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Purity RAW novel - Chapter 4
3. 본능적 화학반응
“오늘은 날이 좋네요.”
수술 부위를 소독하고 드레싱 거즈를 붙인 후 반창고를 살짝 눌러서 붙여 마무리를 하고 있던 지원의 귀에 환자의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원은 눈길을 들어 침상에 누워 있는 29세의 젊은 여자 환자를 보았다. 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원도 눈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내내 흐리기만 하던 하늘이 오늘은 무척 맑았다. 옅은 옥색빛 하늘이 마치 초가을의 하늘을 연상케 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선생님이나 저나 답답한 병실에만 묶여서…….”
여자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지원의 눈길이 다시 환자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위암 말기 환자로 이틀 전에 고식적 수술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유 없는 복통이 지속되어 동네 병원을 찾았다가 위궤양 검사를 진행하다 암 덩어리가 발견되어 대일병원으로 왔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는 이미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을 지경으로 진행되어 있었다.
십이지장, 위, 위와 연결된 부위를 전부 암 덩어리들이 막아 버려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지경까지 되어 버린 후였다. 이럴 때 외과는 치료를 위한 수술이 아닌 생명이 유지되는 동안 최소한의 고통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고식적 수술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녀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지원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병실에만 묶여 있는 같은 처지지만 너무나 다른 상황이다. 그녀는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사람이었고 지원은 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공부하고 배우는 학생이었다. 너무나 긴 미래를 앞에 두고 있었고 얼마든지 희망에 찬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여자가 지원을 돌아보았다.
“스물일곱? 스물여덟? 보기엔 그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레지던트라고 하니까 그쯤 됐을 것 같고……?”
“스물여덟이에요.”
지원은 저도 모르게 환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말았다. 보통은 환자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건 지원에게 있어 원칙과도 같았다.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다 보면 환자와 필요 이상으로 교감을 나눈다. 그렇게 되는 걸 지원은 극도로 꺼려했다. 감상적인 의사, 환자의 상태에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것만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원은 대체로 환자들에게 냉정하게 대했다. 때로는 너무 차갑고 매정하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게 그녀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나보다 한 살 아래네요.”
여자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맑으면서도 안타까워서 지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난 스물여덟 살에 뭐 했더라? 아, 그때도 고시 공부하고 있었구나.”
여자는 5년째 고시 공부를 하던 고시생이었다.
이번에는 1차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꽤 잘 보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드디어 긴 고행의 길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단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고시 합격이라는 희망 대신 청천벽력과 같은 사망 선고가 떨어졌다.
어땠을까? 합격 발표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희망에 들떠 있던 여자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기분이 어땠을까?
지원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
“합격이래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다음 순간 지원은 여자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합격했구나. 그 어렵다는 고시에 합격했구나.
지원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자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눈길을 준다.
여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원은 그대로 드레싱 세트들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병실을 나오다 다시 뒤돌아보니 여자는 여전히 창밖에만 시선을 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원은 병실을 나오자마자 복도 한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뭔가 묵직한 것이 가슴팍에 걸려 도통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침을 삼켰다. 이번에는 목 언저리가 묵직해진다.
스물아홉,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다.
내 스물아홉에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원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조금은 나아진 레지던트 3년차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저 환자처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삶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 있어 죽음은 너무나 먼 이야기인 것 같지만 또 어떤 때는 너무나 가까운 이야기가 되고 만다.
흠칫,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감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같은 또래 여자의 죽음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늦추었던 모양이다.
지원은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스스로의 감정을 억눌렀다. 뭔지 모를 답답함을 이해하려고도 분석하려고도 하지 않으면 된다. 의사로서의 냉정함이 흔들려서는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없다.
“한 선생님.”
문득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지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염 간호사가 뛰어오고 있었다.
“드레싱 끝나셨어요?”
“네.”
“그럼 지금 스테이션에 가보세요. 김원철 선생이 찾아요.”
“절요?”
“네, 제가 이쪽으로 온다고 했더니 혹시 한 선생님 보면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드레싱 끝났으면 좀 보자고요.”
그리고 염 간호사는 병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지원은 의국으로 향하던 방향을 돌려 스테이션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수술 참여도 2건밖에 없었고 자신이 주치의로 맡고 있는 환자들의 상태도 양호해 일찌감치 일을 마무리 짓고 퇴근할 작정이었다.
5일째 아파트에 못 들어갔다. 지원은 그가 이사 들어오던 날, 아주 늦게 아파트로 돌아갔다. 일부러 그가 편안하게 이사하라고 자리를 비켜 준 거였다. 덕분에 경훈이 이사를 들어온 후부터 지금까지 아파트 안에서 마주친 적은 없었다.
곧 4년차에 들어가는 그는 1주일에 한 번 꼴로 당직이었기에 지난 5일 내내 아파트로 퇴근을 했을 것이다. 매일매일 의국이나 병원 복도, 병실에서 그와 마주치지만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깊지도 친하지도 않은 ‘선후배’ 관계일 뿐이었다.
스테이션에 도착하자마자 지원의 눈에 가장 먼저 띈 사람은 김원철 선생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길은 스테이션 중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최경훈에게 멈추었다.
환자복을 입은 중년 여자와 그 보호자로 보이는 중년 남자를 앞에 두고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마 수술에 대한 설명이거나 회복을 앞둔 환자에게 상태를 설명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의 눈에 보이는 최경훈의 표정은 더없이 자상하고 친절한 의사의 얼굴이었다.
“한 선생.”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원은 고개를 돌렸다. 스테이션 한쪽에 있는 컴퓨터 앞에서 김원철 선생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지원의 눈 끝에 이쪽을 바라보는 최경훈의 눈길이 희미하게 잡혔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그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김원철에게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휘플 OP 받을 환자야.”
지원은 김원철 선생이 보고 있는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내일 있을 수술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깐깐한 정 교수가 집도하는 수술이라 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정 교수는 수술에 참여하는 레지던트 1년차와 2년차들에게 돌발질문을 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원리원칙을 철저하게 따지는 교수라 수술 준비에 약간의 오차라도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낸다. 그래서 레지던트들은 정 교수의 수술에 참석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지원이 대답하자 김원철 선생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
“네가 개복해 봐.”
순간, 지원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김원철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할 수 있지”
예상보다 훨씬 일찍 찾아온 기회였다. 지원의 눈길이 모니터 옆에 놓인 차트로 향했다.
22세, 미혼, 여자.
환자의 간략한 정보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젊은 여잔데요.”
자칫했다간 보기 싫은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어시스트 할 거야. 침착하게 배운 대로만 하면 돼.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그 말에 힘이 났다.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김원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따라와. 미리 한 번 더 설명해 줄 테니까.”
“네, 선생님.”
김원철 선생이 먼저 앞서고 지원은 그 뒤를 따라갔다. 마침 테이블에 앉아 있던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경훈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예, 수술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보호자와 환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설명을 듣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여요. 감사합니다.”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는 환자와 보호자를 지나치며 지원은 경훈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언뜻 스치듯 본 것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 그의 미간이 모아지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향해 인상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뭔가 언짢은 걸까? 설마 아파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의 얼굴에 나타난 아주 작은 변화에 지원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엉켜들기 시작했다.
경훈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좀 길다 싶을 정도로 오래 쳐다보았다. 겨우 1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간호사들과 레지던트, 인턴들이 수없이 오가는 스테이션 한가운데에 서서 한쪽 방향을 바라본 채 가만히 서 있는 것은 충분히 눈에 띄는 현상이었다.
“최 선생님?”
결국 간호사 한 명이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하지만 경훈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간호사들끼리 수상한 눈짓을 교환했다. 그래도 경훈은 몰랐다. 그때 마침 성민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간호사들은 더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
성민의 큰 목소리에 경훈의 신경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경훈은 바로 옆에 서 있는 성민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왜?”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 기분 나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경훈은 뭔가 언짢았다. 그런 그의 기분을 눈치 챘는지 성민이 묻는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야. 왜?”
“아, 잠시만요.”
갑자기 성민이 그의 팔을 잡고 스테이션 밖으로 움직였다. 경훈은 마지못해 끌려가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한적한 복도 한쪽으로 이동한 성민이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밤에 급하게 처리할 일, 있으세요? 한두 시간 후에 퇴근하실 수 있어요?”
경훈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레지던트들이 이런 밝은 표정으로 퇴근 가능 여부를 타진해 보는 건 대개 ‘번개’ 술자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성민이 누가 들을세라 재빨리 부연설명을 했다.
“CS(흉부외과)임 선배님이 오늘 오프라서 집에서 뭉기적거리고 계신답니다. 조금 전에 전화 왔는데 당직 아니면 술먹자시더라고요.”
경훈은 피식 웃었다. 임진규가 오프 날 술자리를 안 만드는 것이 이상하다. CS(흉부외과)도 GS(일반외과)처럼 3D에 속하는 관데 어떻게 된 게 진규 놈은 모든 피로를 술로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었다.
“지가 산대?”
경훈이 묻자 성민이 냉큼 대답했다.
“당근이죠. 우리 모임 규칙 있잖습니까. 술 먹자는 분이 술 산다.”
그 말에 경훈이 쿡쿡, 웃었다. 같은 의대를 다니며 친한 선후배끼리 술을 마시다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주사의모, 즉 술을 사랑하는 의사들의 모임이다.
“몇 시?”
경훈이 묻자 성민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몇 시가 어딨습니까? 일 끝나면 모이는 거죠. 참고로 저는 8시쯤이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적어도 9시 안에는 일 끝내고 ‘할머니 껍데기’ 집으로 모이라는 뜻이었다. 경훈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럼, 좀 있다가 밖에서 뵙겠습니다.”
성민이 신이 난 얼굴로 거수경례까지 하고 복도를 뛰어간다. 경훈은 그런 성민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기분도 그런데 술이나 마시자. 술 마시며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다 보면 이 찝찝한 기분도 나아질 것이다.
“리버를 가상학적으로 보면 이런 모양이지.”
지원은 김원철 선생이 하얀 백지 위에 사람의 배 모양을 그리고 그 안에 간의 위치를 표시하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자이포이드(검상돌기)가 촉진되는 지점에서 약 1, 2센티미터 위에 표시하고 배꼽에서 세 손가락 정도 위에 표시해.”
지원은 김 선생이 그려 놓은 위치를 고개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개복을 여러 번 해온 경험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가장 중요한 건 바울(장)을 안 다치게 하는 거야. 그건 알고 있지?”
“네.”
“이 환자는 배도 두껍지 않고 바울 어드히전(유착)도 없으니까 크게 문제될 것도 없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벌써부터 시작되는 긴장감으로 손바닥에 촉촉이 땀이 배어난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처럼 김원철 선생이 부드럽게 말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긴장해. 걱정하지 마.”
“네, 선생님.”
지원이 각오를 다지듯 또렷하게 대답하자 김원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그가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다.
“오늘 밤에 약속 있어?”
“네?”
지원은 순간 허를 찔린 사람처럼 멍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김원철이 약간은 긴장한 듯 다시 물었다.
“오늘 별일 없으면 술을 곁들인 저녁이나 먹을까? 저녁 먹으면서 내일 수술에 대해 이야기도 좀 하고.”
잠시 혼란이 왔다. 지원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원철의 제안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은 5일 만에 집에 가는 거라 밀린 빨래도 좀 해야 하고…….”
지원은 명백한 거절의 의미를 담은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한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알았어. 싫다는 거지? 오케이, 접수.”
그렇게 말하고 김원철은 책과 자료들을 모아 들고 의국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원은 껄끄러운 감정을 가득 안은 채 멀어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이, 한 선생.”
짐 가방을 들고 1층 로비를 가로지르던 지원은 뒤에서 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성민 선배였다. 그녀의 앞까지 뛰어온 성민이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렸다.
“아이고, 숨차다. 내가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 너, 엘리베이터에 타는 거 보고 열나게 불렀는데. 너 잡으려고 비상계단으로 뛰어왔다, 짜샤.”
“무슨 일, 있으세요? 저, 지금 퇴근하는 건데요.”
“알아, 인마. 아니까 쫓아왔지. 너, 내일 첫 개복 한다며?”
어떻게 벌써 알았는지 성민도 그녀의 첫 번째 개복 기념일이 될 내일 수술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야, 간호사들 사이에 벌써 소문 쫙 퍼졌어.”
역시. 지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마, 그래서 이 하늘같은 선배님이 너한테 미리 축하주 한 잔 사주려고 이렇게 쫓아왔잖냐.”
“축하주요?”
“그래, 축하주. 안 그래도 오늘 술 고파서 술 마시러 가는 중이거든. 그런데 마침 염 간호사가 너, 내일 첫 개복 한다고 하잖아. 그래서 너한테 술 한 잔 줘야겠다 싶어서…….”
“전 됐어요, 선배님.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아요.”
“어허. 하늘같은 선배가 술 한 잔 사주겠다는데 빼긴 뭘 빼! 너, 지금 나한테 대거리하냐? 나도 작년 4월에 첫 개복 했을 때 느꼈던 그 심정을 잘 알아서 그래. 아무리 천하의 한지원이라도 긴장도 되고 걱정도 되고 할 거, 아냐? 그러니까 따뜻하게 술 한 잔 마시고 집에 가서 푹 자란 말이지. 이것도 다 경험자의 충고니까 사양 말고 가자.”
그러더니 성민이 갑자기 그녀의 손에 들린 빨래 가방을 홱 잡아채 갔다.
“선배님!”
지원이 급히 성민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 로비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성민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돼지 껍데기 집이었다.
의대 시절부터 예비의사들의 단골집인 ‘할머니표 껍데기’ 집에 도착하는 순간 지원은 당황했다. 물론 겉으로 표를 내지는 않았다. 성민이 ‘선배님들, 저 왔습니다’ 하고 활기차게 인사를 건넨 테이블에는 이미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지원은 그 중 한 명을 발견하는 순간 표정이 굳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최경훈도 의외라는 듯 짙은 눈썹을 휙 치켜 올린다.
“선배님들, 제가 지원이 데리고 왔습니다.”
“어, 그래. 한지원, 오랜만이다.”
CS(흉부외과)의 임진규 선배가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지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래, 와서 앉아.”
진규 선배가 내어 준 의자는 최경훈의 바로 옆자리였다. 지원은 경훈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성민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원이, 내일 첫 개복 한답니다.”
순간 최경훈이 그녀를 돌아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원은 묵묵히 앉아 애꿎은 술병만 쳐다보고 있었다.
“캬아, 역시 한지원 아닙니까. 범생이가 달리 범생이가 아니라니까요. 남들 2년차나 돼야 하는 걸 1년차 말에 하다니. 야, 한지원. 너 진짜 난 놈은 난 놈이야. 자, 한 잔 받아라.”
지원은 성민이 건네는 술잔을 쥐고 그가 따르는 술을 받았다.
“그래서 제가 지원이 축하도 해줄 겸, 저의 경험담도 들려주고 우리 선배님들의 주옥같은 충고도 들려주기 위해 이 자리에 합석을 시켰습니다. 괜찮으시죠?”
너스레를 떨며 묻는 성민에게 진규가 흔쾌히 대답했다.
“괜찮지. 야, 한지원. 축하한다. 건배 한 번 하자.”
지글거리며 껍데기가 구워지고 있는 숯불 위에서 네 개의 소주잔이 모아졌다.
“한지원의 무사 개복을 기원하며, 건배!”
챙.
술잔이 부딪치고 각자의 잔은 주인의 입으로 흩어졌다. 선배들이 하는 것처럼 지원도 한 번에 술잔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자 이번에는 진규가 술을 따라 준다. 지원은 둘째 잔도 단숨에 비웠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잔을 비울 때마다 따갑게 꽂히는 눈빛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원은 최경훈을 향해서는 일절 작은 눈짓도 보여 주지 않았다.
“옛날에는 그랬죠. 옛날, 옛날 아주 옛날에 말입니다. 외과가 의학계의 꽃이었고 외과를 들어오겠다고 지원하는 놈들이 병원 로비에서부터 병원 밖까지 길게 줄을 서던 그런 시절 말입니다.”
그동안 술이 무지 고팠다며 급하게 마시더니 취하기도 너무 빨리 취해 버린 모양이다. 성민은 다짜고짜 ‘아, 옛날이여!’라는 구시대적 노래를 부르며 자신은 겪어 보지도 못한 과거사를 자기가 겪은 일인 양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느으무 인기가 많다 보니까 위계질서가 완전 짱이었던 그 시절에는 말입니다요. 기강이 너무 엄격해서 개인적인 호칭으로 불렀다가는 그날로 골로 갔다, 이겁니다. 선배? 형? 언니? 그랬다간 다 죽음이었죠.”
성민이 자신의 목을 손으로 쓰윽 긋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그러자 진규가 성민의 뒤통수를 툭 치며 이죽거렸다.
“그니까. 짜식아, 넌 복 받은 거야. 넌 그 시절이었으면 외과 문턱도 못 넘었어. 너, 이실직고해 봐. 미달로 들어왔지?”
“아닙니다! 아, 진짜! 선배님은 왜 맨날 저더러 미달로 들어왔다고 합니까? 경훈 선배님, 말씀 좀 해주세요. 저, 진짜 성적 좋았죠”
“몰라.”
경훈이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자 성민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지원을 돌아보았다.
“지원아, 넌 믿어라. 진짜 이 형들이 일부러 놀리는 거야. 나, 진짜 공부 잘했다. 나,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야.”
“야! 네가 무슨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야? 이 무식한 놈아! 말뜻도 모르면서 갖다 붙이기는. 너희 집 부잔 거 온 병원 사람들이 다 아는데 무슨 개천?”
진규의 말에 성민이 뻔뻔스럽게 웃었다.
“에이, 그래도 시골이잖아요.”
“부산이 시골이냐? 그것도 부산에서 알아주는 유지라며?”
“어쨌든 수도권은 아니잖습니까.”
“잘났다, 새꺄.”
그러자 성민이 배시시 웃었다.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외과가 요즘 너무나 기강이 해이해졌다, 이 말입니다.”
“기강, 기강 하는 걸 보니 네가 어떤 개념 없는 아랫년차한테 채였구나? 뭔 일인데?”
진규가 알 만하다며 묻자 성민이 기다렸다는 듯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어벙한 인턴 한 놈이 레지던트 1년차에서부터 3년차까지 깡그리 무시하고 4년차한테 직접 보고를 했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의사면허증에 잉크도 안 마른 놈이 감히 레지던트의 위계질서를 싸악 무시하고 말입니다.”
“급한 보고였나 보지.”
진규의 성의 없는 대꾸에 성민이 발끈했다.
“아니라니까요! 분초를 다투는 응급상황이었다면 제가 이렇게 성질을 내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보고를 그냥 4년차한테 직접 전화를 해서 보고를 했다 이겁니다. 교수한테 보고 안 한 걸 정말 천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개념 개자식은 아마 4년차가 전화 안 받았으면 담당 교수한테 전화했을 겁니다. 1, 2, 3년차가 껍데깁니까? 왜 세 다리씩이나 다 건너뛰고 의국에서 가장 높은 윗대가리로 가냔 말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일거수다투족으로 집단 린치를 당할 일 아니냐, 이겁니다!”
“그렇지. 죽일 놈이네.”
성민의 흥분에 진규가 맞장구를 쳤고 경훈은 미소 지었다.
“전 정말 그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윗년차가 뭐 시키면 무조건 ‘네’라고 하던 그 시절로. 저기 산을 저쪽으로 옮겨라, 하면 또 ‘예, 알겠습니다’ 하던 시절로요. ‘왜요?’, ‘못하는데요’라는 말 따위는 감히 상상도 못할 그 시절이요. 뭐 가져오라고 시키면 바로 뛰어가야 한다, 이 말입니다. 없는 것도 뺏어 오던, 만들어 오던 그 시절로 진정코 돌아가고 싶습니다.”
성민이 흐느적거리며 찹찹하게 말을 하는 동안 진규와 경훈의 눈길이 약속이나 한 듯 지원에게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성민의 말처럼 위계질서가 그렇게 엄격하고 경직되었던 그 시절이었다면 지원과 같은 캐릭터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무너진 외과의 위계질서 덕을 톡톡히 보는 사람 중 하나가 한지원인 셈인 것이다.
지원은 선배들이 어떻게 보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냥 어느 시점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지 틈만 노리고 있었다. 할 일이 많았다. 집에 가서 내일 있을 수술에 대해 글 한 줄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그런데 잠깐만 앉았다가 가라던 성민은 아예 그녀의 빨래 가방을 자신의 옆구리에 끼고 놓지를 않는다.
“야, 한지원.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인마, 그만해. 너, 취했어.”
진규가 나섰다. 그러자 경훈도 한 소리 했다.
“한지원은 그만 보내.”
그러자 성민이 울상을 지었다.
“선배님들, 왜 그러쎄요? 속상하게. 저도 좀 이뻐해 주세요. 저, 진짜 외로운 놈입니다.”
잘하면 눈물까지 떨어트릴 것 같은 성민의 얼굴에 진규와 경훈, 지원까지 전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성민은 선배들이 조용해지자 신이 난 듯 또 말문을 열었다.
“한지원, 우리 경훈 선배 대단한 사람이다.”
성민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성민의 입담의 주인공이 된 경훈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고 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우리 경훈 선배가 어떤 사람이
냐면 말이야,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어. 그날은 수술이 무지 많았지. 연속으로 세 건을 끝내고 그날 마지막이 될 네 번째 수술을 할 참이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마취과에서 네 번째는 보류하자는 거야. 그 이유인즉슨, 세 번째 수술까지는 예정이 되어 있었는데 네 번째는 계획에 없었다는 거지. 그렇게 급한 수술도 아니니까 보류하자고 한 거야. 한 마디로 알력 싸움인 거였지. 그 전날 외과의 어떤 개념 없는 분이 마취과를 집단 무시하는 발언을 거하게 하셨대. 그러니 어디, 우리 마취과 없이 너네끼리 수술 잘 해봐, 하는 심산이었던 거지.”
성민의 말에 진규와 경훈도 새삼 기억이 나는지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머금는다. 진규는 추임새까지 넣었다.
“그랬다더라. 그때 진짜 난감했을 거야.”
그러자 성민이 더 신이 난 듯 말했다.
“2, 3개월 이상 수술 스케줄이 빡빡하게 잡혀 있는 상태에서 네 번째 수술 환자를 그 수술 스케줄에 끼워 넣을 수가 있겠냐? 수술실 사람들 전부 막막하고 황당해서 멍 때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지. 그런데 그때 우리의 경훈 선배께서 그 넓고 깊은 인맥을 동원한 거지.”
“인맥? 그게 인맥이었냐?”
진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성민이 으하하, 웃었다.
“어쨌든 동기였잖습니까. 그러니까 인맥이죠.”
지원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얼마 전 해부학실의 카데바를 동원해 동혁의 씨 라인 잡는 일까지 연습시킨 최경훈이 그때는 어떤 황당한 일을 벌였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느긋하게 건배까지 하고 술을 두 잔 연거푸 들이켜는 성민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지원은 결국 먼저 묻고 말았다.
“어떻게 했는데요?”
문득 최경훈이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원은 애써 그 눈길을 외면하고 성민만 쳐다보았다.
“보쌈을 해버렸지.”
지원의 눈이 커졌다.
보쌈? 누굴?
“당시 마취과 4년차가 경훈 선배 동기였어. 경훈 선배는 군복무를 먼저 했으니까 1년차였지만 그 선배는 군복무를 안 하고 바로 레지던트 시작해서 4년차였지. 경훈 선배가 그 마취과 동기 목 줄기를 잡고 수술실로 끌고 와버린 거야. 그때 난 인턴이었는데 진짜 가관이더라. 마취과 선배도 한 덩치 했는데 경훈 선배가 그 선배 목을 휘어 감고 질질 끌고 오는데…….”
새삼 그때 일이 생각나는지 성민이 키득거렸다. 지원의 눈길이 최경훈에게 향했다. 무심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성민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보쌈 당한 과부가 수절해서 뭐 하겠냐? 수술실로 끌려온 마취과 4년차는 교수님 앞에서 네 번째 수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지. 결국 그 선배는 나중에 마취과 담당 교수님 앞에 끌려가서 박살이 났다는 아주아주 스펙터클한 전설이 있지. 하하하하.”
정말로 스펙터클(spectacle)하다. 그런데 그게 바로 최경훈답다는 생각이 든다. 최경훈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상황에서 그런 황당한 일까지 저지르겠는가.
“그때 마취과 선배는 박살이 났지만 우리 경훈 선배는 외과의 우상으로 거듭났지. 그때 수술 담당 교수가 누구였는지 알아?”
지원의 눈이 궁금증으로 빛나자 성민이 ‘서프라이즈!’라고 외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바로 정 교수님이야.”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지원은 놀란 표정으로 최경훈을 다시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깐깐한 정 교수님의 칭찬을 들은 최초의 레지던트 1년차가 바로 경훈 선배라, 이 말이야. 그때 정 교수님 눈에 떠오른 표정이 딱 이랬지. 짜아식, 제법이군.”
“하하하, 맞아. 맞아. 그때 그 딱딱한 정 교수 표정이 온화하게 펴지면서 만족한 미소가 떠오르는데, 당시 수술실에 있던 간호사, 레지던트, 전문의 할 것 없이 전부 경이에 찬 표정이었다더군.”
진규도 들어서 알고 있었는지 모두 기억난다는 투였다. 성민이 그 말에 다시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그 후로 정 교수를 그토록 만족시킨 레지던트 1년차는 없었다, 이 말이야. 그런데 내일 한지원, 네가 정 교수님 수술에서 1년차로서는 처음으로 첫 개복을 한다니 내가 이 말을 해주는 거지. 할 수 있겠어?”
성민이 장난스럽게 묻는다. 최경훈이 1년차 때 그랬던 것처럼 지원에게도 정 교수를 만족시킬 수 있냐고 묻는 것이다.
지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답은 뻔했다. 자신은 최경훈처럼 그렇게 인맥이 넓지도 못했고 용감하지도 못했으며 과감하게 규율을 어길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최경훈처럼 정 교수를 만족시키는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 자. 우리 한지원, 너무 겁먹지 말고 이거 한 잔 마시고 파이팅 해. 정 교수님 수술이라고 너무 겁먹지 말고 첫 개복이라고 손 떨지 말고 평소의 강심장, 한지원답게.”
성민이 술병을 들고 지원을 향해 팔을 뻗었다. 지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여섯 잔째다. 이렇게 마시다가는 집에 가서 뻗기 십상이다.
“전 이제 그…….”
지원이 술을 마다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누군가의 팔이 쑥 뻗어 나오더니 성민이 들고 있는 술병을 낚아채 가버렸다. 성민과 지원의 눈이 술병을 낚아채 간 최경훈에게로 향했다.
“왜요?”
성민이 곧장 물었다. 그러자 경훈이 대꾸한다.
“그만 줘. 내일 첫 개복이라잖아.”
“에이,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야, 한지원. 너 취했냐?”
성민이 지원에게 고개를 돌려 전투적으로 물었다. 여기서 취했다고 대답하면 ‘선배한테 대거리하는 거다’라고 협박하는 투였다. 하지만 지원에게 통할 협박이 아니다.
“아뇨, 취한 건 아니지만 그만 마시고 싶습니다.”
똑 부러지는 지원의 말에 성민이 우거지상을 썼다. 그러더니 진규를 향해 어린양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거 보세요, 선배님. 1년차가 감히 2년차의 술을 거부하다니. 옛날 같으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말셉니다, 말세!”
퍼억.
성민의 뒤통수에 불이 났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성민의 눈길이 자신의 뒤통수를 가격한 경훈에게 향했다. 물론 자신을 때린 윗년차에게 존경심이 담긴 눈빛은 아니었다. 부라린 눈이 ‘왜 때려요!’ 하고 악다구니를 퍼붓는 것 같았다.
“눈 깔아. 이게 어디서 감히 2년차가 3년차한테 눈을 부라려? 옛날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성민이 한 대로 그대로 갚아 준다. 지원과 진규는 성민 몰래 피식 웃었다. 성민이 울상을 지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경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원을 쳐다보았다.
“그만 마시고 오늘은 이만 일어서자.”
“벌써?”
이번에는 진규가 나섰다. 몹시 아쉬운 투다. 물론 성민도 언제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싹 잊어버리고 경훈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아직 초저녁인데요.”
밤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 초저녁이라니. 지원은 성민을 향해 속으로 혀를 찼다.
“나도 내일 아침 일찍 키드니 TPL 있어.”
“에이, 언제부터 선배님이 다음날 아침 수술까지 신경 쓰면서 술을 마셨어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성민이 찡얼거리자 경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도 이제 늙어서 힘들다. 옛날에는 새벽까지 술 퍼마시고 집에 가서 책 볼 수 있었는데 이젠 몸이 안 따라 준다. 그러니까 늙은 선배 술 먹이지 말고 놔줘.”
“꼴랑 1년차 가지고 뭘…….”
성민이 중얼거리자 경훈이 인상을 썼다.
“이 새끼가 어디서 세월을 지 맘대로 까먹어. 너하고 나하고 레지 1년 차지, 나이도 1년 차냐? 내가 군대 안 갔다 왔으면 넌 내 얼굴도 못 쳐다볼 까마득한 후배야, 새꺄.”
“아, 예.”
성민이 즉각 찌그러졌다. 경훈이 그런 성민을 보며 웃고는 진규를 쳐다보았다.
“한지원하고 난 먼저 갈 테니까 넌 이 자식하고 술 좀 마셔 줘라. 오늘 CPR 두 건이나 떠서 떡 쳤단다. 아마 술 더 마시고 싶을 거다.”
“오케이. 나도 며칠 동안 마누라 눈치 보느라 술도 못 마셨는데 오늘 지대로 마셔 볼란다.”
경훈이 눈치를 주자 지원은 자리에서 일어서 성민이 끼고 앉아 있는 빨래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경훈이 더 빨랐다. 성민의 엉덩이를 발로 퍽 차서 공간을 확보하더니 그 틈새로 손을 뻗어 가방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가방은 곧장 경훈의 손에 안착되었다.
지원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그런데 그는 그녀의 손을 싹 무시하더니 곧장 계산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여기 얼맙니까?”
그러자 진규가 벌떡 일어섰다.
“어이! 우리 더 마실 건데 뭔 계산이야? 내가 할 거니까 냅둬!”
“됐어. 지금 마신 것까지만 계산할 테니까 나머지 추가분은 네가 해.”
진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훈은 지갑을 꺼내 계산을 치렀다. 지원은 그런 그의 뒤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계산을 마치고 돌아설 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가방 주세요.”
그러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선배가 후배 가방 좀 들어 주는 것도 안 되냐?”
지원이 가만히 있자 경훈이 몸을 틀어 입구로 향했다. 그녀도 그냥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안 될 건 없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아주,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그 어떤 일에서도 최경훈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서 뭔가를 주는 사람은 나 하나여야 한다. 동거를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사람을 위해서 뭐든 다 해주고 나면, 내 마음속의 그를 지울 수 있을 만큼 다 해주고 나면 깨끗해질 거니까.
그러니까 원 없이 주고, 원 없이 보고 싹 지워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그의 호의를 받게 되면 애써 세운 계획이 모두 틀어져 버리는 것이다.
드르륵.
경훈이 문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이 먼저 열렸다. 지원은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문을 열고 이제 막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게 되었다
.
“아.”
놀란 탄식음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김원철이 전문의인 이민수 교수와 함께 서 있었다.
“어? 여기서 보네.”
이민수 교수가 경훈을 향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경훈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예, 교수님.”
지원도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민수 교수가 지원과 경훈을 번갈아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둘이 술 마시러 왔어?”
충분히 숨은 의미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단둘이 술 마시러 왔냐고 묻고 싶은 것이 아니라 둘이 사귀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아닙니다. 저기 앉아 있는 놈들과 마시고 저희는 먼저 나가려는 중입니다. 둘 다 내일 아침에 중요한 수술이 있어서요.”
경훈이 나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이민수 교수의 눈길이 테이블을 쭈욱 훑어보더니 진규와 성민을 발견한 모양이다.
“아, 그랬군.”
어째 아쉬운 투다. 뭔가 병원 내에서 가십거리가 될 거리를 물었다가 놓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원은 그런 이민수 교수에게서 눈을 돌려 김원철 선생을 바라보았다.
난감하다.
‘오늘 별일 없으면 술을 곁들인 저녁이나 먹을까? 저녁 먹으면서 내일 수술에 대해 이야기도 좀 하고.]
[오늘은 5일 만에 집에 가는 거라 밀린 빨래도 좀 해야 하고…….
‘
그의 제안에 거짓 변명을 늘어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지원은 난감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원철의 얼굴은 납빛으로 변했다.
“오늘 바쁜 것 같더니 이것도 그 중 하나였나 보군.”
그녀를 향한 목소리가 몹시 언짢은 기색이었다.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원의 표정도 굳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눈치 챈 경훈의 입가도 경직되었다.
“자, 그럼 갈 사람은 가고 우린 자리에 앉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이 교수가 먼저 앞서자 김원철도 경훈과 지원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지원은 잠시 그런 김원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갈 거야? 남을 거야?”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원은 고개를 돌렸다. 최경훈이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무슨 뜻으로 그런 걸 묻는 걸까?
지원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고 당연한 듯 대답했다.
“갈 겁니다.”
‘할머니표 껍데기’ 집을 나와 아파트 방향으로 걷는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원의 빨래 가방은 여전히 경훈의 손에 들려 있었고 그녀는 그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민수 교수와 김원철 선생이 함께 술을?
이민수 교수는 강정만 교수가 이끄는 간이식 팀의 스태프 중 한 명인 주니어 교수였다. 그건 뭔가 좀 찜찜한 상황이다.
소문에 의하면 김원철 선생과 최경훈이 강정만 교수 팀에 들어가기 위해 지원을 한 상태고 강 교수는 두 사람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 두 사람 중 하나인 김원철 선생이 강 교수 팀의 스태프인 이민수 교수와 단둘이 술을?
강정만 교수는 자신의 팀에 들일 인재를 뽑는데 있어서 팀원들의 의견을 중요시했다. 어느 수술이나 마찬가지지만 이식 수술처럼 수술 시간이 길고 정교함을 극도로 요구하는 수술에서는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강 교수는 현재 팀원들과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가를 우선적인 기준으로 삼는 걸로 유명했다.
그러니 현재 스태프인 이민수 교수와 강 교수의 팀원이 되고 싶은 후보자 중 하나인 김원철의 사적인 만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지원은 몇 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경훈을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조금 전, 김원철 선생과 이 교수를 봤으니 뭔가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띠리링.
잠금 해제 음이 울리자 지원은 곧장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덜컥, 문이 열리고 센서등이 불을 밝혔다.
지원은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불안했다. 이사 당일에는 이삿짐이 아직 정리도 되지 않았던 상황이라 당연히 평소 그녀의 아파트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기대도 없었고 유심히 보지도 않았다.
그가 이사하던 날, 밤늦은 시각에 귀가해 곧장 방으로 들어갔고 다음날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병원으로 출근했기 때문에 집 안이 어떻게 변했는지 전혀 모른다.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원은 내심 불안했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바로 코앞의 일도 계획하고 실천하는 그녀였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주변 환경이 늘 그 자리에, 그 상태로 있기를 바라고 안정적이기를 원했다. 변화와 도전적인 삶보다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계획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 거부감이 컸다.
최경훈이 바로 그런 거부감의 일종이다. 계획하지 않았던 심장의 움직임.
그를 향한 마음은 그녀가 전혀 계획하지도 상상하지도 않았던 돌발적인 일이었고 그것에 대한 대책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만도 오래 걸렸고 그 일을 극복해내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도 오래 걸렸다.
이제 그녀는 그를 극복해내기 위한 방법을 실천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절대적으로 혼자만의 공간이었던 아파트에서 그와 함께 생활해야 했고 익숙한 물건들 틈 사이에서 낯선 물건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녀의 눈길이 무심코 자신의 슬리퍼가 아닌 남자용 슬리퍼에 머물렀다. 갈색과 검정색이 섞인 낡은 면 슬리퍼였다. 와인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것과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모양이고 색깔이었다. 한집에 이렇게 다른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는 것이 정말로 어울리지 않았다.
탕.
그가 뒤따라 들어오며 현관문도 닫혔다. 외부와의 단절. 이젠 그와 그녀뿐이다. 지원은 슬리퍼에서 눈길을 돌리고 거실로 몇 걸음 내딛었다.
TV, 오디오, 소파…….
거실의 물건들을 조용히 훑어보던 그녀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이상하다. 달라진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닷새 전, 그녀가 나가던 때와 똑같았다. 아니, 그때는 풀지 않은 박스들이 거실 한 켠에 쌓여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다. 새로운 입주자 따위는 없다는 듯 그녀의 거실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녀의 눈이 자연스럽게 현관 입구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방의 가구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침실은 이 방으로 정했어.”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의 가구들을 한 번에 설명해 주었다. 싱글 침대와 장롱 두 짝이 들어가니 방이 꽉 차 보였다. 바닥에 쌓인 몇 겹의 책들은 그가 오늘 아침까지 보았을 것이라 짐작이 되고 침대 옆에 놓인 낮은 책장에 꽂힌 책들은 언제든 필요할 때 뽑아 볼 수 있는 전문서적들이었다.
지원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최경훈답다.
안방 건너편에 있는 방이 지금 이 방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지금 이 방에 놓인 가구들이 그쪽 방으로 간다면 훨씬 넓게 침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경훈은 지극히 보수적인 관념에 의거해 그녀의 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입구 방으로 자기 침실을 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
“저 먼저 들어갈게요.”
달리 할 말도 없었고 단둘이 어색하게 서 있는 시간도 참기 싫어서 지원은 그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는 그녀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차 한 잔 할래?”
지원은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싱긋 웃으며 빨래 가방을 내민다. 그녀는 그제야 생각이 난 자신의 빨래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의 잔잔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다시 울렸다.
“하우스메이트가 된 기념으로 축하주는 못 들어도 차 한 잔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닷새 동안 묵힌 빨래를 종류별로 분류하고 일차적으로 필요한 옷가지들을 먼저 세탁기에 넣어 돌린 다음 지원은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은 거실과 달랐다. 그리고 여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원이 혼자 사용하던 주방은 유명무실한 남는 공간에 불과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주방이라는 개념은 간단한 차를 끓여 마시는 정도의 용도였다.
그런데 최경훈이 서 있는 주방은 그녀가 지금껏 알고 있던 공간과 달랐다.
활발한 기가 느껴지는 곳, 제대로 된 음식을 해먹는 곳, 뭔가가 끓고 탁탁탁 칼질하는 소리가 어울릴 것 같은 곳, 마치 화목한 가족들이 둘러앉아 두런두런 웃으며 식사를 즐기는 그런 공간으로 느껴진다.
그녀가 없는 닷새 동안 아파트의 주방은 그렇게 변해 있었다.
처음 보는 그릇들과 냄비들, 애초에 그녀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작은 전기밥솥, 싱크대 위 선반에는 수저들과 조리기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다른 쪽, 또 다른 선반에는 양념통들이 일렬로 줄을 맞추어 정렬되어 있었다. 휑했던 주방은 온갖 물건들로 가득 채워졌지만 지저분하거나 정리정돈이 안 되어 보이기는커녕 깔끔한 정리 덕에 비어 있던 예전보다 훨씬 깨끗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달그락.
“마셔.”
그녀가 식탁 의자를 빼내어 앉자 경훈이 곧장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 하나를 내려놓았다. 지원은 향긋하게 피어오르는 유자 향을 코끝으로 느꼈다.
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녀의 눈길이 저도 모르게 선반 위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유자차 병으로 향했다. 그녀가 두었던 그대로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그 옆에 더 큰 병이 하나 더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 병에도 유자차로 보이는 내용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병은 깨끗했다. 어느 회사에서 만들어진 어떤 유자차라는 상표 따위는 없었다.
“시골에서 어머니가 직접 담그신 거라 네가 마시던 거와는 좀 다를 거다”
출처를 알 수 없던 큰 유리병의 정체가 설명되었다.
지원은 그의 어머니가 손수 담갔다는 유자차를 한 모금 맛보았다.
부드럽다. 달콤하지만 너무 달지 않고 깊은 향이 느껴졌다.
슈퍼에서 아무거나 눈에 띄는 대로 달랑 사들고 왔던 것과는 다르다. 딱 한 번 마셔 본 후 너무 강한 단맛에 질려 다시 손도 못 대고 선반 위에 방치해 버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문득 무안해진다. 이런 차를 마시던 사람에게 싸구려 유자차를 대접이라고 했으니…….
“많으니까 유자차 마시고 싶으면 이걸로 마셔.”
“…….”
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유자차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눈이 저절로 감긴다. 하루의 피로가 이 한 잔의 차에 의해 녹여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위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질 만큼 온기가 가득했다.
심장까지 따스함이 전해지고 지난 닷새 동안 바짝 곤두섰던 신경들도 모두 노곤해지고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한지원.”
문득 느슨해진 신경 사이로 부드러우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원은 눈길을 들어 맞은편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관계, 개선이 좀 필요한 것 같지 않아?”
우리 관계…….
지원은 그의 입에서 나온 ‘우리 관계’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긴장했다.
사전학적으로 볼 때 ‘관계’란 사람들이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라는 대명사가 ‘너’와 ‘나’를 하나로 묶으면서 ‘관계’라는 단어 앞에 쓰이자 그것은 마치 ‘너와 나의 특별한 사이’라고 인식이 되었다.
그와 그녀는 전혀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단순한 하우스메이트였고 앞으로도 ‘특별한’이라는 형용사가 의미하는 의미심장한 관계가 될 가망은 전혀 없는 사이였다.
“어떤 점을요?”
그와 개선할 관계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우선은 그가 필요로 하는 개선점에 대해 들어 보고 싶었다.
“이제 한집에 살 사람들인데 좀 친하게 지내자고.”
별로 달갑지 않은 제안이다.
“아무리 집 안에서 마주치는 시간이 적다고 해도 이렇게 어색해서는 서로 불편하지 않겠어?”
그는…… 불편한 걸까?
“내가 좀 구식이라 여자 후배하고 한집에 사는 걸 꺼려한 건 사실이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친한 선후배로 지내도 괜찮잖아.”
성격 좋은 그에게는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었다. 그를 옆에 두고 함께 살 결정을 했을 때 가까운 사이가 될 거라는 것쯤은 예상했다. 그러니 이런 제안은 충분히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녀의 성격이 문제였다.
“전 선배처럼 사회 친화적인 성격이 못 돼서 금방 그렇게는 안 돼요.”
“누가 사회 친화적이야?”
그가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다. 지원은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최경훈이 피식, 웃었다.
“인마, 나도 낯 많이 가려. 조직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다 보니까 억지로 말도 많이 하고 웃고 다니는 거지. 알고 보면 나도 내성적인 남잔데.”
지원은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최경훈이 내성적이라니,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다. 선배들이나 교수님들께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깍듯하고 동기나 후배들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장난기가 넘쳐서 그의 주위는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난다. 천성적으로 모나지 않은 성격 탓에 언제 어디서든 그 상황과 분위기에 맞게 스며드는 인간형이었다.
그런 사람이 낯을 가리는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말도 안 된다는 그녀의 비웃음이 전해졌는지 경훈이 정색을 했다.
“못 믿겠으면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든지. 어릴 때 너무 낯을 많이 가려서 낯선 사람만 보면 울어 젖혔단다.”
지원이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자 그가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디 보자. 그게 몇 살 때까지였냐면…… 두 살? 세 살?”
하!
지원은 이번엔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입을 살짝 벌렸다. 두 살, 세 살. 아기 때 낯 가렸던 걸로 내성적이라고 말하는 최경훈이 정말 어이가 없었다.
“훗.”
그녀의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가에도 주름이 잡히고 입 꼬리도 늘어졌다. 정말 못 말리는 남자다.
“안 울면 사탕 준다고 해서 그거 얻어먹으려고 낯선 사람을 보고 안 울기 시작한 거지. 그 후로 모르는 사람을 보면 잔뜩 겁도 먹고 울상은 지었지만 안 울었대. 사탕 얻어먹으려고.”
엄마 품에 안겨 사탕을 얻어먹기 위해 용을 쓰고 있는 최경훈의 아기 때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그는 어떤 아이였을까? 십중팔구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을 것이다. 새 옷을 입고 나가서도 반나절 만에 헌 옷으로 만들어 버리고,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죄다 저지르고 다니는 그런 골목대장이었을 것이다. 성인이 된 그의 얼굴에서 여전히 장난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낯가리는 것과 내성적인 성격은 고칠 수 있어.”
그가 미소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사탕 얻어먹으려고요?”
그녀가 그의 말을 흉내 내어 대꾸하자 경훈이 웃었다.
“그래.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활발한 성격으로 변하면 얻는 게 많지.”
“대신 잃는 것도 많죠.”
지원의 무뚝뚝한 대꾸에 경훈이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뭔가를 묻고 싶은 눈치다. 가령, 사람들과 어울려서 뭔가를 잃어 본 적이 있느냐는 식의 질문. 하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장난기 서린 약속을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하고 친해져서 잃게 되는 건 없을 거야. 장담해.”
정말일까?
지원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있다. 혼자만의 삶을 잃었고 가끔씩 느껴지는 심장의 아우성 때문에 일에 충분히 집중할 수도 없다. 제일 꺼려했던 변화와 도전이라는 상황을 내 손으로 만들어야 했고 이제부터는 그에게 빼앗겼던 내 심장을 되찾아 와야 하는 혼자만의 전쟁도 치러야 한다.
그런데 그와 친해진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해 모든 것이 궁금한 지금보다 나아질지도 모른다. 친한 선후배 사이로 발전해 허물없이 지내게 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최경훈에 대한 선망과 동경, 그리고 막연하게 그저 좋기만 한 이 감정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편안한 친근함이 대신할 수도 있었다.
“전 방법을 몰라요.”
정말이다. 지원은 누군가와 친해지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자 그가 씨익 웃었다.
“내가 알아. 넌 그냥 내가 하는 대로만 하면 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지원이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최경훈의 웃음기 실린 목소리가 말했다.
“날 피하지 않는 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