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178
제 1178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순간 눈이 커진다.
시간이 못 박힌 듯 정지된 감각 속에서 진천희의 눈은 세계를 더욱 확장하고, 확장하고, 확장하더니 인지(認知)했다.
강렬하고 다양한 격류들.
그것들이 무엇인지.
순식간에 ‘알게’(知) 된다.
왜냐하면 격류 중 일부가 진천희에게 다가와 인사했으니까.
나무 아이.
최초로 나무가 되었던 아이.
그 아이가 말을 걸어 왔다.
[여기 있으면 안 돼. 여기 있으면 너도 녹아 버릴 거야.]아. 그런가.
아직 모두가 ‘재료’로 사용된 것은 아닌 건가.
‘하긴, 저 나무는 어디까지나 매개체. 여기가 진짜일 테니……. 여기서 금단선약이 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거겠지.’
방금의 진천희처럼 空의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겠지.
‘만약 내가 저 나무를 제대로 베어냈다면… 그랬다면.’
좀 더 나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작은 진천희들이 침묵하는 가운데서도.
의원은 생각했다.
법칙(仙)을 가르는 힘을 갖게 되었으나, 결국 망설임이 이 일을 만들어 낸 것인가.
진천희의 말을 들은 ‘아이’가 말했다.
[아니, 네 ‘인과를 가르는 힘’(斷仙)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담아내는 것은 그래 봤자 인간의 육체. ‘나무’는 어디까지나 이곳을 연결하는 단말일 뿐이야. 그때 네가 나무를 베었다면 더 빨리 이곳으로 끌려 들어왔겠지.]‘……?’
진천희의 눈이 커진다.
[그래. 지금 생각하면 상대의 마음을 이용한 함정이 아닌가 싶어. 나는 베는 것조차도 함정으로 썼던 거야. 그때 나무였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죽고 싶었기에 부탁했지만…….]아이의 목소리에 죄책감이 서린다.
자신의 망가짐을 인지하고, 더는 이 낙원을 지탱할 수 없다는 생각에 베어 달라 부탁했다.
아이는 자신과 말이 통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더 조급했다.
하지만 그 마음 또한 거대한 귀계(鬼計)의 일부였던가.
진천희가 물었다.
대체 도원향에 진짜가 있긴 하냐는 질문.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철저하게 거짓말일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
그 질문에-
[적어도 우리 가족은 행복했었어. 그 마음은 진짜야. 응…….]아이는 미소 짓는다.
물론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웃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너도 여기서는 즐거웠었잖아? 그 달콤한 기분만은 진짜였으니까.]진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무에서 벗어났기에 알 것 같아. 이곳은… 너 같은 자들을 가두기 위한 함정이야.] [오래전부터 천기를 거스르는 자들을 없애기 위한 덫.] [천기가 시작된 후부터 아득한 시간 안배해 왔고 인간의 지식으로는 결코 본질에 닿지 못하게 안배한 덫.]한 번에 합창이라도 하듯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솟아오른다.
“…….”
조금 소름이 돋았으나 진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네. 이미 짐작한 모양이구나.]어렴풋이.
처음에는 몰랐다.
현원전단신공이 대단하다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서를 가지고 유추해 내는 힘이고.
복희의 피에서 오는 지식인지, 아니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것은 모르는 주술에 해박할 뿐 미래를 예지하는 게 아니다.
거짓과 거짓과 거짓과 거짓과 거짓으로 점철된 낙원.
[왠지 모르겠지만. 천기는 자신에게 반역할 자는 선하고 순수한 자일 거라고 짐작한 것 같아.] [협(俠)을 위해 검을 드는 자.] [현명할 거라고도 생각하는 것 같아.] [인간을 지키며, 어딘가 순진한 구석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그것은 천기가 악(惡)이라는 뜻?] [달라.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니까.]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여러 개로 분열된다.
오랫동안 나무였기에, 아니, 여러 백(魄)으로 이루어진 군체였기에 생긴 후유증이라는 생각에 들었다.
그리고.
‘머리가 나빴다면 더 빨리 죽었겠군.’
왜 제갈세가가 법칙을 끊는 태을단선검을 갖고.
또 뇌를 강화시키는 현원전단신공을 가졌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아득한 무언가를 상대로 필멸자가 저항하기 위해 전해지는 무공이다.
힘이 모자란다면 지혜라도 있어야 했다.
현원전단신공으로도 이렇게 궁지에 몰렸는데 그조차도 없는 무인들은…….
‘아예 대항할 방법이 없었겠구나.’
인간이 이런 존재를 상대하려면 어찌해야 하나.
그 힘은 끝없이 강대하며.
시간 따위는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기다리는 존재들을 대체 어찌 싸워야 하나.
[너만이 우리를 위로해 주었어.] [여기까지 온 자들은 나랑 대화가 통하지 않았는데도, 모두 나를 베는 걸 택하여 끌려 들어와 空이 되었지만 너만은 달랐어.]따스한 목소리.
[과거에 우리는 계약을 했고 소원을 이루었어. 그 계약에 따라 대가를 지불하는 것뿐.] [하지만 너는 달라. 어서 나가야 해.]작은 손이 등을 민다.
하지만, 그 힘이 너무나도 미약했다.
[밖으로 보내줄게.] [걱정하지 마.]그럼에도 진천희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으윽……! 밀려라!]하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진천희를 밀고, 또 밀어 본다.
하지만 ‘아이’는 결코 법칙에 거스를 수 없다.
[빨리 내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곧 녹아버릴 거야.] [용맥의 기운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모든 것을 끓일 거야.]하지만 나무 선배님.
나가고 싶어도 나가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내보내 줄게!]하지만 나무 선배님. 보시다시피 조금도 꿈쩍이지 않는걸요.
[……아…….] [아아아…….]무력감이 아이의 얼굴을 잠식하고-
[미안해. 내가… 내가……. 바보라서…….] [……멍청이 나무라서…….]마침내 열기가 밀려온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기가 진천희에게 닥쳐들었다.
진천희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던 격류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크으으으으으!’
지독한 열기가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일으킨다.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미증유의 열기가 진천희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진천희는 급하게 자신의 원래 몸을 떠올려 복구시켜 본다.
허나, 버티는 것보다 열기가 훨씬 더 뜨겁다.
‘이… 이대로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지만 되돌릴 수 있을까.
죽는다면 다시…….
그때 작은 진천희들이 말했다.
‘이곳은 인간계가 아니라고.’
되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거니와.
만약 되돌아갈 수 있다고 한들 가지고 있는 대가로도 부족할 수 있다고.
덫.
반선의 씨앗을 위한 덫.
‘끄아아아아아악!’
말 그대로 사람을 삶고 태우는 지독한 통증.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빌어먹을!’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도 복희의 피가 통하는지, 통하지 않는지 바로 몸으로 시험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때 진천희 품 안의 존귀한 분을 못나게 빚은 토용이 조용히 빛을 발했다.
우우웅-
거기서 기적이 벌어진다.
진천희 주변으로 빛이 생겨났다.
* * *
태원의 빈민가 외진 곳.
그곳에는 투박하지만 깨끗하고 견고한 집이 한 채 있다.
온돌이 잘 만들어진 집.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은 중년의 여인 한 명과 그녀의 자식들인 소녀와 소년까지 세 명일 뿐.
무법지대라고 할 수 있는 빈민가, 그리고 외진 곳.
누군가가 빼앗으려고 들 수도 있건만, 아직까지는 아무도 이 세 모녀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빈민가일수록 하오문의 영향력은 크고 지대하니까.
땅거미가 능선을 넘어 집을 가득 채우는 시간.
동생은 책을 읽고 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고 있다.
소녀는 점소이로 일하고 온 터라 피곤한 채로 누워 있다.
‘역시 머리가 좋구나. 동생 놈은…….’
신의께서 왔다 간 이후로 그녀에게 배움의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학이나 대학 같은 학문서는 머리가 핑핑 도니 집어치웠다.
대신 무량연화범심공 정도라면 꽤 익힐 만했다.
‘나한테 재능이 있는 건가?’
알 수는 없다.
다만, 며칠 후에 연무 도시에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알고 있다.
동생은 의원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고, 자신은 무인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
엄마는 건강해졌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감사합니다. 신의님. 감사합니다. 은공…….’
소녀가 바랐던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이런 것.
그저 잔잔한 일상.
대단할 것도 없이 건강한 일상.
‘이 은혜는 목숨을 갚아서라도 갚겠습니다.’
전부터 했던 맹세.
신의께서는 그녀가 무릎을 꿇는 것조차도 허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랬기에 마음은 더 깊어 간다.
소녀는 맹세를 기억하며 잠이 든다.
우우웅-
왜일까.
소녀의 집 앞에 세워진 커다란 여우 토용이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 * *
측삭절맥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 다른 이들처럼 살 수 있게 된 성주의 아들.
그는 기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애초에 걷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매일매일이 아니던가.
이제는 산책할 때마다 공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새벽 햇살에 나뭇잎이 어떻게 빛나는지 알고 있다.
그는 밤하늘을 보며 천천히 걸어간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걷는 걸음이나 그야말로 기적.
성주 아들은 생각한다.
‘다시 걷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인. 은인을 위해서라면, 이 목숨을 바치고 싶습니다.’
성주의 거처에 세워진 유호 토용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우우웅-
* * *
강호의 어느 곳이든 신의(神醫)의 발걸음이 닿는 곳이면 여우의 형상은 존재했다.
집집마다 여우 토용이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놓여있곤 했다.
그가 구했던 많은 이들 중 일부.
그 일부들이 진천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 염원하고, 또 염원한다.
-너희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한다면 따르라.
-선택한 그 길에 후회가 없다면, 바쳐라!
그들의 염원이 하나의 법칙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여우의 형상은 그것에 호응한다.
필멸자의 염원.
그것은 ‘존귀한 자’의 지고한 양식이자.
그들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이기도 했고.
-인간의 생명이 담긴 신앙.
-그들의 수명을, 염원을 삼키리.
-이 자리. 새로운 ‘존귀한 자’가 탄생하리라.
오래된 약속에 응답하며 사람의 생명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 * *
소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소녀가 인지하는 세상은 단지 하나뿐이다.
저 멀리 불이 있다.
그리고 그 불 앞에 은인이 서 있다.
불이 곧 은인을 집어삼킬 것이며, 내버려 둔다면 은인은 죽으리라.
여기서 소녀는 어째서인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 것 같았다.
은인 대신 저 불에 몸을 던져라.
고통은 없을 것이나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소녀의 마음에 스며든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세계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정신 때문에 소녀는 이게 현실임을 알았다.
저 불에 뛰어든다면 죽는다는 것 역시 알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은 현실임을 인지한다.
그리고 기꺼이 소녀는 결심하며 자신을 내던졌다.
‘은(恩)을 목숨으로 갚으리.’
그리고 소녀는 자신을 던졌다.
* * *
측삭절맥에 걸렸으나 겨우 사람 구실을 하게 된 성주의 아들은 거대한 불길을 본다.
태원의 소녀 가장처럼 그 역시 모든 것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러나 소년은 소녀처럼 죽음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측삭절맥을 앓으며 살았던 세월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아. 은인이시여. 감사드립니다.’
부모님께 효를 다하고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제 생명을 기꺼이 받으소서.
소년은 자신을 내던진다.
문득 소년은 자신과 같은 자들을 본다.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신의님, 제 감사를 받아주십시오. 제 감사로 부디 은인께서 살아남으시기를!’
목숨을.
바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