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80
제 280화
은왕야는 턱을 괴고 진천희를 내려다본다.
의원, 그러나 그가 여태까지 걸어온 길은 단순히 강호 의원이라는 규격으로 담기에는 어려웠고.
가지고 있는 사상과 뜻 역시 단순 의원이라고만 보기 힘들었다.
은왕야에게 있어 진천희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존재였다.
“포상에 대해 말해 보자꾸나. 원래라면 네가 원하는 것 세 가지를 들어 주려고 했다. 내 벌모세수 치료. 그리고 삼왕자를 치료한 것. 그리고 처음 약조한 대로 닷새 안에 정수흡관(淨水吸管)을 만든 일.”
이 셋 중 무엇도 제국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다.
눈앞의 의원은 그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다.
청명한 푸른빛이 잠시 머물다 스쳐 지나갈 뿐.
그렇게 흐르는 푸른빛이 흡사 마치 강이 구불거리며 흘러 지나가는 모양새 같기에 뭇 사람들의 가슴을 술렁이게 하는 거겠지.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은왕야는 말을 이어 나갔다.
“허나, 지금 보니 그 혹 때문에 포상을 하나 줄여야겠구나. 상벌은 명확해야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황공하다거나 성은이 망극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구나.”
“그런 말은 좋아하지 않으심을 압니다.”
바람이 진천희의 옆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은왕야의 말에도 놀라지 않는 모습이 흡사 청년은 처음부터 그가 어떻게 말할지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조금은 어울려 줄까.
은왕야는 오랜만에 장난기가 생겼다. 황권이 공고해질수록, 제국이 단단해질수록 점차 잊게 되는 감정 중의 하나였다.
“자, 그러면 어떤 포상을 원하느냐?”
진천희 옆에 있는 세외의 여인은 여전히 부복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 이야기가 자칫 잘못 새어 나가게 된다면 죽게 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겠지.
아직 은왕야는 저 세외의 암살자를 어찌할지 완전히 정하진 않았다.
죽이지는 않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변덕.
그 정도의 변수는 황위에 오르며,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가끔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니까.
허나 그다음은 어찌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눈앞의 의원에게 맡기고 지켜볼 수도 있고, 적당한 핑계를 대서 신병을 인수하는 것도 방법일 거고.
그보다는 이 의원이 무엇을 고를지가 가장 궁금하다.
‘백환후 후원금에 대한 거나 비누 판매에 대한 게 일 순위겠지.’
그다음 순위로는 연무 도시의 확장이나 백린의각 세력의 공고화려나……?
‘최근 들어온 정보를 생각하면 혈선교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군.’
혈선교와의 일전!
백의신룡이 혈선교의 십천군과 어떻게 혈투를 벌였는지는 꽤 소상히 들었다.
정보를 받은 동창들도 죽지 않은 게 신기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 정보를 정리한 제독태감 한광이 이렇게 평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했는데, 그 계란이 결국 바위를 깼습니다요.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의 책사라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했다.
고작해야 용봉지회 후기지수 넷이서 혈선교 십천군을 처치하는 일은.
그것을 해냈다.
혈선교는 황실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허나, 그들은 너무 깊이 숨어 있고 관아라는 입장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사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청년은 은왕야에게 있어 하늘에서 떨어진 복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네 녀석이 무슨 선택을 할지 궁금하구나.’
이윽고 진천희는 작게 숨을 고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힘을 갖고 싶습니다.”
“호오?”
강해진다라.
세상 누구보다 무공에 가장 집착이 없는 이가 무공을 익히고 싶어 한다.
“어떤 무공을 원하느냐? 천하를 제패할 패도의 힘? 아니면…… 반대로 천하를 혼란하게 만들 힘을 원하느냐.”
“그저 앞으로 걸어갈 길을, 죽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이면 족합니다.”
죽지 않고 갈 만큼의 힘.
이 청년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적어도 의원으로서의 명성이나 용봉지회에서 얻은 무명은 아닌 길일 터.
“어느 곳을 걷기에 그것을 원하느냐.”
“지옥을 걸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지옥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진천희는 단아한 미간을 살짝 접었다.
“상을 크게 원해 한 일은 아니나, 주시겠다 하신다면 두 개의 상 모두 그것으로 갈음하고자 합니다.”
“황가의 신병이기를 원하느냐?”
진천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푸른 눈의 청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은왕야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제4의 답안.
“황궁 비고의 출입 권한을 주시옵소서. 그곳에서 열흘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 하하하하하!”
재미있지 않나.
뜬금없이 황궁 비고의 출입 권한을 달라 하다니.
“그곳은 네 앞에 있는 제독태감이나 되어야 겨우 열람이 가능한 곳임을 알고는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허나, 과거 선황의 목숨을 살린 무인에게 그러한 상을 하사한 적이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전례가 있긴 하지.”
황궁 비고를 열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그곳에 있는 것들은 상당한 절학의 무공들이다.
허나, 정말 중요한 것들은 다른 곳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고 그것을 열람할 수 있는 건 황제를 비롯한 정말 소수의 황가의 인물들뿐.
황궁 비고를 열어주는 것이 그에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터.
“갖고 싶은 책이 있느냐?”
진천희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의 고절한 절학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수많은 무공서들을 한 번에 견식해 보고 싶습니다.”
“흐음. 질을 원하는 게 아니라 양을 원하는 것이라.”
그 말에 진천희가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절대 황궁 비고의 서적을 폄하하려는 의미가 아니옵고…… 그저…….”
“하하하! 네 뜻이 그게 아님은 알고 있다. 다만 그저 재미있어서 말이다.”
한 권의 절학이 아닌, 수백 권의 그저 그런 무공서라.
물론 황궁 비고이기에 어디 가서 결코 떨어지는 무공서들을 보관하진 않는다.
‘허나 다수의 책을 탐독하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겠지. 그것도 양질의 책만 모여 있는 곳이니.’
문득 이 청년이 그리고 있는 미래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열흘인 게로구나.”
진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단계로 가야 할 단서가 그곳에 있으리라고 봅니다.”
“다음 단계라 함은 화경을 의미하느냐?”
그 말에 진천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 너머를 찾고 있습니다.”
현경……!
미친 자의 잠꼬대로 들릴 만한 소리였다.
고작해야 이제 화경이나 조금 밟을까 싶은, 정식으로 닿은 것도 아닌 애송이가 현경의 무학을 논하고자 한다?
“하하하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그렇게 하고 싶은 이유가 고작해야 살기 위해서라니.”
“……이상한 말이지만 그렇게 됩니다.”
“현경에 들지 못하면 너는 죽는가?”
“…….”
진천희는 대답 없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은왕야가 다시 물었다.
“현경에 들지 못하면 죽을 만큼의 길인가?”
“……살 방도를 찾을 따름입니다.”
자세히 설명하는 법도 없이 그저 필요한 것을 담담히 답할 뿐.
은왕야는 쓰게 웃었다.
“그래. 나의 생을 살린 의원아. 너는 대체 무엇을 숨기고자 하는 것이냐.”
* * *
은왕야를 상대하는 것은 무섭고 어려운 일이다.
‘끈질기시기도 하고.’
그는 진천희의 대답이 무척이나 재미있고 즐거운 모양인지 쉽게 답을 내주려고 하질 않는다.
‘하지만 황궁 비고를 들어가려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
무협 소설 최고의 이벤트 중 하나. 황궁 비고 출입!
보통은 약간 고전 게임의 고블린 보물 창고마냥 무공 한두 개 정도 얻어서 나오는 이벤트다.
쓰레기 같은 무공인 줄 알았는데 사실 천고의 기서라서 안목 있는 주인공님만이 그 책을 들고 나오곤 한다.
‘나는 그냥 불특정 다수의 무공서들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지금 배운 무공들 소화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걸릴지 기약이 안 된다.
물론 절세 무공이 있다면 외워 오면야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차순의 문제고 중요한 건 압도적인 정보량.
그 정보들을 통해 현경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은왕야는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후원에 있는 건 이제 은왕야와 진천희 단둘뿐.
겉으로 보았을 때는 한없이 개방되어 있는 듯한 곳이나 쥐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설령 여기서 진천희 자신이 시체가 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담장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결코 없으리라.
“열흘이라…… 이건 또 의외의 것을 원하는구나. 네가 무공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거기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진천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황궁의 규칙을 제대로 꿰고 있다니 놀랍구나. 외인에게 포상으로 비고의 출입을 허가할 경우 열흘이 한계인데 말이다.”
“…….”
“후후후, 그래. 너는 참 신기한 녀석이지. 네가 해준 요리들만 하더라도 천하 그 누구도 아는 이가 없는 요리였다. 심지어는 세외의 세림 교국에도 네가 만든 요리는 없더구나. 거기다가 그 기묘한 의술까지.”
“…….”
진천희는 답하지 않았다
“끝까지 말하지 않을 터냐?”
“아닙니다. 언젠가는 말해야 할 때가 올 거라고는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진천희가 비밀을 밝히고 스승님과 함께 진실로 대화를 나누던 날.
미래에 대한 책략을 아무리 짜 본들, 조력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진실을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랬다. 상대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
신뢰가 없으면 계속해서 관계가 틀어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틀어진 관계는 앞날을 반드시 망칠 수밖에 없다.
결국 위험한 다리를 건너긴 해야 한다.
허나, 어떤 순간에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어디까지 말할지를 두고 스승님과 무척이나 고민했다.
‘일카나는 받아들여 주었지.’
많은 정보를 풀진 않았기 때문일까.
증거가 많았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녀는 그 정도까지는 받아들여 주었다.
허나, 눈앞에 있는 이는 어디까지 받아들여 줄까.
그래도 해야겠지.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이 산을 넘지 못한다면 앞으로 있을 지옥 길을 걷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왕야. 그에 답하기 전에 제 이야기를 조금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흐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하구나. 이제 와서 말을 돌리려는 것은 아닐 터이고. 좋다. 말해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