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78
제 278화
“크윽.”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좀처럼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점혈인가.’
다행히 목은 움직일 수 있도록 조처를 해 놓은 모양이다.
목 아래 상태를 보니 온몸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더는 출혈은 없었다.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약 냄새뿐.
목 아래로 감각은 없지만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침실 안이었다.
당연히 압수했는지 무기는 보이지 않았고.
원래 입고 있던 옷 대신에 환자들이 입기 좋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문 밖에는 시종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왜 안 죽인 거지?’
분명 눈을 떴을 때는 고문실에 사지가 묶여서 혓바닥만 집게에 잡혀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문이란 본디 세외든 중원이든 큰 차이는 없다.
그렇게 손톱과 발톱을 하나씩 뜯고, 이빨도 뜯고.
사지 근맥이 뜯기고.
흡사 개미가 나비 하나를 해체하듯 차곡차곡 날개부터 다리, 더듬이까지 해체당하고 나면.
정신력 고강한 고수들도 뱃속에 있는 모든 진실을 토하기 마련.
‘왜 이렇게 잘해 주지?’
이것도 고도의 심리적 고문인가?
그녀로서는 도무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녀의 눈에 불꽃이 튀자 진천희가 급히 말했다.
“진정하세요. 고문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일카나는 여전히 크게 숨을 삼켰다.
“안녕하십니까. 백의신룡 형제님.”
느물거리는 미소가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철저하게 감정이 절제된 목소리가 그녀가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라 왔는지 말해 주었고.
‘오우, 광룡이라고 안 하시네?’
진천희는 약간 호감도가 올랐다.
“저를 아시는군요. 과연 암살 교단, 정보 수집은 기본이죠.”
도리어 믿음직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모습이 범인의 모습은 아니다.
일카나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차분히 답할 뿐.
“본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인데…… 형제님께서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는 이유가 뭐죠? 어떤 함정을 꾸미고 있는지 궁금합니다만.”
욕설을 내뱉거나 죽이라는 도발도 없다.
그저 기묘한 위화감만이 느껴질 뿐.
진천희는 이 모습에서 한 가지를 느꼈다.
살고 싶다는 의지.
생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는 끈질기고 기묘한 미련.
타인을 죽이고 언제든 스스로 자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게 바로 살수란 존재.
어릴 때부터 극한까지 가해지는 세뇌는 자기애조차 거세시키기 마련이다.
자연히 살고 싶다는 욕구조차도 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일카나는 삶을 놓지 못했다.
그것은 좋은 신호였고.
‘음…… 여기서부터 설명을 잘하긴 해야겠지?’
이쪽에게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다.
우선 ‘책을 읽은 독자인데 님의 미래를 내가 알고 있음 ㅇㅇ. 님 이대로면 죽음 ㅇㅇ. 내가 살려줌 ㅇㅇ.’ 이렇게 말하면 그녀가 끄덕끄덕 납득하고 나중에 풀어 줬을 때 뒤통수에 단도를 박을 거다.
그러니 첫 단추부터 잘 끼우는 게 좋겠지.
“진정하세요. 딱히 함정을 꾸미는 건 아닙니다. 거기다가 저는 교단에 대해서도 그럭저럭 조사를 해서 당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죠.”
이 정도 포석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지.
진천희는 차분히 말했다.
“일카나 9왕녀.”
황녀라고 부르는 게 맞나 고민하다가 일단 왕녀로 부르기로 했다.
“…….”
일카나는 여전히 웃고 있으나 입가는 조금 굳어 있다.
인형 같은 무기질적인 가면 위로 허나, 입가가 약하게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자. 여기서부터는…… 조금 신비롭게 보이는 쪽이 좋겠지?’
진천희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저의 이름은 진천희. 당신이 아는 대로 백의신룡이란 별호를 가졌으며, 백린의각의 소각주인 의원입니다. 하지만, 저는 세인들은 알지 못하는 남다른 능력을 가졌습니다.”
일카나의 표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천희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천지의 기운을 읽어 과거, 현재, 미래를 제한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겁니다. 일카나 9왕녀. 6황비의 딸. 그리고 복수를 갈망하는 자. 아닙니까?”
진천희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미소 짓던 일카나 왕녀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다.
“그걸 어떻게……?”
금이 간 가면 사이에 보인 것은 분명 살의.
‘암살 교단에서도 모르는 그녀의 비밀을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거니까 놀랄 만하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녀를 풀어주는 순간 뒤통수에 칼날을 박을 게 자명했다.
허나,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으로.
진정한 신뢰를 얻기 위해서 때로는 선을 건너야 할 때도 있는 법.
실제로 일카나의 마음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비밀을 만약 암살 교단에서 알았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테니까.
가장 은밀한 비밀. 그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보루.
그것을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백의신룡 진천희가 어찌 알고 있다는 말인가?
진천희는 깨진 가면 속에 으르렁대는 짐승을 바라본다.
‘제대로 답을 못 한다면 언제가 반드시 목을 물어뜯겠지.’
알고 있었으나, 진천희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다.
“당신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죠. 제가 이곳에 왔을 때, 당신이 암살을 하러 이곳에 온 것은 저로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습격을 막아 내고, 당신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된 순간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
“당신은 복수를 원하기 때문에, 암살 교단의 기본 강령인 ‘자살’을 하지 않았죠. 틀린가요?”
일카나는 살의를 담아 답했다.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요즘 의원들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사실, 전부 아는 것은 아니라서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한적으로 볼 수 있는지라. 그래서 제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진천희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진천희를 향해 일카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믿고 믿지 않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지요. 그보다 형제님은 무엇을 원하는지가 궁금하군요.”
여전히 속 모를 미소를 유지하며. 그녀는 태연을 가장했다.
삼절추호가 담백한 호걸이라면, 눈앞에 있는 일카나는 뒤틀린 간웅.
어찌 보면 상대하기로는 삼절추호의 몇 배는 어렵다.
‘후, 사람 하나 살리는 게 쉽지 않구만.’
진천희는 여하륜이 아니다.
누군가의 머리통을 부수면서 힘으로 설득해 매료시키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고.
거기다가 진천희의 목적은 파천(破天) 같은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건 주인공 같은 대단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지.’
진천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손에 닿는 대로 구하는 것뿐.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거짓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못된 어른일 뿐이다.
진천희는 분위기를 잡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원하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제 밑에서 오 년, 오 년만 있어 주십시오.”
“오 년? 흥미가 동하는군요.”
목소리만 들으면 설득된 것 같으나 그게 아님을 진천희는 알고 있다.
이대로라면 그저 풀려날 날만 기다렸다가 진천희란 후환을 없애고 사라지겠지.
그게 바로 일카나. 그녀의 성격이니.
“살수시잖습니까. 그것도 끈이 떨어진 살수.”
그 말에 그녀는 그저 대답 대신 미소로 응답했다. 진천희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이대로 순순히 풀어 준다고 해도 변절했을 거라 생각하여 교단에서는 당신을 제거하려 할 것이고.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자결을 하고자 하셨다면 진즉에 하셨을 거니까요.”
“형제님께서는 그만큼 제가 생에 집착을 하고 있다 짐작하시는군요.”
“그저 죽음보다 중한 목표가 있음을 압니다. 당신이 세림 교국의 천국을 믿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며. 진천희는 생각했다.
“사실 이대로 풀어 주어서 기회를 노려 저를 죽이신다고 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음 역시 알고 있고요. 오 년만…… 오 년만 함께했으면 합니다.”
‘오 년이면 여하륜에게 보내도 죽지 않겠지.’
원작을 분석했을 때, 결국 그녀가 방패가 되어 사망한 것도 그녀의 무력과 경험에 비해 적이 너무 강대했기 때문.
그리고…….
‘현실적으로 복수에 여하륜과 함께 천마혈로, 그리고 수련까지 동시에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지.’
결국 일카나의 사망 원인은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상황에서 적이 너무 강대하다는 데 있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돕겠습니다. 아마…… 술탄, 아니면 그 측근 중 누군가이겠지요.”
“호오, 형제님께서는 그런 것도 보이시는 모양입니다.”
“……세림 교국에 별의 기운이 너무 강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탐욕스러운 별의 기운이.”
진천희는 아련한 눈으로 다시 먼 곳을 바라본다.
진천희의 말에 그녀는 그만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형제님, 그만하십니다. 엿 같은 예언자 놀이는 집어치우시죠. 그래요. 이제 와서 숨길 것도 없죠. 저는 복수를 꿈꾸고, 그렇기에 살수로서의 법도를 어겨 자결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저는 천국에 이르지 못하겠죠.”
그녀의 웃음이 잦아든다. 이윽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제님 속셈이 뭐든 간에…… 그래요.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안 믿으시는 겁니까?”
진천희가 샐쭉해져서 묻자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형제님. 이건 살수로서의 감인데 형제님이 미래 어딘가를 예측하고 있다는 것은 진짜라는 건 알겠습니다. 허나, 글쎄요. 왜인지 안간힘을 쓰며 저를 살리고자 하는 것도 느껴지는군요. 그리고…….”
까드득-
어금니가 한을 긁으며 지나간다.
“제 선택지는 어차피 하나입니다. 저는 살고 싶고, 형제님에게 잘 보여야 하는 위치이죠. 그것을 위해서라면 댁의 엿 같은 발가락이라도 핥아 드릴 각오도 되어 있었으니까요. 형제님.”
그녀는 눈을 감는다.
기이하게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그녀의 양 귀를 막으며 했던 말이.
엄마의 손바닥이 귓바퀴를 막아 웅얼거리는 외침밖에 들리지 않는다.
살려 달라고 했나? 아니면 복수를 해 달라고 했을까?
아니면 내 딸만은 구해 달라고 사정이라도 했나?
상관없다. 어차피 약에 길들여진, 굶주린 짐승 새끼들은 배만 채우면 그만이니까.
그녀가 살아남은 건 엄마의 살점이 놈들의 배를 채울 정도였고.
그렇게 뜯겨 가면서도 엄마가 딸을 끌어안고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때 그녀의 귀를 막고 뭐라고 했던 걸까.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죽여야 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이를 똑같이 그 약 처먹은 굶주린 짐승 새끼들 사이에 놓고.
그놈의 자식들이랑 같이 처넣어서.
과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봐야만 했다.
“참으로 이상하군요. 형제님. 왜인지 제 감에 따르면…… 형제님을 죽였다가는 복수는커녕 정말 엿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으니 말입니다.”
진천희는 차분히 답했다.
“그냥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제 밑에서 오 년을 함께하신다면 괜찮은 무공을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된다면 더 강해질 수 있겠지요.”
대체 무슨 살수의 감이 그렇게 그녀의 뒤통수를 찌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천희는 열심히 판촉을 했다.
궁귀 어르신…… 지금 참한 신참 포장 중입니다.
성공을 빌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