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8
제 18화
인간 진천희와 의사 진천희가 싸웠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죽여. 의원이 손댈 여지도 없게. 안 될 거 알면서 살려 보겠다고 고치는 마음을 넌 모를 거다.
얼마 전, 자신이 여하륜에게 했던 말 아닌가.
‘정말로 못 고치는 걸까?’
진천희는 생각에 잠겼다.
소설에서 읽었던 모든 단서들을 짜내 보았다.
“…….”
진천희의 꽉 쥔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기재 중의 기재라 불리는 백린의선도 자신의 체질은 고치지 못했다. 그걸 내가 할 수 있을까? 구음절맥은 다른 것도 아니고 무협지의 체질이야. 현대의 의학이 나설 수 있을까? 이건 단순 외상이나, 매독 같은 병이 아닌데.’
백린의선은 그런 진천희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이윽고 진천희가 말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무엇을 해 주면 되니?”
백린의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내심 고민하는 진천희의 모습이 아들처럼 귀여웠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음 말에 그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진천희가 말했다.
“사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그게 무슨…….”
“병이 있으신 건 알고 있어요. 아니, 엄연히 말해 체질이지만요. 제 생각이 맞다면 완치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싹.
목 뒤쪽으로 털이 곤두섰다.
일전에 느껴 보았던 감각이었다.
미래의 천마, 여하륜이 눈을 떴을 때가 이랬다. 마치 호랑이를 앞에 둔 기분.
이런 걸 살기(殺氣)라고 하는 걸까.
진천희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한쪽을 향했다.
그곳에 있는 건 유호였다.
그에게서는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표정은 무표정하다. 하지만 조금의 감정도 없는 듯한 그 얼굴이 도리어 공포스러웠다.
‘으헉, 엄청나게 무섭잖아! 소설에서는 1권에서 몇 번 언급만 되던 엑스트라 아니었어?’
“유호. 그만두게.”
백린의선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후우…….’
진천희는 속으로 안도했다.
몸을 압박하던 그 살기라는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유호가 무표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저 꼬맹이가 지금 주인님을 능멸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호의 말에 진천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알고 있다.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암 말기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법이 나왔다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고문인지.
진천희는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싸워야 했다.
가망이 정말 없다면 포기하고 호스피스에 전념해야 하지만, 희망이 있다면 알려 줘야 했다. 그게 그의 직업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잔인한 일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희망은 때로는 절망보다 잔인하다.
희망은 사람을 간절하게 만든다. 그리고 울부짖게 만든다.
아름다운 죽음을, 깨끗하고 정리된 결말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진천희는 생각했다.
치료가 힘들고 고통스럽고, 살 수 있는 확률이 백 프로가 아니라고 해도.
그 사실조차도 감춰서는 안 되는 게 의사 아닌가.
그 끝이 추하고, 고통스럽고, 악에 차서 개처럼 울부짖는다 하더라도 나을 수 있다면.
삶은 가능성이었다. 이어 나가야 했다.
그걸 말하는 게 자신의 업이었다.
진천희가 말했다.
“받기만 하지도 않을 거고, 포기하게 하지도 않을 겁니다. 편히 죽게도 하지 않을 거예요.”
“미쳤군요.”
유호가 그 실눈을 살짝 뜬다. 살의를 담은 눈동자가 그곳에 있다.
실눈 캐릭터가 눈을 뜨면 참 인상이 더럽다는 것을 진천희는 실감했다.
저벅.
유호가 백린의선의 뒤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다시 말해 보십시오.”
쿠그그-
다시금 살기가 흘러나온다.
아까보다 더 끈적하고, 숨이 턱 막히는 감각이 진천희를 휘감았다. 천마의 것과는 달랐지만, 천마와 똑같이 치명적이었다.
‘큭. 이거 장난이 아닌데…… 그나저나 이번에는 제갈린도 안 말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데…….’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진천희는 입을 열었다.
의지로 가득 찬 얼굴로, 비록 식은땀이 흘러내리지만 또박또박 그는 말했다.
“살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재미있군요. 죽고 싶습니까?”
끼기기긱-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짐승이 발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유호가 선 자리의 바닥이 갈라지는 게 보였다.
“그만.”
그러나 백린의선의 말과 함께 그 기세가 단번에 없어졌다.
그것은 기묘한 모습이었다. 유호가 선 바닥이 갈라지는데, 백린의선의 옆에서 멈추었다.
백린의선이라 불리는 제갈린.
그가 유호의 기세를 차단한 것으로 보였다.
‘……백린의선이 무공을 익혔나?’
그가 싸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공손영 누나도 이렇게 하진 못했는데.’
이게 가능하려면 절정 고수보다 높은 경지여야 했다.
소설에 나오지 않은 부분을 그렇게 진천희는 확인하고야 말았다.
백린의선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냉막한 표정으로 그는 진천희를 바라보았다.
“나를 우롱하는 일치고는 꽤나 거창하구나.”
“우롱이 아닙니다.”
진천희의 대답에 유호가 답했다.
“우롱? 그게 아니면 크게 사기라도 쳐 먹을 생각이겠죠.”
“이미 제자 자리를 주신다 했는데 여기서 뭘 더 바라겠습니까?”
진천희.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아이었다.
어른들 앞에서는 늘 서글서글하게 웃고 애교 있게 굴었다.
군데군데 영특한 모습도 보여 주어서 예쁨을 받는 아이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 마음을 홀리는지 아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백린의선은 생각에 잠기다가 입술을 열었다.
“일단 듣자꾸나.”
“주인님.”
백린의선은 유호의 말을 무시했다.
“단, 날 놀리는 결론이라면 제자로 삼겠다는 말은 거두겠다. 알겠느냐? 나는 두 번 다시 너를 보지 않을 거란다.”
말의 무게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간다.
“네.”
진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크게 심호흡했다.
‘괜찮아. 익숙한 일이야.’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지만, 의사의 업을 지녔기에 도망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제 생각에는…….”
* * *
유호는 진천희를 죽일 생각이었다.
제자를 들이는 것만으로도 주인님께 얼마나 큰 부담인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주인을 능멸하려 하고 있다.
죽여야 할 이유야 충분했다.
진천희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유호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소년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아팠지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야기를 끝낸 소년은 도리어 이렇게 말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나가 있겠습니다.
기이하게도 그 말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검과 말은 비슷하다.
오랫동안 아껴 온 병장기가 손때에 영글듯, 말 역시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억양부터가 자연스럽다.
소년의 억양은 마치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은 해 본 것 같은 닳고 닳은 억양이었다.
“음양합일 같은 개소리나 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허허허. 일전에 그런 분이 계셨지.”
-구음지체는 양기가 부족해서 생긴 일 아닌가! 당장 태양지체인 공손영 소저를 꼬시면 되는 일! 의선께서는 미모도 되시고, 몸도 좋으시지 않나! 음양합일로 양기를 보충하면 되는 일인데 그걸 못하다니. 백린의선은 분명 불구이거나 고자인 것이 틀림없다.
엄청난 소문이었다.
유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 발언지를 하루 만에 찾았다.
의원이었다. 그것도 꽤 동네에서 이름 있다 하는 의원.
그 의원은 유호가 뒷산에 머리만 내놓고 묻어 버렸다.
“음양합일이 무슨 절세의 영약도 아니고 뭐든 고쳐 주면 의원이 왜 있겠나. 그냥 그것은 선인들께서 건강한 성생활을 통해 몸을 보하라고 만드신 것일세. 쉽게 말해. 기체조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의원에게 피해를 입은 환자들도 꽤 있었다.
환자에게 턱없이 비싼 약값을 내놓으라 하고, 집을 팔아 그 돈을 내놓으면 병을 고치기는커녕 생과 사는 하늘에 달린 것이라 둘러대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른바 돌팔이. 그것도 꽤나 악질이었다.
유호는 그놈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응징한 후, 인근 관아에 넘겼다.
“아직도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있군. 유호.”
“주인님께서 말리지 않으셨으면 그놈은 이미 죽었습니다.”
“산 것만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그걸로 되었지.”
사지를 작신작신 밟아서 관아에 넘겼다. 또한 사기를 당한 환자의 유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관아에서는 최고형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놈의 모든 재산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고, 거기에 얹어서 보상까지 하게 했다.
“…….”
그 이후로 유호는 백린의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제 정말 온전히 각오했다 싶을 때 ‘그 아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쩌실 겁니까.”
“받아들여야지.”
“실패하면요?”
“곱게 죽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말대로 평온한 죽음은 겪지 못하게 되겠지. 마지막까지 고통스럽게 병마와 싸우다 가겠지.”
“그래서 실패하면요?”
“의원은 사람을 살릴 때도 성장하지만 사람을 죽일 때에도 성장한단다. 어떨 때는 살릴 때보다 죽일 때 더 많은 성장을 하기도 하지. 그때에는 나를 뛰어넘는 신의가 될 거란다.”
백린의선, 아니 제갈린은 자신의 죽음을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 하듯 담담히 말했다.
“거름이 되겠다고요?”
“스승으로서 그 이상의 보람이 어디 있을까.”
“대체 그 아이의 어느 부분이 그리도 마음에 든 겁니까? 총명하고 매력적인 아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요. 네, 특이한 의술을 알고 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쏙 드신 겁니까?”
“그 아이가…… 그리 말하더군.”
-죽으려고 의사를 찾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처치가 아프고, 과정이 괴로워도 싸우기 위해, 이기기 위해 환자는 오는 거죠.
-네, 물론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죠. 사람의 힘이 죽음의 힘보다 강하지 않으니까요. 확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는 싸움을 하는 존재입니다.
소년은 그렇게 단언했다.
우리의 싸움은 언젠가 질 것이라고. 죽음은 모두를 데려간다고.
하지만 백린의선의 마음을 울린 것은 그다음 말이었다.
-언젠가는 지고 말겠지만, 하지만, 이번 한 번은 이기자고 덤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백린의선. 저는 당신을 곱게 죽이지 않겠습니다.
-저를 제자로 받는다는 건 평온한 결말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묻겠습니다.
시간은 무정하다. 모든 이들은 언젠가는 죽는다.
-백린의선. 당신은 싸울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언젠가 모든 인간은 죽지만, 그래도. 이번 한 번은 이겨 보지 않겠냐고.
소년은 당돌하게 물었다.
그 눈빛에 백린의선은 그만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