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00
제 200화
다음 날.
황보무휘가 진천희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진 형제, 설거지는 내가 하겠네.”
여기서 형제란 강호에서 예사로 부르는 호칭으로 의형제의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졌다고 꽁해 있지는 않네.’
다음날 아침 정신을 차린 황보무휘는 솔직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런 황보무휘가 진천희에게 사과하러 간 날 본 것은 그의 대적자 황보무아와 진천희의 사이좋은 모습이었다.
“호오, 거기서 그렇게 다음 수를 판단한 거군요.”
“네. 상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첫 번째. 방위를 점하는 것이 두 번째. 세 번째가 되었을 때 손이 나가야 하는 건(一見二步三手). 기본적인 무(武)의 원리입니다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갈세가는 생각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들었는데 그것을 이용한 겁니까?”
“네. 하지만 황보세가에는 황보세가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 말에 황보무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되물었다.
“궁금하군요.”
“황보세가는 기본적으로는 강건한 무공으로 우위를 점하고 육감에 의지해 방위를 점합니다. 제가 판단한 게 맞나요?”
짧은 비무로 거기까지 짚어 낸 것인가.
소름이 살짝 돋았다. 황보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희가 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제 생각입니다만. 그게 되려면 권보다 보법을 우선해야 합니다. 육감이란 결국 경험에서 추론하는 판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발이 느리면 다음 수에서 밀리게 되는 거죠.”
진천희는 황보무휘의 벽력신권이 막혔던 과정을 세세히 설명했다.
방위 선점은 좋았으나 발이 따라가지 못했고.
권은 그에 비해 지나치게 빨랐다.
그것은 찰나의 허점을 만들어 내는데 하수나 동수라면 보이지 않을 터이나 고수라면 허허롭게 날린 기탄으로도 파훼가 가능하겠지.
“어찌 생각하십니까. 황보 소협?”
진천희의 시선이 황보무휘에게 닿았다.
황보무휘가 얼굴이 빨개졌다.
“거 엿들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끼어들 틈을 찾기가 어려워서…….”
“압니다. 거기다가 비록 소저께 말씀을 드렸다고는 하나 비무를 한 것은 황보 소협이시니 소협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함께 복기를 해볼 생각이었습니다.”
“제갈세가의 현원전단신공은 오성을 발달시키는 무공이라고 들었습니다. 전투 중에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던 건 그 덕분인가요?”
황보무휘는 구태여 파훼법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여러 문파들이 제갈가를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버지께 듣기로는 제갈가의 혈사 때 타 문파들이 돕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고.
시비 거는 것은 어제로 충분했으니까.
진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갈세가의 현원전단신공은 신공절학이라 말하기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그게 없었으면 저도 평범한 범인(凡人)일 뿐입니다.”
진담인가. 아니면 겸손인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이든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준 상대.
무(武)에 대한 통찰은 최소 세 수는 위였다.
‘비슷한 나이 같은데 대체 어떤 지옥을 구른 거지.’
자신도 상당히 많은 실전을 거쳐 왔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진천희의 무학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황보무휘는 어젯밤 시비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설거지를 도맡아 하기로 했다.
황보무아는 원래라면 바로 어머님께 전서를 날려야 할 일이나 인생이 불쌍해서 한 번은 봐준다고 했다.
‘사이가 나쁜 건지, 좋은 건지…….’
그래 놓고 점심 고기 한 점을 더 먹을지 덜 먹을지로 치열하게 싸운다.
인생 혼자 살아온 진천희에게는 신기한 모습.
형제가 있다는 사실에 조금 부럽기도 했다.
물론 두 사람은 그 말을 들으면 끔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겠지만.
* * *
그렇게 일행은 무림맹을 향해 나아갔고.
어느덧 무림맹이 자리한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鄭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주는 하남성의 성도이니만큼 크나큰 대도시라 할 수 있지만 그런 대도시 안에 무림맹이 자리를 잡은 건 또 아니었다.
정주를 둘러싼 성벽의 바깥 쪽.
도시의 외곽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무림맹이라 할 수 있었다.
강호 문파들의 연맹체이기 때문에 무림맹 본단에 있는 사람 수만 해도 거의 육천여 명.
무림맹에 속한 무인만 적어도 일만여 명이 넘어간다.
즉, 강호 최대의 연맹체!
거대한 무림맹의 규모를 감상하며 진천희는 헤벌쭉 웃었다.
‘이게 무림맹이구나!’
어느 무협지든 한 번은 꼭 무림맹이 나온다.
물론 승리하거나 잘나가는 경우는 거의 회상 장면이고.
-30년 전 무림맹이 힘을 합쳐 천마를 패퇴시키기에 이른다!
이런 구절.
대부분은 누군가를 놓치거나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쥐새끼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게 천라지망이오. 무림맹이 펼친 천라지망을 빠져나가는 자는 단연코 없을 것이오.
천라지망은 직역하면 하늘과 땅에 펼친 그물. 현대로 치면 사람으로 포위망을 펼쳐 수색하는 거라 보면 된다.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간하면 펼치기 힘들지만 무림맹에서 강호 공적을 추격하기 위해 펼치곤 하나.
반드시 뚫린다.
주인공이든 악역이든 어쨌든 무림맹이 펼친 천라지망은 꼭 뚫리더라.
-놈이 대체 어찌 무림맹의 천라지망을 뚫고 도망쳤단 말인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나!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사마 그 소용돌이 속에서 무림맹은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며 최종 결전에서도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등장한다.
주인공을 돕기도 하고, 방해도 하고, 들러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 또한 무협의 묘미!
흑도와 백도가 있다고 한들, 그것만으로는 선악을 정할 수 없는 것이 무협지의 즐거움 아닌가.
진천희는 가슴이 웅대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이 반짝이는구나. 희야.”
그 말에 진천희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 너무 티 났나?’
그래도 역시 좋았다. 너무 좋았다.
마치 연말 콘서트 예매에 성공한 팬 같은 기분!
‘내가 해냈다! 내가 무림맹에 왔다!’
이게 무림맹의 벽돌이구나. 이것이 무림맹의 깃발이고.
저기 저 허술한 포즈로 서 있는 사람은 무림맹의 보초!
암, 저래야 천라지망이 구멍이 나지. 천라지망은 구멍이 나야 제맛이야!
조금 핀트가 어긋난 덕질을 하며 감격에 젖은 진천희였다.
* * *
무림맹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무래도 용봉지회 때문인 듯싶었다.
용봉지회에 참여하는 후기지수들뿐만 아니라 세가에서 보낸 호위나 시중을 들 가솔들.
장문인이나 장로가 동행을 하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물건을 영업하기 위해 상단들도 모여든다.
한마디로 용봉지회는 단순히 후기지수 무투 대회가 아니다.
커다란 정문을 지나치며 진천희는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천장의 벽화 봐라. 크으…….’
용과 봉이 함께 춤을 추는 벽화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준다.
이윽고 무림맹의 수문위사(입구를 지키는 무인)가 진천희 일행에게 말했다.
“잠시 정지해 주십시오.”
아까까지 하품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제법 군기가 든 표정으로 이쪽이 든 깃발과 황보세가의 깃발을 확인한다.
“백린의각에서 오셨군요. 무림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명록을 작성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같이 따라온 추나당주 주단하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하겠네.”
“감사합니다.”
신분을 증명하는 명패를 보여 주고 몇 가지 확인 절차를 거치고는 곧바로 방명록을 작성했다.
방명록을 받은 수문위사가 말했다.
“백린의각주님이 오시면 모시라는 맹주님의 명을 받았습니다. 안내를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갈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봉지회에서 가장 갈리게 될 곳이 바로 의각이니 당연했다.
“희야, 네가 다른 이들을 이끌고 별채에서 짐을 풀 거라. 나는 잠시 무림맹주를 만나고 오겠다.”
무림맹주에게 달리 존칭을 하지 않은 것은 백린의각의 각주로서 무림맹주를 만나기 때문.
어디까지나 무림맹은 문파의 연합체이고.
맹주는 무림의 황제 같은 게 아니라 각 문파의 수장들이 뽑은 연합의 대표.
자연히 상하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띠게 된다.
“예. 스승님.”
진천희가 답하자 제갈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안내에 따라 무림맹주를 만나러 향했다.
‘……왜 스승님이 용봉지회에 가야 할 때마다 썩은 표정을 짓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데.’
무림판 응급실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심력이 갈릴 일이지만 수장으로서 이런 정치적인 위치도 있으니 더 귀찮으실 만했다.
‘그래도 겉으로 티는 잘 안 내시는군.’
또 다른 수문위사가 말했다.
“별채는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를 따랐다.
* * *
별채를 가며 느낀 건데 무림맹은 그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면 큰 대학교 캠퍼스 몇 개는 붙이고도 남겠는데?’
길을 잃으면 찾기 힘들겠다 싶을 지경.
아니나 다를까 길을 잃은 무인 하나가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지붕과 지붕 사이를 경공으로 달렸고, 무인을 쫓아 아가씨 체통을 지키시라며 가솔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당과며 꿀을 발라 구운 떡을 파는 노점도 많았고.
개방에서 온 무인들과 개들도 보였다.
컹!
아는 개를 만났는지 황구는 잠깐 대열에서 이탈해 어떤 개와 코 뽀뽀를 했다.
그러고는 곧장 진천희를 향해 달려왔다.
즐거웠다.
“기뻐 보이십니다.”
침구당주 사마병이 그런 진천희에게 말을 걸었다.
“네. 신기한 게 많아서요.”
“소각주님은 참 독특한 사람입니다. 어떨 때는 세상 모든 진리를 다 아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또 어떨 때는 이렇게 모든 것을 생소해하니 말입니다.”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그리고 과거 스승님께서 했던 이야기고.
진천희는 뺨을 긁적였다.
“그런가요.”
“그런 모습이 이 노부는 좋다는 말입니다.”
다른 의도로 한 말은 아니라고 사마병은 한마디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각주님께서 드실 먹거리라도 사 가시는 건……? 돌아오시면 다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으실 테니까요.”
“무림맹주와 대담하는 게 피곤한 일이긴 하죠.”
“네. 저로서는 자세한 건 짐작하기 어려우나, 의각을 책임지는 각주란 많은 이들이 만나길 원하는 자리니까요.”
백린의각에서 마냥 제자에게 팔불출인 모습만 보여 주었던 스승님이었다.
이렇게 다른 모습을 알게 되는 날도 당연히 올 거라고 짐작하긴 했다만.
“우선 짐을 좀 풀어 놓고 움직이려고요. 그리고 스승님 입맛이 좀 까다로우신 게 아니니 미리 시식도 해 봐야죠.”
“하하하. 소각주님이 사 온 것은 뭐든 좋아하실 겝니다.”
“그래도. 그래도 기왕이면 입에 맞는 걸 드리는 게 좋으니까요.”
제자가 사 왔다면 성의상 좀 더 먹기야 하겠지만, 평소 성정대로라면 두 입 먹고 버리실 거라.
진천희가 고자질을 하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스승님 취향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닌 건 강호 사람들이 다 알죠.”
“그러게 말입니다. 향기 가리시고, 먹을 것 가리시고, 사람도 가리시는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그런데 용케도 소각주님만은 마음에 드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물론 소각주님께서 보통 힘드신 게 아니겠지만.”
……대체 왜 제갈린에게 선택받은 것을 다들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일까.
침구당주 사마병까지 그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아니, 나는 잘 지내고 있는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