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77
제 277화
“무공은 어디까지나 무공일 뿐이지요.”
“네가 쥔 활처럼 말이구나.”
“…….”
“보통이라면 신병이기를 버린 널 보고 방심했다 믿겠지. 백의신룡이 자신의 내공을 믿고 활을 꺼냈다고. 그래. 보통의 강호신성들이라면 그리하겠지. 창룡검이라도 그리할 거고.”
노인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허나 사실은 정반대가 아니냐.”
“…….”
“개가 도망을 치는 동안 너는 미끼가 되어 엄호할 생각이겠지. 그러기에 좋은 것은 필시 검술이 아닌 궁술일 게야. 복잡한 검격보다는 한 발의 화살이 더 도움이 될 터이니. 이 촌부의 말이 틀렸느냐?”
진천희는 작게 혀를 찼다.
청년이 수 싸움을 좋아하듯, 눈앞의 노인도 살수답지 않게 수 싸움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노사께서는 보통 분이 아니신 듯합니다. 누구십니까?”
각궁에 뇌기가 맺혔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날고 있는 뇌진의 깃털 끝에도 푸른 기가 맺혔다.
노인이 간과한 게 하나 있다.
진천희는 스스로 피뢰침이 될 생각이었다.
금생기와 뇌전기를 품은 화살을 쏘아 뇌진이 만들어내는 번개를 유도할 생각이었다.
천뢰응인 뇌진이 만들어내는 번개는 진천희가 내는 뇌기보다도 더 강력하다.
허나 단점이 있다면 그 정확도는 무공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는 것.
그러니 진천희가 직접 전하가 담긴 화살을 쏘아 뇌진의 번개를 정확한 곳에 꽂아 넣는다면.
첫 수에 다섯.
다섯을 쓰러뜨리고 나면 그 후부터는 판을 깰 수 있으니.
“너는 우리를 다 처치하고도 죽이지 않을 방법을 강구하는구나.”
저벅-
노인 뒤에 있던 십수 명의 인영이 앞으로 걸어왔다.
그때, 노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서라.”
인영은 그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노인이 홀로 진천희를 향해 걸어왔다.
‘이 또한 수 싸움인가?’
진천희는 방심하기보다는 다음 수를 생각했다.
이윽고 청년은 고작 세 수 만에 황구와 환자를 안전하게 왕야의 저택에 도착하게 할 방법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노인이 한 행동은 무기를 드는 것도, 투항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손을 가면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달칵-
가면이 떨어지며 자글자글한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수염은 보이지 않는 맨들맨들한 턱선.
그에 비해 눈썹까지 새하얀 얼굴, 그럼에도 흉터로 가득 찬 얼굴은 이 노인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사투해 왔는지 말해 주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제독태감직을 맡고 있는 한광이 은인을 뵈어 인사 올리나이다.”
그는 무기를 버리고 진천희를 향해 포권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제독태감…… 한광? 한이정의 할아버지잖아?! 아니, 그 전에. 천천세는 왜 하시는 거야?’
황제의 복심 1호!
이번 습격에 황가의 비밀 부대라고 할 수 있는 동창이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동창의 우두머리인 제독태감께서 직접 이 일에 관여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기다가. 갑자기 과한 인사까지!
‘아, 아니 너무 높…… 그런 걸로 치면 은왕야도 높지. 그래…….’
평민 의원은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무리 그래도 그 엉덩이 무거운 양반께서 직접 이 사막에서 나오는 건 이상하지 않…….
‘은왕야가 오셨는데 직접 부를 수도 있지.’
허나 진천희를 보자마자 알아봤음에도 일부러 그리 반응한 것은 결국 진천희가 폐하의 곁에 있을 만한 사람인지 시험해본 것일 터.
일단. 여기서는 말을 잘해야 한다고 진천희는 생각했다. 그래서 진천희는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과례(過禮)는 곧 비례(菲禮)라고 했습니다. 저는 한낱 의원이니 말을 낮추어 주시지요.”
예기.
유교(儒敎)의 경전(經典)으로 예의에 대한 것이 적혀 있는 서적이다. 사서오경의 오경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책.
당연하지만, 제국에서도 먹물 좀 먹었다 하는 이라면 이에 대해서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 예기에 나오는 ‘과례는 비례이다’라는 이 구절은 지나친 예는 예가 아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진천희는 천세라고 외친 제독태감의 행동에 반응하여 답한 것이다.
나는 그런 과한 예를 받을 사람이 아님에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과연…… 이 노복(老僕)이 실수를 했군요. 허헛! 모시는 이의 생을 구한 은인을 만나게 되어 마음이 너무 앞섰나 봅니다.”
노인은 부드럽게 말하더니 고개를 들며 웃었다. 그러나 그의 말과 언행은 자연스러웠으나.
주변의 인물들은 술렁거리면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에 대해서 이분이 알긴 아는 모양인데…… 다른 동창 요원들은 몰랐나 보네. 그러면 일부러 소리 내서 말한 이유가 있겠지? 나에 대해서 알리려는 건가. 아니면… 아니. 일단 섣부른 추측은 의미 없는 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러면 공자님. 이번 일에 대해서는 차후에 찾아뵙고 말씀 드리지요. 우선은 눈앞의 일을 논의하고 싶사옵니다.”
“더 말을 낮추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리고 눈앞의 일이라니요?”
“저 아이를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시험일까? 알 수 없다.
허나 황제 때와 똑같다.
진천희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죄송합니다. 이 사람은 제가 거두어 대화를 할 생각이니까요.”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공자님께서 감싸려는 그 아이가 암수를 휘둘러 다두왕국의 삼왕자를 시해하려 한 것을 알면서 하시는 말씀이시겠지요?”
미친 대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난다면 이자는 죽는다.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기에.
“어차피 갈 곳 없는 칼이에요. 칼날의 주인은 이 칼이 어디로 향할지 염려해서 부수려고 들 테고요. 그들은 미련 없이 제거하려 들 테니, 제가 주워서 쓴다 한들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암살 교단의 암살자들은 임무를 수행하다가 포획된다면 반드시 자결하게 되어 있다.
만약 자결하지 않는다면, 다른 암살자를 파견해 반드시 죽이려고 든다.
그것이 그들의 조직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니까.
진천희의 말은 그것을 언급한 것. 그리고 그것은 제독태감 한광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진천희가 언급한다는 것은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허허허허. 재미있군요. 그리 답하시다니. 제 조사에 따르면 분명 공자께서는 그 아이를 처음 보지 않았습니까?”
거기까지 알고 있나.
하긴 진천희의 이 행동이 참으로 이상할 법도 하겠다.
‘내가 봐도 이건 참 말이 안 되는 짓이지.’
문득 황구의 등에 피가 묻어나는 것을 보았다.
비록 점혈로 지혈을 했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생명은 시시각각 꺼져 가고 있고.
전투를 벌이게 된다면 결국 그 시간 동안 환자는 고스란히 부담을 져야 할 터.
‘납득할 만한 답을 주어야 비켜 주겠지.’
진천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이렇게 말했다.
“관련이 있다면 제가 직접 심문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분이 보여 준 기이한 무술도 흥미가 가고요.”
차라리 백의광룡에 걸맞은 탈을 쓰는 게 납득이 갈 만한 답이 될 테지.
혈생노괴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 진천희의 표정은 연구에 미친 의원 그 자체였고.
“…….”
제독태감은 생각에 잠기다가 이리 말했다.
“황상께서 총애하는 분이시니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습니다만, 반드시 이 일을 알릴 겁니다. 그리되면 판단은 황상께서 하실 터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판단을 은왕야에게 유보하겠다는 건가.
그 또한 바라던 바다. 환자를 치료할 시간을 버는 거니까.
“네. 얼마든지요.”
“알겠습니다. 허먼 몸조심하시길 이 노복은 비옵니다.”
그리 말하며 다시 가면을 썼다.
동창들이 흩어지듯 사막의 지평선으로 사라진다.
제독태감의 모습도 흩어지자 진천희는 그제야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구, 뇌진. 돌아가자.”
손끝에 맺혔던 전류를 흩으며 진천희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사막 지평선 끝에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시선은 여전히 느껴지는군.’
봐준다고 했지 완전히 놓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과연 제독태감.
허나 괜찮다. 환자를 치료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길고 긴 새벽이었다.
* * *
일카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엄마는 살아 있었고, 술탄은 엄마를 사랑해 주었다.
음모도 암투도 그곳에는 없었다.
술탄이 어린 일카나를 끌어안고는 목마를 태워 주었다.
엄마는 그런 술탄과 함께 정원을 걸었다.
정원에는 들짐승들이 보였지만 누구도 엄마의 살점을 물어뜯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대로 목줄을 했고 굶주리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도 일카나를 끌어안고 왕가의 모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 이야기를 이해할 정도로 아이가 총명했고, 엄마의 고통에 찬 속삭임과 악의에 찬 절규를 이해할 정도로 엄마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어린 그녀는 흔들흔들 술탄의 목마를 탄다.
술탄의 정수리가 보였다.
이 세상에는 좋은 것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뻗었다. 단단한 무언가가 잡혔다. 차크람이었다.
수백, 수만 번 연습했던 그녀의 무기.
그리고 그 무기로 술탄의 머리를 찍는다.
퍽!
두개골이 박살난다.
엄마가 비명을 지른다.
짐승들도 기뻐한다. 누구의 시체를 밥으로 줄까.
빠각!
술탄의 머리를 찍고, 또 찍는다.
그녀 안의 짐승이 웃는다.
그래, 이걸 바랐어. 국방대신이고 암살단이고…… 이걸 원했어.
붉게 물든 머리와, 그만큼 붉어진 자신의 손을 보며 그녀는 웃고 울기를 반복했다.
컹!
개가 짖는 소리와 함께 뭔가 축축한 것이 뺨에 닿았다.
일카나는 그렇게 악몽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분명…….’
익숙한 천장이다. 타깃을 처치하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은 마음속에 그렸던 그 천장.
그것이 가장 먼저 눈에 보였다.
‘아…… 부하들을 살리려고 했지.’
암살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솜씨를 봐서는 강호인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오히려 중원 황군의 느낌이 났다.
그녀의 부하들은 여덟.
공격하는 이는 서른.
빈틈도 없었을뿐더러 상대는 사막에서 미리 연습을 했는지 강했다.
결국 일카나는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자처해서 미끼가 되기로 했다.
부하들은 도망쳤고.
이제 자결만이 남았다.
‘하지만 어금니 안쪽 독을 도저히 씹을 수가 없었어.’
자객이 되기에는 자아가 너무 강했기 때문일까.
자결을 하질 못했다.
상처는 쌓여갔고, 자결을 할 최후의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마지막 검이 가슴에 박히고…… 의식은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