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04
제 104화
그날 밤. 남궁 남매와 진천희 셋이서 다실에 모였다.
당아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비무에서는 승자가 패자보다 더 지치는 일이 종종 있긴 했다.
그게 오늘 같은 경우였다.
당아는 하루치 기력을 다 소진했는지 곧바로 기절하듯 잠이 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궁운이 말했다.
“진 형제 말일세, 고작 2년 만에 당가의 후기지수를 상대로 그렇게 잘 싸웠던 건 제갈세가의 비전, 현원전단신공 때문 맞나?”
그 말에 진천희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스승님의 무공에 대해 아시나 봅니다?”
“구 대 문파와 팔 대 세가는 서로의 무공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밖에 없지. 과거 제갈가가 화를 당했다고 해도 그건 변함이 없다네.”
‘남궁가는 오만하군.’
소설에서 몇 번이나 나온 이야기였다.
제갈가의 멸문의 화에 대해서는 강호에 모르는 이가 없다.
이제 와서는 오래된 이야기.
‘스승님이 결혼을 하시고 아이를 가지신다면 제갈가가 이어질 수 있겠지.’
시한부였던 처지도 이제는 끝이다.
좋은 인연을 만나 혼례를 올려 자녀를 둔다면 제갈세가는 충분히 재건할 수 있다.
그럴 힘도, 자금도, 명망도 충분했다.
문제는 스승님 성격이 워낙 독특하다 보니 남녀의 애정사 같은 것에 영 관심이 없다는 것.
‘스승님은 남녀를 떠나 사람 자체를 썩 좋아하진 않으시는 것 같단 말이야.’
진천희가 지켜본 바로는 스승님은 인간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의각에 필요한 강호의 중요한 정보라면야 빠짐없이 수집하는 편이지만 그게 아닌 흥미 위주의 풍문들은 쥐뿔도 신경 쓰지 않는다.
‘스승님은 동물도 별로 안 좋아하시지.’
황구도 눈치챈 건지 스승님에게만은 치대질 않는다.
아니, 어지간하면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는 말이 맞겠다.
진천희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시한부 인생이셨으니까 정을 주지 않는 게 습관이 되신 거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야.’
비록 진천희가 제자로서 비전을 익혔다고 해도 제갈가의 대가 이렇게 끊기는 건 아까운 일이었다.
진천희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남궁운.
그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 자리는 수술을 무사히 끝내고 되돌아가는 남궁운의 환송회다.
물론 의원이 환자가 퇴원한다고 일일이 환송회를 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
보통 이런 식의 행사는 없다.
하지만 남궁운은 사실상 진천희가 초대를 했다고 볼 수도 있는 인물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왕 이렇게 된 거 환송회를 열고야 말겠다고 남궁운 본인이 강력하게 주장을 했다.
그래서 다실 탁자에는 차와, 다과, 그리고 남궁운에게서 압수한 술, 그리고 남궁운에게서 압수한 육포가 놓여 있었다.
‘정말 많이도 꿍쳐 놨어.’
육포의 일부는 황구의 뱃속으로 들어갔다만 남은 양으로도 술안주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술을 먹고 있는 건 남궁운 혼자.
남궁운은 본인이 꿍쳐 둔 술을 본인이 자작을 하며 말했다.
“현원전단신공. 오성을 발달시켜 주는 공능을 가지고 있다 들었네. 내공의 축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전투에 임했을 때의 효용성만큼은 무시무시하던데. 특히나 다른 무공의 파훼식을 만들 거나,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역전할 수 있게 해 준다지?”
당아와 대련 이후, 그는 진천희에게 더욱 관심이 생겼는지 자꾸만 붙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구파일방. 팔 대 세가.
강호정파의 가장 큰 축인 열여덟 문파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의 무공을 제법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라고 남궁운은 말하고 있었다.
또한 진천희가 이렇게 성장이 빠른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도.
“오, 오라버니…….”
그런 남궁운을 남궁연이 복잡하게 바라보았다.
남궁운은 취기가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공의 높고 낮음, 수련의 얕고 깊음. 이 두 가지 외에도 상대의 무공이 가진 특성과 특징을 모른다는 것도 위협 요소이지. 그래서 과거 제갈세가가 멸문할 적에 아무도 돕지 않은 것이기도 해.”
쪼록-
술잔이 달처럼 차올랐다.
“은근히 두려워했던 거야. ‘천재’가 ‘만들어지는’ 가문을.”
“뼈 있는 말씀이시네요. 그런 말을 하셔도 되는 겁니까?”
진천희의 물음에 남궁운은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는 짓은 영락없는 풍류 공자인데 그 안에는 뼈가 숨겨져 있었다.
‘방심하면 안 되겠는걸.’
이번 일도 그렇다. 술에 취해 말을 흘리는 척하고 있지만 말 속에 담겨 있는 건 칼날과도 같았다.
“뭐…… 그만큼 내가 자네를 신뢰한다고 생각해 주게. 원래 무인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목숨을 맡기지 않으니까.”
사천당가의 당아. 그녀가 없는 자리가 되자 그는 자신의 속내를 살짝 내비쳤다.
그것은 그가 진천희를 인정한다는 표시.
동시에 당아를 동생처럼 돌보면서도, 세가 간의 경쟁 구도 역시 인지하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당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그렇다고 진천희와 느긋하게 독대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남궁운 자신은 남궁가의 미래를 짊어져야 했으니까.
‘참 이상한 사내야.’
풍류 공자이며 모사가이며, 뛰어난 검수.
진천희는 그가 마시던 소홍주를 들어 자신의 찻잔에 따랐다.
“앗, 내 잔을 받는 건가?”
“자작입니다.”
“거 정말 정이 없군그래. 진 형제.”
진천희가 웃었다.
“현원전단신공으로도 남궁 소협의 진짜 모습을 아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런가. 내 눈에는 진 형제가 훨씬 알기 어려운 사람인데.”
“…….”
그는 소홍주를 조용히 한 모금 삼키다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이 술 같은 것일세. 어디에 담겨 있느냐에 달린 거지. 술병에 담겨 있으면 술병 모양이 되는 거고, 술잔에 담겨 있으면 술잔 모양이 되는 거네.”
그는 술잔을 핑그르르 돌렸다.
내기가 담긴 술잔은 팽이처럼 그의 손가락 위를 휘돌았으나 술은 단 한 방울도 넘치지 않았다.
‘대단하군.’
진천희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평범한 자기 찻잔이다. 여기에 내기를 담으려면 깨지지 않을 만큼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하다.
거기다가 이렇게 돌면서도 술 방울이 넘치지 않는다는 건 안에 들어 있는 술조차도 그의 내기로 붙잡고 있다는 뜻이 된다.
‘허공섭물 전 단계에 다다른 건가.’
그는 그걸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하고 있었다.
취한 척을 하고 있어도 기실 부동심의 경지에 다다른 셈.
‘이게 만약 술잔이 아니라 칼날이라면 어찌 되었을까.’
사람 목을 가르면서도 피가 배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게으른 파락호라 세가의 일을 하는 것도, 수련하는 것도 사실 귀찮으이. 이렇게 친우와 술을 마시면서 밤을 지새우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지.”
탁.
그는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가 손을 뗀 이후에도 술잔은 계속해서 팽이처럼 돌았다.
“하지만 내가 어떤 위치인지도 알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고 있다네. 그래서 흠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네. 뭐, 그 정도만 해도 세가의 어르신들은 만족하고 계시고.”
그것은 소설에서 나오지 않았던 남궁운의 속내였다.
그는 성실한 인간이 아니었다.
적당히, 흠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의무를 다하고 나머지는 놀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천하제일검을 노릴 만큼의 검수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 더 원한다면 올해 안에 우리 연이 뺨을 피둥피둥 살찌워서 꼭 잡아당겨 볼…… 아얏! 연아!”
남궁연이 오빠의 팔을 다시 팍팍 때렸다.
남궁운은 그런 연이의 공격에 아픈 척 엄살을 부렸다.
‘전부 다 진짜 모습이라는 건가.’
이 얼마나 오만한 사내란 말인가.
남들 같은, 피 말리는 절박함이 없음에도 강자로 태어나… 강자로서 군림하는 인생.
닭으로 태어나 닭의 삶을 살 듯, 범으로 태어나 범으로 살아간다.
그는 진천희 같은 피 토하는 절박함도 없었고, 당아와 같은 불타는 투지도 없었다.
여하륜처럼 천살성을 억누르며 살 필요도 없다.
제갈린의 천형(天刑)과 기이하게 꺾인 감수성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마지못해 배운 것만으로도 그는 쭉쭉 앞으로 나갔다.
진천희는 그는 마치 매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새들이 죽어라고 날갯짓을 할 때, 그는 바람을 타는 것만으로도 아득히 높은 곳에서 수월하게 활공하고 있었다.
‘입맛이 쓰군.’
불혹의 영혼이 그를 질투했다.
이런 사람을 전생에도 본 적이 있었다.
다른 이가 열 시간을 공부해야 할 것을 고작 한두 시간 안에 해내는 초인들.
진천희 자신도 외과의로서 상당히 공부를 해 왔다 자부를 했지만 그런 초인들을 따라가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거기다 성격도 왜 그리 하나같이 좋은지.’
차라리 못된 성격이면 대놓고 미워할 수 있으련만, 고난을 모르는 강인함이 성품도 온화하게 만들었다.
남궁운도 그랬다.
그는 성격마저도 좋았다.
수많은 강호인들이 그와 연을 맺고자 했고, 그 와중에도 그는 호구가 되지 않고 남궁가에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챙길 줄 알았다.
심지어 남들은 말더듬이라 쑥덕대는 여동생을 끔찍이 아껴 철혈검주로 각성시킬 정도였다.
취기가 돌자 진천희는 속내를 꺼냈다.
“저는 남궁 소협이 밉습니다.”
“호오, 신기하군. 나는 진 형제가 너무나도 마음에 쏙 드는데 말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질투가 났습니다.”
“그런가? 이상하군. 내가 진 형제에게 그리 잰 체를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설마하니 남경 장인이 만든 비단 무복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거고.”
“백린의각도 돈 많습니다.”
“그건 아주 잘 아네. 백린의선이 누군가. 세상 누구보다 사리에 밝은 이가 아닌가.”
“그거 꼭 비아냥 같네요.”
“진 형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일세, 백린의선이 무섭네.”
“스승님이 왜요?”
“가끔은 말일세, 날 보고 웃는 건지, 날 죽일 생각으로 웃는 건지 구분이 안 갈 때가 많아. 진 형제에게 실례인 말이지만 사람이 아니라 차가운 피를 가진 무언가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서 말이지.”
이걸로 궁귀와 여하륜에 이어 남궁운까지 비슷한 의견을 내게 되었다.
스승님이 원래 오해를 사기가 쉬운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어 진천희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잘못 생각하는데…….”
“…날 설득할 필요는 없네. 남궁가의 일원으로서 백린의선을 대할 때는 부족함이 없을 거니까.”
설득이 안 먹히는 것도 똑같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저 자네가 마음에 드네. 내 속을 모르겠다고 하기에 가르쳐 주었네만?”
진천희는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남궁가로서의 역할인가요?”
“의선의 제자와 연을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이었다면 자네의 스승에 대해 나쁘게 말하진 않았겠지. 그 편이 자네의 호감을 사기 쉬웠을 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진천희에게 내면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다시 말했잖나. 진 형제가 마음이 들어. 노력하는 모습도 좋고, 고민하는 모습도 좋았네. 당아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한 수 감추었던 것도 좋았고.”
“…알고 있었군요. 남궁 소협.”
“모를 리가.”
진천희는 당아와 대결하면서 단 한 번도 진짜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
양민을 괴롭히고, 현상금을 노리는 하오문의 낭인들 상대라면 쉬이 나오련만.
그렇게 동경하던 대련.
막상 시작해 보니 성인도 안 된 아이를 상대로 팔이나 다리를 꺾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상대가 장성한 어른이었다면 훨씬 편했을까?
소처럼 크고 똘망똘망한 눈이랑 마주치자 윽,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진천희 내면의 중년 꼰대가 자꾸만 뭐 하는 짓이냐고 훈계질을 했다.
일종의 강제 현자타임이다.
‘망할…….’
그래서 진천희는 비무는 그저 비무로만 여기고 임했다.
“제대로 싸웠어도 제가 졌을걸요.”
“음.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급소를 잘 알고 있는 게 의원 아닌가. 글쎄, 내 감은 조금 다르군.”
그는 가볍게 부정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진 형제와 계속 정을 쌓아 나가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