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07
제 207화
둘은 밤이 깊도록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호의 기재(奇才)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니 제법 많은 것들을 빠르게 정해 나갈 수 있었다.
그것들 중에 진천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도 제법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과연 스승님이시다. 이건 단순히 현원전단신공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경험, 통찰, 그리고 지혜가 있어야 가능하지.’
또한 같은 무림인이기에 짚어낼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진천희는 이 세계에 와서 나름대로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의원으로서의 본분이 우선순위가 높은 터.
사고의 방향이 무림인들과는 다를 수밖에.
반면 스승님은 강호의 혈사를 당하고, 홀로 복수를 해 나가야만 했으니.
의원보다는 무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더구나 오랫동안 제자를 지켜봐 왔기에 짚어낼 수 있었던 것.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세력의 확장이겠지. 강호란 결국 힘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은원과 정사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일이란다.”
“단순히 지금의 백린의각으로는 부족한가요?”
“부족하지. 앞으로 약소 세가들이 특히나 짓밟히게 될 터인데 특히 더욱.”
제갈린은 부채를 천천히 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가문을 잃었는데 제정신을 유지하는 이는 드물단다, 희야. 약소 세가가 강자에게 짓밟히고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대들보에 머리를 박고 자결하는 일이야 흔하지. 환난이란 그런 것이란다.”
“…….”
“세력은 말이다. 그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분쟁을 막아 준단다. 또한 살아남은 이들도 대들보에 머리를 박기보다는 어떻게든 살아서 복수를 꿈꿀 수 있지. 기댈 곳이란 그런 거란다.”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세력의 확장이란 그런 것이군요.”
“그래. 백린의각은 지금까지의 행보를 벗어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행동에 들어가야 한단다. 네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고. 다행히 나도 이제 수족이 자유로워졌으니 전면에 나설 수 있지.”
스승님은 그리 말하고는 살짝 이마를 찌푸리셨다.
“물론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말이다.”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것 없단다.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까 말한 중소 문파들이 기댈 곳을 뜻하는 것만이 아닌, 네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란다. 축방(築防)이 튼튼해야 홍수를 막는 법이니.”
축방(築防). 즉, 방죽을 뜻한다.
그리고 그만큼 스승은 제자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겠지.
무엇보다 이 행보는 본래의 소설 지존천마에는 존재한 적이 없는 역사.
‘앞으로 강호가 어찌 변화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는걸.’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사람을 살려야지. 암. 더 많이 살려 낼 수 있어야지.’
이곳에 와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리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반드시 그리되게 만들 거야.’
이 세계에 와서 조금도 변한 적이 없는 각오가 하나 있다.
가끔 지칠 때도 있고, 또 가끔은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힘들 때면 습관이 되어 중얼거리는 한마디가 있다.
-의원은 의원의 일을 할 뿐.
* * *
“아침에 누가 똥이라도 넣은 거야, 형? 꼭 뭐 씹은 얼굴이네~?”
다음 날 낮.
이번에는 본래 자기 얼굴로 나타난 사마현이 진천희를 보며 그리 물었다.
“아, 아아. 딴생각 좀 하고 있었어.”
“딴생각하는 건 알지~ 그런데 우리 형이 그런 표정을 하게 한 생각이 뭔지 이 동생은 궁금하네~?”
그 말에 진천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사마현은 그런 형의 얼굴을 가는 눈을 뜨고 들여다보더니 ‘뭐, 됐어. 말하기 싫으면 말고~’ 이렇게 말하고는 넘어갔다.
“대회는 다음 주인가?”
그 말에 진천희가 재빨리 답했다.
“응. 지금은 준비 단계지. 보통은 이 시기에 후기지수들끼리 만나 술을 마시거나 친목도 다진다고 스승님께 들었어. 그리고 물밑으로는 후기지수를 따라온 실무자들끼리 사업 이야기를 나눈다고. 뭐, 대부분은 이미 위에서 정한 것들을 확인하는 단계지만 말이야.”
백린의각은 단순히 사업 이야기를 넘어서 미리 응급 의료를 위한 진법 설치 및 처음 파견 온 의원 교육, 원래 무림맹에 대기하고 있던 의원들과의 업무 조율을 해야 하니 좀 더 일이 복잡하다.
현대로 치면 올림픽을 앞두고 의료 스태프들이 하는 일을 여기서 하는 거고.
올림픽은 장대높이뛰기를 하고, 수영을 하고, 보호 장구를 철저하게 입은 선수들이 날 없는 칼로 펜싱을 하지만.
여기는 검기를 줄기줄기 날리면서 싸운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위험할 것 같으면 빨리 기권했으면 좋겠다. 제발, 제발…….’
앞길 한창 창창할 나이에 1패가 두려워 아득바득 버티다가 반신불수가 되는 일이 허다한 게 무림 아닌가.
반신불수나 되면 다행이지, 여차하면 사망자도 나오는 게 바로 용봉지회다.
의원은 무인의 낭만 같은 건 모른다.
그냥 자존심 좀 구기더라도 팔다리 온존하고 돌아가서 맛있는 밥 먹고 건강한 삶을 즐겼으면 하는 바람뿐.
“금혈방도 바쁘겠네.”
“그치. 하오문 사업 관련은 보통 우리 금혈방이 처리하는데. 황금왕이신 우리 사부님께서 나한테 짐을 떠넘기고 보내셨으니 말이야.”
“친목질이라도 하라는 거지?”
“좋게 말해 교류지, 교류. 근데 뭐, 강호의 우정이란 것도 결국 비슷한 사람들끼리 나누는 거지. 사파 상대로 정파 애들이 진심으로 친목질 하겠어? 우리 착한 정파 어린이들은 나쁜 사파랑은 친구 안 해요~”
“흑점은 엄청 이용한다며?”
“그게 재미있는 점이지. 착한 정파 어린이들에게 있어 사파는 어른의 빨간책 같은 느낌이지. 개꿀 재미있는데 밖에서 보기에는 좀 그런 느낌?”
“그, 그렇군.”
사마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친구가 되긴 하는데 진실된 우정. 이런 거 생각하면 안 돼, 형. 대롱 꽂아 먹으려는 팽천식이든 언정무든, 나는 걔들한테 놀 때 좋은 나쁜 친구가 되어 주는 거지~ 진정한 우정은 참정파 어린이랑 나눌 테니까.”
사마현은 이미 하북팽가와 진주언가 자제들에게 빨대를 꽂을 생각 만만인 모양.
그러면서도 신랄함은 잃지 않는 게 참 사파다웠다.
“뭐, 결국 말이야. 나는 형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나?”
“형도 인맥 많잖아? 남궁운을 고쳤다며. 지난 용봉지회의 압도적인 우승자인 혈편왕도 형은 꽤 반기는 눈치던데.”
‘당아가 안 그래 보여도 잔정이 참 많지.’
어쩌다 보니 상당히 흉악한 별호를 얻게 되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잔정이 많고 주변을 잘 챙겨 주는 아이인 것을 진천희는 봐 왔다.
“아니면 형이 후기지수 녀석들 만나러 다녀 볼래?”
‘사교 활동이라. 인맥…… 중요하긴 하지.’
여기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육체 나이) 동년배 무인들과 우정을 나누는 풍경을 동경하긴 했다.
그러나 황보무휘에게 시비 털리고.
언정무에게도 시비 털리고.
“…….”
약간 처음 가졌던 로망이 좀 빛바래긴 했다.
‘사교 활동… 인맥…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굳이 지금 단계에서 내가 인맥을 넓히는 게 필요할까.’
어차피 황궁에도 백(황제)이 생겼고. 의각도 잘되고 있고.
콩깍지가 벗겨지니 남는 건 차디찬 이성뿐.
‘돌아다닐수록 시비나 털리지 않을까.’
진천희라는 이름의 황금 고블린이 무림맹에 출몰했으니 이제 명성에 눈이 벌게진 무인들이 레이드하러 달려오는 풍경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개중에는 단순 명성뿐만 아니라 ‘스승 친구 제자’ 때문에 분노가 쌓여 한을 풀러 온 무인들도 있겠지.
“…….”
진천희는 판단을 내렸다.
“그다지 인맥을 넓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 둘이서 적당히 눈에 안 띄는 곳이나 돌아다니자고. 이번 일 끝나면 또 한동안 못 볼 테니까.”
사마현은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무당파는 아직 도착 안 했나?”
“환난을 대충 수습하고 오는 것만으로도 빠듯할 거야. 용봉지회가 밀린 것도 무당에서 생긴 변고 때문이니까.”
그리고 그 용봉지회가 열린 이유도 혈선교에 대한 증거를 물밑에서 논의하기 위함.
스승님은 날이 밝자마자 곧바로 무림맹주를 비롯한 여러 장로, 문주님들과 대화하기 위해 나가셨고.
‘입장이 있으시니 총회의 때는 일부러 불참하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만나러 다니실 예정이고.’
무당이 도착하기 전에 뭔가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많은 모양이다.
‘추나당주님과 침구당주님은 무림맹 소속 의원들을 뵈러 가셨고 말이지.’
진천희가 있는 부술당 의원은 애초에 무림맹에 없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곳인 데다가 부술에 대한 지식 자체가 생소하기 때문.
‘음…… 내가 데리고 있는 상의원과 중의원들에게 하달할 명령은 이미 다 했고…….’
해야 할 말들은 이미 이른 아침, 조회 때 다 했다.
더 조이려면 조일 수야 있지만 어차피 다음 주면 무림 ER을 경험해야 할 병아리들.
기본 실습은 예전에 끝난 터.
여기서 뭔가 더 군기를 잡을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여독도 빠지지 않았을 테니 들볶지 말자.’
괜히 몸살이라도 터졌다가는 정작 용봉지회 때 아무 일도 못 한다.
“놀자. 형~ 응? 나 끝내주게 재미있게 잘 놀아줄 수 있는데~”
“……잠시만. 나라도 해야 할 거 뭐 남았는지 생각 좀.”
“가가. 소녀를 두고 누굴 생각하시나요?”
젠장.
“같이 안 놀아 주면 계속 이 목소리 낼 거야, 형. 나 진짜 개판 잘 만들어. 믿어도 좋아~”
“그래. 네가 이겼다. 그것 좀 그만해.”
진천희의 백기에 사마현이 키득였다.
몸은 커졌어도 애 같은 부분은 여전한 동생이었다.
“나랑 있을 때만이라도 좀 쉬자~ 형. 곧 바빠진다며?”
사마현이 끈덕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요하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게 맞을 터.
다른 것도 아니고 미래의 하오문주이자 시산혈겁으로 세상을 불태우며 여하륜과 싸웠던 자.
그것도 특별한 무골이나 지켜 줄 가문 하나 없이 밑바닥부터 올라온 이였다.
끈기와 집요함이 없다면 말이 안 되겠지.
작정하고 팔을 붙잡고 늘어지니 숙련된 프로 깽판러의 각이 보였다.
결국 진천희는 미래의 하오문주에게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놀아 주기로 했다는 뜻.
“형은 미식가니까 사람 적은 곳 중에 맛집 찾아줄게. 황구랑 뇌진…… 맞나? 걔들은 빼고.”
왈!
삐익!
두 털 짐승들이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사마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짐승 둘이 붙으면 너무 눈에 띈다고~ 하루만 형 좀 놔줘라. 형도 쉬고 싶을 거 아니야. 하루 종일 너네 챙기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아니, 현아. 나는 오히려 쟤들한테 고맙고. 달리 그렇게 힘들진 않았…….”
형의 말을 끊고 사마현이 촉촉한 눈망울로 이렇게 말했다.
“……가가~★”
‘젠장. 과연 경극 출신이라 이건가. 연기에 감정이 제대로 실려 있어.’
프로 깽판러의 묘기에 결국 진천희는 두 영물들에게 돌아오면 특식을 해줄 것을 약속하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