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Purity RAW novel - Chapter 7
6. 나의 눈 속에 네가
지원은 아침 일찍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나왔다. 수술이 끝나고도 이것저것 뒷정리와 미처 처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정리하느라 한참 뒤에서야 비로소 의국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의국은 비어 있었다. 수술 시간 내내 서 있었더니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의 아무것도 보지 않고 곧장 소파로 다가가 털썩,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너무 피곤했다.
새벽녘에야 잠이 든 데다 수술이라도 순조로웠다면 좀 나았을 텐데 그렇지가 못했다. 신장이식 수술이었는데 혈관이 너무 약해서 건드리는 곳곳마다 터지는 바람에 예상했던 시간을 훨씬 초과하는 까다로운 수술이었다.
오늘, 입국식이 있어서 오후부터는 2년차들끼리만 환자를 봐야 하는데…….
한숨을 푹 내쉬던 지원의 눈이 갑자기 퍼뜩 떠졌다.
분과 편성! 오늘, 외과 레지던트들의 분과와 소속될 조가 발표된다.
지원은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성급한 눈길이 의국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로 향했다. 수술 일정표와 특이사항 등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이 화이트보드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A4 용지로 향했다. 윗면만 고정된 A4 용지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거리고 있었다.
지원은 몸을 일으켜 벗어 놓았던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그리고 다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화이트보드로 향했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이름은 최경훈이었다.
어제 동혁이 말한 대로 그는 간이식 파트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적힌 김원철은 혈관외과로 편성되어 있었다. 지원의 눈길이 최경훈이라는 이름 아래쪽에 나열된 이름들로 향했다. 해당 분과에서 나누어진 조에서 팀장인 4년차 이름 아래로 적힌 이름은 같은 조로 편성된 것이다.
“젠장.”
지원의 입에서 나지막한 설이 새어 나왔다. 같은 조다. 최경훈과 같은 조였다.
간이식 및 간담도췌외과 치프, 최경훈.
3년차, 이성민.
2년차, 한지원.
1년차, 박우석. 김해인.
인턴, 홍완표. 하종안.
“김해인까지…….”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처럼 탄식이 새어 나왔다.
최경훈과 한 팀인 것도 버거운데 하필이면 김해인과도 같은 조라니. 정말로 같은 팀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들을 일부러 묶어 놓은 것 같았다. 예쁜 얼굴 내세워, 실수하고 잘못해도 애교 부리면 다 되는 줄 아는 김해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다른 윗년차들처럼 최경훈이 만약 김해인을 감싸고돌기라도 한다면……?
입 안에서 욕설이 맴돌았다. 그럴 경우, 자신이 어떻게 대처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성민 선배는 지금쯤 입이 귀에 걸렸을 것이다. 자진해서 김해인이 관리하는 어장으로 들어간 사람이니 같은 조가 됐다는 걸 알고 얼마나 신이 날까?
“휴우…….”
그녀의 눈길이 김원철의 아래에 있는 이름들로 향했다. 최경훈의 팀이 되기를 그토록 바라던 동혁이 있었다. 김원철 선생의 팀은 절대 싫다고 했는데 같은 팀이 돼 버린 것이다. 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은 심정이다. 김원철 선생도 과히 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멋대로 뛰어대는 심장 간수를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 3개월만 참으면 되는데 뭘.”
3개월 후면 다른 분과로 간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견디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원의 얼굴은 전혀 편안해지지 않았다. 3개월 동안 최경훈과 매일매일 얼굴 맞대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그에게 의논하고 보고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어지러워진다.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건 정말 바라지 않았는데…….
의국 문이 열리고 김원철 선생이 들어올 때까지도 그녀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왜 별로 안 좋은 얼굴이야?”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고개를 돌리는 지원의 표정을 본 원철이 대뜸 물었다. 지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원철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화이트보드에 붙어 있는 A4 용지를 들여다보았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최경훈 팀이잖아.”
“…….”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는 지원을 향해 그가 고개를 돌렸다.
“좋아하는 마음, 들킬까 봐 그래?”
이 사람은 왜 이럴까? 뭘 확인하고 싶은 걸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김원철 선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비싼 원두커피를 사다 주고 병원 밖의 식당까지 찾아가 도시락을 포장해 그녀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아침에는 빵집에서 갓 구워낸 베이커리를 사와서 병원 안 정원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불편하기만 했다. 김원철 선생의 노력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그녀의 마음은 거부감으로 벽을 쌓았다.
게다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직접적으로 물어올 때면 그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남자는 이럴 수도 있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걸 알고도 아무렇지도 않는 걸까?
“최경훈은 아직 모르나? 네가 자길 좋아하는 거.”
“…….”
“의외로 무디네. 내 눈엔 정확히 보이는데 그 자식은 아직 눈치도 못 채고 있다는 게.”
돌아오는 대꾸도 없는데 김원철은 혼자서 잘도 말을 잇는다. 그러다가 그가 진지하게 묻는다.
“고백을 해보지 그래? 내 생각에는 네가 고백하면 최경훈도 과히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말끝에 묻어나는 비웃음은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원철은 여전히 제 할 말만 늘어놓는다.
“너 정도면 썩 괜찮은 여자야. 내가 그렇게 눈이 낮은 편은 아니거든. 모르지, 어쩌면 최경훈도 속으로는 널 마음에 두고 있는지도. 네가 사귀자고 하면 그 자식도 흔쾌히 좋다고 할지 몰라. 그러면 내가 완전히 지는 건가?”
그가 손가락으로 A4 용지를 툭 튕겼다.
“여기 보다시피, 1차전은 내가 뒤로 밀렸어.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야. 먼저 간이식을 돈다고 해서 꼭 미라클 팀원이 되라는 법은 없으니까.”
원철이 이번에는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비릿한 웃음 한 자락이 걸려 있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지금은 네 마음이 그 자식을 향해 있다고 해도 난 포기 안 해. 난 포기라는 걸 한 적이 없거든. 특히 경쟁자가 있을 때는 더더욱. 많이 좋아해라. 질릴 때까지 그 자식을 좋아해. 네 그 마음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그럼 그때는 내게도 기회가 오겠지. 나는 그 기회를 반드시 붙잡을 생이다. 일이든 사랑이든 마지막에 가지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니까.”
지원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지만 원철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돌아선다. 저벅저벅 의국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너무나 언짢았다. 그러다 결국 폭발했다.
“선생님.”
그녀의 부름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지원은 몇 걸음을 옮겨 김원철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지원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예전엔 미라클 팀에 최 선배보다 선생님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보니, 선생님은 절대 미라클 팀에 들어가선 안 될 것 같습니다.”
김원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유는?”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하지만 지원의 얼굴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미라클 팀의 명성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뛰어난 의술 하나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라클 팀이 그 수많은 이식 수술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건, 세계 최고의 팀워크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아요. 의술을 익히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야심과 욕심을 앞세우지 않아요. 오직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건강을 되찾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그 한 가지 목적만이 모든 팀원들의 목표고 바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새로 선발될 펠로우는 기존 팀원들과의 융화(融和)와 조화(調和)가 가장 우선적인 조건이라고 들었습니다.”
김원철의 입술 모양이 일그러졌다.
“그 말은, 난 네가 말하는 그 융화와 조화를 이루어내지 못할 거라는 뜻이야?”
지원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면에서 최경훈 선배가 가장 적격자라는 확신이 듭니다. 경훈 선배는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우기보다는 팀원들과 협력해 환자를 살리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둘 사람이니까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경훈 선배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환자일 테니까요. 그건 미라클 팀원들도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지원은 잠시 망설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도가 지나친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의 무례가 신경을 건드렸고 또 달갑지 않은 집착이 계속될 것 같아서 더 이상의 인내는 무의미하다고 판단이 들었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멈추는 것 또한 별 의미가 없다.
그녀는 잠시 멈추었던 말을 다시 이었다.
“전 선생님이 쟁취해야 할 목표물이 아니에요. 선생님 말씀대로 경훈 선배를 향한 제 마음이 닳고 닳아 질릴 정도로 된다고 해도 선생님을 향해 돌아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절 사이에 두고 경훈 선배와 경쟁하실 생각이라면 이쯤에서 그만둬 주세요. 아니, 그만두세요. 더 이상의 진전은 저도 불쾌합니다.”
그녀가 야무지게 말하는 동안 원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끝맺고 나서도 한동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반응이라도 보일까 싶어 기다리던 지원이 그만 돌아서려던 때에 비로소 김원철이 입을 열었다.
“넌 내가 널 그렇게 여긴다고 생각하는구나.”
지원의 눈길이 다시 원철에게 향했다. 그가 짐짓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네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린다고 했던 말이 그런 식으로 해석되다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한지원.”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자 김원철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일그러졌다.
“네 말처럼 최경훈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특히 그 자식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미라클 팀원들에게도 크게 작용할 거야. 때문에 난, 최경훈을 이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생각이다. 또, 너도 마찬가지야. 네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난 아주 끈질긴 놈이거든. 네가 먼저 포기하고 날 받아들이게 될 거야. 너도 언젠가는 내 진심을 알아주고 우리가 얼마나 닮은 사람인지, 우리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될 거다.”
문득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그와 나는 닮았다.
김원철, 그 또한 자신의 세계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목표 달성과 승자와 패자로만 보려 하는 편협한 그의 생각은 주변사람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누구도 믿지 못하는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 바로 나처럼.
“안 됐다, 신동혁.”
울상을 짓고 있는 동혁의 옆에서 성민이 계속 깐죽거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하지만 목소리에 묻어 있는 웃음기는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절대 피하고 싶다던 김 쌤 조에 들어가다니. 역시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던 게야.”
동혁이 찌릿 성민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자 성민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시련을 주시기로 하신 거지. 뻑하면 정신줄 빼놓고, 덤벙덤벙 일만 저지르는 네 놈의 버릇을 확실히 고쳐 주기 위해서 우리 교수님들께서 합심을 하신 게지. 그러니까 널 김 쌤 팀에 밀어 넣은 거지. 안 그러냐?”
“쌤은 그게 그렇게 좋습니까?”
동혁이 원망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성민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널 위해서야. 고생이 좀 되더라도 김 쌤 밑에서 잘 배워. 너한테 그게 훨씬 도움이 될 거야.”
“그래도 전 경훈 쌤 스타일인데.”
“자식아, 경훈 선배 밑으로 가면 편할 것 같냐? 니들이 몰라서 그래. 원래 한결같은 사람이 대하기는 더 쉬운 거야. 원철 쌤은 한결같이 성질이 더럽고 차갑잖냐.”
“경훈 쌤도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잖습니까.”
“웃기고 자빠졌네.”
동혁의 말에 성민이 콧방귀를 뀌었다.
“왜요? 경훈 쌤, 좋잖아요. 쌤도 경훈 쌤을 제일 좋아하잖아요.”
성민이 쯧쯧, 혀를 찼다.
“난 우리 병원에서 경훈 선배가 제일 무서워, 인마.”
“예에?”
동혁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성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경훈 선배가 그냥 보기엔 사람이 좋아 보이지? 그런데 한 번 화나면 아무도 못 말려. 워낙 도덕적인 휴머니스트라 상대방의 입장을 되도록이면 이해하려고 하는 점은 있어. 그래서 후배들이나 동기들, 선배들도 모두 경훈선배를 사람 좋게만 보는 거야. 하지만 뭔가 도리에 어긋나는 걸 절대 용납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지. 책임감 없는 놈, 노력하지 않는 놈, 게으른 놈, 권모술수만 부리는 놈, 약한 자 괴롭히는 놈, 앞에서는 살살거리면서 뒤에서는 농땡이 까는 놈, 기타 등등. 그런 놈들한테는 가차 없는 사람이야. 내가 경훈 선배하고 몇 년을 동고동락하고 같이 어울려 다녔지만 아직도 난 그 사람을 모르겠어. 얼마 전까지 아파트에서 같이 살던 영규 선배도 경훈 선배의 속은 알 수가 없대. 그런 사람이야.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 그러니까 한결같이 독하고 차가운 사람보다 훨씬 무서운 거지.”
“정말요?”
동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어쩌면 원철 쌤보다 경훈 쌤이 더 무서울 거다. 너, 경훈 쌤한테 한 번도 혼 안 나 봤지?”
동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경훈 쌤이 너한텐 왜 너그러운 줄 알아?”
이번에는 동혁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넌 노력하기 때문이야. 네가 좀 굼떠서 그렇지, 하려고 애는 쓰잖아. 경훈 선배는 그런 사람한테는 한없이 좋은 사람인 거야. 그러니까 원철 쌤 조 됐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열심히 해. 만약 네가 경훈 선배 팀에 들어갔다고 해도 절대 수월하지는 않았을 거니까. 원철 쌤 밑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란 말이야. 알았냐?”
원철 쌤보다 경훈 쌤이 더 무섭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동혁은 그저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동혁을 보며 성민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언젠가 뺀질거리고 후배들한테 힘든 일은 죄다 미루고 요리조리 피해만 다니던 동기 놈이 경훈 선배한테 어떻게 당했는지 알려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언젠가는 직접 보게 될 테니까. 어쩌면 그 당사자가 동혁일 수도 있고.
성민은 속으로 쿡쿡, 엉큼하게 웃었다.
진짜, 어떤 개념 없는 놈이 경훈 선배한테 한 번 걸리면 좋겠다. 그럼 아주 좋은 구경거리가 될 텐데. 그리고 경훈 선배를 선하고 착한 선배로만 알고 만만하게 대하는 후배 놈들에게도 제대로 경각심을 심어 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선생님, 안 가세요?”
스테이션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경훈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성민이 신이 나 죽겠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이 자식은 술이라면 대서양도 건널 놈이다. 특히 공짜 술이라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총알처럼 튀어올 놈이다. 안 그래도 오늘 입국식을 일식집에서 한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전부터 오늘이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놈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좋아 죽을 것 같은 얼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가야지.”
경훈은 주위를 둘러보며 대꾸했다. 참 빠르기도 하다. 조금 전에만 해도 눈앞에서 얼쩡거리던 1년차와 3년차 놈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새 다 입국식에 참석하러 나간 것이다.
병원을 지켜야 할 2년차들 몇 놈만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원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 아침부터 수술실에 들어가더니 아까 오후에도 수술실 일정인 것 같았다. 아마 점심은커녕 저녁 먹을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경훈은 성민을 향해 말했다.
“2년차들 밥이나 챙겨 먹이고 가자.”
“예에?”
이게 무슨 김빠지는 소리냐는 얼굴로 성민이 손을 내저었다.
“에이, 쌤. 그러지 마시죠? 애들도 아닌데 자기들끼리 알아서 먹겠죠, 뭐. 정 뭐하면 횟집 가서 이쪽으로 초밥 배달시키면 되고요. 그럼 아마 엄청 감동 먹을 겁니다. 아, 맞다. 한지원도 초밥 좋아하던데. 오늘 한지원이 무지 고생이에요. 까다로운 수술이 세 건이나 있었는데 세 건이 연달아 있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어요. 아마 지금쯤 녹초가 됐을 겁니다.”
안 그래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에 성민의 말을 듣자 경훈의 마음은 더 묵직해졌다.
“그래서? 아직도 지원인 수술실에 있어?”
“아뇨, 좀 전에 끝나서 나왔습니다. 지금은 의국에서 차트 정리하고 있어요. 오늘 수술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해서 그거 하느라 또 똥줄이 빠질 겁니다. 게다가 1년차부터 4년차까지 죄다 빠져 버리니까 당직까지 서야죠. 한지원, 내일쯤 되면 완전 뻗어 버릴 걸요?”
걱정으로 일그러지는 경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민은 남 일 말하듯 천하태평이었다. 그러면서 얼른 가자고 조른다.
“빨리 일어나세요. 로비에서 기다릴게요.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또 응급환자라도 들어오면 발목 잡혀요. 그러니까 빨리 오세요.”
그리고 쌩하니 가버린다. 그런 성민을 보며 경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가 또 문득 인상을 썼다. 내내 굶고 있을 지원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 감정이 뭔지 분석해 볼 생각도 없이 그저 그 녀석이 걱정되고 안쓰럽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머, 선생님. 국식에 안 가셨어요?”
복도에서 마주친 간호사가 경훈을 발견하고 놀라서 물었다. 경훈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예, 볼일이 좀 남아서요.”
“저런, 레지던트 선생님들 전부 가시고 없는데. 대충 처리하고 빨리 가세요.”
간호사의 얼굴에는 공식적인 회식 자리에 나가지도 못할 만큼 일이 밀린 것이 안쓰럽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경훈은 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려다 갑자기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 간호사를 불렀다.
“혹시 한지원 선생, 보셨어요?”
“한 선생님이요? 네, 아까 인턴 쌤한테 의국에 있을 테니까 급한 일 있으면 콜하라고 하시던데요?”
“고마워요.”
지원이 있는 곳을 알아낸 경훈은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시간이 촉박했다. 외과 과장을 비롯한 교수진들과 부교수, 조교수 할 것 없이 모두 모이는 자린데 너무 늦게 참석하면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경훈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걸음이 빨라지자 그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도 덩달아 흔들거린다.
의국 앞에 도착한 경훈은 밝은 미소를 지은 채 문손잡이를 잡았다. 조금 열려 있는 문을 밀려는 차였는데 문득 방 안에서 희미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경훈의 표정이 얼어 버렸다. 그의 눈이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어서 먹어.”
김원철. 경훈의 눈에 김원철이 보였다. 그리고…….
“이러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부담스럽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었어요.”
“한지원.
알아. 하지만 난 포기 안 한다고 했었지. 그리고 이건 윗년차가 고생하는 아랫년차에게 사주는 야식일 뿐이야.”
원철이 지원에게 내밀고 있는 하얀색 종이봉투에는 경훈이 지금 들고 있는 종이봉투에 있는 것과 똑같은 가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네가 초밥 좋아한다기에 제일 맛있다고 소문난 집에서 사온 거야. 맛있을 거다.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먹어.”
경훈은 지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원철이 그녀의 앞에 종이봉투를 올려두고 그 안에서 초밥 세트를 꺼내 테이블에 나열하는 것이 보였다. 경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눈길이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로 향했다. 혹시 몰라서 인턴들과 2년차들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사온 초밥 세트가 보였다.
경훈의 입가에 쓴 미소가 피어올랐다. 피식, 속으로 비릿한 웃음을 삼킨 그는 조용히 문에서 물러섰다.
유치한 삼각관계.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원철이 지원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몇 달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원은 원철과 같은 마음이 아닌 것 같아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신경이 쓰였었다. 만약 지원이 원철과 사귀게 되기라도 한다면 같은 집에 사는 자신의 입장이 무척이나 우스워질 테니까. 또 한집에 살게 되면서 지원이 다른 후배들과는 다르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순수하게 여동생을 생각하는 오빠 같은 마음이었다. 오빠라면 여동생이 누구와 만나는지 궁금한 건 당연한 거니까.
그런데…….
경훈의 눈길이 다시 의국 문으로 향했다.
정말이냐? 최경훈, 정말 그런 순수한 마음뿐이야? 한지원에게 정말로 오빠 같은 마음뿐이냐고.
그의 눈앞에 어제 오후, 밝은 봄 햇살 속에서 웃던 지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녀석의 미소를 보는 순간 느꼈던 격렬한 설렘이 이어져 밤잠을 설쳤던 사실까지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제길.”
경훈의 눈이 사나운 빛을 머금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의국 문을 노려보던 그는 갑자기 성큼성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의국 문을 홱 열어젖히고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당사자가 싫고 부담스럽다는데 자꾸 이러시는 건…….”
벌컥.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던 지원은 갑자기 버럭 열리는 문을 향해 놀란 눈길을 돌렸다.
“선배님…….”
지원의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여 이제 막 의국으로 들어선 경훈을 불렀다.
“어? 김원철, 아직 입국식에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그녀처럼 당황해서 돌아보는 원철과 지원을 한꺼번에 일별한 경훈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다가 테이블 위에 있는 초밥 도시락과 그 옆에 놓여 있는 일식집 포장 봉투를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이런, 내가 한발 늦었나? 김 선생이 사올 줄 알았으면 난 안 사오는 건데 말이야.”
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는 김원철 선생이 가지고 온 종이가방과 같은 마크가 찍혀 있는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최경훈, 그도 초밥 도시락을 사온 것이다.
지원은 지금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아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만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경훈이 쾌활한 표정으로 테이블로 다가섰다.
“뭐, 많으면 좋지. 안 그래도 인턴에 2년차들까지 전부 다 먹을 수 있을지 난감했는데 잘됐네. 김 선생은 몇 인분 사왔어? 난 한 5인분 되는데, 이 정도면 녀석들 전부 먹을 수 있겠지?”
지원은 경훈이 테이블 위에 초밥 도시락을 일일이 올려놓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말로 다섯 명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양이었다. 테이블 위에 사온 초밥 도시락을 전부 올려놓고 그가 돌아섰다.
“한지원.”
그녀도 그를 바라보았다.
“동기들하고 인턴들하고 사이좋게 나눠 먹어라. 모자라면 콜하고. 더 배달시켜 줄 테니까. 어, 그리고 녀석들한테 내가 사는 거라고 꼭 말해라. 이왕 돈 쓰는 거, 생색 좀 내게. 물론 김 선생도 같이 샀다고 말하고.”
그가 웃으며 김원철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하지만 돌처럼 굳은 원철의 얼굴은 풀릴 기미도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경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지원을 돌아보았다.
“내일 오프지?”
“네.”
“아침에 퇴근이야?”
지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훈이 씨익 웃었다.
“오늘 내내 힘들었다면서? 고생되더라도 조금만 더 견뎌.”
자신의 할 말만 하고 경훈이 원철을 쳐다보았다.
“안 가냐? 더 볼일 있어?”
“아니, 없어.”
원철이 굳은 목소리로 대꾸하며 지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원의 눈은 오직 단 한 사람, 최경훈에게만 박혀 있었다.
“그럼 가자.”
원철에게 가자는 턱짓을 해보인 경훈은 곧장 문으로 향했다.
몇 걸음 옮기는가 싶더니 그가 갑자기 멈춘다. 그리고 지원을 돌아보았다.
“집에 가면 꼭 식탁 위부터 살펴봐. 우렁각시가 너 먹으라고 맛있는 죽을 끓여 놨을지도 모르니까. 있으면 꼭 먹고 자라.속 안 버리게.”
그 순간 지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건 뭔가?
원철이 있는 앞에서 왜 저런 수상한 멘트를 하는 거지?
‘출근하기 전에 내가 죽 끓여 놓을 테니 꼭 먹어라’ 하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지원은 분명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걸 모르는 원철에게는 이상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지원의 눈길이 원철에게 향했다. 김원철의 눈빛이 의심스럽게 좁혀져 있었다. 뭔가 수상하다는 듯.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경훈을 보자 그의 눈과 똑바로 마주쳤다.
그 순간 보았다, 미소는 짓고 있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진지한 그 눈빛은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며 뭔가를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어떤 말을.
경훈과 원철은 나란히 의국을 나와 또 나란히 병원 문을 나섰다. 급하게 길로 내려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지나가던 택시를 불러 세우고 재빨리 올라탄 후 입국식이 있는 일식집 상호를 불렀다. 택시는 두 남자를 태운 채 어두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의외였다.”
택시가 출발하고도 잠시 동안은 서로 침묵을 지키던 그들 중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원철이었다.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경훈은 고개를 돌려 원철을 바라보았다.
“뭐가?”
원철이 진지한 눈빛으로 경훈을 마주 보고 말했다.
“조금 전에 의국으로 도시락 배달한 거.”
“아.”
경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짧은 감탄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원철이 다시 묻는다.
“병원 지키는 후배 놈들 먹이려는 의도가 다였어?”
“무슨 뜻이야?”
“정말로 그게 다냐고.”
원철의 의심 가득한 질문에 경훈은 피식, 웃었다.
“뭐가 더 있어야 되는데?”
두 사람의 눈길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원철이 조용히 말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그러자 경훈이 기다렸다는 듯 묻는다.
“넌? 그러는 넌 무슨 의도가 있었나 보군.”
원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분명한 의도가 있었지.”
경훈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원철은 그런 경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분명하게 말을 이었다.
“한지원. 내가 사간 도시락은 한지원 거였어.”
순간, 경훈의 입가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하지만 경훈은 섣불리 뭔가를 묻거나 더 깊은 것을 캐려고 들지 않았다. 스스로의 마음조차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원철의 마음까지 들여다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원철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나, 지원이 좋아한다.”
경훈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이 순간,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다.
기분이 몹시 나쁘다는 거.
김원철의 입에서 나온 ‘지원이’라는 단어가 몹시 불쾌했다. 마치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양, 한지원을 친근하게 부르는 그 단어가 김원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몹시 화가 났다. 지금까지 김원철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는 좀 다를 것이다. 아주,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다.
“그래? 몰랐네.”
하지만 경훈은 자신의 감정을 꾹 억눌렀다. 오늘 밤 잠자리에서 한지원에 대한 이 뜻 모를 소유욕의 정체를 캐기 전까지는 어떤 섣부른 대처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 미칠 것처럼 폭주하는 감정의 정체를 캐고 난 후에는 다를 것이다.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 후에는 이런 식으로 가만히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내가 그 녀석을 좋아해. 지원이가 아직 마음을 못 정해서 드러내 놓고 티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경훈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 자식, 뭐지? 지금 내 앞에서 한지원에 대한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는 건가?
정말로 그러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철의 눈에 떠오른 눈빛은 ‘그러니까 넌 허튼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마라’라고 하는 듯했다.
경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조금 전처럼 창밖을 응시했다.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과 길가의 가로등 불빛이 달리는 자동차만큼이나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일병원 외과 레지던트 1년차, 김해인입니다.”
“우와아아아!”
짝짝짝짝짝…….
하얗고 조그만 얼굴에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예쁜 미소를 지으며 해인이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 대일병원 외과 입국식이 열리고 있는 룸 안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에 버금가는 호응이 터져 나왔다. 레지던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해인의 예쁜 모습에 반한 교수들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탤런트 뺨치게 예쁜 얼굴도 얼굴이지만 어깨까지 내려오는 비단결 같은 머리칼과 거의 완벽하다 싶을 만큼 잘 빠진 몸매, 거기다가 치마 아래로 쭉 뻗은 종아리는 백 점 만점에 이백 점을 주고도 남을 만큼 예뻤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생기는 자잘한 주름은 귀여웠고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면 보는 남자들 미치게 만드는 섹시미까지 엿보였다.
이러니 이미 소개를 마친 1년차들과 다음에 소개될 1년차들의 존재는 김해인의 존재로 인해 병풍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캬아! 역시! 이 함성, 이 뜨거운 반응. 역시 우리 대일병원의 여신, 김해인답지 않습니까?”
소개는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지만 음식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관심거리는 오로지 김해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김해인의 어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성민에게도 당연히 해당되는 일이었다.
성민은 맞은편에 앉은 경훈에게 환상적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저 오늘 잠 못 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런 애가 왜 이 힘든 외과를 지원했을까요? 저렇게 예쁜데 그냥 편하게 탤런트 하지, 왜 힘든 닥터가 되려고 하는 걸까요? Why? 뭣 때문에? 그것도 고생길 훤한 디바서전(여자 외과의사)을 지원하다니!”
경훈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해인의 늪에 빠진 성민은 누군가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아, 나의 여신. 전 오늘부터 김해인만 바라보는 해바라깁니다. 사랑은 쟁취죠. 암요. 아자, 아자!”
성민이 파이팅까지 외치는데도 경훈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경훈을 그제야 발견한 성민이 그의 앞 테이블을 톡톡 치며 불렀다.
“선배님, 선배님.”
경훈이 고개를 들자 성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왜?”
“뭐 하세요? 좀 전에 해인이가 자기소개 했는데 보셨어요? 난리 났었는데.”
“그래?”
경훈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1년차들이 소개를 하고 있는 상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민이 말하는 김해인의 차례는 이미 지난 후였다. 성민이 그런 경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야.”
성민이 보기에 전혀 아닌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성민은 이내 경훈의 표정 같은 건 잊어버리고 다시 해인의 늪에 풍덩 빠져들었다.
“역시 너무 예쁘다니까요. 저, 결심했습니다. 저, 사랑을 쟁취하려고요. 내 사랑은 내가 쟁취한다, 이겁니다.”
“짝사랑은 파멸을 부르고오오오…….”
옆에 앉아 있던 같은 3년차 동기가 성민의 옆에서 깐죽거렸다. 그러자 성민이 버럭 화를 내며 동기를 노려보았다.
“뭐? 이 자식이 그냥 콱. 나도 나름 능력자야, 자식아.”
“에이, 그래도 김해인은 아니지. 쟤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듣기로는 구영기 선생님도 해인이한테 관심 있대.”
“뭐?”
성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구영기라면 일반외과 펠로우 과정에 있는 선생이다. 이제 곧 정식 스텝으로 발령 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사람과 이제 3년차가 되는 레지던트라니, 쨉이 안 된다.
하지만 성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도 난 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이미 진행되었다 해도 반드시 빼앗고 말리.”
성민이 눈과 입에 힘을 빡 주고 선서했지만 옆의 동기 놈이 다시 깨방정을 떨어댔다.
“남의 사랑 박살낸다고 내 사랑이 될까? 그건 아니지.”
“이 자식이 죽을라고! 야!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내가 오늘, 우주 밖으로 던져 버린 네 개념을 되찾아 주마.”
성민이 동기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보며 경훈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평소 같았다면 벌써 저 장난에 끼어들어 성민을 놀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경훈은 시선을 들어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는 원철을 응시했다. 옆에 앉은 미라클 팀 스텝과 잔을 부딪치며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경훈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 지원이 좋아한다.’
그 말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배는 고픈데 입맛도 없었다.
평소에는 없어서 못 먹던 술도 안 내킨다.
병이다.
이거 무슨 큰 병이 들린 것이 틀림없다.
경훈은 고개를 돌려 눈앞에 놓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알싸한 소주의 향이 목 안을 적시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취하지도 않는다. 혼자서 소주 한 병의 양을 마셨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보통 때 같았다면 벌써 술에 의해 취한 몸이 나른해지고 알딸딸해지면서 날카로웠던 신경도 무뎌져야 하는데…….
소주 반병을 더 마시고 또 한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경훈은 갑자기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을 느꼈다.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눈빛이 흐려졌다.
강문희.
갑자기 취기가 확 오른다.
지금까지 마신 술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끈질기게 울리는 휴대폰을 들고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과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은 그가 일어서는 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경훈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경훈이?
”
“말해.”
경훈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켜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
“취했니?”
“…….”
대꾸하지 않았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이 시간에 왜 내게 전화를 한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시간에 이 여자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어디야? 밖에서 술 마시고 있어?”
“용건만 말해.”
-…….
차갑게 대꾸하자 문희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 얼굴 두꺼운 여자는 그깟 냉정한 대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밖이구나. 차 소리 들려. 병원 사람들하고 술 마시는 중이야? 많이 마셨어?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 언제 끝나?”
내가 이상한 건지, 이 여자가 이상한 건지…… 다른 남자와 결혼한 이 여자는 여전히 내 여자인 것처럼 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의 행적을 묻고 나를 걱정하는 체한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뭘 잘못했기에 이 여자는 여전히 내가 자기 남자인 것처럼 구는 걸까?
왜 날 병신 취급하는 걸까?
–
“경훈아…… 내가 갈까……?
”
미치겠다.
경훈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답답했다.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고 가슴은 갑갑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경훈아, 거기 어디야?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내가 지금 그리로…….
”
뚝.
경훈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기를 노려보는 눈빛이 사나웠다. 휴대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배터리를 뽑아 버렸다. 그러고도 화가 진정되지 않는다. 아니, 이 화(火)는 문희와 연관된 화(火)가 아니었다.
‘나, 지원이 좋아한다.’
김원철 때문이다.
아니, 한지원……
그 녀석이 원인이었다.
털썩.
지원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침대로 쓰러졌다.
머리에는 수건을 매단 상태였고 속옷조차 입지 않은 가운 차림이었지만 현재 그녀의 상태는 이것저것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으음…….”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드디어 ‘내 침대’에 몸을 뉘였다는 사실이 이토록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잠이 들어서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푹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꼬르륵.
그녀의 손이 납작한 배를 어루만졌다. 어젯밤에 초밥 몇 개를 집어 먹은 이후 현재까지 공복 상태였다. 그 많은 초밥 중에 그녀가 먹은 거라곤 겨우 세 개였다.
김원철 선생과 경훈 선배가 나가고 난 후에 갑자기 들이닥친 동기 한 명과 인턴 두 명과 함께 초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응급실에서 콜이 왔다. 할 수 없이 응급실에 내려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새 초밥은 다 먹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거라곤 단무지 몇 개와 염교 절임 몇 알이 전부였다. 아, 하나 더 있었다. 배부른 인턴들과 2년차들. 응급실 불려간 동기는 생각지도 않고 매정하게 초밥을 다 먹어 치운 매정한 동료들이 의국 방을 뒹굴고 있었다.
“끄응.”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입에서 아픈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배가 고프든 말든 그냥 자고 싶었지만 머리도 말려야 한다. 속옷도 입어야 하고…….
지원은 침대에서 일어서자마자 곧장 머리부터 말렸다. 그리고 옷장 서랍을 열어 속옷을 꺼내 챙겨 입고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를 찾아 입었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지원의 눈길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대접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녀의 손에는 조금 전 발견하자마자 집어 들어 읽은 쪽지가 여전히 들려 있었다.
?
바로 잘 것 같아서 소화 잘되게 죽 끓였다. 데워서 먹어.
?
대접에 담긴 것은 깨죽 같았다.
검은 색깔이지만 향은 구수하다. 죽이라는 게 만들기엔 참 번거로운 음식인데 그가 아침부터 일어나 죽을 쒔을 걸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그의 오지랖 중의 하난가?
처음에 든 생각은 이거였다.
함께 사는 동안 가끔 그가 한 음식을 먹은 적은 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시골집에서 올라온 반찬 종류였다. 그의 어머니는 때마다 반찬을 보내 오셨고 그래서 냉장고는 늘 가득 차 있었다. 혼자는 죽어도 다 못 먹는다며 같이 먹어야 한다고 하도 강요를 하는 바람에 지원도 어쩔 수 없이 몇 번 먹었다. 그러니 그건 엄밀히 말해서 그가 한 음식은 아닌 셈이다.
아, 아니다. 그가 한 음식을 먹어 보긴 했다. 한 달 전쯤이었던가? 그가 된장찌개를 끓였었다. 너무 맛있어서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최경훈이 한 음식을 먹은 건 과일주스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깨죽. 이건 최경훈의 오지랖 중 최강이다. 아무리 함께 사는 후배라지만 자기도 힘들 텐데 밤 새워 일한 후배를 위해 새벽잠까지 포기하면서 깨죽을 만들다니……
이건 좀 심하다.
지원은 어제 의국에서 보았던 경훈을 떠올렸다.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의 표정과 말투, 평소보다 훨씬 진지했던 눈빛까지. 어제의 최경훈은 너무나 이상했다.
그리고…….
이렇게 깨죽까지 끓여 놓은 최경훈도 평소와는 다르다.
“후우.”
생각할수록 복잡지기만 하고 결론은 나지 않는 고민을 하니 체력이 더 고갈된다. 지원은 복잡한 생각들을 억지로 털어 버리고 깨죽 그릇을 전자레인지 안에 넣었다. 전자레인지를 작동시키고 그 앞에서 지키고 서 있던 그녀는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음이 들리자 그릇을 꺼내 식탁 앞에 앉았다.
부드럽게 데워진 죽을 한 스푼 퍼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후후, 뜨거운 기운을 불어낸 다음 스푼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고소하고 향긋한 향이 입 안으로 번져 나갔다. 입 안에서 씹히는 쌀알의 느낌도 좋았고 부드럽게 퍼지는 깨와 찹쌀의 느낌도 좋았다. 그녀는 다시 스푼을 죽 그릇에 넣었다. 까끌까끌하기만 한 입 안에 뭘 삼켜야 할지 몰랐는데 이렇게 부드러운 죽이라니, 완벽했다. 먹을 거 달라고 아우성을 쳐대던 위도 그녀의 숟가락질 횟수가 거듭될수록 포만감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죽 한 그릇을 다 먹어 치운 지원은 그릇을 씻어 싱크대 위에 엎었다.
젖은 손을 수건에 닦고 있는데 갑자기 식탁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띠링’ 하며 메시지 도착음을 냈다.
지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혹시 병원에서 온 연락이라면 정말 달갑지 않다.
혹시, 하는 마음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보긴 봐야 한다. 괜한 궁금증에 잠까지 설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죽 먹었어? 다 먹어라. 우리 공 여사께서 한 알 한 알 심어서 수확한 깨로 만든 거야. 그러니까 남기면 우리 공 여사한테 이를 거다. 난 이제 수술실 들어간다. 오늘 리버 티피엘만 두 건이다.’
문자 끝에 우는 이모티콘이 걸려 있었다. 지원은 피식 웃었다. 인기 있었던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를 흉내 낸 그의 말투가 우습기도 했지만 자기 어머니를 ‘우리 공 여사’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나저나, 리버 티피엘이 두 건이나 된다면……
오늘은 최경훈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갈 모양이다.
문득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휴대폰을 놓아두고 돌아선 그녀는 싱크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몇 번 문짝을 열었다가 닫았다가를 반복하던 그녀가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병에 종류별로 잘 담아져 있는 곡물들이 지원의 손에 의해 하나씩 바닥으로 나왔다.
병에 붙어 있는 라벨에는 붓글씨 느낌이 나는 필체가 적혀 있었다. 볼펜으로 쓴 글씨지만 무척이나 반듯하고 가지런했다. 아마 이 글씨체의 주인은 성격도 반듯하고 올곧을 것 같았다.
“어머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글씨체의 장본인이 그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그런데 그건 아닐 것이다.
가끔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은 ‘공 여사’님은 쾌활하고 밝은 시골 아주머니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버지 글씨일지도 모른다. 아들에게 보내려고 곡식을 담고 있는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가 일일이 라벨을 붙이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한가로운 시골 마당의 전경이 펼쳐진 마루에 걸터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주거니 받거니 투닥거리면서 아들에게 보낼 먹거리를 챙기는 정겨운 그림이 일사천리로 떠오른다.
“훗.”
피식, 웃음이 났다. 실없는 웃음과 함께 심장에 구멍 하나가 난 것 같았다. 그 구멍 사이로 휑한 바람 소리가 난다.
지원은 쓸데없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라벨을 크게 읽었다.
“참깨, 검은깨, 녹두, 조, 찹쌀, 콩…….”
많기도 하다. 이 중 어떤 것으로 죽을 만들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가 않는다. 지원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하니까 머리까지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잠이나 잔 후에 뭘 해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지원은 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무너지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문득 희미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그가 끓여 준 죽 덕분에 배도 부르고 몸도 편하고…… 참…… 좋다.
“38호실 베드 두 개 비었는데 오늘 아침에 IM(내과)에서 전원 되어 온 환자가 들어왔고 하나는 현재 비어 있는 상탭니다.”
“알았어. 그럼 지금 ER에서 올라오는 TA(교통사고) 환자 그쪽으로 보내.”
보조간호사에게서 병동 보고를 받고 있던 수간호사, 선애가 갑자기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문자를 확인하던 그녀가 갑자기 미소를 짓자 앞에 있던 보조간호사가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쳐다본다.
선애는 고개를 들어 보조간호사에게 말했다.
“가서 ER에서 올라오는 환자 주치의한테 병실 번호 알려 주고 보호자들한테 입원 처리 사항 알려 줘요.”
“알겠습니다.”
보조간호사가 황급히 자리를 뜨자 선애는 본격적으로 휴대폰에 문자를 찍기 시작했다.
‘죽? 무슨 죽 만들고 싶은데?
‘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깨, 녹두, 조 중에서 피곤 풀어 주는데 어떤 죽이 좋을까요?
피곤할 텐데 지금 죽 끓여 먹으려고?
많이 쉬었어요. 푹 자고 일어났더니 배가 고파서.
아, 그래? 피곤한 데는 녹두가 좋은데. 깨도 좋고.
녹두죽은 어려워요?
똑같지. 깨나 녹두나. 녹두는 갈아야 돼. 혹시 녹두가루는 없어?’
이번에는 답장이 느렸다. 선애는 지원의 답장을 기다리며 병동 스테이션 쪽으로 움직였다. 스테이션에서는 이성민 선생과 최경훈 선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수술복 차림인 걸 보니 곧바로 다음 수술에 들어갈 모양이었다.
선애는 두 사람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스테이션 한쪽에서 간호 기록지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띠링.
문자가 왔다는 신호음에 선애가 다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
있어요, 녹두가루.
‘
‘그래? 그럼 일이 훨씬 쉬워지지. 쌀 불려서 녹두가루랑 같이 쑤기만 하면 돼. 찹쌀 있으면 같이 불려. 찹쌀이 들어가면 훨씬 찰지거든 은근한 불에서 한 시간 정도 잘 저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뭘. 웬일로 집에서 죽도 해먹고. 우리 한 선생, 이제 시집갈 때 됐나 보다. 내일 봐.
?’
선애는 웃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언제 왔는지 경훈이 옆에 서 있었다. 완전히 피곤에 절은 얼굴이었다. 선애의 눈길이 조금 전에 함께 있던 성민을 찾아 헤맸다. 복도 저쪽으로 걸어가는 성민의 뒷모습이 보였다.
선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경훈을 바라보았다.
“쯧쯧, 얼굴 좀 봐라. 산적이라고 해도 믿겠다.”
거뭇거뭇하게 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경훈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안 그래도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박 교수 수술 이제 끝난 거야?”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애가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몇 시간이나 걸린 거야? 열네 시간?”
“열네 시간 사십 분.”
“대단하네. 그런데 또 수술 들어가야 하잖아.”
경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눈길을 들어 선애를 보았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은데 뭐 재밌는 일 있으면 같이 좀 웃죠?”
선애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흘겼다.
“내가 재밌는 일이 어딨어?”
“그럼 조금 전에 휴대폰 보면서 왜 실실거렸어요?”
“내가?”
“예, 실없이 웃었잖아요. 매형이 사랑한다는 메시지라도 보냈나?”
“그 인간이? 행여나! 연애할 때도 좋아한단 말 한 마디 안 한 인간인데. 말이 났으니 말이지, 간호사들 중에 누가 경상도 남자하고 결혼한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 진심으로!”
선애의 말에 경훈이 쿡쿡, 웃었다. 그가 생각해도 선애의 남편은 무척이나 무뚝뚝했다. 지금껏 그렇게 많이 봤지만 말하는 걸 몇 번 못 본 것 같다고 하면 말 다 한 것이다.
“한 선생 때문에 웃었어.”
순간 경훈의 피곤한 신경이 발딱 일어섰다. 언제 피곤하기라도 했었냐는 듯 ‘한지원’이라는 이름 석 자에 엔돌핀이 샘솟는다. 하지만 그는 애써 아닌 척 차분하게 물었다.
“한지원이요? 그 녀석이 왜요?”
“한 선생이 원래 뭐 해먹고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내가 아는 한 선생은 자기 손으로 뭘 해먹느니 굶는 스타일이지.”
잘한다, 한지원. 그러니까 그렇게 살이 없지. 뭐? 뭘 해먹느니 굶어? 기집애가 굶는 걸 아주 업으로 삼아, 그냥.
경훈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한 선생이 조금 전에 죽 끓이는 방법 좀 가르쳐 달라고 문자를 보냈더라.”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죽? 무슨 죽? 내가 끓여 준 죽은 어쩌고?
“피로 회복에 먹으면 좋은 죽이 뭐가 있냐고 해서 재료가 뭐, 뭐 있냐고 했더니 깨도 있고 녹두도 있다더라고. 그래서 녹두죽이 좋겠다고 방법 알려 줬지. 여잔 나이 들면 다 제 몫은 한다더니 그 말이 딱이야. 한 선생도 시집갈 적령기가 되니까 이렇게 뭐 해먹을 생각도 하고. 호호, 우리 한 선생같이 딱 부러지는 여자가 시집가면 살림도 잘하고 애도 똑 부러지게 키울 거다, 아마.”
경훈의 귀에는 이미 선애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해준 죽 안 먹고 또 무슨 죽을 해먹는다고…… 내가 해놓은 죽은 안 먹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거 먹고 또 먹고 싶어서 다른 죽 해먹겠다는 건가? 젠장, 죽 하나에 내가 왜 이래?
정말로 누가 알까 무섭다. 죽 하나 끓여 놓고 나와서는 한지원이 그걸 먹었을까 말았을까, 부터 시작해서 맛있게 먹었을까 아닐까, 등등을 고민하는 자신이 정말로 한심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경훈은 수술실로 가는 복도를 걸으며 내내 그놈의 ‘죽’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내가 서서히 미쳐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젠장.
달칵.
경훈은 아파트 현관문을 숨죽여 닫았다. 그러면서도 혹시 몰라 안방 쪽을 살폈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다.
잠시 그대로 어둠 속에 서 있던 그는 조용히 신을 벗고 거실로 올라섰다.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다. 너무 늦어서 그냥 숙직실에서 잘까 하다가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후우…….”
현관 입구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경훈은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졌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느라 땀을 흘리고 몇 번이나 넘긴 고비들 덕분에 식은땀이 잔뜩 배인 속옷을 벗고 나니 훨씬 개운했다.
경훈은 아파트에 들어오면서 새로 구입한 욕실 가운을 걸쳤다. 자신의 방 앞이 바로 욕실이었지만 동거녀가 있는 이상 조심할 것은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동거녀.쿡,
경훈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해낸 단어에 웃었다. 누가 들으면 아주 이상한 쪽으로 상상할 그 단어가, 사실은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쓰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거실을 둘러본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욕실로 건너갔다.
가운 차림에 젖은 머리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온 경훈은 시원한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을 지나쳐 곧장 정수기로 향한 그는 차가운 물이 나오는 냉수꼭지 아래에 컵을 대고 물을 받았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탓에 목을 적시는 찬 기운이 여간 시원한 것이 아니었다.
갈증을 해소하고 컵을 소리 나지 않게 싱크대 안에 집어넣고 돌아섰다. 그러다 무심코 식탁 위에 눈길이 갔다. 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잠시 그렇게 서서 식탁 위에 놓인 대접과 그 옆에 놓인 하얀 메모지를 보던 경훈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락,
경훈의 손이 메모지를 들어 올렸다.
-혹시 밤에 출출하시면 드세요. 맛은 보장 못해요 – 지원.
?
순간, 경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랩에 잘 싸여져 있는 그릇에 담긴 죽을 보면서 그 일그러진 묘한 표정은 서서히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의외의 상황에 놀라서 황당함이 어렸던 눈빛은 풍부한 기쁨으로 출렁였고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실룩이더니 서서히 늘어났다.
‘한 선생이 조금 전에 죽 끓이는 방법 좀 가르쳐 달라고 문자를 보냈더라. 피로 회복에 먹으면 좋은 죽이 뭐가 있냐고 해서 재료가 뭐, 뭐 있냐고 했더니 깨도 있고 녹두도 있다더라고. 그래서 녹두죽이 좋겠다고 방법 알려 줬지’
노르스름한 색깔에 간간히 보이는 흰쌀 알갱이를 보아하니 저건 필시 녹두죽이다.
급기야, 경훈의 늘어난 입이 귀에 걸릴 태세다. 그의 눈길이 닫혀 있는 안방 문으로 향했다. 저 안쪽에 지원이 있다는 걸 아는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었다. 바로 이런 설렘이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심장이 먼저 알아차리고 달려 나가 버리는 이 떨리는 감정, 시작되면 멈출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바로 그런 느낌.
죽 그릇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 속에 한지원이 있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나를 내내 혼란스럽게 했던 그 시간들…… 그건 바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지원이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오는데 마침 경훈도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잘 잤어?”
그가 먼저 그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지원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경훈 또한 주방으로 걸어온다. 지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수기에서 물 한 컵을 따라 마셨다.
달그락.
물을 마시고 컵을 씻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식탁 위에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지원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등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최경훈의 인기척이 더 신경 쓰였다.
“이거 마셔라.”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지원은 고개를 돌렸다. 식탁 위에 빨간색 내용물이 담긴 유리컵이 놓여 있었다. 언제 또 일어나서 과일주스를 만들었나 보다. 지원의 눈길이 이번에는 경훈을 향했다. 그가 이쪽을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뭔가 다르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는데 뭔가가 달라 보였다.
아직 날도 완전히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잠이 모자랄 것이 뻔한 그의 얼굴이 빛나 보이면 얼마나 빛나 보일 것이며 밝아 보이면 얼마나 밝아 보이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최경훈의 얼굴은 그랬다. 살짝 미소 지은 얼굴에서는 빛이 났고 어두운 새벽 그림자를 모두 물리칠 만큼 밝아 보였다.
두근.
부드럽게 마주친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지원의 심장이 천 길 아래로 추락한다.
더럭, 겁이 나고 그의 눈빛이 주는 간절한 느낌에 살이 떨렸다.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끝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을 쥐고 그것도 모자라 컵을 들고 있던 손가락에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었다. 그래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심장 깊은 곳에서 해일처럼 일어나는 설렘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딸기주스야. 마셔.”
그녀가 우두커니 서 있자 그가 컵을 들고 다가왔다. 지원은 눈앞에 내밀어진 컵을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데, 그냥 주스일 뿐인데, 처음도 아니잖아. 그가 해주는 생과일주스를 처음 먹어 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떠는 거야. 한지원, 정신 차려!
지원이 없는 용기까지 다 끌어 모아 그가 내미는 컵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그가 더 깊게 웃는다.
“착하네.”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너무나 차분하고 조용해서 이명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착각은 사실로 굳어졌다.
“죽, 맛있더라. 안 남기고 깨끗이 먹었다.”
또다시 그녀의 마음을 흔드는 깊은 목소리.
그건 착각도 아니었고 상상도 아니었다. 지원은 눈길을 들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뭐지? 이건……. 그의 눈 속에서 내가 보여. 나를 바라보는 저 빛나는 미소의 의미가 뭐지? 그는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녀가 혼란스러운 생각들로 인해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 그가 쾌활하게 말했다.
“마시고 나와라. 현관에서 기다릴 테니까.”
그가 돌아섰다. 그리고 곧장 현관으로 걸어간다.
기다린다고? 왜?
?
그가 그녀를 기다린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함께 출근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분명한 목적은 지원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했다.
경훈이 1층 버튼을 누르는 것을 지켜보며 지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새벽 시간에 무척이나 한산했고 그 좁은 사각 공간 속에 단둘이 남은 남녀 또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원은 잠시 그 침묵에 동조하다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가세요. 전 아파트에 다시 올라갔다가 병원으로 갈게요.”
경훈이 돌아보았다.
“왜? 두고 온 거 있어?”
아뇨. 하지만 함께, 나란히 병원으로 출근할 수는 없잖아요.
지원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는다.
“걱정 마.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난 뒤에 들어갈 거니까.”
그녀는 다시 돌아서는 그의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 해요? 왜 오늘따라 안 하던 거, 해요? 왜, 우리가 더 가까워지는 것 같냐고요.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