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97
제 297화
어쨌든 이 가설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를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노력은 유한한 자원이다.’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무공의 성취는 둔화된다.
먹고 자고, 휴식하는 시간은 빼는 게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폐관 수련으로 인생 모든 것을 갈아 버리겠다고 해도, 인간의 정신력도 한계가 있는 자원이다.
평생을 폐관 수련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결국 정해진 시간 안에 내공심법과 무공, 보법, 실전 경험을 테트리스처럼 욱여넣어야 하는데…….
‘음…… 이 발상도 사실 미친 소리겠지.’
일반적인 무협 월드의 트루 소드 마스터라면 노력은 언제나 무한한 자원이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취가 느린 거면 오성(悟性)이 부족하다, 체질이 안 맞는다 하는 거고.
‘태극보가 미리보보다 사람을 덜 타고 대성이 상대적으로 쉬워. 이건 큰 효율이지.’
차르륵-
사슬낫이 회전하며 다시 천우의 사각을 노린다.
천우의 몸이 미끄러지며 흑강혈마와의 간격을 좁히려고 했다.
그 순간, 흑강혈마의 손에서 사슬낫이 뱀처럼 뻗어 나가고, 천우는 검을 비스듬히 비틀어 막아 낸다.
스카카강!
‘피격 직전 검을 꺾은 것은 태극의 유능제강의 묘리를 그대로 실천한 거라 할 수 있겠네. 이렇게 하면 확실히 검과 검이 부딪쳤을 때 손목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어쩔 수 없다.
역시 무협식 비유법을 쓰는 건 진천희에게 어려운 일이다.
‘허나 흑강혈마는 최소 검사지경에는 오른 고수. 그저 사슬낫을 막았다고는 해도…….’
츠가가각!
사슬이 천우의 검을 감으며 한 번 회전했고, 검사에 스치며 천우의 얼굴을 베고 지나갔다.
다행히 얇은 상처.
‘순간 판단력과 반사 신경 하나는 천우가 좋단 말이지. 나라면 아예 첫 수부터 원거리 타격으로 접근하는 걸 차단했겠지만.’
현대인은 잡기(雜技)에 능하다.
‘사슬낫은 확실히 성가신 무기야. 보통 검수라면 검사(劍絲)를 머금은 사슬낫 때문에 이쯤에서 칼을 놓쳤겠지.’
승부는 그것으로 끝.
천우는 다진 편육이 되었을 터.
허나 진천희는 천우가 팔을 잃을지언정, 검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저 지켜볼 뿐.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무인의 명예고 나발이고 개입해서 동생 옆구리에 끼고 토낄 준비도 되어 있다.
현대 의사는 어째서 무명(武名)이 사람 목숨보다 귀한지 이해할 수 없다.
진천희가 의원의 길을 추구하는 한 아마 그것은 영원히 모르겠지.
대신…… 극한의 실리주의가 그저 관전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무학(武學)을 조립해내기 시작했다.
차르르륵-
천우의 검을 감은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여기서 검을 놓치면 죽을 것이고, 그렇다고 버틴다면 칼은 부러질 것이었다.
천우의 검은 진천희가 가지고 있는 신병이기 같은 게 아니다.
무당파의 제자인 만큼 보통보다야 좋은 검이겠으나, 그렇다고 날이 무뎌지지 않는 것은 아닐 터.
끼기긱-
칼날이 사슬의 압력에 점점 더 불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크크큭.”
승리를 확신한 흑강혈마가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흑강혈마의 어깨 근육이 내공으로 부풀어 오른다.
마공을 익힌 것치고 꽤 기초가 탄탄한 고수.
‘음, 그래. 악당도 기초가 있어야 악당을 해먹는 법이지.’
이대로 천우가 버티면 버틸수록 검에 가해지는 부담은 더욱 커져 갈 터.
천우가 제아무리 검사지경을 넘어 검기운해에 다다랐다고 해도 이 자세로 사슬을 베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천희는 과연 천우가 어찌 대응할지 궁금해졌다.
그것은 무당의 절학을 뜯어 뇌 한구석에서 다시 재조립 중인 학자의 눈이기도 했다.
무당파가 싫어할 만하지만 어쩌겠나.
그것은 본디 책사가 시조인 제갈가의 직업병인 것을.
카가가각-
대치 상태가 한계에 이르는 순간.
탕!
천우가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흑강혈마를 향해 파고든다.
차라라락-
상대를 잃은 사슬이 빠르게 당겨지며 도리어 흑강혈마의 중심이 일순 흐트러진다.
주인 잃은 사슬의 압력이 느슨해지는 것과 동시에 천우의 동작은 익숙한 초식에 접어들었다.
‘태극혜검.’
형이 밟았던 심무의 끝자락을 아우도 드디어 밟게 되었는가.
흑강혈마가 급히 사슬을 회수해 아까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한 내력을 담아 사슬을 쏜다.
후우우웅!
그 모습은 진신절기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었고.
천우 역시 그 절기에 답하듯 태극혜검을 펼친다.
흡사 공간이 왜곡된 것과 같은 비틀림이 천우의 검 끝에서 한 번, 그리고 반격하는 검에서 또 한 번!
츠가가각–!
천우의 중검이 위에서 아래로 지나간다.
사람을 머리끝부터 사타구니까지 한가운데로 토막 치는 검에도 도가의 자비가 깃드는가.
“크아아아악!”
그 일격에 흑강혈마는 반으로 갈라져 숨이 끊어졌다.
피를 뒤집어쓴 아우는 가쁜 숨을 한참이나 내뱉었다.
이만한 고수를 홀로 상대한 것이 처음인 걸까.
숨을 가다듬은 천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형처럼은 안 되네요.”
“…….”
산적들을 말을 잃었다.
분명 대등, 아니, 어찌 보면 흑강혈마 쪽이 압도하고 있었는데 찰나의 순간 처참히 도살되고 말았다.
단지 진천희만이 편안한 표정일 뿐.
‘후, 천우가 강심장이라서 다행이네.’
무학을 펼치는 데 기반이 되는 게 정신.
괜히 모든 무학에서 심(心), 기(氣), 체(體)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실전, 그것도 마교의 고수를 상대로 몸이 굳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던 모양.
형은 가슴을 쓸었다.
허나, 산적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이놈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딱 하나.
지들보다 강한 고수와 싸울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놈보다 강한 흑도라면 빠르게 무릎을 꺾어 목숨을 구명하고, 강한 백도의 고수라면 도망치거나 아니면 한 줌 핏물이 되어 죽는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흑도의 섭리라고 할 수 있었고.
본인들이 굴복한 고수가 다른 고수에게 사망하는 변수는 상정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게 이자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니까.
허나, 의외로 여기에는 그 변수도 생각해 둔 자가 있었다.
“당황하지 마라! 준비했던 대로 간다!”
와호채의 두목의 내공 섞인 고함에 적들도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때 날아온 것은 칼이 아니었다.
타앙!
내공 있는 자가 던진 쇠 그물이 빛처럼 빠르게 천우를 덮친다.
그 뒤로 날아오는 건 바로 화살 비. 그물에 몸이 엉키는 순간 화살을 맞고 치명상을 입을 거고, 그물은 어찌어찌 피한다고 해도 화살 비까지 막을 여력은 없을 터.
‘와우, 이건 무림이 아니라 전쟁의 방식인데?’
진천희는 작게 감탄하며 신형을 날렸다.
입은 여전히 장난스레 웃고 있으나 눈은 분노로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 * *
마교에서 초빙한 고수가 쓰러지자 와호채 산적들의 얼굴은 급격히 썩어 들어갔다.
저 백의광룡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만 그들을 포박해 관아에 넘길 것은 확실했다.
그것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상흔을 남겨서.
평생 반성하며 살라는 의미로 숨만 겨우 붙여 줄 것이었다.
산적을 데려다가 관군이 하는 일이라고는 보통 둘 중 하나.
탄광이나 염전 같은 곳으로 끌고 가 죽을 때까지 노동을 시키든가, 그들이 죽인 유가족들 앞에서 곤장을 때리고, 형벌을 빙자한 고문을 한 후, 사형을 하는 정도.
몸이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탄광이나 염전을 간들 그건 죽는 게 나을 지경이고.
그들이 그간 벌인 악행을 생각하면 사형도 깔끔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백의광룡에게 질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간 백의광룡에게 처맞아본 흑도의 고수들이 일제히 하는 소리다.
남은 삶을 반성하고 살 거면 애초에 양민을 학살하지도 않았다.
돈이 사람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그 말에 동의할 필요도 없다.
흑도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애초에 그들이 하는 일 자체가 사람의 피를 짜내 금으로 빚어내는 연단술 아닌가.
선을 넘는 것은 너무나도 쉽고, 그 대가로 주는 황금이란 어찌나 달콤하던지.
‘남은 생을 반성? 지랄하네.’
와호채의 산적들은 필사적인 심정으로 외쳤다.
“죽여! 단 두 명이니까 죽이자!”
“제기랄, 이렇게 된 거 너 죽고 나 살자!”
휭휭휭!
산적들은 일제히 무언가를 던졌다.
와호채라고 하면 그래도 녹림십팔채에 드는 집단이니만큼 삼류라고는 해도 다들 무공 한 자락 정도는 익혔다.
그들이 내력을 담아 던진 것들이 파공음을 내며 날아든다.
그것은 사슬을 이어서 만든 그물.
제법 굵직한 쇠 그물은 고수를 대비해 만든 물건으로, 특별히 돈을 들여 제작했다.
성과도 있었다.
무인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주력 무공 한 우물만을 파 온 자들이다.
검수와 검수의 결투에는 자신 있으나 이런 집단전에는 당황하는 면모를 드러낸다.
이 공격에 백도의 인물들이 얼마나 당황했던가.
일순의 당황이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진 게 얼마인가.
“…….”
허나, 진천희는 그 모습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신병이기를 뽑아 검기를 뿜어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마저 느껴지는 여유로운 태도.
푸른 안광만이 스산하다.
츠츠츠츠츠-
검을 둘러싼 기의 칼날은 점점 늘어나 그 길이가 무려 일 장(약 3m)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그런 칼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휘둘렀다.
후아아앙!
칼날에 쇠 그물이 종이처럼 찢어진다.
그래도 내공을 익힌 자들이 번개처럼 날린 쇠 그물인데.
백의신룡의 검격은 이미 그 속도를 아득하게 뛰어넘었고.
그 검에 담긴 무학이란.
‘삼재검법……?’
무공을 아는 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는 저잣거리 검격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삼재검법이었다.
‘어째서 태을단선검(太乙斷仙劍) 같은 제갈가의 신공절학을 놔두고?’
하다못해 무당파의 태극검이라도 되면 자존심이 덜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긍지 같은 건 버린 흑도인 산채 두목 인생이라 생각했건만, 회심의 공격을 고작 삼재검법으로 걷어내니 가슴 속 무언가가 우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놈의 검기가 저렇게 커!”
“영약을 밥 대신 먹은 거 아니야?!”
눈을 두고도 삼재검법을 못 알아보는 부하들이 당황한다.
하긴, 일 장이 넘는 검기를 찰나의 순간에 세 번 휘둘렀다.
하수라면 어딘가의 신공절학일 거라 판단하는 게 당연.
두목이 소리쳤다.
“쏴라, 쏴! 어서!”
산적들이 필사적으로 화살을 쏘아 댄다.
가지고 있는 투창도 있는 대로 집어 던진다.
어차피 고수와의 격전.
근접으로 들어가면 죽는 건 이쪽이다.
엄폐물로 몸을 가리고 눈먼 독화살 하나라도 스치면 이쪽이 승리한다.
거마(巨馬)도 한 번에 마비시키는 마비 독이 담긴 화살.
관통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피부 밑에 한 번이라도 닿으면 된다!
그때 진천희는 천우에게 빠르게 전음을 날렸다.
[고생했어. 이다음은 내가 할게.]“그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