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55
제 255화
표현이 서툰 언니와 표현이 서툰 동생은 그렇게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했다.
욕이 섞인 고성이었다.
비록 할 수 있는 욕이라고는 ‘바보’나 ‘멍청이’가 전부였으나 그녀들은 한참 동안 자신의 감정을 토해 냈다.
‘정략결혼이 섞여 있었구나.’
제독태감의 결정은 다음과 같았다.
언니가 육부상서 중 하나가 되어 관직의 길을 걷는 동안, 동생은 가문을 위해 이민족과 혼인을 해라.
얼굴도 모르고, 성격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먼 타향으로 가는 것.
그렇게 정략결혼을 하고 나면 그곳에서 가문을 위한 다리가 되어 끊임없이 제국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아버님도 그렇게 왔잖습니까!”
“그래. 어머님은 이민족인 아버님을 끔찍하게 아껴 주셨지. 허나, 너도 그럴까. 소아야, 너도 그리 아껴 줄까?”
정략결혼을 해도 화목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아버님은 그래도 말은 통했다, 소아야. 말은 통했어. 하지만 이번에는 문화도 다르고 글자도 다른 곳이야. 아는 이도 없는 만리타향을 어떻게 가려고 하느냐.”
“그래요. 어렵겠죠. 허나 그게 언니가 죽을 이유는 못 됩니다.”
“자리는 하나였고, 누군가는 가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갔어야 해. 소아야.”
“조부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언니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었으니까!”
한이정은 담담히 답했다.
“그러니 내가 죽을 것이다. 병을 핑계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요절하고 나면 그러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 순간 한이정과 진천희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심기가 복잡한 표정으로 진천희에게 문밖을 눈짓했다.
조용한 축객령에 진천희는 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혔다.
안에서는 울음소리와 고함 소리가 반복해서 울렸다.
‘스승님은 젊다 하셨지. 젊으니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혼인을 막고 싶은 언니와, 그런 언니를 살리고 싶은 동생.
권력의 맛이란 원래 이렇게 떫은 건가.
흡사 오늘 회의에서 마신 우릴 대로 우린 찻물처럼.
‘이게 의각주가 고려해야 할 일이었구나.’
인간은 감정의 생물이고, 선을 아무리 잘 그어 분리해 본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도 존재했다.
이대로 두 자매가 결론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겠지.
허나…… 그때 비명 소리가 울렸다.
“언니! 언니이이이이!”
의원을 부르는 소리에 진천희가 급히 문을 열고 달려가니 언니, 한이정이 돌연 극심한 현기증으로 혼절해 있었다.
‘그래. 병마는 기다려 주지 않지.’
지금 이 순간에도 뇌 속 시한폭탄은 계속 째깍대고 있다.
인간의 사정 따위 모른다는 듯.
무심하게.
* * *
보통이라면 환자와 같이 온 보호자하고까지 이야기했으니 진천희는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허나,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이유가 단순히 후유증이나 수술 리스크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라 동생의 정략혼 때문에 자결을 목적으로 하는 거라면…….
‘아, 못마땅하네.’
의원으로서의 오지랖이 자꾸만 퍼덕이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흐음. 이민족이라. 확실히 사람 심리상 다른 이민족에게 거부감이 있을 테니 말이다.”
인종 차별까지 갈 것도 없다.
그냥 한 마을에서 성씨가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차별하는 게 이 시대.
“정략혼을 한다는 곳이 어딘가요?”
“최근 혼담이 오가는 곳이 남만 너머에 있는 소국인 것으로 알고 있단다. 둘째 왕자가 굉장히 방탕하고 폭력적이기로 유명하지.”
“설마 그 둘째 왕자……?”
“바로 그렇단다.”
망했군.
이러니 언니 입장에서는 자결을 택해서라도 막고 싶은 게 당연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자 삼형제 중에 멀쩡한 놈이 셋째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나라가 잘도 돌아가네요?”
“뭐, 매일 사람의 목을 죽죽 치는 광인도 아니고. 소국 정도라면 지리와 자원, 인구만 돌아갈 수 있다면 어찌저찌 유지된단다. 물론 현 황제께서 제국 팽창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기조이신 것도 크고.”
“그래도 제독태감께서 손녀를 사랑하시는데 셋째 쪽에 정략혼을 하고 싶지 않으실까요?”
셋째 왕자라는 차선책이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 패는 놈한테 손녀를 보내고 싶지는 않지 않을까.
“그 부분은 알 수 없지.”
스승님은 서신에 빠르게 무언가를 적었다.
한자가 아닌 점과 선으로 이어진 암호문으로 중요한 정보를 전할 때는 이렇게 나눈다.
여러 집단과 교류하시기에, 하나의 암호문이 아닌 여러 암호문을 사용하기 때문에 진천희도 암호 풀이를 다 알지는 못한다.
스승님이 진천희에게 공유하는 정보는 아직 일부이기 때문이다.
“뭐. 혹시 알겠니. 어쩌면 제독태감께서도 이 상황을 전부 파악하시고 자기만의 수를 물밑에서 두고 계실지도 모르지.”
“어렵군요.”
셋째와 미리 몰래 맞선이라도 해 주고 싶으나 진천희는 의원이지 월하노인이 아니다.
“뭐…… 네 표정이 너무 고약해서 스승으로서 말해 주자면. 이런 일이란 본디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걸 먹고 있으면 알아서 잘 풀리기 마련이란다.”
이게 잘 풀릴 건덕지가 있나.
제자의 표정이 좀처럼 풀리질 않자 스승님은 피식 웃었다.
암호문을 다 작성하고 전서를 보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이야기를 해 보면 될 것 같구나.”
“스승님이요?”
“하하하, 그래.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이 사태를 해결할 방책이 있으신 건가?
* * *
스승님은 느긋하게 한이정의 병실로 걸어갔다.
들어가도 되겠냐는 물음에 한이정은 한참 말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드르륵-
안으로 들어가니 동생인 한소정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헝클어진 얼굴이 부끄러운지 돌아서서 대충 소매로 얼굴을 훔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내 싸운 모양이다.’
소매로 아무리 눈가를 닦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으니 진정하러 달려 나간 것이고.
오히려 언니의 표정은 고요해진 것이 완전히 죽음을 받아들인 모양.
스승님이 말을 꺼내기 전에 언니 한이정이 먼저 말했다.
“예를 표하실 것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다만 치료를 받지 않을 터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시겠다는 겁니까?”
“네…… 그러고 싶습니다. 조부님께서 알게 되면 강제로라도 부술을 시키실 테니 그때는 자결을 각오해야겠지만요.”
이 시대에는 성인이겠으나 진천희가 보기에 그녀는 아직 십 대 후반.
고작 십 대 후반의 아이가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지독하리만치 단호했다.
백린의선이 쓰게 웃었다.
“수년 전까지 죽음을 받아들였던 선배로서 하는 이야기지만 시한부 인생, 그리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괜찮습니다.”
“밥을 먹어도 맛을 못 느끼겠더군요. 어차피 끝이 보이니 말입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어떤 서적을 읽어도 조금 맹숭해집니다.”
“책 읽기를 좋아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장녀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을 뿐. 괜찮습니다.”
“제독태감의 후원에는 그리도 배꽃이 아름답다 하지요. 매년 5월이면 하얗게 피어나 경치가 일품이라고 합니다. 그 길을 두 손녀께서 특히 즐거이 걸으신다는 소문을 저도 들었습니다.”
“……어차피 이젠 같이 걷지 못할 것이니 괜찮습니다.”
“…….”
스승님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것은 한때 시한부 인생을 살아왔던 스승님이.
똑같이 시한부 길을 걸으려는 아이에게 주는 미소였다.
“끝을 기다리는 건 참으로 지루한 일입니다.”
“이상하군요. 어차피 끝이 날 것을 아는데 지루하다고요?”
“네. 끝을 의식하는 삶은 늘 지루하지요. 일각이 열흘과 같으실 겁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나이보다 훌쩍 늙기 마련이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벌써 말만은 늙으셨군요.”
한이정은 제갈린의 말에 눈을 감는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망념이 한 방울 흘러나온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법한 생의 집착 같은 것.
이윽고 스승님이 말했다.
“만약 그 배꽃 길을 다시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네……?”
“만약 그 배꽃 길을 다시 동생과 걸을 수 있다면. 허나, 그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면.”
무슨 뜻인지 한이정은 알 수가 없어 까만 눈동자만 굴렸다.
스승님은 아직 시한부가 되지 못한 젊은이에게 말했다.
“독을 삼키실 수 있으십니까? 손에 피를 묻히실 수 있으십니까?”
그리 말하고는 네 번 접은 쪽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 쪽지 귀퉁이에는 어떤 도장이 찍혀 있었는데 진천희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조부님이시군요.”
“선한 것은 늘 쉽게 스러지고 말지요. 마지막에 남는 것은 늘 독종들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부께서는 한때 선하셨으나 지금은 황궁의 복심이 되셨지요.”
그것이 무슨 뜻일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꽉 움켜쥐었다.
제갈린이 말했다.
“그것을 여시면 조부와 같은 길을 걸으실 겁니다. 허나, 살아남으시겠지요. 독한 것은 늘 오래 살아남으니까요.”
스승님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결정하시면 됩니다. 선하게 죽든가, 독하게 살든가. 큰 결정은 아닙니다. 살아남으신다면 앞으로 밥을 뭘 먹을지보다 자주 하실 고민이니까요.”
그녀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
우그럭-
손 안에서 구겨진 서신이 비명을 지른다.
그것은 젊은 한이정에게 남은 순수가 지르는 신음이기도 했다.
“청춘은 좋은 것이지요. 순수 역시 좋은 것이고요.”
스승님의 웃음소리가 흡사 냉혈동물의 숨소리와도 같았다.
“…….”
결국 한이정은 이번만은 ‘괜찮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서신을 열었다.
작은 백지를 가득 채운 것은 점과 선의 나열.
진천희는 모르는 암호였다.
이윽고…… 그것을 한참 읽던 한이정의 표정이 서신만큼이나 구겨졌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신음을 내뱉었다.
“끅…… 끄윽…….”
분노와 참담함, 그와 동시에 각오와 결의.
“……할아버지…… 대체…… 으윽……!”
그녀의 신음 소리는 희로애락이 뒤섞인 진흙덩이의 맛이었다.
이윽고 한참 숨을 내쉬던 한이정이 핏기라곤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부술을…… 부술을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스승님이 희미한 조소를 담아 답했다.
“말했잖습니까. 시한부 인생은 재미없다고 말입니다. 이제 즐거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백린의선…… 당신은 대체…….”
스승님은 대답 대신 그녀에게 깊이 예를 표했다.
“폐하의 다음 복심이 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 목소리에는 아까와 같은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엄숙하기까지 했다.
“…….”
한이정은 새카만 눈으로 제갈린을 말없이 바라본다.
이윽고 마지막 남은 순수가 단말마가 되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할아버지와 백린의선, 두 분의 가르침. 평생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린에게 포권했다.
기이하게도 감사하다 말하는 그 포권 속에 독기가 스며 있었다.
적의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호의도 아닌.
흑백 속에서 둘은 서로에게 예를 표했다.
그것은 진천희가 보기에 퍽이나 기묘한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