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Purity RAW novel - Chapter 21
20. 용서와 화해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라고?”
“네, 큰어머니.”
경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하고 말았다. 무작정 쳐들어와서 경훈이가 사귀는 아가씨가 누구냐고 물어대는데 도저히 대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지켜야 할 비밀 같지도 않았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선애의 말을 빌자면 벌써 두 사람끼리는 결혼도 약속한 사이라지 않는가. 병원에도 소문이 쫘악 날만큼 확고한 사이라는데. 게다가 경훈이 큰어머니께도 인사를 시키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까지 갔다는데 여기까지 찾아온 큰어머니께 대답 못할 이유도 없다.
“외과의사야?”
“네. 후배라고 하더라고요. 전공의 2년차래요.”
“한참 힘들 때네.”
그러면서도 며느릿감이 의사라는 것이 싫지 않다는 듯 큰어머니는 미소를 머금는다. 경진은 슬쩍 농담을 던졌다.
“좋으시죠? 아들에 며느리까지 의사라니까.”
“좋기 뭐가 좋아? 외과의사가 보통 힘든 일이냐? 경훈이 외과 선택한 후로 내가 아들놈을 1년에 한 번 보기도 힘이 든다.”
“에이, 그래도 아주 이상한 여자한테 안 홀린 게 어디예요? 전에 만나던 여잔 제가 봐도 아니던데.”
“행여나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지금 만나는 아가씨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것 없으니까.”
“벌써 잘 알고 있을 걸요? 다 같은 학교 출신에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었잖아요.”
하긴, 미란은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솔직히, 경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경훈이 전에 만나던 문희라는 아이는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어른들께 인사 오면서 하고 온 옷차림부터가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일로 지금까지도 쑥덕대는 걸 보면 아직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게다가 결혼 조건이라고 내세운 것이 병원까지는 아니라도 아파트 중대형 평수 하나는 마련해 줘야 한다니…… 아닌 말로, 모자란 아들한테 돈까지 짊어지워서 보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기분까지 들었었다.
미란은 다시 경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양친 어른들은 다 계시고?”
“모르죠. 전 얼굴밖에 못 봤어요.”
“인상이 어떤데?”
“좋아요. 미인이에요. 귀염성도 있어 뵈고. 에이, 경훈이 모르세요? 걔가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누가 잘생기고, 못생기고 물었어? 얼굴에 그림자는 안 졌는지, 바르게 자란 아가씨 같던지, 그런 걸 묻는 거지.”
“얼굴만 보고요? 전 모르죠. 그래도 그냥 보기엔 예쁘고 맑다는 느낌은 받았어요. 뭐 따지고 재고 할 것 같지는 않던데요? 이거저거 다 빼고 경훈이가 완전히 푹 빠졌던데요, 뭘.”
“그 아가씨한테?”
“예. 완전히 빠져서 허우적거리더라고요. 여기 와서 노래 잘 안 부르는 녀석인데 그 아가씨 앞에서는 기타까지 잡고 노래도 부르더라고요. 거기다가 생전 안 추던 춤까지 춘다고 아가씨를 반강제로 데리고 나가서는 진짜 춤을 추더라니까요. 제가 보기엔 빠져도 단단히 빠졌어요. 큰어머니가 반대하신다고 해도 못 말릴 것 같던데요?”
“말리긴 뭐 하러 말려? 다 큰 놈이 제 짝은 제가 어련히 잘 알아서 찾았겠지.”
경진은 슬그머니 웃었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지만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다 보였다.
“어, 가시게요?”
갑자기 미란이 일어서자 경진은 놀라서 물었다.
“그래, 가봐야지.”
“어디로요? 경훈이 아파트, 아세요?”
“그래. 얼마 전에 주소 가르쳐 주더라.”
“그럼, 아파트로 가세요?”
“그래.”
경진은 잘 생각했다는 듯 웃었다.
“네, 그러시는 게 좋겠어요. 병원에 들러서 먼저 만날 수도 있지만 조금만 참으셨다가 경훈이가 정식으로 인사시킬 때 보는 게 훨씬 좋죠, 뭐.”
“간다. 밥 제때 챙겨 먹고. 네 어머니, 너 때문에 매일매일 노심초사시다.”
“네, 네. 걱정 말라고 전해 주세요.”
“시집은 안 가냐?”
“가야죠. 임자 찾으면.”
미란은 헤벌쭉, 속없이 웃는 경진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렇게 예쁜 아이가 왜 아직도 임자가 없을까? 세상 남자 놈들 죄다 눈이 삔 거지.
“수고해라.”
“예, 큰어머니. 조심해서 가세요. 꼭 택시 타고 가세요.”
처음엔 아파트로 바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도중에 내려서 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미란은 대일병원 앞에서 내렸다.
부우웅.
버스가 가버리고 미란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결심을 하고 곧장 병원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일반외과 한지원 선생님이요?”
병원 로비에 있는 인포메이션 앞에 선 미란은 친절한 안내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분 오늘 출근하셨나요?”
그러자 안내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 선생님은 당분간 병원 근무 안 하세요.”
“네? 근무를 안 해요? 그럼……?”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요. 그런데 혹시 한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신지……?”
“아, 이런. 미안해요. 내가 궁금한 마음만 앞서서 묻기만 했네요. 사실은 한지원 씨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요.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해서요.”
안내원의 눈길이 미란을 찬찬히, 조심스럽게 훑는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보기에도 온화하고 품격이 있어 보이는 미란의 태도에 의심을 푸는 것처럼 보였다.
“아, 그러셨군요. 아마 수술 일정이 갑자기 잡혀서 주변 사람들께 연락을 못 드렸을 거예요.”
“수술이요? 누구 수술이요?”
갑자기 불안한 마음에 미란이 얼른 물었다. 그러자 안내원이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선생님 수술이요. 어제 수술 끝나시고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이세요.”
미란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지면 질수록 무표정했던 얼굴은 서서히 경직되고 있었다.
[간암 말기로 위험했던 부친께 간을 기하셨어요. 자세한 설명은 못 드리지만 어쨌든 지금은 회복 중이세요. 8층에 가셔서 입원실 물어보시면 알려 주실 겁니다.]미란은 안내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입원실이 아닌 휴게실로 향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미란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휴대폰을 꺼내 수간호사로 근무하는 선애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선애의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미란은 무뚝뚝하게 말했.
“너, 나 좀 보자. 나, 지금 병원 8층 휴게실에 와 있다. 바쁘지 않으면 이리로 좀 와줘. 경훈이한텐 말하지 말고.”
전화를 끊은 미란은 굳은 시선을 창밖의 푸른 창공으로 돌렸다. 그녀의 심란한 마음과 달리 하늘은 무척이나 맑고 푸르렀다.
“아줌마, 여긴 어쩐 일이세요? 경훈인 만나셨어요?”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애가 반가운 미소를 가득 띤 채 나타났다. 미란은 맞은편에 앉는 선애를 보며 물었다.
“오랜만이구나.”
“네, 사는 게 바빠서 부모님 뵈러 갈 시간도 없어요.”
“애들은 잘 크지?”
“그럼요. 너무 잘 커요. 애들 아빠가 키가 커서 그런가? 먹는 족족 키로 가는 것 같아요.”
“아픈 덴 없고?”
“네. 저흰 다 잘 지내요. 아줌마는요? 아저씨도 잘 계시죠? 엊그제 엄마랑 통화했는데 경훈이 장가보내게 생겼다고 다들 좋아하신다면서요?”
미란은 슬그머니 인상을 썼다.
“그 문제 때문에 너 먼저 보자고 했다.”
“네?”
선애는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자 미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아가씨, 넌 잘 알지?”
“그 아가씨요?”
“그래, 경훈이하고 지금 만나고 있는 아가씨.”
“아, 한 선생이요? 한지원이라고 예쁘고 참한 아가씨죠. 만나 보시면 진짜 마음에 드실 거예요.”
“듣자 하니까 그 아가씨가 지금 입원해 있다고?”
문득 선애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만 해도 경훈이 부모님께 말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당분간은 알리지 않을 거예요. 지원이도 부담스러워하고. 지원이, 회복되고 좀 좋아지면 그때 다시 찾아뵐 거니까 누나도 당분간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선애도 적극 찬성했었다. 아무리 너그럽고 호탕한 성격의 부모라도 제 자식 일에는 엄격해지는 법이니까. 세상의 어떤 부모가 큰 수술, 그것도 몸의 중요한 장기를 반 이상 뚝 떼어낸 며느리를 흔쾌히 좋아하겠는가. 실상은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의료계에 몸담고 있지 않는 한 알기 힘들 것이다.
“혹시 경훈이가 말했어요?”
선애는 그새 경훈이 마음을 바꿔서 지원의 일을 말한 건가 싶었다.
“아니. 그냥 우연히 알게 됐다. 그게 사실이야? 생살 가르고 멀쩡한 간을 잘라냈다는 게.”
너무 무뚝뚝하게 말하는 미란을 보며 선애는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네, 그렇긴 한데요. 그게 그렇게 아줌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위험한 것도 아니에요. 물론 수술은 대수술이었죠. 하지만 세계 최고의 의료진들이 붙어서 한 덕분에 수술도 잘됐고 환자들 예후도 좋아요. 간이라는 게 우리 몸속의 장기 중에서 가장 재생력이 뛰어난 거거든요. 아마 몇 개월 후면 본래의 크기로 돌아와서 예전처럼 똑같이 건강을 회복할 거예요.”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아니에요, 아줌마. 만약 그게 그렇게 불확실한 거였다면 한 선생 아버지가 자식 간을 이식 받았겠어요? 그 아버지라는 분도 처음에는 절대로 수술 안 하겠다고 버티다가 남은 가족들 때문에 결국 수술을 결정한 걸요. 만약 한 선생 건강이 위험하다고 생각됐다면 그분이 절대 수술 동의 안 하셨을 거예요. 진짜 그건 걱정 마세요.”
선애는 평소 미란이 사람을 평가할 때 제일 중요시 여기는 것이 건강이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는 것도 안다. 지원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면 미란은 결코 두 사람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입에 발린 소리 하지 마라. 사람이 멀쩡한 간을 잘라냈는데 어떻게 예전과 똑같아져? 괜히 경훈이 편들려고 하는 소리라는거, 다 안다.”
“아니라니까요. 정 절 못 믿겠으면 경훈이한테 설명 들으세요. 경훈이도 못 믿으시겠으면 저희 교수님을 만나게 해드릴 수도 있어요. 이번 수술 집도하신 교수님인데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권위자세요. 그러니까…….”
“됐다.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일하러 가라.”
전혀 이해한 것이 아닌 얼굴로 미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선애도 다급히 일어섰다.
“경훈이, 안 만나세요? 지금 불러 드려요?”
“됐다. 있다가 근무 끝나면 아파트에서 보지.”
“경훈이 사는 아파트, 아세요?”
“그래. 며칠 전에 통화하다가 주소 불러 줬다.”
“네…… 그럼 꼭 경훈이한테 설명 들으세요.”
하지만 미란은 선애의 당부를 무시하고 돌아섰다.
“난 그만 가볼 테니 일해라. 나올 것 없다.”
“네? 네에…….”
선애는 서둘러 걸어가는 미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경훈의 번호가 저장된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신호가 가지만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녀는 잰걸음으로 병동 스테이션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최 선생님이요?”
“그래, 못 봤어?”
“아까 수술 들어가셨잖아요.”
“수술? 아, 그랬지.”
맞다. 오늘 경훈이 들어갈 수술이 세 건이 있었다. 선애는 미란을 만난 후유증으로 경훈의 수술 일정을 잊어버린 것이다.
제길. 욕설이 절로 씹힌다. 아줌마가 그렇게 갔는데 해결해야 할 당사자는 움직일 상황이 아니다.
선애의 눈길이 입원실이 있는 복도로 향했다. 저기 어디쯤, 지원이 누워 있는 병실을 더듬는 그녀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경훈은 조용히 병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곧게 누워 있는 지원이 보였다. 꽤 깊은 밤이라 벌써 잠이 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더 애틋해진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 옆에 달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바이탈도 정상이고 혈압도 정상이다.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말해 주는 일정한 기계음이 이토록 사람을 편안하게 할 수도 있다니.
경훈은 잠든 지원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평화롭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는데 문득 울컥 뭔가가 치솟는다. 그 무언가는 심장이 뿌듯할 정도로 저리게 만들었고 감정이 평소보다 훨씬 더 풍부해지도록 만들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지원의 얼굴 윤곽을 더듬었다. 얕은 숨을 내쉬며 잠든 연인의 숨결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며 그녀가 살아있음을 감사했다. 단 한 번도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한 적이 없었다. 의식적으로 그런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수술인 만큼 위험도 컸다. 만약 하늘이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을 심산으로 누군가가 실수를 하게 만들 수도 있었고 또 정말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그녀에게 위험이 닥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의 곁에서 따뜻하게 숨을 쉬고 있다. 고운 얼굴에는 따스한 핑크빛이 흐르고 붉은 입술은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녀의 몸속에 있는 간은 엄청난 크기를 잘라내고 약하게 자라고 있지만 그래도 경훈은 감사했다.
한지원이 이렇게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를 향해 웃어 주고 나를 봐줄 수 있는 지금의 현실에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경훈아.”
문득 문가에서 숨죽인 목소리가 들렸다. 경훈은 고개를 돌렸다. 선애다. 그는 지원이 아직 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문으로 다가갔다. 병실 밖으로 나간 그는 선애에게 웬일이냐는 듯 물었다.
“왜요?”
선애는 경훈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 어머니를 못 만난 것이라 짐작했다.
“너희 어머니 오셨어.”
경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서울에요?”
“그래.”
“그래요? 못 들었는데. 지금 어디 계신대요?”
“네 아파트에 계시겠지.”
“아.”
경훈은 그제야 아까 마지막 수술을 끝내고 나왔을 때 이 간호사가 전해 준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란 분이 메모 남기셨어요. 전화해 달라고 하셨어요.]수술 내내 휴대폰을 꺼놓은 덕분에 어머니가 병원에 메모를 남긴 것이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지원이 괜찮은지 확인하느라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줌마, 아시더라.”
갑자기 선애가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경훈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뭘요?”
“한 선생, 수술.”
순간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누나가 말했어요?”
“그럴 리가 있겠니? 네가 말하지 말라고 미리 당부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이미 알고 오셨더라.”
“여길요?”
“그래. 낮에 병원으로 찾아오셨어. 너, 수술 들어가 있을 때.”
“뭐라고 하세요?”
“한 선생에 대해 묻더라. 난 또 네가 소개시키기 전에 미리 좀 알아보시려고 온 줄 알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말씀드렸는데 대뜸 한 선생 수술에 대해서 물으시는 거야. 다 알고 오셨는데 아니라고 말도 못했어.”
경훈은 슬그머니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애초의 계획은 지원이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다음에 어머니께 인사를 시킬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약한 지원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걱정하시던가요?”
“그래. 당연히 걱정하시지. 너희 어머니, 알잖니. 다른 건 몰라도 건강에 대해서는 엄격한 거. 너희 형 전처가 내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을 때까지 경민이가 얼마나 고생했어? 당신 큰아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는 걸 몇 년에 걸쳐서 봐왔는데 또 둘째아들까지 그런다고 생각해 봐라. 어떤 부모가 그걸 허락해?”
“형의 경우완 다르죠. 지원이 건강은 아무 문제없어요. 몇 달이면 간은 재생될 거고 그 후엔 더 건강해질 거라는 거, 잘 알잖아요.”
“나야 잘 알지. 그런데 너희 어머니같이 의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난 네가 미리 말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너희 어머니 입장에서는 충분히 예민해질 수 있는 상황이니까 미리 설명하고 설득했어야 했어.”
“모르고 지나면 아무 일도 아니니까 그냥 넘기려고 했죠.”
사실, 몇 개월 후면 어머니가 아실 방법은 없다. 지원은 다시 예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어머니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젠 문제가 달라졌다.
“가봐야겠어요.”
경훈은 마음이 급했다.
“집에?”
“예.”
그러더니 경훈은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자 곧바로 말했다.
“성민아. 나, 집에 좀 갔다 와야 되니까 지원이 좀 신경 써라.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어머니.”
“됐다. 이 결혼은 안 돼.”
설명은 들어 보지도 않고 단정부터 짓는 어머니를 보며 경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거짓말할 놈으로 보이세요?”
“네 형도 거짓말할 놈은 아니었다.”
단호하게 대꾸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완고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고집스러워 보였다.
경훈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형의 첫 번째 결혼이 어떤식으로 실패했는지 잘 알기에 어머니의 마음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형수는 결혼 전부터 신부전증에 걸려 있었다. 결혼식 직전에 알게 된 사실을 형은 부모님을 속이고 결혼을 강행했었다. 형수의 신장은 회생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고 이식만이 최선이었지만 당시에는 기증자를 찾을 수 없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제조차 없는 형수에게 맞는 신장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병고 끝에 아내를 잃은 형은 몇 년간 병수발을 들며 피폐해져 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님의 속도 함께 타들어갔다.
하지만 어머니나 아버지, 두 분 모두 마지막까지 형수에게 자상한 시부모님이었다. 임종하던 형수도 끝까지 두 분에 대해 감사하며 운명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그 경험은 당신 식구에 대한 건강의 중요성에 강박감을 가질 정도가 되었다. 만약 매형이 외국 사람이 아니라 순수 한국이었다고 하더라도 건강하지 못했다면 누나의 결혼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것을 잘 알기에 경훈은 어머니의 고집을 탓할 수 없었다.
“절 못 믿겠으면 저희 교수님을 만나 보세요. 아니, 제가 바로 간에 대해 쓴 책을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아니면, 며칠 후에 저희 병원에서 간이식 관련된 세미나가 있어요. 그때 참석하셔서 발표를 들어 보면…….”
“난 오늘 내려갈 거야.”
“어머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어머니에게 경훈은 드디어 폭발했다. 미란은 그런 아들을 노려보았다.
“네 형이 지금의 형수를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힘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나와 네 아버지 또한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 사랑? 그래, 사랑도 좋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네 형은 첫 번째 형수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 같아?”
“그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고요. 지원인 병이 있는 게 아닙니다.”
“간을 잘라냈다며? 생살을 가르고 간을 반 이상 잘라냈다며? 그런데 그게 어떻게 정상이야!”
“간은 재생됩니다. 다른 장기와는 다르단 말입니다. 신장 두 개 중에서 한 개를 잘라내도 정상이고 위를 절제해도 정상으로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어요. 왜 모두 같아야 한다는 기준으로 보세요? 게다가 간은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니까요.”
“나한텐 다 똑같아. 그래, 네 말대로 신장 두 개 중에서 한 개 잘라내도 정상이지. 그런데 난 싫다. 다 싫어. 난 건강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며느리는 절대, 다시는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너도 그런 줄 알아!”
미란은 주방에서 나와서 소파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들어 올렸다.
“반찬, 냉장고에 다 넣어뒀으니 꺼내서 먹어라. 사골 끓여서 한 번에 하나씩 먹을 수 있게 냉동실에 넣어뒀으니 밥 먹을 때마다 데워서 먹고.”
차가운 목소리로 아들에게 당부를 한 미란은 그대로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경훈을 보았다.
“난 절대 허락 못한다. 그러니까 너도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거야.”
미란은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경훈을 뒤에 두고 미란은 그대로 현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야, 너 진짜 너무 건강한 거, 아니냐? 이러다가 일주일 만에 퇴원하겠다.”
성민이 일부러 익살을 떤다. 지원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좋죠.”
“그래, 인마. 너, 모르지? 경훈 선배가 수술 끝나자마자 너한테 달려간 거. 얼마나 네가 걱정이 됐으면 그렇게 빨리 뛰어가냐? 그런데 수술 중일 때는 전혀 그런 티도 안 냈다니까. 사람이 참 독하더라. 나 같으면 너 있는 수술실이 궁금해서 다른 수술은 손에도 안 잡힐 텐데 경훈 선배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꿋꿋하더라. 너한테서 적출한 간 들어왔을 때 잠깐 멈칫한 거 빼고는 완벽했어. 너무 차분하니까 강 교수님이 도리어 경훈 선배를 자꾸 살폈다니까. 수술 성공하고 끝나니까 그제야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고는 강 교수님이 농담을 다 하시더라.”
지원은 강 교수가 무슨 농담을 했는지 궁금해 성민의 입만 쳐다보았다.
“야, 최경훈. 너, 뭐가 그렇게 냉정해? 지원이 궁금해서 이쪽 수술에는 신경도 못 쓸 것 같더니 제법 하더구나, 이러셨다니까. 그랬더니 경훈 선배가 그러더라. 제 할 일도 제대로 못하면 나중에 지원이한테 혼납니다.”
피식, 지원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배가 당기면서 수술 자국에 찌릿한 아픔이 느껴진다.
“경훈 선배가 너 많이 좋아하나 보다, 했다.”
성민의 웃음기 섞인 말에 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너 복 받은 거야. 세상에 경훈 선배 같은 남자, 구하기 쉬운 줄 알아?”
“저 같은 여자 구하는 것도 안 쉬워요.”
지원이 지지 않고 대꾸하자 성민이 ‘웩’ 하는 표정을 짓는다.
“가만 보면 너도 무지 자뻑 기질이 강해.”
성민의 이죽거림에 지원은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았다. 웃을 때마다 수술 자국이 아프니 되도록이면 안 웃고 싶었다.
“아, 그 말 들었어?”
성민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하자 지원은 ‘뭐가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성민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원철 선생, 사표 냈단다.”
“네?”
금시초문이었다. 어제 병실에 왔을 때만 해도 그런 말 없었는데…….
[수술 잘됐더라.] [네.]반갑지 않은 사람의 방문에 시큰둥하게 대했었다.
[건강 회복해서 네가 원하는 그런 의사가 되길 바란다.]그게 작별 인사였었나 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지원은 괜스레 심란해졌다. 당신은 의사도 아니라고 막말을 해댄 사람이었지만 실력만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본받고 싶었고 많이 배우고 싶었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목표를 이루고 싶은 욕심 앞에서 의사로서의 본분을 잊지만 않았다면 정말로 뛰어난 외과의사가 되었을 사람이었다.
“유학 갈 모양이더라.”
성민이 또다시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래요?”
“어.”
지원은 원철이 유학을 가면 좀 더 나은 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재능 있는 의사가 소양까지 갖춘다면 분명 우리나라 의학계에도 아주 좋은 일이 될 테니까.
“운동했어?”
그때 경훈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성민과 지원의 눈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지원의 눈빛이 반짝였다.
“방금 좀 움직였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꾸준히 해. 괜히 아프다고 게으름 피우면 회복도 느리니까.”
다 아는 소리를 잔소리처럼 해대는 경훈을 향해 성민이 이죽거렸다.
“아, 애인이 이러고 누워 있는데 선배님은 집에 가서 쉬고 오시는 겁니까? 진짜 지원이가 말은 안 해도 얼마나 서운 하겠습니까?”
서운의 ‘서’자도 꺼낸 적 없는 지원은 기가 막힌 듯 성민을 쳐다보았다.
“선배님, 내가 언제…….”
“야, 야. 괜찮아. 이럴 땐 서운하다고 말해도 돼. 솔직히 수술한 지 겨우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그새를 못 참고 집에 가버린 애인한테 섭섭한 마음 드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
퍽.
“아!”
기어이 매를 벌었다. 성민은 뒤통수를 때리고 노려보는 경훈을 인상 쓰며 쳐다보았다.
“왜? 떫어?”
경훈이 덤비려면 덤벼, 라는 식으로 쳐다보자 성민이 입을 툭 내밀며 투덜거렸다.
“제가 어떻게 하늘같은 선배님께 대거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이제 곧 제가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두 아이?”
지원과 경훈이 동시에 물었다. 그러자 성민이 손가락으로 브이 표시를 해보이며 씨익 웃었다.
“예써. 1타 2피라는 말, 아시죠? 제가 바로 한 번에 둘을 얻는 그 당사잡니다.”
“쌍둥이야?”
경훈이 놀랍다는 듯 묻자 성민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오늘 오전에 OB(산부인과, ob/gyn, obstetrics/
gynecology)에서 그러더랍니다. 뱃속에 둘이 들어 있다고요. 하, 하, 하.”
“진짜? 너무 축하해요, 선배님.”
지원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경훈은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이죽거렸다.
“자식이, 어디서 또 그런 능력이 있네.”
“그죠? 제가 또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니까요.”
“아, 사람 심란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나가.”
괜한 심술을 부리는 경훈에게 성민이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밤마다 허벅지에 바늘 꽂으실 우리 선배님께 진짜 죄송합니다.”
경훈이 다리를 휙 들어 올리며 성민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시늉을 했다.
“으악.”
맞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며 성민이 문 쪽으로 도망을 치자 경훈이 으름장을 놓는다.
“선배 놀리고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넌 이제부터 병원 생활 좀 고달플 거다, 자식아!”
“아, 진짜! 지원아, 너 봤지? 경훈 선배가 은근히 저렇게 속이 좁다니까. 너, 잘 데리고 살아라.”
그리고는 경훈에게 잡힐까 봐 줄행랑을 쳤다.
“저 자식이 대놓고 염장질이네.”
지원은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는 경훈을 바라보았다.
“선배가 반응하니까 성민 선배가 더 그러는 거예요.”
“누가 몰라? 그런데 배가 아파 죽겠는 걸 어떻게 해?”
“배가 왜 아파? 우리도 곧 결혼하고 애기도 낳을 건데.”
경훈은 지원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렇지? 그래, 우리는 세쌍둥이 낳자.”
“진짜, 가만 보면 은근히 욕심 많아.”
“욕심 아니고 애국이지. 자꾸 인구가 준다잖아. 나라도 애국해야지.”
“그럼 선배 혼자 하든가.”
“야, 인마. 네가 협조를 해야지.”
“하는 거, 봐서.”
아직은 침대에 누워서 웃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웃는 지원을 보며 경훈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조금 전에 어머니가 그렇게 가신 것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밝은 미소가 조금은 일그러진다.
“지원아.”
“응?”
“나, 한 이틀 시골 다녀와야겠다.”
“시골?”
“음, 집에.”
“왜요?”
“너, 집에 말씀드리려고.”
“나, 다 나으면 말씀드리기로 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왜? 그냥 그렇게 해요.”
“싫어. 너, 퇴원하면 봐줄 사람 없잖아.”
지원은 인상을 썼다.
“날 선배 어머니께 봐 달래려고?”
“어.”
“미쳤어.”
“우리 어머니가 너 잘 돌봐 주실 거야.”
“싫어요.”
“시골에서 맑은 공기 쐬면서 지내면…….”
“싫다니까. 건강하고 좋은 모습 보여 드려도 될까 말깐데 아픈 몸으로 신세까지 질 순 없어요. 난 퇴원하면 간병인 쓰면 돼요.”
“너, 진심으로 잘 돌봐 줄 사람 곁에 두고 싶다.”
“선배, 왜 이래? 나, 진짜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요?”
“좋아. 그건 아니래도 어쨌든 지금 우리 어머니께 너에 대해 말하고 싶어. 지금쯤 이상하게 생각하고 계실 테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자 소개시키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취소하니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무지 궁금해하실 거야. 가서 상황 설명이라도 해드려야지.”
“괜찮을까?”
“괜찮아.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지원은 경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수술 끝난 지 만 하루가 겨우 지났을 뿐이다. 수술 경과가 좋다지만 그래도 몸도 못 가누는 날 두고 그가 시골로 이렇게 바쁘게 내려가는 것이 이상했다. 어머니께 나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게 몹시 급한 듯 서두르는 것이 뭔가 이유가 있는 것만 같았다.
“선배.”
“음?”
그가 그녀의 몸과 연결된 바이탈을 체크해 보고 플로이드(수액) 등을 점검하다 눈길을 돌렸다.
지원은 경훈을 진지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 아니.”
보기엔 전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지원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최경훈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꽤 능란하니까.
“정말 아무 문제 없는 거죠?”
“그러니까 무슨 문제? 아버님도 지금 경과가 아주 좋으시고 너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가고 있는데 문제가 뭐가 있어?”
그래, 그녀의 아버지도 지금 무균실에서 아주 잘 견뎌내고 있었다. 아까 몇 시간 전에 강 교수님도 직접 오셔서 두 사람의 빠른 회복에 아주 기뻐하셨다.
[한 선생, 아버님 수술 누가 했냐고 물으면 꼭 내가 했다고 소문내라.]농담까지 하시면서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번 리버 티피엘(간이식)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원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든다.
똑똑.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지원의 신경은 잠시 돌려졌다.
“네, 들어오세요.”
경훈이 대신 대답하자 조용히 문이 열리며 지원의 새어머니가 들어오셨다.
“몸은 괜찮니?”
조심스럽게 묻는 새어머니에게 경훈이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괜찮습니다.”
영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최 선생이 고생이 많네요. 돌볼 환자들도 많을 텐데 우리 지원이까지…….”
우리 지원이…….
지원은 새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하는 그 어감에 문득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에 소속이 된 것 같은 안전한 기분. 누군가에게 ‘우리’라고 포함되어지는 따뜻한 기운이…….
“어머니가 고생이 많으시죠. 저야, 원래 하는 일이 환자들 살피는 일이지만 어머니께선 안 하시던 일 하시려니 더 힘드실 겁니다. 하루 종일 환자 수발드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 그런 것 같아. 하지만 이 정도 고생이야 기쁜 마음으로 감수하지. 지원이 아버지도 순조롭게 회복 중이고 우리 지원이도 아무 문제없이 저렇게 앉아 있게 된 것만으로 난 뭐든 할 수 있어.”
‘우리 지원이’에 이어 ‘지원이 아버지’라는 말. 지원은 새어머니에게서 뭔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를 당신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 같은…….
“안 그래도 어머니께 의논드릴 게 있었습니다.”
“의논?”
영혜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자 경훈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버님이나 지원이 건강 문제가 아니라 제가 한 이틀 시골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없는 동안 어머니께 지원일 좀 신경 써 달라고 하면 너무 힘드실까요?”
“아니, 난 안 힘들다니까. 지원이 아버지는 무균실에 당분간 있어야 하고 면회도 힘든데 그동안 내가 거기서 할 게 없잖아. 걱정 말고 다녀와요. 지원인 내가 돌볼 테니.”
“감사합니다, 어머니. 그렇게 해주시면 제가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는 뭘, 내가 당연히 할 일인데.”
그러면서 새어머니는 조심스럽게 지원을 쳐다본다.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워하는 새어머니를 보면서 지원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서로가 어색하고 어려웠다. 몇 년 동안 쌓인 앙금이 금방 사라질 것도 아니고. 하지만 지원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새롭게 잘해 보고 싶어 하는 새어머니의 마음을.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지원은 확신할 수 없었다. 새어머니를 미워하는 마음이 큰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미움과 원망은 이해 앞에서 퇴색되고 옅어졌다.
우리 지원이, 지원이 아버지…….
어쩌면 새어머니는 그녀를 딸로 받아들여서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럼, 난 갈게요. 그런데 지원아.”
지원은 새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맞추었다.
“지수가 너한테 자주 오고 싶은데 네가 싫어할까 봐 못 오겠단다. 내가 한 짓 때문에 지수도 미안해해. 내 잘못 때문에. 그 애가 많이 고지식하거든. 지원아, 나는 죄인이지만 지수는 아니잖니. 그 애는 얼마 전에야 겨우 널 알았어. 난 너희가 아주 좋은 자매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지수가 널 아주 많이 닮았거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가오는 가족의 그림자 앞에서 지원은 매정하게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싫어요!’라고 말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변했다, 최경훈에 의해서. 그에 의해서 세상을 밝게 보고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따뜻하게 다른 사람을 감쌀 여유까지 생겨 버린 것이다.
“네. 자주는 말고 가끔 오라고 하세요.”
결국 그렇게 대답해 주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슬쩍 걱정이 된다. 고3이면 공부할 시간도 모자랄 텐데 병원에 신경 쓰느라 공부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지.
“지원아.”
새어머니가 또 부른다. 그리고 이어서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네 아버지 문제도 그렇고, 지수도…… 난, 네가 그렇게까지 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지원은 처음에 계획했던 지수와 같이 아버지께 간을 기증할 것을 바꾸기를 고집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지수에게서 1년의 시간을 빼앗는 것보다는 어차피 1년을 쉬게 될 지원, 자신의 시간만 희생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어차피 희생할 거라면 둘이 아니라 하나만 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다른 두 사람의 간을 조금씩 잘라내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간을 잘라내어 이식하는 것이 수혜자 입장에서 적응하는 것도 빠르니까.
그녀가 처음 이 의견을 말했을 때 경훈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반대했다. 하지만 강 교수만은 찬성했다. 검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행하고 반복 체크한 후 강 교수는 그게 수혜자에게 가장 좋고 기증자인 지원에게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결정했다.
결국 경훈은 받아들였지만 새어머니의 가족들과 아버지는 지원이 더 위험해지는 일일까 봐 끝까지 반대했었다. 그중 새어머니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강 교수님에게 찾아가 몇 번이고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면서 그랬단다.
[우리 지원이 잘못되면 저는 남편 볼 면목도 없고 앞으로 죄책감 때문에 못 삽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다시 생각해 주세요. 남편도 아마 못 견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지원이한테 절대 해되지 않는 방향으로 판단해 주세요.]지원은 죄스러워 얼굴도 들지 못하는 새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친어머니께는 이런 감정이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저분한테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누구보다도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저분이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가끔 생각했었다. 그때마다 포근하고 안전해지던 기분이 기억난다.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많이 부러워했었다. 지수와 지환, 이름도 몰랐던 그 아이들이. 그런데 이제 정말로 새어머니에게서 진짜 어머니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정(情)이 느껴졌다.
“네…….”
지원은 그냥 그렇게 대꾸하고 말았다. 새어머니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지수한테 말하마. 네가 와도 된다고 했다고.”
그리고 경훈에게 웃어 보이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간다. 경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기분 어때?”
“무슨 기분?”
지원이 뭉툭하게 묻자 경훈이 씨익 웃었다.
“우리 지원이, 착하네. 잘못해 놓고 미안하다는 사람, 용서해 줄 줄도 알고.”
“누가 용서했대?”
“지금은 아니라도 아마 다 용서하게 될 거야. 나는 못해도.”
지원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 자신보다 더 허물없이 대하던 경훈의 태도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나보다 더 친해 보이던데?”
경훈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네 어머니시니까. 그런데 솔직히 난 네 새어머니도 용서가 안 되고 아버님도 용서가 안 돼. 물론 나한테 그분들을 용서하고 말고 할 자격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가끔 두 분이 밉다. 널 그동안 그렇게 외롭게 해서.”
지원은 그와 마주 보며 웃었다.
“그래도 어머니, 아버님, 잘만 부르더라.”
“당연하지. 그래도 장모님, 장인어른 될 건데. 앞으로 우리 지원이, 잘 봐달라는 의미기도 하고.”
“선배가 봐줄 건데 뭐 하러?”
“인마, 남편하고 부모는 또 달라. 너, 나하고 살다가 싸우면 네 편 들어줄 사람 필요하잖아.”
“나랑 싸우려고?”
“그럼, 당연하지. 싸우면서 정도 더 깊이 드는 거야. 난 너랑 많이 싸울 거다. 그리고 화해하고 찐하게 사랑도 하고.”
그러면서 허리를 숙이더니 지원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속삭인다.
“죽겠다, 한지원. 너, 빨리 회복해라. 성민이 자식 말처럼 나, 요즘 매일 밤 바늘로 허벅지 찌른다. 이러다 몸에 사리 생길 것 같아.”
그러면서 또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이번에는 좀 길게 그렇게 있었다. 아쉽다는 듯 입술을 떼며 그가 속삭였다.
“진짜 죽겠네.”
미련을 떨치려는 듯 그가 몸을 홱 일으키더니 말했다.
“나 없다고 운동 게을리 하지 마라. GS 전공의들한테 전부 너, 감시하라고 할 거니까 절대 게으름 못 부릴 거다.”
“진짜. 내가 알아서 할 거라니까. 귀찮아요.”
“귀찮긴 뭘. 자식들한테 당번 정해서 너 살피라고 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선배!”
장난치듯 말하는 경훈을 앙칼지게 불렀다. 하지만 이내 수술 자국의 통증 때문에 숨을 들이켜자 그가 한달음에 다가와 살핀다. 지원은 행복했다. 아프다고 하니 이렇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와 주는 그가 있어 행복했고 당번 정해서 보살펴 주는 동료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그들이 있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저 녀석, 우리 설득하려고 내려온 거지?”
남편의 말에 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겠죠. 한창 근무할 시기에 갑자기 내려올 일이 뭐가 있겠어요?”
어젯밤에 갑자기 집으로 내려온 막내아들 녀석 생각에 미란은 밤새 한숨도 못 잤다. 평소처럼 밝고 쾌활한 얼굴로 어리광을 부리며 들이닥치긴 했지만 녀석의 속이 빤하게 들여다보여서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무조건 반대라고 결정짓는 어미를 보내고 저도 속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마음은 급하고 일은 손에 안 잡히고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미란도 서울에서 내려오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랴? 아닌 건 아닌 건데. 아들이 또 그 고생을 하는 걸 어떻게 보란 말인가.
달그락, 달그락.
미란은 오랜만에 내려온 아들을 위해 구수한 된장국에 밭에서 갓 수확한 채소들을 맛나게 무쳐냈다. 시골 밥상이지만 진수성찬이었다.
“경훈이, 아직 안 일어났어요?”
남편이 고개를 젓는다.
“웬걸. 그놈이 여태 자겠어? 새벽녘에 일어나서 앞산에 올라간다고 나갔지.”
“그놈의 산은, 힘든데 좀 쉬지. 전공의 생활 한다고 잠도 모자란 녀석이.”
“태생적으로 부지런한 놈, 아니요. 언제 경훈이 놈이 게으름 부리는 거, 봤나? 아, 참. 경민인? 전화 왔던가?”
“예, 오랜만에 가서 그런가 장인, 장모가 아주 좋아서 난리랍디다. 사돈어른께 죄송하죠. 자주자주 보내 줘야 하는데.”
“당신이 안 보내 주는 건가? 지들이 농사일이다 뭐다 해서 못 가는 거지.”
“그래도 사돈어른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원망스러울 거예요.”
“안 그래. 그 정도로 이해심 없는 분들이 아니잖아.”
“휴, 그나저나 경훈이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미란이 걱정 섞인 한숨을 내쉬자 남편이 슬그머니 묻는다.
“만나는 봤소?”
“누구요? 그 아가씨요?”
“그래.”
“아뇨. 만나면 뭐 해요? 안쓰럽고 마음만 더 안 좋지.”
“하긴. 뭐 나쁜 일도 아니고 아버지 살리자고 그랬다는데 우리가 야속할 거야.”
“…….”
미란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남편이 또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 담당 교수라도 좀 만나 보지 그랬어? 경훈이 말이 진짠지.”
“진짜면요?”
“그 녀석 말대로 정말로 아무 이상 없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라면…….”
“어떻게 그게 정상이에요? 속에 간이 없는데.”
“간이 없는 게 아니라잖아. 좀 잘라낸 거지.”
“그거나, 그거나. 어쨌든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몸이 약할 거고, 그러면 병에도 더 잘 걸리겠죠.어떻게 안 잘라낸 사람들과 같겠어요?”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 내가 하도 걱정이 돼서 고민하는데 저 윗집 화가 양반이 그러더구먼. 자기 먼 친척도 예전에 형제한테 간을 기증해 줬대. 그런데 사는데 지장 없었다더구먼. 그냥 사람 사는 것처럼 살더래. 남들 다 걸리는 감기야 걸리는 거고, 직장 생활도 잘하고 간 떼어 준 후에 애도 하나 더 낳고 잘 살았다고 하더라고.”
“그런 못 믿을 소리를 뭐 하러 믿어요? 누가 그랬다더라, 누가 그렇다고 하더라, 그런 말이 제일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거, 몰라요?”
“그야 그렇지만…….”
남편이 다시 말을 줄인다. 이 양반도 속이 편치 않은 것이다. 막내아들이 좋아 죽겠다고 하는 여자를 반대하려니 어떻게 속이 편하겠는가.
미란도 느는 건 한숨뿐이었다. 부모 설득하기 위해 마음먹고 내려온 아들놈과 한바탕 전쟁을 치를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 병원 생활은 어때?”
“그렇죠, 뭐. 그래도 매일 매일이 보람찹니다.”
아버지의 물음에 아들이 호쾌하게 대답한다. 미란은 묵묵히 숟가락질을 하면서도 아들이 언제 그 아가씨 이야기를 꺼낼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넌, 확실히 의사 되길 잘했다. 어릴 때도 그렇게 동네 녀석들 다 모아 놓고 의사 놀이를 하더니.”
“의사 놀이만 했어요? 힘없고 불쌍한 사람은 그냥 보고 넘기질 못했잖아요.”
미란의 대꾸에 남편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숟가락을 탁 놓았다.
“맞아, 맞아. 언젠가 길거리에 자는 사람을 보고는 119를 불렀던 일이 있었잖아. 그 사람은 그냥 노숙자라 길거리에서 자는 거라고 말하니까 왜 그래야 하느냐고 우리 집에 데려와서 밥 먹이고 재우자고 했었지. 그때 어찌나 황당하던지. 하하하.”
“오지랖이 너무 넓은 거죠.”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니, 제 별명이 오지랖 쵠데.”
“자랑이다. 세상에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 많은데 오지랖 넓은 게 좋은 건 줄 알아?”
“그러게요. 그래도 전 생긴 대로 살 겁니다. 오지랖 넓게 낳아 주신 어머니 탓도 있죠, 뭐. 어머니도 불쌍하고 안 된 사람 보면 가슴 아파 하시잖아요. 이게 다 어머니를 닮아서 그래요.”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이다. ‘마음 좋은 어머니가 내 애인 좀 봐주세요’ 하는 것 같다.
“살다 보니 안 그래야 할 때도 있더라. 나부터 생각하고 내 가족 위해서는 이기적일 필요가 있어.”
미란은 혹시 그 아가씨 말을 꺼낼까 봐 얼른 대꾸했다. 그런데 아들이 침묵한다. 뭐라고 대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이 없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들은 그 아가씨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농사에 대해 질문하고 오랜만에 친정나들이를 간 형수와 형에 대해서만 대화를 했다. 미란은 불안했다. 목적을 가지고 온 녀석이 침묵하니까 더 불안하다.
미란은 설거지까지 다 마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칫솔을 잡으려고 세면대 앞에 섰는데 문득 거울에 붙여진 종이가 보였다. 뭔가? 하는 궁금함에 자세히 들여다보던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간은 인체에서 가장 큰 선(gland)으로 무게는 약 1-1.5㎏이나 되며, 오른쪽 횡격막 아래의 복부에 위치하여 늑골의 보호를 받고 있다. 간은 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사이를 담관과 혈관이 지나간다. 간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의 대부분이 간세포로서 그 수는 2천억-2천5백억 개나 되며 무수한 기능을 수행한다. 간소엽이 모여 만들어진 간은 크게 좌엽과 우엽으로 나뉘며 우엽이 좌엽보다 훨씬 크고 두껍다.
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적힌 종이를 주욱 읽어 내리며 미란은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절로 새어 나왔다. 거울에 붙여진 종이를 툭 잡아 뜯어 선반에 올려놓고 미란은 양치질을 시작했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칫솔을 놀리는데 자꾸 그놈의 간 크기가 떠오른다.
‘간이란 게 그렇게 큰 장긴가?’
몰랐다, 우리 몸속의 장기 중에 간이 제일 큰 줄은.
양치질을 마친 미란은 화장수를 바르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무심코 스킨을 잡고 고개를 드는데 화장대에 달린 거울 앞에 또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미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간의 기능
– 간은 우리 몸의 모든 기능에 관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백 가지도 넘는 일을 하며 1천 가지 이상의 효소를 생산해서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화학반응에 관여한다. 간이 정상적인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간 내의 혈액 순환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 간세포에 충분한 산소와 영양이 공급되어야 한다. 단백질이 결핍되거나 기아가 계속되면 간 단백질이 줄어들어 효소의 효능은 저하되고 간의 기능도 저하되게 된다.
이번에는 간의 기능이다. 미란은 종이를 뜯어서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처음 알았다, 간이 우리 몸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줄은.
아들놈의 행태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란은 옷을 꺼내 입고 밭에 나가 볼 요량으로 장롱 문을 열었다.
“하.”
기가 막혔다. 장롱 안에도 커다란 A4 용지가 붙어 있었다. 화난 손짓으로 종이를 뜯어 읽어 보았다.
간의 4분의 3까지도 떼어낼 수 있는 간이식 수술이 가능한 것은 수술 후 4개월 정도가 지나면 간이 원래 크기로 재생되기 때문이다. 간 이식은 말기 간질환 또는 간세포암 등 간질환에 대한 치료법으로 정상인의 간을 수술적으로 적출하여, 대상 환자에게 옮겨 붙여 간이 기능하게끔 하는 수술법이다. 현재 간이식의 수술 사망률은 센터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약 1~3% 정도로 여타 수술에 비해 높지 않다.
미란은 눈길을 들어 닫힌 방문을 쳐다보았다.
하여튼, 정말 내 아들이지만 졌다, 싶다. 어미가 움직일 방향을 완전히 파악하고 가는 곳마다 이런 걸 붙여 놓다니.
미란은 감탄하며 다시 눈길을 내렸다.
간이식을 받은 환자는 합병증 및 부작용이 많다. 일반적인 전신 마취를 통한 수술을 받는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이외에 간이식과 관련된 대표적인 합병증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각종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에 대해 나열이 되어 있었다. 문득 걱정이 되었다.
그 아가씨의 아버지는 지금 괜찮을까
언뜻 들으니 수술이 성공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렇게 부작용과 합병증이 위험하다니 수술 자체보다는 경과가 더 중요한 듯 보였다.
미란은 경훈이 뽑아 놓은 자료를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일할 때 입는 점퍼를 꺼내 입었다. 읽고 나니 마음이 더 심란하다. 그 아가씨 아버지 걱정도 되고.
무거운 마음으로 방을 나선 그녀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일이나 하려고 현관을 나섰다. 밭일 할 도구들이 들어 있는 창고로 간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망할 자식.”
미란은 창고 맞은편 벽에 떡하니 붙어 있는 종이를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웃음이 난다. 경훈이답다. 그렇게 쉽게 물러설 놈이 아닌 걸 깜박했었다. 자식을 셋이나 키웠어도 미란은 막내아들이 제일 어려웠다. 아니, 쉬웠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놈이었다. 녀석이 얼마나 끈질기고 인내심이 강한지 알기 때문이다.
고집 한 번 부리면 누구도 못 당했다. 그렇다고 아주 아닌 고집을 부리지도 않는다. 나름 합리적인 이유와 논리를 가지고 고집을 부려서 상대가 매번 수긍할 수밖에 없게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 녀석의 면모가 확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무지한 부모를 먼저 깨우쳐서 제가 사랑하는 여자를 받아들이게 할 심산인 것이다.
미란은 헛웃음을 웃으며 이번에는 또 무슨 내용인가 싶어 종이를 뜯어 보았다.
생체 간이식의 메카, 대일병원의 미라클 팀!
제목부터 거창하다.
우리는 드디어 3000건의 생체 간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우리는 올해 참가한 세계 간이식 학회에서 괄목할 만한 주목을 받았다. 3000건에 달하는 수술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건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수술 대상자 중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절체절명의 중환자들의 생명 또한 살렸다는 것에 기립박수를 받았다. 세계 유수의 병원들이 우리 미라클 팀을 향해 찬사를 보냈다. 우리는 그동안 2퍼센트의 수술 실패 확률에 가슴이 쓰렸다. 그래서 이번 100퍼센트의 성공은 그 어느 때보다 희망찬 내일을 예고하는 것이라서 더더욱 감회가 새롭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우리 미라클 팀은 항상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약속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더 달릴 것을. 그리고 또 약속한다. 부모 형제를 포함한 가족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간을 기꺼이 내놓는 기증자의 목숨을 나의 목숨처럼 소중히 할 것을.
-대일병원 간이식, 미라클 팀 강정만 교수
미란은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의사로서,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나 잘 묻어나는 글에 가슴이 찡했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좋은 교수 밑에서 일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종이의 나머지 부분은 간이식이 어떻게 진행되고 기증자와 수여자의 수술 회복 과정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더불어 미라클 팀이 만들어진 역사와 매해 수술 성공 실적률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미란은 맨 아래에 적힌 손 글씨가 아들의 글씨체임을 알아차렸다.
어머니, 막내아들 경훈입니다. 먼저 어머니 마음을 제가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형과 죽은 형수를 보며 늘 마음 졸이시며 살던 어머니를 저도 봐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심정을 모르겠습니까. 만약 지원이가 돌이킬 수 없는 병에 걸렸다면 저는 아마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거짓말입니다. 저는 지원이가 어떤 무서운 병에 걸렸어도 어머니께 그 여자를 받아 달라고 고집했을 겁니다. 그만큼 사랑합니다. 제 나머지 인생을 그 여자에게 걸고 싶을 만큼 사랑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그 여자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형이 왜 죽은 형수와 결혼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정도로. 그런데 저는 축복받은 남자인가 봅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는 몇 개월 후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고 저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아 줄 거라고 큰소리 땅땅 치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 희망찬 미래가 보이고 그녀의 눈 속에서 제 행복한 미래가 보입니다. 제 인생의 멘토이신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진실하고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저 위의 글을 쓰신 강정만 교수님처럼 훌륭하고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이 모든 미래의 제 계획에 한지원이 있습니다. 그녀와 함께여야만 저의 미래도 존재합니다.
미란은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나쁜 놈…….”
제 여자 받아 달라고 어미를 울리다니…… 불효막심한 놈…….
미란은 울면서 웃었다. 아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감사와 함께 이 글대로라면 더 이상 아들의 여자를 반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안도감 때문이었다.
“당신, 여기서 뭐 해?”
문득 창고로 들어오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 왜 울어?”
남편이 놀라서 달려온다. 경훈이도 저런 남편이 될 것이다.
아내를 위하고 자식들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자상한 가장이 될 것이다.
미란은 묵묵히 종이를 내밀었다. 남편이 ‘뭔데?’ 하는 얼굴로 종이의 내용을 읽어 내린다. 그리고 얼마 후 남편이 미란을 쳐다보았다.
“누구 아들이 이렇게 잔머리를 잘 굴려?”
웃으며 묻는 남편에게 미란은 눈을 흘겼다.
“당신 아들이지, 누구 아들이겠어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미란은 조만간 또 서울에 다녀올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예감했다. 아마 꽤 자주 다닐 것 같았다. 아니면 몇 달 거기서 눌러 앉아 예비 막내며느리를 돌봐야 할지도.
에필로그 1 – 가족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그럼요. 경훈 씨요? 음…… 매일 전화 통화하고 오프 때마다 찾아와서 괴롭혀요.”
지원은 새어머니가 내미는 음료수 잔을 받으며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까닥였다. 음료수 잔을 든 채 거실 소파로 간 그녀는 다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몰라요. 저번에 어머니랑 같이 드레스 골랐다고 하는데 굳이 다시 입어 보러 가자고 하는 거예요. 자기 눈으로 못 봤다고 꼭 봐야 한대요. 네, 그렇다니까요. 경훈 씨, 정말 어떤 땐 너무 고집이 세요. 그죠? 어머니도 그렇게 느끼시죠?”
예비 시어머니와 수다를 떠는 지원의 모습을 영혜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벌써 6개월이나 됐다. 아버지에게 간을 기증해 주고 회복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원은 2주 만에 퇴원했다. 퇴원 당시에 지원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얼마나 안절부절못했었는지 생각해 보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하다.
[지원아, 내가 하게 해줘. 난 너 혼자 못 둬.] [괜찮아요. 간병인 구했어요.] [간병인이 널 어떻게 정성으로 돌보겠어? 내가 하마. 내가 할게.] [아버지 퇴원하시면 아버지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다 할 수 있다. 내가 다 할 수 있어. 지수도 돕겠단다. 걔도 수시로 대학 합격했으니까 1년 휴학하고 집에서 날 거든다고 했어.] [휴학까지 뭐 하러요. 전 금방 정상인처럼 생활하게 될 거고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알아. 그래, 할 수 있겠지. 그래도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내가 이렇게는 널 보낼 수가 없어. 제발, 지원아. 나한테도 죄를 씻을 기회를 좀 줘. 부탁이다.]울면서 애원했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으로 빌었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지원은 아버지가 퇴원할 때까지만 집에서 머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몇 주가 6개월이 되었다. 지원은 이제 이곳을 제 집인 양 편안하게 생각한다. 아니, 제 집이 맞다.
영혜는 늘 감사했다. 지원이 아버지 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색해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지원이 적응하는 데에는 경훈의 공이 가장 컸다. 오프 때마다 들이닥쳐서는 가족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사위 노릇, 매형 노릇, 형부 노릇까지 톡톡히 해냈다. 얼마나 장난도 잘 치고 익살도 잘 떠는지 온 가족이 경훈만 보면 활기차게 변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지원도 경훈 덕에 웃기 시작했고 지수와 가장 먼저 말을 트고 지내더니 어느새 지환의 공부도 봐주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영혜는 왜 진즉 이렇게 만들 노력조차 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러웠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노력했더라면 그동안 내내 마음 한쪽 무거운 짐 하나 올려놓고 살지 않았어도 되었고 이렇게 행복한 가족도 완성시킬 수 있었는데.
“네, 어머니. 혼 좀 내주세요. 네. 아, 집이요? 네, 저희 어머니랑 같이 가서 봤어요. 네.”
새로 꾸릴 신혼집 얘기가 나오자 영혜는 얼른 다가가 ‘나 좀 바꿔 줘’ 하는 입모양을 해보였다. 그러자 지원이 수화기에 대고 말한다.
“어머니, 저희 어머니께서 좀 바꿔 달라고 하시네요. 바꿔 드릴게요.”
지원이 내미는 수화기를 받아든 영혜는 반갑게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부인. 별일 없으시죠?”
-예, 사부인이 걱정해 주신 덕분에 편안합니다.
“안 그래도 전화를 한 번 넣으려고 그랬어요. 며칠 전에 지원이랑 같이 집 보고 왔는데 너무 감사해요. 애들 둘이 사는 집인데 너무 큰 걸 해주셔서…….”
-제 돈 들여 한 것도 아닌데요, 뭘. 경훈이가 그동안 모아 둔 것으로만 장만했습니다. 그 녀석이 애들도 많이 낳을 거라고 큰 거 얻겠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래도 31평이면 많이 넓겠어요. 집은 너무 좋고 깨끗하더라고요. 들어갈 때 손댈 곳이 하나도 없겠어요. 혹시 수리했으면 하는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건 저희가 해서 들여보낼 테니까요.”
-수리는 무슨. 지들이 살면서 하라고 하면 되죠, 뭘. 사부인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으세요. 결혼 준비하느라 바쁘실 텐데. 원래 신랑보다 신부 쪽이 신경도 더 많이 쓰이고 힘이 들잖습니까.
“네, 안 그래도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해서 보낼까, 매일 고민입니다. 첫 애라, 결혼도 처음인지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우왕좌왕만 하다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래도 잘하시는 겁니다. 허례허식 없이 기품 있는 결혼식이 될 것 같아요.
“전 좀 더 욕심을 내고 싶은데 지원이와 경훈이가 워낙 완고하게 고집을 부려서 마음껏 해주지도 못합니다.”
-그 마음만으로도 지원이와 경훈이가 고마워할 겁니다. 세간도 하나같이 정성 들여서 마련해 주시고 이불 하나, 베개 하나까지 얼마나 정성을 들이셨는데요. 너무 꼼꼼하게 잘하셔서 제가 어디 손 하나 댈 데가 없습니다. 저한테도 좀 남겨 주셔야 저도 며느리한테 면이 서는데 말입니다.
“저희 아이, 예뻐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그것만큼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거야 저도 마찬가지죠. 저희 아들이 모자란 것투성인데 그렇게 예뻐해 주시니 제가 늘 감사드립니다, 사부인.
“네, 사부인. 그럼 일주일 후에 식장에서 뵙겠습니다.”
-예. 그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예, 안녕히 계세요.”
영혜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지원을 보고 웃었다.
“네, 시어머니가 너무 좋으신 분이라 안심이 되는구나.”
“네, 좋으세요.”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그건 당연한 거고, 나중에는 너무 잘해 주셔서 어려울 지경이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내내 찾아오셔서 이것저것 챙겨 주시는 통에 지원은 몸 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언제나 편안하게 대해 주셔서 지원도 어느새 그 따뜻함에 동화되고 말았다.
한결 같은 분이었다. 경훈이 어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아버님을 뵈었을 때는 또 그분도 닮은 것 같았다. 어머님과 아버님, 모두 한없이 자애롭고 편안한 분들이었다.
“네 복이다.”
새어머니의 말에 지원은 동감이라는 듯 웃었다.
복, 맞다. 이런 복이 내게도 있는 건지 몰랐는데 지금은 느낀다. 날 미친 듯이 사랑하는 좋은 남자가 있고 나를 이뻐해 주시는 시어른들에…
지원의 눈이 새어머니를 향해 반짝였다.
가족….
드디어 내게도 가족이 생긴 것이다. 함께 공원을 산책하자고 매번 조르시는 아버지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달려와 언니, 누나라고 소리치는 여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매일 매일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며 좋은 것만 먹이려고 애쓰는 어머니…….
지원에게도 가족이 생긴 것이다. 진짜 ‘내 편’이 되어 줄 가족.
“참, 맞다. 잠깐 기다려.”
새어머니가 급히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뭔가를 들고 나오셨다.
“우리 마사지하자.
”
“네?”
지원이 놀라서 묻자 새어머니가 웃었다.
“내가 오늘 백화점 갔다가 마사지하는 방법 배워 왔거든. 마사지 숍에 다니고는 있지만 그래도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는데 몇 번 더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소파에 누워.”
지원이 쭈뼛거리자 새어머니가 다시 재촉했다.
“얼른.”
그때였다. 2층에 있던 지수가 어떻게 알았는지 계단을 다다다 내려오며 소리를 쳤다.
“나도! 나도, 나도 할래.”
“으이그. 쟤 좀 봐라. 요즘 연애하니? 왜 그렇게 멋을 내?”
새어머니가 핀잔을 주자 지수가 삐죽거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 학교에 좋아하는 선배가 생겼거든. 조만간 내가 먼저 고백해서 확 낚아챌 거야.”
당돌한 지수의 말에 지원과 영혜 모두 웃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얼마 후 나란히 거실 바닥에 누워 얼굴에 마사지 팩을 올려놓고 있었다.
“알았어요. 나갈게요.”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경훈이 늦게 퇴근하고 집 앞에 왔다. 꼭 얼굴 봐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지원은 할 수 없이 알았다고 대답하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와락 달려드는 그의 품에 안겼다.
“왜 그래요?”
품에 안겨서 물었다. 그러자 그가 웃는 것이 느껴진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뭐가 보고 싶어? 이틀 전에도 봤는데.”
“넌 안 보고 싶었냐?”
“응.”
지원은 그를 놀릴 심산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골이 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식이, 너 자꾸 나 놀리면 결혼해서 막 외박하고 그런다?”
“해봐요, 어떻게 되나.”
“어떻게 되는데?”
“짐 싸서 친정에 와버리지.”
헉,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어디서 안 좋은 것만 배워서. 가출은 절대 안 돼!”
“누가 가출한댔나?”
“그럼 뭔데?”
“외출. 친정으로 외출.”
“하.”
그녀의 농담에 웃더니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은은한 조명처럼 두 사람을 비춘다.
그의 키스가 깊어졌다. 지원도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벌렸다. 거친 숨결이 오가고 열정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더니 조심스럽게 가슴을 움켜잡는다. 지원은 더 바싹 다가서는 남자의 몸을 느꼈다.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 뜨겁게 매달렸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달뜬 숨을 내뱉으며 멀어졌다. 그의 깊은 눈빛이 지원을 응시했다.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응.”
“그날, 내 신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야.”
“당연하지.”
능글맞게 대꾸하는 지원의 이마를 그가 콩 쥐어박았다.
“인마, 점점 뻔뻔해지냐?”
“어. 누구 닮아서.”
맞다.
두 사람은 닮아 가고 있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키스한다. 지원은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입술을 떼고 서로를 꽉 안으며 그 따뜻함을 공유했다.
사랑…… 이 세상에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안다, 나보다 상대를 더 사랑할 수도 있다는 걸.
행복…… 그건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내게도 오고 다른 이에게도 오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었다.
지원은 그의 목을 더 힘껏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가 장난스럽게 대꾸한다.
“내가 더 사랑해, 인마.”
에필로그 2 – 사랑스러운 미래
2년 후.
쏴아아아.
힘차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건장한 팔의 소독약을 씻어 내리고 있었다. 한쪽 팔이 깨끗해지자 이번에는 반대쪽 팔이 물줄기를 맞기 시작했다.
“심란하겠네? 최 선생.”
경훈은 옆으로 와서 선 이민수 교수를 돌아보았다. 이제 막 솔로 손을 꼼꼼하게 닦기 시작하는 그를 보며 경훈은 희미하게 웃었다.
“예, 편안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팔자가 그렇지. 나도 애 둘 다 태어날 때 옆에 못 있어 줬어. 그래도 자넨 첫째잖아. 우리 마누라도 첫째 때는 이해하더라고.”
경훈은 이 교수의 말에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둘째 때는 이해 못하시던가요?”
이민수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두고두고 원망하더라. 외과의사를 남편으로 둔 팔자라고 포기하기는 했지만 하필 왜 애 낳을 때마다 수술이냐면서 투덜거려. 살면서 내가 섭섭하게 할 때마다 애 낳을 때 옆에 못 있어 줬던 걸로 타박이야.”
“…….”
경훈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이 교수가 씨익 웃었다.
“어쩌겠나, 그렇다고 우리가 수술 팽개치고 마누라 옆을 지킬 수는 없잖아? 그래도 자넨 나아. 집사람이 같은 외과의니까 충분히 이해할 거야.”
이해…… 그래, 이해는 한다.
[나 걱정 말고 수술 잘해요. 시간 많이 걸리는 중요한 수술이라면서요? 우린 잘할 테니까 수술에만 전념해요.]지원은 자신의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전혀 서운한 눈치도 없었다. 중요한 수술에 들어가는 남편 앞에서 진통으로 아픈 티도 내지 않았다.
경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더 기다렸어야 했는데…….
경훈은 지원이 이렇게 빨리 임신할 줄은 몰랐다. 결혼하면서 지원의 계획은 어서 빨리 아이 하나 낳고 복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훈의 생각은 달랐다. 지원의 몸이 충분히 회복되기 전에는 절대로 아이는 갖지 않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3년은 지난 후에 아이를 가질 계획이었다. 그런데…….
경훈은 임신하려고 작정한 지원의 계략에 빠진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배란일 아니라고 마음 놓고 하자면서 유혹하던 섹시한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것처럼 홀라당 넘어간 것이다.
“후……. 걱정입니다. 지원이 몸이…….”
“몸? 왜? 어디 안 좋대? 강 교수님 말씀으로는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됐다고 하던데?”
이 교수가 놀라서 묻는 질문에 경훈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정상은 맞는데 그래도 걱정됩니다. 아직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쯧쯧, 간이식 전문의 과정을 밟는다는 놈이 그렇게 확신이 없어서야 어떻게 다른 환자를 대해? 2년이나 됐는데 뭐가 걱정이야? 간도 정상 크기로 돌아왔고 다른 건강상의 문제도 없는데. 한지원, 악바리잖아. 애 낳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로 해낼 거다.”
이 교수의 위로 섞인 말도 경훈에게는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는 늘 지원이 걱정되었고 이제 자신도 없이 혼자 진통을 겪고 있을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수술은 미국의 간이식 전문 팀과 일본의 수술 팀까지 와서 참관하는 매우 중요한 수술이었다. 강철 심장이라는 강 교수까지 긴장하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훈 또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지원인 잘할 것이다. 내 아내는 특별한 여자니까.
경훈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원래도 차분하고 침착한 지원이었지만 아이를 가진 후부터는 더 깊어지고 강해진 그녀였다. 가족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녀에게 아이는 세상 최고의 축복이었고 행복이었다.
[넌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최고의 보물이야.]하루에도 수십 번씩 뱃속의 아이에게 속삭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질투가 날만큼 사랑이 넘치는 그녀였다.
경훈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한 시간 전, 걱정 말라며 도리어 자신을 걱정해 주던 아내의 침착한 얼굴을 떠올리며 경훈은 조금씩 그녀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눈앞에 놓인 수술로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 가보자. 오늘 우리 미라클 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팀이라는 걸 보여야지.”
이 교수의 활기찬 말에 경훈도 강한 자신감을 내보이며 수술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악! 아아아아! 아아악!”
“여보, 여보! 해인아!”
“아아악! 나 죽어! 나, 죽을 것 같아!”
“어쩌냐, 어떡하냐. 조금만 참아 봐. 응? 여보…… 으악!”
해인의 옆 침대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지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으으윽. 해인아, 이거 좀 놔 봐. 응? 이거 좀 놔 봐봐.”
“아악, 아아악!”
진통으로 몸부림치던 해인이 성민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런, 저러다 남편 머리털 다 빠지겠네.”
보다 못한 시어머니가 얼른 다가가 해인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고, 이 사람아. 남편 대머리 되겠어.”
“으허허헝!”
해인이 울음을 터트리며 남편의 머리칼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제 진통이 좀 가시는지 몸을 축 늘어트렸다. 진통 간격이 급격히 줄어든 덕에 저렇게 쉬는 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성민이 얼얼한 머리통을 문지르며 우거지상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끙’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지원이 인상을 쓰고 있는 걸 보더니 바로 옆에 서 있는 공 여사에게 물었다.
“지원인 아직 진통이 심하지 않은가 봅니다.”
“웬걸. 이제 곧 아이 낳을 것 같다고 하던데.”
“예? 아니, 근데 왜 저렇게 멀쩡합니까?”
공 여사도 성민과 같이 지원을 쳐다보았다. 2년이 넘게 봐온 며느리지만 참 악바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침착하고 독한 사람도 애 낳을 때는 이성을 잃는다는데 자신의 막내며느리는 애를 낳기 직전인 이 시점까지도 침착하다. 기껏 아프다는 표현이 한숨을 푹 쉬거나 끙끙거리거나 이불자락을 세게 움켜잡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아픈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지원아, 많이 아프면 소리를 질러. 그래야 덜 아파.”
보다 못한 영혜가 옆에서 딸의 땀을 닦아 주며 말하는 것이 보였다. 안사돈도 애가 타는 것이다. 시어머니인 자신도 이렇게 답답한데 친정어머닌 오죽할까.
“괘, 괜찮아요. 후후, 견딜 만…… 해요.”
공 여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리를 안 지르니 간호사들도 지원의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는 듯했다. 공 여사는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았다.
“여기 의사 좀 오라고 해줘요. 우리 며느리가 곧 애를 낳을 것 같으니까.”
“네?”
간호사가 아직도 제법 잘 견디고 있는 지원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공 여사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재촉했다.
“내 보기엔 곧 나올 것 같아서 그래요. 저 애가 워낙 표현을 안 해서 그런 거라니까. 빨리 분만실로 옮겨야 한다니까. 이러다 여기서 애 낳아.”
그제야 간호사가 황급히 의사를 부르러 뛰어간다. 공 여사는 지원에게 다가갔다.
“지원아, 조금만 더 힘내라. 경훈이 없어서 내가 미안하다. 여자가 애 낳을 때 남편 없으면 더 서러운 법인데…….”
지원은 힘없는 눈을 들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 아요, 어머니. 훅!”
갑자기 진통이 밀려오는지 지원이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왜?”
옆에 있던 영혜가 재빨리 물었다.
“아, 아기가…… 아기가…….”
지원이 더듬거리자 공 여사가 재빨리 이불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상황을 살폈다.
“아이고! 머리 보인다, 머리 보여!”
공 여사가 머리를 들고 이제 막 가운 자락을 날리며 들어서는 의사를 향해 손짓을 했다.
“빨리 와요! 여기, 아기 머리 보여요!”
“그래서?”
경훈이 걸음을 빨리하며 묻자 우석이 재빨리 대답했다.
“지원 선배님이 워낙 차분하게 있으셔서 의료진들도 그렇게까지 진행된 줄 몰랐던 모양입니다. 아프다는 말씀도 안 하셨대요. 나중에 선생님 어머니께서 애가 곧 나올 거라고 소리를 질러서 급하게 분만실로 옮겼는데…….”
우석이 말을 멈추자 경훈이 인상을 썼다.
“옮겼는데?”
“분만실 들어가자마자 애가 나왔답니다. 힘 두어 번 주니까 그냥 바로 쑤욱…….”
“산모는?”
딴에는 실감나게 말해 주려고 말에 강약까지 넣던 우석이 경훈의 급한 질문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원이 몸은 어떠냐고!”
경훈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우석이 그제야 대답했다.
“아, 지원 선배요?
물론 건강하시죠. 애도 건강하고요. 애가 3.1킬론데 건강하고 튼튼한…….”
그 말을 듣는 순간 경훈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질풍같이 내달리는 모습을 보며 우석은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경훈이 눈 깜짝할 새에 비상구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우석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들이라고요. 그 말 해주려고 #했는데 그냥 가시네.”
경훈에게는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 궁금할 겨를이 없었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고는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강 교수의 허락을 받고 곧장 달려가는 중이었다. 미국 팀과 일본 팀의 기립박수를 받고 수술은 성공리에 끝났다. 그래서 모두들 외국 팀과 다과를 즐길 예정이었지만 경훈은 잠시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가 있는 산부인과로 달리고 있었다.
“아이고, 어쩜 애가 이리 잘생겼누.”
공 여사가 아이를 보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서 남편도 입이 귀에 걸린 얼굴로 히죽거렸다.
“입매하고 눈매는 지원이 닮았네.”
남편의 말에 공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코는 경훈이 닮았네요. 사부인, 예쁜 딸 덕분에 우리 손자가 이렇게 잘생겼습니다.”
그러자 영혜가 활짝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닙니다, 사부인. 잘생긴 아들 덕분에 이렇게 잘난 손자가 나온 거죠.”
“아이고, 그렇게 겸손한 말씀을.”
그렇게 두 사돈지간이 서로에게 공을 돌리고 있을 때 지원은 아이를 보며 넋을 빼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손자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옆얼굴을 보자 지원도 울컥 목이 메었다.
손가락 하나를 내밀자 아이가 그 손가락을 꽉 쥔다. 그러자 아버지의 입이 길게 늘어졌다. 지원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고 축하하고 있었다.
지원은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좀 전에 수술 끝났단다. 곧 갈 거야.]조금 전에 수간호사 선애가 알려 주었다. 그래서 지원은 지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이곳으로 #달려올 사랑하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콰당.
모두의 눈길이 세차게 열린 문으로 향했다. 지원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서 있었다. 그의 눈길이 지원에게 제일 먼저 향했다.
“최 서방.”
“어? 너, 어떻게 왔니? 수술 끝났어?”
여사의 물음에 경훈이 ‘네’라고 대답하더니 곧장 지원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몸은? 의사는 뭐래?”
“괜찮아요.”
“괜찮네, 최 서방. 산모도 아이도 모두 아주 건강하대.”
영혜가 대신 말해 주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지원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며 지그시 바라본다.
“미안하다, 혼자 견디게 해서.”
“괜찮다니까……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어.”
“잘됐네. 수고했어요.”
“네가 수고했지, 인마.”
“당신도 수고했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깊게 바라보았다.
“자, 자. 애 아빠가 자식한테는 너무 무심한 거, 아니냐? 애는 안 봐?”
공 여사가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지원도 볼을 붉히며 경훈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 봐요.”
아들…….
경훈은 이제야 비로소 지원이 낳은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다가온 아이를 보는 순간 울컥, 뭔가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조그맣고 붉은 기가 도는 아이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녀석이 순하다. 엄마, 아빠가 바쁜 의사라는 걸 알고 순하게 클 모양이야.”
공 여사가 말하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이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경훈이 놀란 표정을 짓자 가족들이 웃기 시작했다.
“저런, 애 앞에서 무슨 말을 못한다더니. 하하하.”
“호호호호.”
모두들 웃었다. 지원도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경훈은 아이의 우렁차게 우는 모습을 보며 히죽거렸다. 그리고 눈길을 들어 지원의 밝은 미소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드럽게 마주쳤다. 고운 달빛이 창틈으로 새어 들어와 경훈이 안고 있는 아이의 이마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달빛처럼 은은하고 햇살처럼 해사한 행복이 두 사람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미래를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