서 아는 내용인데 당황해서 대답을 못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됐어. 자, 수고했어.”
드디어 수술이 끝났다. 5시간의 긴 수술이었다. 지원은 아랫년차들과 함께 수술실을 정리하고 나왔다.
수술 방 앞 복도로 나와 겨우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그녀의 눈이 이제 막 다른 수술 방에서 나오는 최경훈을 발견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색 수술복 차림의 그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앞에 선다. 지원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술하셨어요?”
“그래.”
“저도 방금 복강경 수술 막 끝냈습니다.”
“임 교수님?”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잠시 망설이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답, 아직 기다려야 하나요?”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이 뚱한 표정으로 변하며 그녀를 향했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이다.
“아직 생각 중이야. 넌? 넌 아직 그 생각 그대로야?”
“네. 전 변함없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요?”
“글쎄. 급해?”
“네?”
지원은 처음엔 그가 뭘 묻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가 그녀가 말한 모자라는 전세자금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하지만 되도록 빨리 대답을 해주셨으면 해요. 선배님께서 거절하시면 다른 방법도 연구해 봐야 하니까요.”
“다른 방법? 가령?”
지원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가장 유력한 방법은 다른 동거자를 찾아보는 거겠죠.”
그의 미간이 좀 더 강하게 찌푸려졌다.
“다른 동거자를 고를 때 여전히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겠지?”
지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함께 살 동거인으로서 조건이 얼마나 맞는지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네가 말하는 그 조건에 내가 해당이 된다니 감격이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선배님은 정리정돈 같은 면에서도 깔끔하시고 평소 생활방식도 깨끗하시니까요.
지금까지 겪어 본 선배님을 보면 저와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접 살아보면 다를지도 모르지. 생각했던 것과 다르면 어쩔 건데?”
“그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가 다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너무 보수적인 건가? 난 그런 생각 자체를 하는 네가 이해 안 되는데.”
“압니다.”
그래, 안다. 지원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최경훈은 그런 남자였다.
그녀가 아는 최경훈이라는 남자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여자라서 못하는 영역은 없는 세상이라도 여자는 여전히 보호해 주어야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은 시작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한 여자와 6년 동안 연애라는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는 남자였다. 아마도 최경훈에게 연애나 사랑이라는 건 사회적 통념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책임감과 일맥상통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자에게 ‘동거’라는 단어 자체가 껄끄러운 건 당연했다.
“난 아직도, 왜 네가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고 현실적인 문제 해결 방안으로만 보시면 간단하실 거예요.”
“글쎄, 넌 그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한텐 어려운 문제야. 이게 바로 세대차이라는 건가?”
지원은 피식 웃었다.
만약 내가 신동혁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면 그는 경훈 선배와 다르게 반응했을까?
아닐 것이다. 같은 나이에 같은 일을 하는 동기지만 신동혁 또한 최경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동혁은 한술 더 떠서 날 미친 여자 취급할지도 모른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제가 유달리 합리적인 성격인 탓이죠.”
그가 피식 웃는다.
“네가 좀 다른 건 인정하나 보지?”
“다르긴 하지만 그게 단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원의 딱 부러지는 대답에 경훈이 다시 웃었다. 그녀는 그런 경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많이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요?”
잠시 침묵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되도록 빨리 결론 내리지.”
“네. 그럼 전 이만…….”
“한지원.”
고개를 살짝 숙이고 지나치려는 그녀를 그가 불러 세웠다. 지원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너, 자유연애주의냐?”
지원은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동거를 제안한 그녀가 그의 눈에는 사회적 전통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몸이 내키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연애하는 여자로 보인 것 같았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굳이 관습에 얽매인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중에 전문의가 되어 시간이 나서 연애라는 걸 하게 된다면 자유로운 연애를 선호하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그가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독신주의냐?”
지원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질문에만큼은 진실하게,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네. 절대적인 독신주의잡니다.”
절대적인 독신주의자라…….
경훈은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당돌하기 그지없는 녀석이라 생각은 했지만 오늘 몇 마디 나눠 본 한지원은 평소에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차가운 여자였다.
“도대체 그 머릿속은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최 선생님…….”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복도를 걷던 경훈은 문득 자신을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민수희 간호사였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는 순간 경훈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긴장했다.
“수술 끝나셨나 봐요.”
수줍게 웃으며 볼을 붉히는 그녀를 보며 경훈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오랜 연애가 끝난 후 몸으로 느껴지는 후유증은 생각보다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우선 사람들의 시선이나 관심이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시간이 많은 오프 날 전화를 걸 사람도, 만날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조금 외로워지기는 했다.
게다가 지금같이 싱글 남자, 즉 임자가 없는 남자로 새로운 연애를 꿈꾸는 여자들의 먹잇감이 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싫었다.
아직은 혼자이고 싶었다. 문희와 평범한 연인처럼 연애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늘 신경 한쪽은 그녀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솔로이기에 가능한 자유로움을 느끼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다.
나중에 다시 연애를 하고 싶은 여자가 생긴다면 그때는 생각이 바뀌겠지만 지금은 정말로 혼자이고 싶었다.
경훈은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용건 있어요?”
민수희의 볼이 더욱 붉어졌다. 이 여자의 피부 조직은 유달리 쉽게 붉은 기를 띤다.
“아뇨, 그건 아니고…… 사실은 어제 오프였는데 쇼핑 갔다가 이걸 샀어요. 선생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녀가 길쭉한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척 봐도 안의 내용물이 넥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 주려고 산 겁니까?”
“네…….”
부끄러운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경훈은 짜증이 났다.
몇 번, 이쪽은 아무 감정이 없다는 언질을 줬는데도 그녀는 도통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줘야 하는 이 상황이 짜증이 날 뿐이다.
하지만 한 번은 해야 할 일이다.
경훈은 그녀가 내미는 박스를 일별한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민 간호사에게서 이런 선물 받을 이유 없는데.”
그녀가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전 그냥…….”
“그냥이라도 이런 선물 하지 말아요. 혹시 나, 좋아해요?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어요. 난 민 간한테 특별한 감정 없으니까.”
“선생님…….”
“민수희 씨도 레지던트 3년차가 이럴 시간 없다는 거, 잘 알 겁니다.
이럴 시간에 난 잠 한숨, 글 한 줄 더 보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더 이상 내 시간 낭비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의식적으로 차갑게 말하고 그녀를 스쳐 지나쳤다. 그 자리에 선 채 얼어붙은 민수희의 감정이 지금 얼마나 비참할지 알지만 경훈은 최선의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짜식, 독하게도 군다.”
문득 복도 코너를 돌던 경훈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규다. 내 고민의 원흉. 저 자식이 일만 치지 않았어도 한지원에게서 동거하자는 제안 따위는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받았다고 해도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자연히 대꾸하는 말투에 가시가 돋았다. 그래도 눈치 없고 뻔뻔한 친구 놈은 실실거리며 살살거린다.
“너 좋다는 여린 여자한테 그렇게 모질게 하고 싶냐? 나한테는 그래도 여자들한테는…….”
“시끄러워, 새끼야.”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경훈은 보기 싫은 놈을 일별하고 의국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규 놈이 재빨리 따라붙는다.
“야, 야. 너도 이제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야지. 언제까지 혼자서 청승 떨 거냐? 좋다고 하는 여자 있을 때 사양 말고…….”
경훈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노려보자 놈이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런 놈에게 험악한 인상을 쓰며 물었다.
“내가 지금 여자 사귀면 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냐?”
“내가? 내가 왜?”
멍청한 놈. 이러니 결혼할 여자한테 아파트가 자기 게 아니라는 말도 못하지.
“너, 내가 여자 만나서 당장 결혼할 거니까 내 돈 내놓으라고 하면 그땐 어쩔 건데?”
놈이 ‘허걱’한다. 그것까지는 생각도 못해 본 얼굴이다. 물론 생각했을 리 없다.
미래에 대한 계획조차 세우지 않고 덜컥 애부터 만든 놈이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그, 그럼 안 되지. 안 그래도 내가 그 일 때문에 널 보려고…….”
경훈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이 자식이 또 무슨 황당한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었다.
“저기…… 경훈아. 우리 결혼식 말이야…….”
말을 질질 끄는 폼이 또 뭔가 어려운 말을 할 태세다. 경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세금을 함께 내어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사귀던 여자가 임신을 했다며 결혼해야겠다고 할 때는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놈은 생각보다 훨씬 뻔뻔스러웠고 대책이 없었다.
예비 장모랑 장인이 눈을 세모꼴로 뜨고 결혼해서 살 집은 있냐고 묻는데 이 아파트 전세금의 3분의 2가 네 거라는 말이 차마 안 나오더라. 사실은 장인 될 분이 채린일 검사한테 시집보내려고 했었거든.
들어 보니까 그 검사 자식은 집도 있고 차도 무지 고급이고 집안도 빵빵하대.
그런 말 듣고 나니까 도저히 집도 한 칸 없다고 말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이 아파트, 내 거라고 했다. 내가 결혼하면 넌 그냥 나갈 거라고…….
시골집에서 땅 팔려고 내놓았으니까 늦어도 1년 안에는 갚아 주겠다는 말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친구 놈 하나 잘못 둔 덕에 경훈은 졸지에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기 직전이었다.
곧 전문의 시험 준비도 해야 하는데 이런 일에 골치를 썩어야 하는 상황이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지만 친구를 위해서 참고 있는 중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며 하나 있는 아들만 바라보고 사는 영규 놈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절대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경훈아, 내가 땅을 내놨다.
네 아파트 값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들어 주마. 절대 안 떼먹어. 정 안 되면 소라도 팔아서 네 돈은 꼭 갚아 주마.
영규 어머니에게 소가 얼마나 귀한 재산인지 잘 아는 경훈은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돈될 집안에 벌써 아파트 마련해 놨다고 큰소리 땅땅 치고 온 아들의 행동이 못난 부모 만난 탓이라고 당신이 더 죄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 코도 석 자고 영규 놈 하는 꼴이 한심스러워서 절대 봐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영규 어머니 때문에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이것저것 안 따지고 영규만 봤다면 이런 상황은 절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경훈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는 생각에 영규를 재촉했다
.
“요점만 말해. 30분 후에 또 OP(수술실) 가야 돼.”
“어, 그래. 알았어. 그,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결혼 날짜가 좀 앞당겨졌어.”
순간 경훈은 경악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당겨져? 언제로?”
“열흘 후.”
“뭐! 이 자식이!”
“야, 야. 경훈아, 진짜 미안하다. 정말로, 내가 진짜 미안하다.
내가 죽일 놈인 거 아는데 한 번만 살려 주라.
나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자꾸만 꼬여. 방금도 내가 시골 엄마한테 전화해서 땅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는데 아직 보러 오는 사람도 하나 없단다.
나, 진짜 죽고 싶다. 너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나,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로 따지면 그 아파트, 네 건데. 내가 딱 죽고 싶은 심정이다.”
경훈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기가 막혔다.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집, 구하기 힘들지?”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친구 놈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 지경이 됐나, 싶은 회의도 들고 만사가 귀찮아서
그냥 ‘모르겠다, 배 째’ 하며 친구의 사정 따위는 모른 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하지만 경훈은 자신이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긴 한숨이 나왔다.
“알았어.”
더 이상 놈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 경훈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경훈아…….”
뒤에서 애절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친구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경훈은 고민 가득한 얼굴로 의국 문을 열어젖혔다.
“선배님!”
경훈은 의국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서 반가운 듯 벌떡 일어서는 동혁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동혁이 한달음에 달려와 90도 각도로 허리를 꾸벅 숙인다.
“뭐야?”
방금 전에 마주친 영규 놈과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던 터라 저도 모르게 무뚝뚝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하지만 동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방 싱글벙글이었다.
“저, 씨 라인 잡았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해냈습니다. 김 선생님이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연습하면 더 좋아지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이게 다 선배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동혁이 다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런 후배 놈을 보며 경훈도 결국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래? 잘했네. 김 선생 말처럼 앞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연습해.”
“예써!”
동혁이 이마에 손을 올려붙이며 거수경례를 했다. 그러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성민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야, 신동혁. 넌 그게 잘한 거냐? 선배님, 동혁이 저 자식, 관 삽입 전에 혈소판 수치도 확인 안 하고 헤파린 주입할 주사기도 빼먹고 완전 엉망이었어요.”
“선생님!”
동혁이 성민의 입을 막으려는 듯 황급히 소리를 쳤지만 이미 후배를 놀려먹는 재미에 빠진 성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 인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김 쌤이 그런 실수를 용납하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 리버 티피엘 어시스트 섰다가 강 교수님께 칭찬 받았단다. 강 교수님이 웬만해선 칭찬 같은 거 하는 분이 아니신데 그런 분께 칭찬을 받았으니 기분이 얼마나 째지겠냐?
그러니까 오늘 네가 한 실수도 그냥 좋게 넘어간 거야.”
“아닙니다. 진짜 잘했습니다.”
“그래서 벌당(벌로 당직을 서는 것) 서냐?”
“벌당?”
경훈이 묻자 성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장 기본적인 실수를 했다고 벌당 하루 서라고 했답니다.”
“꼴랑 하룹니다.”
동혁이 바보처럼 웃으며 말했다.
“전 이번에 에당(에브리데이, 매일 당직) 설 각오까지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겨우 하룹니다. 진짜 기분 좋습니다.”
“아이구, 퍽이나 좋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우리 외과의 꼴통이 맞아.”
“선생님, 진짜 왜 그러세요. 좀 이뻐해 주세용.”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애교를 떨며 들러붙는 동혁의 행동에 성민이 부르르 몸까지 떨며 뒤로 물러났다.
“에비, 저리 가. 저리 가.”
“선배니임.”
경훈은 그런 두 사람의 장난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컴퓨터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있을 위아전절제술에 대한 자료를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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