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87
제 287화
진천희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여하륜의 전서를 뜯었다.
여러 통이었으나 간결한 문장으로 짧게 적어서 괜찮았다.
‘얘도… 자기 이야기는 잘 안 하는데…… 뭐, 이건 중간에 누군가가 가로챌 것을 예상하고 쓰는 거니까.’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 쓰는 것만으로도 다른 소교주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쓸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고.
절제된 몇 개의 단어 정도로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람답게 살고는 있는 거 같네.’
확실하게 언급한 건 아니지만 부하라고 할 수 있는 자들도 생긴 것 같다.
그리고.
‘혈로를 걷고 있구나.’
외부에 드러날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아마 몇 명의 소교주를 죽인 것 같다.
성취에 대한 암시적 문장을 봐서는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여하륜에게는 응급약을 보내는 게 맞겠네.’
본인이 다치든, 부하가 다치든 쓸 일이 많을 터.
그럴 때 믿을 만한 사람이 보낸 약만큼 큰 힘이 되는 게 없다.
마지막으로 뜯을 건 왕각연의 전서.
‘아…… 각연아. 주소 잘못 보냈다.’
아무리 봐도 궁귀 어르신에게 보낸 전서다.
아빠에 대한 인사말이 눈에 들어온 순간, 진천희는 재빨리 전서를 덮었다.
그 와중에 그만 문장 몇 개를 더 읽었는데 천희가 걱정이 되니 곁에서 잘 지켜 주라는 말이었다.
‘고맙네.’
그리고 이 와중에 전서에 이름 잘못 쓴 건 너무나도 왕각연다웠다.
‘궁귀 어르신한테는 설마 내 편지가 간 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문을 똑똑 두드리며 궁귀 어르신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어…… 은공. 아직 안 주무십니까? 그…… 야밤에 찾아와서 정말 실례지만…… 어…….”
“드, 들어오세요!”
궁귀 어르신이 시뻘게진 얼굴로 잘못 온 전서를 내밀었다.
아이고, 각연아. 아빠 민망하다.
* * *
그렇게 백린의각에 있는 동안에는 친우들과 동생들에게 밀린 전서를 보내며 시간을 보냈다.
진천희가 완농을 다녀오는 동안 모아둔 토양 표본들은 모두 연구실, 유호에게 배당되었다.
“지역마다 토양에 사는 미생물들이 다르니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헛수고일 것 같습니다만……?”
“아니, 유호. 왜 그렇게 말을 서운하게 해. 될 수도 있잖아!”
“벌써 이 짓만 몇 년째입니까! 도련님은 질리지도 않으십니까?”
“안 질려. 유호! 우리 둘째 봐야지!”
뚝-
그것은 유호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유호는 망할 도련놈의 목을 붙잡아 탈탈 털었고, 진천희는 꾸에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이 와중에 다른 의각원들은 그쪽으로 시선을 안 주기 위해 애썼고.
이 미친 짓 속에서도 두 사람 모두 선반에 있는 표본 하나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독했다.
“유호, 내 말 좀 들어 봐. 내 말 좀 듣고 이야기해! 유호!”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입니까?”
“뭐? 아니, 그런 게 아니…… 꾸에에엑! 커억! 아니, 알았어. 죽기 전에 말할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기똥찬 걸 배워 왔는데, 치유 주술이라고. 이걸로 끝내주는 배양을 할 거거든? 꾸엑! 크어억!”
덩치도 커 가지고는 작정하고 멱살을 털면 벗어날 수가 없다.
“아니, 진짜로…… 믿…… 끄억! 한 번만 믿어 줘! 진짜 대단한…… 유호, 너 사실 주술 쓸 줄 알잖……!”
콰앙!
그 순간, 유호가 일부러 벽을 차서 진천희의 목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막았다.
“……둘이서 좀…… 대화가 필요하겠군요. 도련님.”
유호는 진천희의 멱살을 쥔 채로 밖으로 끌고 나갔다.
* * *
의각 후원 대나무 숲.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유호 대학원생은 악마 같은 진 교수를 땅에 내동댕이쳤다.
“커헉, 컥컥!”
“와, 외공을 극한으로 익혀서 이제 이 정도는 피도 안 토하시네요. 도련님?”
“그게 다 유호의 조교 덕분 아니겠어? 아니…… 젠장……! 농담도 못 하네.”
유호가 주먹을 들자마자 진 교수는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교수와 졸업 없는 대학원생이라는 악마 같은 관계는 서로에 대한 증오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유호, 내 말 좀 들어 봐. 유호가 썼던 무공이지만 무공 아닌 것들 말이야. 이론을 따져 보니 주술과 일견 비슷한 면이 있었단 말이지.”
“이 인간 새끼가 거기까지 봤으면서……!”
“내 말 들어 보라니까! 내가 유호가 왜 그런 주술 비슷한 걸 쓰는지는 안 물을게. 유호의 사생활이잖아.”
아니었다.
더 부려 먹기 위해서 안 물어보는 것이었다.
진 교수는 양손을 모으고 고아하게 말했다.
“나는 유호의 사생활을 존중해.”
“제 노동량은 존중 안 합니까?”
“……유호. 유호는 어린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었잖아. 아동 살해 협박이라고. 그건 과로해도 싼 벌이야.”
그 순간, 유호는 분노를 느꼈다.
저 아름다운 미모로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반만 못생겼어도 좀 화가 덜 났으련만.
망할 진 교수는 저도 잘생긴 걸 알아서 얼굴을 막 쓰고 있었다.
“아무튼 유호 들어 봐. 듣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진천희는 ‘들어 봐’라는 말을 시작으로 유호가 주먹질을 안 할 거 같자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유호도 이 노동을 그만하고 싶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짧게 끝내자고. 이번 완농까지 다녀오며 채취해 온 토양 표본들. 그중에 하나도 없으면 포기한다!”
꿈틀.
그 말에 유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진 교수는 재빨리 포착했다.
“응, 포기할게! 무인답게! 포기한다.”
“댁이 무슨 놈의 무인…….”
“알았어. 의원답게 포기한다!”
유호는 그 말에 더욱 신뢰가 안 갔다.
의원으로서의 진천희는 그야말로 거머리의 환생이었다.
치졸하고 끈질기게 달라붙기로 일인자인 놈이었고.
“한 번만 믿어 봐. 믿어 보라니까! 내가 주술 가르쳐줄게! 일이 더 편해질 거라고!”
그 일을 주고 있는 놈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더 분노가 치밀었다.
진천희가 눈을 빛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불태워 보자.”
후욱, 후욱.
진천희는 제정신이 아닌 눈을 하고 있었다.
“없으면 연구 정말 포기하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
불끈!
유호가 주먹을 쥐는 순간 서둘러 다음 말을 했다.
“유호를 빼고. 나 혼자 한다는 말이야. 나 혼자!”
“포기한다는 건?”
“이번 연구에서 유호의 노동력을 포기한다는 거야! 그렇게 부려 먹었으면 유호도 할 만큼 했지! 나도 충분히 유호를 부려 먹었어!”
진 교수는 양심이 없는 새끼였다.
그리고 기왕 양심 버린 김에 끈덕지게 유호에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들어 봐, 유호. 주술 잘만 쓰면 간호사 업무가 반으로 준다? 진짜임. 믿어 봐. 나 못 믿어?”
유호는 원래도 인간이란 종족이 싫었지만, 진 교수를 보니 더 지긋지긋해졌다.
“원래 돈 받고도 안 가르쳐주는 건데 유호에게만은 공짜라니까?”
……진 교수는 그가 만난 인간들 중 나쁜 의미로 최고였다.
* * *
유호는 그렇게 주술을 배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외식 주술이겠지요.”
“유호가 쓰는 주술은 어디가 달라?”
그 질문에 유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도리어 이렇게 물었다.
“정 궁금하시면 알려 드릴까요?”
“아니, 스스로 알아낼게. 나는 타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사람이니까.”
진천희는 어쨌든 유호의 노동력이 소중했다.
정색까지 하며 변하는 태도에 유호는 기가 막혔지만 저 도련놈은 원래 미친 새끼니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옥 속에서 볼 장 다 본 사이.
이 이상 혐오스러워진들 큰 의미는 없다.
“원래는 며칠만 쉬다가 바로 황궁으로 출발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많아서 일주일만 있다가 출발하려고.”
“황궁으로 가는 거면 급한 일 아닙니까?”
“급하긴…… 하지. 하지만 이것도 중요하니까.”
진천희는 부술당 상의원들의 기량을 일일이 점검하고, 그들이 만든 기록들을 분석했다.
더불어 진천희가 떠나 있는 동안 백린의각이 얼마나 커졌는지도 확인했다.
‘무인의 숫자가 이제 2,500명…… 그중 절반은 준영약 제공이라니.’
비록 영약급은 아니라고 해도 준영약도 상당히 비싸다.
커다란 세가의 자제들이야 밥처럼 먹는다고는 해도 흑도도, 백도도 아닌 궁귀같이 애매한 회색분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귀한 기회였다.
백린의각이 ‘의각’이기에 자체적으로 준영약을 제작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
사실상 원가만 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법 덕분에 내공 수련의 성취가 빨라.’
이 역시 소림이나 남궁 같은 거대한 문파의 성취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니다.
허나, 그들보다 무인의 기복이 적다는 게 장점.
정형화된 무공으로 집단전에서 큰 힘을 발휘해 나갈 터였다.
‘스승님은 대체 어떤 미래를 그리고 계시는 걸까.’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과정.
알고는 있으나 가끔 스승님의 능력에 오싹해지곤 한다.
‘이런 사람이 어째서 제갈가를 다시 부흥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스승님은 언제나 가문에 대해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하곤 하셨다.
가문의 복수를 제 손으로 이룰 정도라면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닐 터.
허나 다시 가문을 일으킬 생각은 그다지 없다.
결국 진천희는 계속 고개를 돌려왔던 한 가지 질문을 하고 만다.
‘제갈가는 대체 어째서 멸문한 걸까?’
또한 그것을 굳이 제자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물론 스승님이 생존자로 계시니 멸문까지는 아니다.
허나, 구음절맥을 앓고 있었고. 진천희를 만나기 전 시한부의 상황이었다면 멸문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대체 그만한 저력이 있는 가문이 하루아침에 멸문하는 게 가능은 한 걸까?’
무당권제를 통해 창룡문과 관계가 있다는 것만 겨우 들었다.
허나, 창룡문은 이제 지도에서 없어진 곳.
‘……스승님과 제갈세가, 그리고 창룡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