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63
제 263화
은전을 슬쩍 받는 수준 정도는 이쪽도 대충 눈감아줄 수 있는 범위였다.
어차피 진천희가 화 제국의 안녕을 위해 살아가는 투사도 아니고, 그냥 왕진 가는 길 무사히 귀찮은 일 없이 도착하는 게 최고의 바람이다.
현대도 아니고, 이 시대에 이 정도 푼돈은 부정부패 취급도 받기 민망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기도 하고.
허나 현상금과 말에 손을 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아니, 왜 내 돈을 니들이 가져가니?’
눈 뜨고 황구 간식비를 빼앗기게 생기자 진천희가 앞으로 나섰다.
“잠시만요!”
어둠 속, 무리들 가장 뒤에 있던 미청년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한 번이라도 보면 얼굴에 기억이 남을 법한 미인이었으나 거기까지.
달도 뜨지 않은 밤에 횃불만으로는 무림인이라는 것만 겨우 짐작할 뿐이다.
“무슨 일이냐.”
어차피 세외까지 와서 표행에 낀 무림인이라고 해봐야 어딘가의 세가 도련님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는지 바로 하대를 날린다.
“마적을 물리친 건 접니다. 현상금을 받아야겠는데요?”
“어허! 어딜 감히…….”
‘안 되겠네. 이 새끼들. 답이 없네.’
눈앞의 불의는 참아줘도 반려견 개껌값 뺏어가는 건 참을 수 없는 견주는 손목에 건 팔찌를 뺐다.
‘이 새끼들이 감히 우리 황구 간식비를 훔치려고 해?!’
그러고는 가볍게 치켜들었다.
횃불이 황룡을 반사해 영롱한 빛을 내뿜었고. 화 제국에서 황룡이 의미하는 게 뭔지 모를 관료는 없다.
“가, 감찰사님!”
감찰사, 그것도 황제 직속 감찰사의 상징.
은왕야를 치료하고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라고 받은 그 팔찌.
실상은 역참에서 말 빌릴 때나 쓰던 것이었다.
진천희의 긴 소매 때문에 보이지 않던 그 팔찌가 모습을 드러내자 운룡표국 표사들도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고.
“모두 말에서 내려라! 어서!”
백인장의 일갈에 다른 군병들도 급히 말에서 내렸다.
쿵!
“감찰사님을 뵙습니다!”
“감찰사님을 뵙습니다!”
“감찰사님을……!”
군병들이 일제히 부복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도 그랬다.
방금 눈앞에서 뇌물 받고 공 채가려고 하는 것을 빤히 보여준 터.
그것도 하필 표국 놈들이 잡은 마적 떼도 아니고 감찰사가 직접 잡은 마적 떼였다.
컹!
황구는 왜인지 부복한 군병들 앞에 앉아 가슴을 힘껏 부풀렸다.
어째 개한테 절을 한 꼴이 되었으나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백인장께서는 뭘 하려고 하셨습니까?”
진천희의 나긋나긋한 질문에 백인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 어…… 마적 떼를 대신 운송할 예정이옵고. 절대 다른 뜻은 없었사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방금 받은 은전은 무엇이었나요?”
“으, 은전이라뇨!”
“선량한 양민에게서 돈을 강탈한 거 아닌가요?”
“아, 아,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니옵니다!”
“그렇군요. 아니군요~ 아무리 봐도 반짝반짝한 것이 은전 맞는데?”
“헙…… 그게.”
“하긴, 설마 백인장께서 감찰사 앞에서 거짓말을 할 리 없겠죠?”
“……그으……게.”
귀찮고 수고스러워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건만.
이렇게 된 거 도착할 때까지 갈굴 생각이다.
크릉!
황구는 돌연 백인장의 발에 오줌을 갈겼다.
쏴아아아-
백인장이 그런 황구를 치우려 하자 진천희가 물었다.
“설마 감찰사가 보고 있는 앞에서 자세를 푸시려는 겁니까? 제가 본 게 맞나요?”
컹!
“아, 아닙니다. 어찌 폐하께서 정하신 감찰사 앞에서 허락도 없이 자세를 풀겠습니까!”
황구는 주인에게 돌아가서 칭찬을 바랐고.
헥헥헥-
진천희는 그런 황구의 턱을 벅벅 긁어 주었다.
* * *
진천희는 군대의 호위를 받아 국경선 경계, 완농까지 편안하게 들어갔다.
완농에 가는 내내 운룡표국 사람들은 신이라도 영접한 눈으로 진천희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랬다.
백의신룡이 유명한 것은 보통 그 의술과 요리 솜씨, 용봉지회에서 우승하고 혈선교를 물리친 강호의 명성 때문이지.
황실과의 인맥이나 감찰사의 증표는 높으신 분들이나 아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렇게 제국 끝, 다두 왕국과의 국경선에 있는 교역 도시 완농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이국적이네.’
화 제국령이라고 하나 교역 도시답게 세외의 건축 양식에 영향받은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장의 옷차림을 한 상인들과 남만의 옷차림을 한 무인들.
또 여러 인종들과 상인들이 섞여서 성문을 지나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보고가 들어간 걸까.
진천희가 말에서 내리며 뒤에 있던 백인장에게 인사했다.
“충! 폐하의 병졸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말은 참 잘해.’
일순 봐줄까 싶다가도 황구 간식비를 탐한 이상 자비는 없다.
이미 진천희는 놈의 이름을 외워 놨다.
사정을 모르는 경비병은 둘의 관계에 대해 살짝 갸우뚱하는 눈치다가 이윽고 진천희를 안내했다.
새하얀 대리석 성문을 지나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아시스 지대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휴양을 위한 호화스러운 저택들.
그리고 그 아래로 중원 상인들과 세외 상인들이 뒤엉켜 물건을 파는 시장이 늘어서 있었다.
‘경치가 아름답긴 하구나.’
오아시스 위로 이름 모를 커다란 새들이 푸드덕 일제히 날아갔다.
무협 세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풍광을 보게 되자 괜스레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경비병은 그런 진천희를 휴양 별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중원의 양식과 세외의 양식이 뒤섞인 저택들을 지나서 어딘가에 도착했다.
길 끝에 있는 가장 호화로운 거처였다.
‘우와…… 이런 곳에 사는 인간들은 뭐 하는 사람들일까.’
현대인은 내공 좀 더 있는 것보다 이런 으리으리한 집에서 유복하게 사는 게 더 부럽다.
현대 지구도 계층 간 이동이 쉽지가 않은데 계급 세상에서는 백 프로 부모님도 금수저고, 자식도 금수저겠지.
“이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더 이상 안내는 안 하나 보군.’
안으로 혼자 들어가니 시종들 하나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다.
정원이며 바닥이며 분명 관리된 흔적은 보이는데 사람이 없으니 기이할 따름.
도깨비에 홀린 기분을 느끼며 정원을 깊숙이 걸으니 금을 타는 소리가 들렸다.
‘주왕께서도 칠현금을 타는 솜씨가 일절이라고 하지.’
그녀가 주색잡기에 빠져 살던 시절, 그 금 타는 소리에 수많은 예인들이 가슴에 불이 올랐다고 한다.
지금 들리는 음은 유곽에서 탈 만한 소리라기보다는 선비나 서생이 탈 만한 음이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은왕야가 앉아서 현을 퉁기고 있었다.
집중하고 계시는데 예를 표해야 하나, 아니면 금을 다 타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망설이는데 이윽고 은왕야께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평안한 여로임에도 꼭 사고를 하나는 치는구나.”
“하하하…….”
진천희가 또다시 엉거주춤 부복 자세를 취하려 하자 은왕야는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만해라. 새삼 또 이제 와서.”
역시 좀 그렇지?
진천희는 서서히 다시 무릎을 폈다. 그 모습을 보며 은왕야가 혀를 찼다.
“어째 너는 볼수록 뻔뻔해지는구나.”
“헤헤.”
퉁-
칠현금이 만들어낸 음절 하나하나가 묘하게 사람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곡조를 다 마치고 은왕야는 몸을 일으켰다.
“가면은 안 쓰십니까?”
“세외와 가깝다 보니 문무 대신뿐만 아니라 황가와 연이 있는 무인도 없어서 말이다. 오랜만의 자유지.”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혈색은 더 좋아졌고, 몸은 더 단단해졌다.
‘완전히 자유라고 하기에는 시종 하나 보이지 않는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일까.
자꾸만 누군가가 쳐다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진천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은왕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그림자’들을 감지할 수 있게 된 거구나?”
“그림자요?”
“황제를 따르는 호위대라고 할 수 있지. 선대에는 ‘암룡’이니, ‘암영단’이니 이리저리 이름을 붙였던 모양이지만 편하게 ‘그림자’라고 부르고 있느니라.”
“그리 말씀하셔도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시선만 거의 느껴지는 수준이라.”
황제 앞에서 허세를 부려 봐야 뭐 하겠나.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네 무공 경지에 그것을 감지한 게 이상한 일이지. 황구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 않나.”
킁-
황구는 풀이 죽었는지 귀를 축 뒤로 늘어뜨렸다.
진천희는 그런 황구의 이마를 쓸었다.
은왕야가 말했다.
“황가가 태호복희의 후손으로서 제국을 통치하며 많은 것들을 연구해 왔다는 건 능히 짐작했을 터. 이것은 무림인과 같은 이능을 가진 황족 둘 모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야겠구나.”
은왕야는 ‘그림자’를 묘하게 물건처럼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맞죠?”
“글쎄다. 그런 존재가 과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만 ‘그림자’를 확인할 방법은 날 암살하는 것뿐이고. 그리된다면 너는 확실히 죽을 테니 그리 추천하고 싶진 않느니라. 주치의를 그리 잃을 수는 없으니.”
‘뭐어……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것도 있는 법이지.’
무협 소설들 보면 관과 무림이 분리되어 있어서 황실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신무협 와서는 옛말.
무협지에 따라서는 주인공이 직접 황제의 모가지를 따버리거나 세상을 바꾸고자 적극적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작품들이 있다.
그럴 때면 언제나 황가의 어두운 이면. 금지된 지식의 결정체.
최강의 살수이나 감정을 배제한 살인 인형…… 등등의 클리셰들이 나오곤 한다.
그렇게 진 히든 스페셜 최종 보스가 된 황제의 목을 따버리고, 본인은 유유히 사라지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협지 이야기.
‘나도 옛날에는 회귀, 빙의, 환생 들어가면 무협지 아니라고 하던 때가 있었지.’
관아도 왕야 이상이 나오면 기함을 하며, ‘어허, 떽! 이놈들아. 어디 무협 주인공이 관과 야합하려 드느냐아. 이것은 무협이 아니다!’라며 일갈하던 무협지계의 흥선대원군이었더랬다.
……허나 그렇게 다 거르고 보니 신작이 없었다.
그리고 무협지 입문하는 몇 없는 젊은 애들은 회귀, 빙의, 환생을 좋아했더랬다.
그렇게 아재 진천희는 자신의 자아를 살포시 접고.
신무협, 퓨전무협을 보며.
‘사형! 지붕 위로 점핑하십시오!’
‘점소이! 메뉴판 좀 주게!’
‘사부님. 이게 바로 천잠사로 만든 글러브입니다!’
……정도의 서술도 그럭저럭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진천희에게 있어서 숨겨진 히든 금기된 시크릿 황실 로얄 블러드 비밀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와, 이렇게 호기심이 안 드는 것도 오랜만이다.’
진천희는 차게 식은 눈으로 말했다.
“일단 진맥부터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