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322
제 322화
전장을 지켜보며, 진천희의 양의심공과 현원전단신공.
그리고 화경에 다다른 오성이 함께 스스로를 관측해 나갔다.
그렇게 내린 자기진단.
‘아, 양민이 없기 때문이군. 그리고 아이가 없기 때문이야.’
화경에 이른 검수가 있든 없든, 일류 고수가 얼마나 많이 싸우든 그건 그리 상관없었다.
단전에 내공이 콩알만 한 무인밖에 없는 곳이라도 그자들이 양민을 학살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가슴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어린아이의 시신이라도 보게 되면 목이 막혀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감각이 밀려왔다.
반대로 천하 십 대 고수들의 싸움과 강기의 폭풍 속에서는, 수없이 병장기가 부딪치고 사람이 죽어도.
불편한 감정이야 당연히 있고 힘들긴 하나…….
완전히 자신을 잃지는 않았다.
‘양민의 유무가 내게 중요한 거였어. 그래, 생각해 보면 용봉지회 때 젊은 무인들이 폭주할 때도 그렇게까지 정신이 힘들진 않았지.’
진천희 자신에게 이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물론 타인들은 어찌 부를지 모르겠다. 무인간의 전쟁 역시 엄연히 전쟁이 맞긴 하다.
허나, 여기는 민가도 아니고 죄 없는 양민들이 눈먼 칼에 맞아 사망한 것도 아니다.
‘숨 쉬기가 한결 편하네.’
진천희에게 있어 ‘전쟁’의 정의 하나를 발견한 셈.
그리고 이것을 관조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아…… 내 용적 용량이 늘어서 그런 거구나. 화경의 경지에 진입하고 응룡의 보옥을 얻고 거기에 다양한 신공절학까지. 때문에 정신의 그릇 자체가 엄청 넓어지고 강인해졌어.’
물론 있던 정신병을 치료해 주는 것까지는 불가능하다.
이런 건 사람 몸과는 달랐다.
이 또한 진천희가 살아온 과정이며, 기억이며, 상처였으니까.
허나. 관조하고 분석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진천희의 정신이 화경의 경지에 들어서기 전에 컵 하나 정도였다면, 지금은 정말로 4인용 욕조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다.
‘경지 한 단계에 이 정도 변화가 일어나다니…… 그러니 다들 화경이 되기 어려웠던 것일지도 몰라. 이런 극적 변화라니…… 그렇다면. 역시 현경은 인간이 아니겠네.’
지금의 진천희 자신이 4인용 욕조라면, 현경에 도달한 삼존들은 대체 어떤 존재들일까?
그들의 정신은 호수 정도는 될까?
호수 크기의 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래도…… 그때 만난 ‘그 존재’한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응룡.
현경이 호수라면, 응룡은 바다일 것이다.
왠지 그럴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아…… 논문을 빨리 쓰게 된 데다가, 경이적인 회복 능력을 얻었다고 좋아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갈 길이 멀구나.’
머리 한구석으로는 자신을 진단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전장을 주시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길잡이.
소설 지존천마를 떠올렸다.
분명 지존천마에서는 현경에 오른 천마 여하륜이 최종 보스를 무너트리고 소설이 끝맺음하게 된다.
그건 하나의 이야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소설 하나가 끝을 맺었을 뿐.
하지만 여기는 현실이며 하나의 세계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응룡이 말하는 때는 무엇일까.
‘최종 보스는 그렇게 여하륜에게 무너지며 뻔한 대사를 날렸지.’
-크크큭, 이렇게 가는가. 허나, 상관없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는 한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클리셰 중의 클리셰다.
너무 많이 써서 이제는 단물도 안 남았을 대사다.
허나, 그게 진짜라면……?
진짜로 그놈이 돌아온다면……?
진천희 자신은 어떤 선택과 대비를 해야 할까?
더 넓고 강대해진 정신으로, 진천희는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생각을 계속해서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진천희의 몸 주변은 기의 흐름이 몹시 기기묘묘해지고 있었다.
뜨거워졌다가, 다시금 차가워진다.
의각원들도 그런 진천희 곁으로 가서 그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결국 제3의 세력이 참전하는 것이 보였다.
일월신교. 세간에서는 마교라 불리던 이들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제부터는 서로 편을 정하지 않은 삼파전의 혼전.
‘봐 주겠어. 너희가 선택한 무학이 어떤 건지…… 나는 계속 지켜보도록 하겠어.’
진천희는 눈을 돌리지 않고서 싸움을 주시했다.
* * *
백린의각이 물러나 진법을 구축하여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고, 동시에 환자를 받을 준비를 하는 사이.
그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이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사도련과 함께 나타난 흑전의각. 그리고 무림맹과 같이 온 화주의각이다.
물론 그들은 백린의각처럼 강력한 무력 조직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어서, 화주의각이 꾸린 치료소는 약 이백여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흑전의각 쪽은 그나마 무인들의 수가 좀 더 많아서 사백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혈생노괴가 와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군.’
화주약선은 확실히 오지 않았다.
애초에 약선은 이런 혈풍에 직접 올 만큼 담이 크지도 않을뿐더러.
외상 치료는 본인의 주력 분야가 아니다 보니 이러한 일에는 좀처럼 직접 나서는 일이 없다.
단 혈생노괴는 달랐다.
그녀는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녀가 과거 진천희 앞에서 선보였던 축근공의 일종은 어지간한 강호 고수들조차 속이는 기기묘묘한 대법으로.
성별, 나이, 특징, 목소리, 이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다.
아직 화경도 넘지 못한 사마현의 변검조차 귀신같을진대, 아득한 시간을 살아온 혈생노괴를 알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지금 여기. 이 자리.
흑전의각의 의원들은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세 개의 의각이 혈풍의 외곽에 자리를 잡고 치료소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치료소를 찾아올 틈도 없이 전투는 계속해서 치열해지고 있었다.
‘전략이나 전술이라고는 검진 정도인가. 허나, 이 또한 강호의 싸움이지.’
물론 무림맹의 군사와 사도련의 군사가 전술적인 선택에 대해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닐 터.
허나, 련과 맹의 직속 무력 조직이 아닌, 그저 같이 동행했을 뿐인.
각 문파들의 무인들이 문제였다.
“혈련문의 두강자다! 애송이들 전부 덤벼라—!”
사자후를 터뜨리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저 무인의 경우.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도련의 통제에 따를 이유가 없다.
사파란 곧 힘이 정의인 곳.
혈련문의 문주가 따로 사도련을 따르라 명했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자신의 무공이 출중하여 혼자 싸울 수 있다는 판단이 들면 그리하는 것이었다.
수천 번, 수만 번, 수십만 번 주먹으로 벽을 때리다 피를 내고, 다시 아물며 형성된 무인의 강고한 자아가 그러라 속삭인다.
“무림맹 소속 일창문의 창진이다! 혈련문의 두강자! 덤벼라!”
“크하하핫! 정파의 위선자군! 좋다! 싸우자!”
그렇다.
그 강고한 자아란 무림맹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창왕이 그렇게 몸을 던져 막았으나 강제력이 없는 연합체란 모래성과도 같다.
일창문의 무인은 무림맹의 통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고, 눈앞의 사도련 소속 무인을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통신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장소는 항산이라고 하는 산과 숲으로 이루어진 지역.
이곳에서 전황을 파악하는 것은 아득하게 어려운 일이다.
그저 아군 아니면 적.
전술을 짜고 싶어도 군처럼 북소리에 따라 주는 것도 아닌 터라 중구난방의 산개형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사도련의 군사와 무림맹의 군사.
양측 모두 일이 이리될 거란 것은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최소한의 꾀를 짜내긴 했으나, 그조차도 첩자인 방검단주의 행동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천희가 중얼거렸다.
“마교가 찌르러 오겠군요.”
푸른 안광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청년은 미술 작품처럼 고아했으나, 어째서인지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창백함도 가지고 있었다.
“정확하구나.”
그런 제자 곁에 스승은 머물렀다.
진천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월신교.
두 명의 소교주가 나타났다.
“마종육가의 무복은 의외로 알아보기가 쉽네요.”
“기억해 두렴.”
치료소에서 아득하게 먼 거리였다.
그것을 제자는 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허공을 멍하니 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톡-
빗방울이 한 방울 진천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토톡-
비가 오는가.
이리도 비가 내리는데도 진천희의 자세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찬비에 젖어 가면서도 청년은 흐트러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청년은 더욱 창백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서 있을 뿐.
스승은, 그런 제자의 곁을 지킨다.
“마종육가 중 세 가문이 힘을 합쳐 보낸 정예들이겠군요.”
“어디까지 파악했는지 말해 보렴.”
책사의 공부. 제갈가의 가장 기본적이며 실전적인 수련 중의 하나였다.
현원전단신공이 극성까지 뇌를 채운다.
“명령 체계는 소교주 둘. 이 둘에게 명령을 받고 있어 무림맹이나 사도련에 비해 압도적인 통일성과 그를 통해 다져진 집단 전투력. 사도련과 무림맹을 공평하게 죽여 대고 있군요.”
목소리는 청아했으나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책사의 목소리였다.
“그래. 숨 쉬기는 어떠니?”
스승의 질문에 진천희는 침착하게 답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래.”
제갈린은 눈앞의 청년이 뼈와 살이 아닌 눈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었다.
겨울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가, 여름이 되면 어느새 사라지고 말.
기묘한 분위기의 기묘한 기품을 가진 청년은 자신을 녹이는 것이 익숙했다.
“또 보이는 것을 말하렴. 그리고 하나씩 분석해 나가는 거란다. 산목숨과 죽은 목숨. 모두를 관측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갈가의 ‘책사’로서 한 걸음 거듭나는 게지.”
“스승님도 아버님과 함께 이 과정을 거쳤나요?”
“…….”
그 말에 제갈린은 답하지 않았다.
속눈썹이 깃털처럼 내리깔리더니 이리 답했다.
“이 수행에 누군가가 굳이 참관할 필요는 없단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지켜보는 것은 혼자로도 충분하지.”
제갈린은 문득 혈린광살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이윽고 작게 미소 지었다.
“물론…… 자신이 만든 혈풍을 감상하면서 수행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일순, 스승님에게서 낯선 광기가 느껴졌으나 진천희는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