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Purity RAW novel - Chapter 20
19. 희망의 바람
“선생님,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어디 아프세요?”
ER에 다녀온 지원이 숙직실로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눕자 해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
지원은 해인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하고 돌아누웠다. 그러자 해인이 다시 묻는다.
“경훈 쌤이 지원 쌤 자는 거 확인하고 전화 달라고 하시던데…….”
“잘 거야. 신경 쓰지 말고 퇴근해.”
지원이 또 귀찮은 듯 대꾸하자 해인도 이번에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저 먼저 퇴근할게요.”
100일 당직이 끝난 이후로 그나마 한 번씩 찾아오는 오프인 모양이었다. 해인은 예쁘게 차려입고 성민의 부모님을 뵈러 간다고 했다.
“그래, 잘 가.”
지원은 숙직실을 나서는 해인에게 말하고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당겼다. 추웠다. 이상하게 몸이 떨리고 평소엔 잘 타지도 않는 추위를 탔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난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모양이다.
“후…….”
지난 며칠간 잡생각을 떨치려고 정신없이 일에만 매달린 결과였다. 다른 사람 오프도 대신 서주면서 쉴 시간을 만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ER(응급실)로 달려가고 자신이 들어갈 수술이 아닌데도 수술실을 기웃거리며 밖에서 수술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병동마다 돌아다니면서 환자들을 수십 번씩 체크하고 미뤘던 차트도 다 채울 만큼 한시도 쉬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경훈도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조금 전 ER로 내려와 당장 올라가서 쉬라고 윽박을 질렀다. 결국 지원은 사흘 만에 처음으로 숙직실 침대에 몸을 뉜 것이다.
지원은 무거운 눈을 감았다. 그런데 또 그 기억들이 떠오른다.
[네 아버진 몰랐어.] [아빤 몰랐어요. 우리 엄마가 다 거짓말한 거였어요.] [네 아버지가 간암 말기야. 이식만이 살 길이야.]지원은 다시 눈을 떴다.
미칠 것 같았다. 눈만 감으면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 외면하고 잊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지금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얼마나 암이 진행되었을까? 지금쯤 이식해 줄 간은 찾은 걸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건…….
지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보고 싶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이 궁금했다. 간암 말기면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생기가 없는 얼굴이겠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왜 그동안 한 번도 날 찾지 않았냐고. 새어머니의 거짓말에 속았다는 핑계 대지 말고 진실을 말해 보라고.
내가 그렇게 전혀 궁금하지 않았느냐고…….
똑똑.
숙직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요?”
소리쳐 묻자 경훈의 목소리가 문을 넘어 날아들었다.
“나야.”
지원은 일어났다. 그런데 머리가 빙글 도는 것 같았다. 휘청 흔들리는 몸에 중심을 잡으려고 침대 기둥을 붙잡았다.
“지원아.”
그가 다시 재촉한다. 지원은 겨우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 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그가 인상을 썼다.
“아픈 거야?”
“머리가 좀…….”
그가 대뜸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열난다. 들어가 누워.”
그리고 지원을 침대로 가 눕힌 경훈은 목에 걸린 청진기를 그녀의 가슴에 댔다.
“숨 쉬어 봐.”
지원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몇 번 하고 나서야 그가 청진기를 놓았다.
“호흡은 괜찮고. 열 감긴가 보다. 가서 플로이드(링거) 가져올 테니까 두 시간만 맞으면서 쉬어.”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말 들어.”
그가 일어서서 문을 향해 돌아선다.
“선배.”
경훈은 걸음을 멈추고 지원을 보았다.
“혹시……?”
그는 지원이 뭘 묻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왜 그토록 자신을 혹사시킨 건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걸 잊고 싶은 것이다. 이성과 달리 자꾸만 그쪽으로 흐르는 마음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생각처럼 잘되지 않아 괴로워하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였다.
경훈은 조용히 말했다.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빠른 시간 안에 이식하지 못하면 3개월도 장담 못해.”
지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봤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
“이틀 전에.”
어때요? 어때 보였어요?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질문을 지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 질문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될까 봐 두려웠다.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도 용납하고 싶지도 않은 그 일. 그 일을 하겠다고 할까 봐 스스로가 두려웠다.
“가…… 볼래?”
경훈이 묻는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불안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의사로서, 꺼져 가는 생명을 살려야 하는 의사로서는 지원에게 가보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남자로서, 그녀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남자로서는 절대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목소리였다.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 그럼.”
경훈은 그녀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난다는 듯 황급히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나가야 할 그가 멈춰 있다. 지원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건강한 간만 있다면…….”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강 교수님 말씀으로는 이식할 간이 건강하고 크기도 적당하다면 성공 확률이 98퍼센트라더라. 다른 장기로 전이된 건 별 문제가 안 될 것 같아서 간만 깨끗이 잘라내고 이식하면 되겠다고 하시더라.”
지원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경훈이 다시 말했다.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강 교수님께 보였어요?”
지원이 묻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그가 문을 열고 나갔다. 지원은 문밖으로 사라지는 그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바보. 싫다면서, 내가 수술대 위에 눕는 거 싫다면서 알아볼 건 다 알아보러 다니고…… 그냥 모른 체하지. 그냥 모르는 척 잊어버리지. 그렇게 싫다면서 성공 확률은 왜 알려 주고…… 바보처럼.
지원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장으로 다가간 그녀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외출복을 꺼내 입고 화장대 앞으로 갔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녀는 화장을 시작했다. 요 래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화장을 제법 공들여 했다.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부모한테 외면당했어도 혼자서 잘 살았다고 보여 주고 싶었다. 부모 사랑 따위 안 받고도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보여 주고 싶었다.
화장을 끝낸 지원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 번 더 점검하고 숙직실 문을 열었다. 순간 그녀의 걸음이 멈추었다.
“선배…….”
그가 숙직실 문 옆 벽에 기대서 있었다.
“지금 갈 거야?”
지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같이 가줄까?”
“그래 줄래요?”
경훈은 희미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인마.”
일부러 밝게 웃는다. 걱정되면서, 걱정돼 미칠 것 같으면서 그는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802호야.”
8층에서 내린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경훈이 지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괜찮아?”
지원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가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며 손으로 열을 짐작해 본다.
“아직 열 있다. 집에 가서 주사라도 맞아야겠다.”
“응.”
“여기서 기다릴까?”
지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갔다 올게요. 오래 안 걸릴 거야.”
“그래, 기다릴게.”
그가 기다린다. 지원은 그가 기다릴 거라는 사실이 든든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듬직함이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지원은 잠시 그를 보다가 돌아섰다. 802호가 있는 병실을 향해 코너를 돌 때까지 자신에게 고정된 경훈의 눈길을 느끼며 그녀는 그렇게 한 발 한 발 그곳으로 향했다.
한정섭.
아버지 이름이 문 앞 환자 이름표에 적혀 있었다. 문 앞에서 그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그녀는 다시 망설였다. 이대로 돌아가 버리고 다시는 생각하지 말까? 이식 같은 거, 해줄 마음도 없으면서 괜히 찾아온 건 아닐까? 괜히 아물어 가는 상처를 덧나게 하는 건 아닐까?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리를 들시는 것 같았다.
“후우…….”
지원은 결국 노크를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의 몸이 흠칫 굳었다.
“언니?”
의아한 목소리가 지원을 불렀다. 지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지수를 마주 보았다. 동생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언니…….”
“왜 그러니?”
병실 안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새어머니가 나왔다. 그리고 지수와 마찬가지로 지원을 보고 놀란다.
“지원아…….”
지원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 그래. 그래.”
당황한 티가 역력한 표정으로 영혜는 지원의 인사를 받았다.
“언니가 여긴 어떻게…… 엄마.”
지수가 험악한 얼굴로 영혜를 불렀다. 그리고 쏘아붙인다.
“엄마가 말했어요? 아버지, 여기 있다고? 또 무슨 말 했어요? 도대체 엄마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야?”
“조용히 해. 아버지, 주무신다.”
영혜는 딸을 무섭게 바라보았다. 지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엄마를 바라보는 사나운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혜가 조용히 문을 닫으며 지원에게 말했다.
“네가 올 줄은 몰랐다. 난 네가…….”
“거기 무슨 일이야?”
순간 닫히는 문틈을 비집고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혜의 얼굴이 흠칫 굳어지는 것과 동시에 지수의 얼굴도 당황했다. 그리고 지원은…… 지원의 가슴은 균열했다. 심장이 파르르 떨리며 진동했다. 십여 년 만에 듣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자 그녀의 목 안 깊은 곳에서 뭉클하고 울컥한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지수 엄마.”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영혜가 지원을 쳐다보았다. 지원은 꿀꺽, 감정의 덩어리를 삼키고 속삭였다.
“만나 볼게요.”
영혜의 얼굴이 스르르, 풀어졌다. 지원은 재빨리 덧붙였다.
“이식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지수의 사나운 눈이 엄마를 향했지만 영혜는 그런 딸을 외면하고 지원에게 고마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괜찮아. 그저 만나 주는 것만도 고맙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들어가서 설명 먼저 하고.”
영혜는 재빨리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원은 새어머니가 들어가자 지수를 쳐다보았다. 지수도 그런 지원을 마주 보았다.
“우리 엄마가 또 언닐 찾아갈 줄은 몰랐어요. 그 정도로 이기적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그동안 언니한테 한 짓도 모자라서…….”
“넌 이해해야지.”
지원의 말에 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지원은 다시 말했다.
“네 엄마잖아. 남편 살리고 싶어서 자존심이고 양심이고 다 버리고 날 찾아온 엄말 넌 이해해야지.”
“언니…….”
“나도 이해하는데.”
“…….”
그래, 나도 이해하는데. 나도 네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데.
정말 그랬다. 지원은 새어머니를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보다 더. 그래서 부럽다. 눈앞에 있는 지수가 너무나 부럽다.
“돌려보내!”
안에서 큰소리가 울렸다. 지수와 지원의 눈길이 동시에 병실로 향했다. 지원은 잠시 그렇게 아무런 기척도 없는 병실 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지금에 와서 무슨 짓이야? 당신 정말로 미쳤어? 당신, 정말로 이런 사람이었어?”
“그냥 보는 거잖아요. 다른 거 아니고 그냥…….”
“다른 거, 아니라고? 당신이 정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지원일 불러들였어? 아니잖아. 그 불쌍한 자식한테 이식 부탁하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어때요! 당신 살릴 수만 있다면 그럼 좀 어때!”
“여보!”
“난 더한 짓도 할 거야. 그래요, 나 그동안 죄지었어. 당신한테도 죄지었고 지원이한테는 못할 짓 했어. 그런데 어떡해. 이제 와서 후회해도 어떡해. 그렇다고 당신 죽는 거, 지켜 보기만 해? 잘할게요. 앞으로 남은 삶은 후회하고 반성하고 잘하면서 살게요. 당신이나 우리 지수, 지환이보다 지원이한테 잘할게요. 지금까지 못한 거, 다 보상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난 못해. 그냥 죽으면 그만일 목숨, 자식 아프게 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아. 해준 것도 없는데, 심장 다 뜯어서 그 녀석한테 내어 놓고 싶은 것도 참고 있는데…….”
목이 메이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를 지원은 아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병색이 짙은 아버지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지난날을 후회하는 듯, 당신에게도 아픈 자식이 있음을 잊고 살았다는 것을 마음 깊이 후회하는 듯한 눈이 그녀를 흔들었다.
“여보, 지수 아버지…….”
새어머니가 아버지를 붙잡으려다 문가에 서 있는 지원을 보았다.
“지원아.”
아버지의 눈길이 돌려졌다. 지원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끔은, 아주 가끔 스스로를 놓아 버리는 밤이 있었다. 느슨하게 놓아 버리면 더 아프고 그리울까 봐 스스로를 단단히 죄고 죄던 시간 사이로 그런 날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잠이 들 때,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향한 그리움에 목 놓아 울던 날. 서럽고 외로워서 벽에 대고 원망을 퍼붓고 울던 날. 그런 밤도 있었다.
그런데 그 밤들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 외롭던 시간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현재, 자신을 바라보는 아픈 아버지만 보였다.
“지원아…….”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를 보며 지원은 울었다. 새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난 날 이후부터 단단히 걸어 잠갔던 빗장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지원아…….”
애달프게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
지원은 눈을 감았다.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뛰었다. 그녀를 위로해 줄 유일한 안식처, 그녀를 품어 주고 안아 줄 그 남자를 향해서 지원은 미친 듯 뛰었다.
경훈은 초조한 마음에 그녀가 사라진 코너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헝클어진 모습으로 그녀가 나타났을 때 심장이 덜컥하고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건 자신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보다 더 겁이 났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무작정 달려오는 그녀를 안으면서도 경훈은 두려웠다.
내 작은 새가 또다시 상처를 받았을까 봐. 내 여린 사랑이 또다시 벽을 쌓고 숨어 버릴까 봐.
경훈은 그녀를 꼭 안았다.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듯 힘주어 안았다.
그녀가 운다. 서글프고 안쓰럽게 흐느꼈다. 경훈은 이를 악물었다. 턱이 으스러질 듯 힘을 주었다.
그녀는 밤새 앓았다.
병원에서 아버지를 보고 돌아온 후 그의 품에서 목 놓아 울던 그녀가 지쳐 잠이 든 때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물수건도 동원하고 해열제도 동원했지만 도무지 열이 떨어지지 않아 경훈은 그녀를 엎고 병원으로 달렸다.
“선배님!”
당직을 서고 있던 성민이 급하게 물었지만 경훈은 대답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열을 떨어트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플로이드(수액)를 달고 바이탈을 체크하면서 해열제를 시간마다 투여했다. 수건으로 몸을 쉬지 않고 문지르며 열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40도를 오르내리던 열이 드디어 내려가기 시작한 것은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였다.
경훈은 체온계에 나타난 온도가 38도를 가리키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선배님! 열 떨어졌습니까?”
ER(응급실) 호출을 받고 내려갔었던 성민이 급하게 병실로 들어왔다. 경훈의 손에 들린 체온계를 본 성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내려갔네요. 아니, 이 자식 무슨 사람 애를 이렇게 태운답니까? 건강하다 못해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던 녀석이 갑자기 웬 감기를 이렇게 심하게 앓아요? 평소 건강하던 사람이 한 번 아프면 독하게 앓는다더니 한지원이 딱 그 짝이네요.”
경훈은 성민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힘없이 누워 있는 지원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힘들어? 인마, 그렇게 힘이 들어? 그렇게 미웠던 아버지를 놓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하는 게, 이렇게 아플 정도로 힘든 일이야?
깨워서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네가 안 아프겠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경훈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선배님, 저기 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세요. 이제 열도 떨어졌으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경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자식이 다시 아플까 봐, 이 여린 녀석이 자신을 찾을까 봐 그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네가?”
강 교수가 지원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교수님. 교수님이 집도해 주세요.”
지원이 말하자 강 교수가 이번에는 경훈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당장이라도 결혼할 것처럼 소문이 나돌고 있는 참이라 둘이 동시에 들어오기에 청첩장이라도 가지고 온 건가 싶었던 강 교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환자가 지원의 아버집니다.”
순간 강 교수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가 눈길을 내려 책상 위에 놓인 환자의 차트를 보았다. 동희병원 마크가 찍힌 복사본에는 현재 간암 말기 환자의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분이 한 선생 아버지라고?”
“네, 교수님.”
지원이 대답했다. 강 교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지원을 쳐다보았다.
“네가 이식해 줄 거고?”
“네.”
“리버(liver, 간) 바이옵씨(biopsy, 조직검사)는?”
강 교수의 이어지는 질문에 경훈이 결과지를 내밀었다. 강 교수는 그 검사 결과지를 받고 훑어보았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어 지원을 쳐다보았다.
“자식이 별명만 빅리번 줄 알았더니 정말로 간이 크네. 네 간, 건강하고 크기도 아주 좋아. 이식하기엔 무리가 없겠다.”
“네.”
지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디서건, 누구한테나 당돌하게 할 말 다 한다고 붙은 별명이 진짜일 줄은 그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빅리버’, 정말로 그녀의 간은 별명만큼 컸다.
“환자는?”
“오늘 동희병원에서 전원 되어 올 예정입니다.”
경훈이 대답하자 강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지원을 보고 물었다.
“넌 2년차 자동 하차야. 다시 돌아오면 2년차부터 다시 시작이야. 알지?”
“네, 교수님.”
“6개월이나 했는데 아깝겠군.”
지원은 미소로 답했다. 이제 6개월만 지나면 3년차가 될 수 있는데 중도 하차라니, 아마 이토록 급하지만 않았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이렇게 결정하고 말았다.
[너, 아파서 울고불고 하는 꼴 못 보겠다. 이식하자. 빌어먹을.]경훈이 결국 먼저 백기를 들었다. 모질게 앓고 잠에서 깬 직후였다. 지원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안아 주었다. 괜찮을 거라고, 수술은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중얼거리는 그를 힘주어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결혼은 미루는 거냐?”
강 교수가 묻자 경훈이 작게 대답했다.
“예.”
“자식, 무지 불만스러운 얼굴이네. 어쩔 수 없지. 자식이 아버지 살리는 일인데. 그럼 환자 도착하는 대로 미라클 팀원들 모아서 상담 일정 잡아.”
“예, 알겠습니다.”
?
달칵.
두 사람은 강 교수의 방을 나오며 문을 닫았다.
“내가 네 주치의다.”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요.”
“아버님 주치의는 성민이야.”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식에 동의한 후로 경훈은 눈에 띄게 굳은 표정으로 다녔다.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지원은 속이 상했다.
“난 바로 회진이야. 나중에 보자.”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며 그가 돌아섰다.
“선배.”
지원은 무뚝뚝하게 돌아서는 그를 불렀다. 경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할 말 있어?”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고 물어야 할 사람, 나예요. 왜 그렇게 화난 사람처럼 굴어요?”
“화난 거,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보여요.”
“…….”
지원은 손을 들어 그의 경직된 입매를 매만졌다.
“나, 걱정돼서 이러는 거, 다 알아요. 그런데 걱정할 필요 없잖아요. 수술,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될 거예요.”
“누가 뭐래?”
그녀는 그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애인, 나 많이 좋아하는구나? 걱정 말아요, 최경훈 씨. 난 한 달 안에 건강 되찾고 일하고 싶어서 미칠 거니까.”
“적어도 1년은 쉬어야 돼.”
“그러니까. 1년을 어떻게 쉬어? 시간 아까울 거야.”
“까불지 마. 간이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게 바로 재생되지는 않아. 충분히 시간을 줘야 돼.”
“알아요. 그래서 나, 미리 다 써놓으려고.”
경훈은 인상을 썼다.
“뭘?”
“논문. 전공의 동안 제출해야 될 논문, 미리 다 써놓고 병원으로 돌아오면 여유롭게 남은 레지던트 생활 보내려고.”
“하.”
그녀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지원은 드디어 그가 웃자 활짝 웃었다.
“웃었다. 선밴 역시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야. 그렇게 웃어요. 알았죠?”
경훈은 애교 있게 팔짱을 끼는 지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인마, 까불지 말고 1년 내내 쉴 생각이나 해. 네가 1년 동안 할 일은 자고 먹고 싸는 것밖에 없을 테니까.”
“아, 진짜. 꼭 그렇게 원초적으로 말해야 돼요?”
“진심이야.”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나, 진짜 걱정 많이 된다. 큰 수술 앞둔 환자 보호자들이 어떤 심정인지 백 퍼센트 이해될 정도야.”
“난 환자 심정이 백 퍼센트 이해되는데. 선배랑 난 진짜 좋은 의사 될 것 같지 않아요? 환자와 그 보호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의사, 그야말로 퍼펙트한 의사죠.”
“그래. 넌 아주 좋은 의사가 될 거야. 그러니까 조심해. 알았어?”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조심할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걱정하는 경훈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라면 더한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영혜는 남편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 남편에게는 더 나은 의료진이 있는 병원으로 옮기는 거라고 속였었다. 앰뷸런스를 타고 내린 곳이 지원이 근무하는 대일병원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입원실에 도착했지만 그는 여전히 여기서 나갈 거라고 화를 낸다. 영혜는 예상보다 더 크게 화를 내는 남편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꼭, 꼭 이래야겠어? 당신, 정말 이래야겠어? 내가 여기서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라고…….”
“지원이가 원해서 그랬어요. 지원이가 꼭 이렇게 해야 된다고…….”
“또 그 핑계요? 그때도 그랬지? 지원이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내가 한 번 만나 보고 싶어 할 때 당신은 그때도 그런 거짓말로 날 속였어. 그 녀석이 내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영혜는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백 개 천 개라도 말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지원이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남편을 속여 왔다. 오로지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위해서.
“미안해요. 그래요, 내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벌 받을게요. 당신이 하라는 건 다 할게요. 그렇지만 그전에 살아야 되잖아요. 당신 살려 놓고 뭐든 하라는 대로 할게요!”
남편이 그녀에게서 눈길을 홱 외면해 버린다. 보기도 싫다는 듯 굳은 표정이었다.
“난 수술 안 받아.”
“여보.”
“난 절대 수술 안 받아.”
“여보, 제발…….”
“그 녀석이 주는 거라면 그 어느 것도 받을 수 없어.”
남편의 확고한 얼굴을 보며 영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똑똑.
그렇게 영혜가 안절부절못하던 그때,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영혜는 문을 향해 들어오라는 표현으로 ‘네’라고 말했다.
스르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네다섯 명의 의사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한꺼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무심코 보다가 영혜의 눈이 맨 끝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 멈추었다.
“지원아…….”
영혜는 무심코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남편의 눈이 홱 딸에게로 향한다.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는 두 눈이 의사 가운을 입은 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간이식 전문의, 강정만 교숩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의사가 점잖게 질문을 하자 영혜는 그제야 지원에게서 눈을 떼고 대답했다.
“네, 큰 변화는 없는데…….”
“예, 그렇겠죠. 그런데 동희병원 임 교수 말로는 상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술을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정은 저희가 최대한 빨리…….”
“수술 안 합니다!”
강 교수의 말을 단호하게 끊은 정섭은 굳은 얼굴로 영혜를 보았다.
“당장 퇴원 수속해. 다시 동희병원으로 가든지, 아니면 다 포기하고 집으로 가든지 할 거니까.”
“여보.”
“제발 말 좀 들어!”
정섭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강 교수가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지원을 돌아보았다. 지원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 강 교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교수님, 다음 회진 때 다시 오셨으면 합니다. 환자가 아직 수술 결정을 못 내린 상태니 제가 잘 설명해서 저녁때까지는 동의서에 서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강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정섭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 똑똑한 따님을 두셨습니다.”
그러자 잔뜩 찌푸려져 있던 정섭의 얼굴이 스르륵 풀어지더니 지원을 바라본다. 강 교수는 그런 정섭의 마음을 조금은 눈치 챘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여리고 참하게 생겨서 외과 전공의 생활을 견뎌내기나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웬걸요. 웬만한 남자들은 저리 가랄 정도로 잘합니다. 누구한테도 기죽지 않고 실력도 뛰어나서 저희 외과 전공의들 중에서는 1, 2등 할 정도로 야무진 의삽니다.”
정섭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강 교수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강 교수도 놀라서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
“하하, 이러시라고 드린 말씀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모자란 여식 맡겨 놓고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마음에 안 들고 탐탁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감싸 주시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예,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도리어 감사해야죠. 이렇게 훌륭한 따님을 저희 의학계에 보내 주셔서.”
“제가, 제가 한 것이 없어서…….”
정섭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여윈 등과 축 처진 어깨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그 모습을 본 강 교수는 뒤에 서 있는 스텝과 전공의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모두들 슬며시 병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강 교수는 지원을 잠시 바라보더니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갔다.
지원은 침대에 앉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버지와 그 옆에서 눈물을 참으려고 외면하고 서 있는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세 사람은 서로를 의식한 채 침묵했다.
“간은 인간의 인체에서 재생력이 가장 좋은 장깁니다.”
침착하게 말을 시작한 지원은 새어머니가 자신을 돌아보고 아버지의 어깨가 경직되는 것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간은 4분의 3까지 떼어낼 수 있는데 이런 경우 약 4개월의 시간만 지나면 완벽히 재생됩니다.”
“난 널 그런 위험에 빠트릴 수 없다. 절대 그럴 수 없어!”
아버지의 얼굴은 단호했다.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은 이미 누렇게 떠 있었고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생체 간이식 수술에서 저희 의료진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뭔 줄 아세요?”
지원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건 기증자의 안전입니다. 수혜자의 안전보다 간을 내어 주는 기증자의 안전이 확실시 되지 않는다면 우리 의료진은 수술하지 않아요. 지금껏 저희 병원의 간이식 팀에서 기증자를 잃은 적은 없습니다.”
“지원아, 이놈아. 내가 어떻게, 어떻게 너한테 그런 부탁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버지가 다시 고개를 떨군다. 지원은 눈가에 열기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울컥 차오르는 서러움을 억지로 삼키고 새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응? 아, 그래.”
새어머니는 당황하는 듯하더니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이제 아버지와 딸, 두 사람만이 남았다. 지원은 아버지를 묵묵히 응시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왜, 왜 한 번도 절 찾지 않으셨어요?”
궁금하지도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아무리 새어머니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그동안 한 번도 찾아볼 생각을 못했냐고 따지고 싶었다. 마음만 있었다면, 당신의 또 다른 딸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한번쯤은 찾아볼 수 있었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지원을 쳐다보지는 못했다.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다는 듯 눈길을 외면한 채 중얼거리듯 조용히 대답했다.
“아마…… 겁이 났었나 보다. 널 봐도 뭘 어떻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르는 내 상황에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야. 지수 엄마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리고 의심 한 번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게다. 내 과거, 지수 엄마를 만나기 전 실패한 내 인생을 돌이켜 보는 것도 싫고 복잡해진 내 인생이 다시 너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도 싫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내가 편한대로 지수 엄마의 말을 믿어 버렸다. 그게 편했으니까. 하지만 지원아…….”
아버지가 붉어진 눈으로 지원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지원아, 만약 네가 그렇게 혼자 사는 줄 알았다면 난 내 평화로운 행복을 버리고서라도 널 데려왔을 거야. 네가 그런 식으로 외롭게 살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거야. 넌 내게 아픈 상처야. 그래도 내 인생의 일부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웠어도 널 부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거니, 못난 애비 잊고 새롭게 꾸린 가정에서 사랑받고 살겠거니…… 그렇게 위안하며 살았다. 미안…… 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는 짙은 후회와 자신에 대한 환멸이 어려 있었다. 지원은 그 진심 어린 눈빛을 보는 순간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응혈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억울하고 분하고 증오하고 미워했던 그 격렬했던 감정들이, 똘똘 뭉치고 단단해졌던 그 응혈이 따스한 봄날 햇살에 녹는 눈처럼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수술…… 받으세요.”
아버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지원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받으셔야 해요. 또 절 버리실 거예요? 또 절 외면하고 모른 척하면서 혼자 가실 거예요? 살아서 보상해 주세요. 그동안 서럽고 서럽게 보낸 제 세월 보상해 주세요. 살아서 저한테 못해 주신 거, 다 해주세요. 저, 다 받을 거예요. 이대로는 못 보내 드려요. 아직 전 시작도 안 했어요. 원망도 시원하게 못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그냥 가시면 전 억울해서 못 살아요. 그러니까 수술 받으시고 제 원망도 받으시고 저한테 빚진 거, 갚으세요. 또…….”
절 혼자 두지 마세요.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마지막 말을 지원은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남자도 채워 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은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해도 아픈 과거는 늘 그녀를 따라다닐 것이고 살다 보면 문득 찾아오는 외로움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안 해줘도 좋다. 늘 보고 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이 세상 어디쯤에 내가 힘들 때 언제든 달려와 줄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원은 든든할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를 향해 지원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잘 사는 모습, 살아서 봐주세요. 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저, 아프게 했던 사람들한테 얼마나 잘 사는지 보여 주고 싶어요. 한지원이 얼마나 독하게 견뎌냈고 결국에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게 됐다고 자랑스럽게 보여 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사세요. 사셔서 제가 사는 거, 똑똑히 보세요!”
지원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손을 들어 얼굴을 훔쳤다. 울음을 참느라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원아…….”
부드럽게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를 외면하며 그녀는 돌아섰다.
“수술 일정, 잡겠습니다. 더 이상 안 한다는 말씀 하지 마세요. 이것까지 못하겠다고는 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를 원망할 수 있는 시간은 주셔야 하잖아요.”
그리고 지원은 걸어갔다. 자신의 등 뒤에 뜨겁게 꽂히는 아버지의 눈길을 의식하며 그대로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지원아…….”
병실 밖에 있던 새어머니가 그녀를 부른다. 이미 지독한 후회와 반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새어머니의 얼굴도 야위어 있었다.
“내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내가 너한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뭘로 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왜요?”
지원의 무심한 대꾸에 새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그런 새어머니를 보며 지원은 말을 이었다.
“새어머니께서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새어머니는 저한테 하실 만큼 하셨잖아요.”
“하지만, 하지만 내가 네 아버지를 속여서…….”
“그럴 이유 충분하셨잖아요.”
“지원아…….”
“어쩌면, 새어머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신 건지도 몰라요. 어쩜 저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랬을지도 모르고요. 사람은 원래 자기 행복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거잖아요. 남편의 전처에게서 난 아이. 그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균열될 가정의 평화. 새어머닌 새어머니의 방식대로 가정을 지킨 거예요.”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너한테 정말 몹쓸 짓을 해서…….”
“됐어요. 전 이제 잊고 싶어요. 아버지, 수술 성공하시면 전 결혼할 거고 앞만 보고 갈 거예요.”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서 내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
지원은 이번 일을 일종의 상처 나고 쓰린 과거를 청산하는 걸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시간은 더 밝고 따뜻하게 맞이하고 싶었다.
“어떠세요?”
학교에서 돌아온 지수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아버지가 계신 병실이었다. 정섭은 딸의 밝은 미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수술은……?”
“하기로 하셨다.”
정섭 대신 영혜가 대답했다. 지수는 엄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기도 하지만 마음 놓고 기뻐할 처지도 아니다. 아버지가 이식 수술을 받는 것은 반가웠지만 아무것도 못 받고 외롭게 자란 지원에게는 정말로 파렴치한 짓이라는 생각을 지수는 안 할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아무 말도 못했다.
“지환인? 지환인 별 말썽 안 부린대?”
엄마의 물음에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걱정이 돼서 하굣길에 외할머니 댁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가끔 엄마 언제 오시냐고 묻기는 하는데 별다른 말썽은 안 부린대요. 작은 이모네가 와서 지환일 돌봐 주나 봐요.”
“그래.”
똑똑.
영혜는 그나마 지환이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는 소리에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가 울린다 싶더니 문이 열렸다
.
“안녕하십니까?”
밝고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잘생긴 청년이 의사 가운을 입은 채 안으로 들어온다. 영혜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 지원이 아파트에서……?”
영혜가 아는 체를 하자 경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예, 일전에 뵌 적이 있는 최경훈입니다.”
“아는 사람이요?”
정섭이 영혜와 경훈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지수도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영혜는 경훈에게 먼저 물었다.
“소개해도 되겠어요?”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더니 경훈이 정섭이 앉아 있는 침대로 쓰윽 다가가더니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경훈이라고 합니다. 여기 대일병원 간이식 팀의 전공의 4년찹니다. 그리고 지원이와 결혼할 사람입니다.”
지원이와 결혼할, 이라는 대목에서 정섭과 지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결혼이요? 지원이 언니랑 결혼할 사람이라고요?”
지수가 놀라서 되물었다. 경훈이 지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래. 우리 만난 적 있지?”
지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전에 언니 만나러 병원에 왔을 때요.”
“그래, 그랬지. 그땐 누군지 몰라서 인사도 못했다. 반가워, 처제.”
넉살좋게 악수를 청하는 경훈의 손을 지수는 활짝 웃으며 맞잡았다.
“정말 몰랐어요. 결혼한다는 말, 안 해서요.”
경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 정섭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필 몸이 안 좋으실 때 이렇게 인사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 얼굴 도장 찍고 싶어서 수술 끝나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원이 모르게 살짝 왔습니다.”
정섭의 눈이 경훈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엄하게 훑었다. 해준 것 없는 애비도 애비라고 딸자식 데려가겠다는 놈을 심사부터 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감 놔라 배 놔라 참견은 못해도 어떤 놈인지는 알아야지. 불쌍하게 자란 내 새끼, 더 이상 불행해지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 여기 의사라고요?”
“예, 지원이 선뱁니다. 말씀 놓으십시오.”
정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이와는 언제부터……?”
“사귄 건 6개월 정도 됐는데 그전부터 선후배 사이로 지내왔으니까 한 8년쯤 됐습니다.”
“그럼 우리 아이, 잘 알겠구먼.”
“예, 많이 압니다.”
정섭의 눈빛이 슬쩍 흔들렸다. 아버지가 돼서 자식이 어떤 아이냐고 남한테 물어야 한다는 게 참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최경훈이라는 청년,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가려운 델 긁어 주듯 정확하게 말해 준다.
“보기엔 딱딱하고 차갑게만 보이는데 알고 보면 정도 많고 웃음도 많습니다. 강한 것 같지만 속은 한없이 여리고, 차가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정이 많습니다. 똑똑하고 세심해서 외과의사로서는 흠잡을 데 없다고 할 만큼 우수하고, 뭐든 똑 부러지게 명확해서 손해도 안 보고 삽니다. 덕분에 제가 좀 힘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틈을 안 줘서 제가 애를 많이 태웠습니다.”
마지막에는 또 넉살을 부리며 엄살을 떨어대자 정섭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제 자식 진가 알아보고 잡으려고 애태웠다는 놈이 이렇게 예뻐 보인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최경훈, 아주 마음에 든다.
“그래, 양친 부모님은 뭘 하시나?”
“두 분 모두 서울에서 사시다가 10년 전에 낙향하셨습니다. 소일거리로 농사일도 하시면서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시는 중입니다.”
“참 행복하시겠구먼. 형제는?”
“누나와 형이 하나씩 있는데 누나는 결혼해서 외국에서 살고 형은 시골에서 부모님과 함께 삽니다.”
“형님 결혼은?”
“했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습니다.”
“그래. 다복한 집안이군.”
정섭은 티 하나 없이 밝아 보이는 경훈이 마음에 들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 듬뿍 받은 청년처럼 보였다. 흡족해하던 정섭은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원이가 나한테 이식을 해주겠다는데 그쪽 어른들은 뭐라고 하시나?”
순간 경훈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정섭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사실은, 지원이가 아직 저희 부모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조만간 뵈려고 날짜를 잡았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그래, 그랬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원이 수술 끝나면 바로 날 잡을 각입니다.”
“그래도…… 되겠나?”
정섭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며느리 될 아이가 몸에 큰 상처 하나 낸다는데, 아들과 결혼하는 것을 내켜 할 부모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안 그래도 무거운 가슴, 또다시 무거워진다.
경훈은 웃었다.
“예, 괜찮습니다. 아들이 이 여자 아니면 못 살겠다는데 그래도 반대할 분들은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아버님은 건강하게 일어나실 생각만 하십시오. 저희 결혼식 때 아버님이 지원이 손잡고 들어가셔야죠.”
정섭은 그 말에 허허, 허전하게 웃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욕심까지 내겠나? 그저 우리 지원이가 잘 사는 걸 보는 것만도 나는…….”
몸이 약해져서 그런가? 정섭은 자신이 평소보다 훨씬 감정적이라는 걸 느꼈다.
“아닙니다. 지원이도 아버님이 그렇게 해주시면 좋아할 겁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보기보다 여려서 정이 많이 그리운 아입니다.”
정섭은 자상하게 말해 주는 경훈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지원이가 부모 복은 없어도 배우자 복은 있나 보군. 우리 지원이, 잘 좀 부탁하네. 내가 이렇게 부탁함세.”
“걱정 마십시오, 아버님.”
“그리고 또 하나. 혹시, 혹시 만약에 말이네.”
“예, 말씀하십시오.”
“만에 하나, 우리 지원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나보다는 지원일 살려 주게.”
경훈의 얼굴을 비롯한 영혜와 지수의 얼굴도 얼었다. 하지만 정섭은 진심으로 말했다.
“담당 의사에게도 내 일러두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줘야 해. 지원이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는 하지만 난 겁이 나. 내가 지금껏 한 짓도 모자라서 자식 배 가르고 간까지 떼어내 가는 사람이야. 인두겁을 쓴 짐승도 이렇게는 못하지. 지원이 앞날까지 망치면 내가 어찌 살겠나? 약속해 주게. 꼭, 반드시 우리 지원이 위험하게 하지 않겠다고.”
손을 덥석 잡으며 애원하는 정섭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경훈은 자신의 손을 그러쥔 나이 든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약속드리겠습니다.”
경훈은 정섭이 그제야 안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지친 듯 자리에 눕는 것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말고 심신을 안정시키십시오. 그래야, 수술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원이가 힘든 결심 했는데 그 결심이 퇴색되지 않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쾌차하셔야 지원이도 행복해집니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눕는 정섭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어때?
”
“다 정상입니다.”
성민의 말에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는 성민의 대답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듯 안정되게 선을 그리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모니터가 가리키는 바이탈과 혈압 등이 모두 안정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눈길이 침대에 누워 있는 지원을 향했다.
경훈은 침대 옆에 서서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 해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원에게 다가갔다.
“기분 어때?”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경훈이 묻자 지원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인이 슬쩍 자리를 비켜 준다.
“좋아요.”
그러자 경훈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눈길을 돌려 옆방에 위치한 수술실을 건너다보았다.
“강 교수님은 아직 안 오셨어. 이 교수님은 지금 내려오고 계시고.”
“곧 마취과에서도 오겠네요.”
“그래.”
지원의 간을 적출하는 담당은 이민수 교수로 정해졌다. 그리고 그 간을 그녀의 아버지에게 이식시킬 담당 교수는 당연히 강정만 교수가 하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수술실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같은 동료이고 후배이며 제자인 전공의의 배를 가르고 간을 적출하는 것이다. 지금껏 실패한 경우는 2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중 어느 경우도 도너(기증자)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 지원에 관한 부담은 그리 크게 가지지 않아도 되지만 수술에 참가하는 교수들이나 전공의들, 너나 할 것 없이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그런 경우가 없었다고 해도 이번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이 말은 강 교수가 어젯밤 이번 수술에 대한 마지막 점검을 할 때 한 것이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모두에게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안길 것을 알기에 강 교수는 강력하게 말했다. 특히 이번 수술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그 단호한 확신은 누구보다도 경훈이 강했다. 지원은 무사할 것이다. 건강하게 일어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 믿음만큼은 절대적이었다.
비록 경훈은 적출된 간을 이식하는 옆방 수술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지원의 간을 적출할 이민수 교수 또한 이쪽 계통에서는 뛰어난 의사다. 그러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넌 빠져.]강 교수는 경훈에게 이번 수술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경훈은 그럴 수 없었다. 지원의 옆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참여시켜 달라는 그에게 강 교수가 지고 경훈은 결국 지원의 아버지 이식 수술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경훈은 바로 옆에 있어 주지는 못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하게 이 수술에 참여할 것임을 보여 주기라도 할 것처럼 지원의 손을 꼭 쥐었다.
“회복되는 대로 우리 어머니, 뵙자. 결혼 날짜도 잡고.”
지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한 6개월은 돼야겠지?”
“재생되는데 4개월이면 충분해요.”
“알아. 그래도 안전한 게 제일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늦다. 그냥 혼인 신고부터 하자니까.”
은근히 투덜거리는 경훈을 보며 지원은 피식, 웃었다. 수술 날짜가 잡히자마자 혼인 신고부터 하자고 고집을 부리는 그를 겨우 달랬던 걸 생각하니 지금도 우스웠다.
“전에도 말했지만 만약 우리가 혼인 신고부터 했으면 내가 선배 어머니를 어떻게 보겠어요?”
“뭘 그런 걸 신경 써? 그냥 모른 척해도 된다니까. 어차피 할 건데.”
“왜 여자로서의 내 꿈을 선배가 망치려고 해요? 여잔 면사포 쓰고 제대로 결혼식 할 권리가 있다고요.”
“누가 안 한대? 그냥 순서를 좀 바꾸자는 거지.”
“난 순서 안 바꿔. 정석대로 할 거야.”
“하여튼 고집은. 네 고집을 누가 꺾어? 6개월을 기다리려니 눈앞이 깜깜하다.”
“4개월. 4개월이라니까.”
지원이 달래듯 정정해 주며 웃었다. 그때 해인이 다가왔다.
“두 분, 다정하신데 죄송합니다. 마취과 선생님 도착하셨거든요. 저쪽 방에는 강 교수님과 이 교수님께서 내려와 계시고요. 강 교수님께서 최 선생님 찾으세요.”
“알았어.”
경훈이 해인에게 대꾸하고 다시 지원을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보자.”
그녀를 보는 눈빛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면 안 된다는 기도와 무사함을 바라는 간절함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지원은 그 눈빛을 가슴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마취 들어갑니다.”
다가온 마취과 의사가 말하자 경훈은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지원은 얼마 후 의식이 저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서서히 느끼며 오늘 하루 마지막으로 최경훈을 눈에 담았다.
?바람이 분다.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
아득하고 어두운 깊은 의식을 서서히 깨우는 바람 냄새가 느껴졌다. 꿈인 듯 아련하고 신기루처럼 형태가 없는 바람이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로 스며들었다.
천천히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긴 터널을 관통하는 그 바람을 따라 지원은 자신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용한 병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소음이 들리고 희미한 바람 냄새와 함께 세상이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무거운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조금씩 커지는 세상이 망막을 통해 깨어난 뇌로 전달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지원은 아직은 뚜렷하지 않은 눈으로 가장 가까운 곳의 사물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의식은 자신을 깨운 바람 냄새의 근원을 찾고 싶어 했다.
바람이 느껴지는 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병실 문을 조금 열어 두고 그곳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바람 냄새를 맡으며 최경훈이 서 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람은 그의 체취를 싣고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선배.’
지원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너무 힘없이 불러서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선배, 나 좀 봐요. 나, 깨어났어요.’
여전히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배 쪽에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겨우, 조금 힘을 준 것뿐인데 그 아픔은 숨을 멈출 만큼 컸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고통이 잦아들 즈음 지원은 다시 눈길을 돌려 창가에 선 경훈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한참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은 의사가 될 거라는 것.
몇 개월 전, 지원과 같은 또래의 강은아 씨가 떠올랐다. 사법시험 2차까지 합격했지만 위암 환자. 그 환자는 지원이 열어 준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아주 고마워했었다. 그 작은 배려에 감격했었다. 답답한 병실 생활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며 창밖의 세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었다.
지원은 이제야, 환자가 그 작은 바람에 왜 그렇게 감사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수술을 끝내고 의식에서 깨어난 지금,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저 작은 바람 한줄기에도 환자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명의 소중함과 삶, 그 자체가 기적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환자의 마음에서 이 옅은 바람 냄새의 의미를 알아 버렸다. 그래서 나는 좋은 의사가 될 것이다.
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힘껏 목소리를 짜냈다.
“선…… 배…….”
그가 고개를 홱 돌린다. 그리고 눈빛이 반짝인다.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어렸다. 지원은 그런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오는 것을 보는 이 기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라는 걸 지금 이 순간 깨닫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