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34
제 34화
단전 안에 느껴진 것은 전보다 많은 양의 진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과 비슷한 진기.
같은 계파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진기를 줄 같은 계파의 사람은 한 명뿐.
왕각연은 아버지가 이제는 예전 같은 무위는 두 번 다시 펼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은 어째서인지 더 강해졌다는 것도.
“괜찮으십니까? 두 번 다시 활은 잡지 못하실 겁니다.”
선천진기까지 사용한 탓일까.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봤던 것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딸이 살았으니 뭘 더 바라겠습니까. 저는 그것만을 원했습니다.”
스승님이 진천희를 힐끗 보았다.
‘희야, 괜찮겠니? 이 사람을 밑으로 둘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냥 진기야 회복이 되지만 선천진기는 달랐다.
인간의 생명력 그 자체였다.
내공을 쓸 수야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을 터였다.
예전의 그가 절정 고수였다면, 지금의 궁귀는 고작해야 삼류 무사 정도의 무위를 보여 줄 터였다.
‘우리 천희야 워낙 선한 아이이니 사람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제자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스승이었다.
사부님의 표정을 읽고는 진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희는 생각했다.
‘써먹기에 딱 좋은 상태군.’
무협 소설에는 수많은 빌런들이 나온다. 그중에서 특히 비중이 큰 빌런들이 있긴 하다. 그러기 위한 조건이 몇 가지 있는데…….
돈이 많은 빌런?
주인공에게 갑질을 시도하다가 훗날 털리는 역할 담당이다.
여기서 주인공의 수저가 흙수저냐, 금수저냐, 또는 이 장르가 환생이냐, 회귀냐, 빙의냐에 따라서 털리는 방식은 다르다.
허나 어쨌든 털리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다.
강한 빌런?
무협에 강한 빌런이야 늘 존재한다.
그자들은 초반 엄청난 무위를 보여 주다 끝내 주인공 깨달음의 거름이 된다. 가히 살신성인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이놈들을 거름으로 주인공은 생사경 임독양맥 타통에 싸우다 말고 검기는 검사로 변하고, 검강의 경지에 오른다.
살아있는 생체 영약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스승도 못 해 준 깨달음을 얘들이 해 준다.
그러나 거기까지. 주인공에게 패배한 ‘강한 빌런’은 더 이상 빌런이 아니게 된다.
죽거나, 개과천선을 하거나, 단전이 폐해지고 더는 등장하지 않거나.
‘결국 최고는 잡초 빌런이지.’
죽여도 죽여도 살아나서 더욱 강해지고, 적이 되었다가, 때로는 아군이 되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말 그대로 잡초 같은 계열이라 할 수 있다.
궁귀는 강한 빌런과 잡초 빌런의 중도를 걷는다 할 수 있겠다.
지긋지긋한 듯……하면서 좀 멋있을 때가 있는 캐릭터다.
합쳐서 ‘지긋멋있’.
소설에는 궁귀가 가족을 잃고 빌런이 되어 폭주를 하고, 천마와의 싸움 끝에 힘을 다 소진한 장면이 나온다.
그때에 얻은 깨달음은 그런 몸 상태가 아니면 불가능한 깨달음이었다.
‘잘됐군.’
모두가 슬퍼하는 와중에 진천희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거기다가 무공도 잃었으니 꼬시기 좋은 상태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좋고 잘나갈 때보다 힘들고 궂을 때 잘해 주는 사람이 더 와닿는 법이다.
거기다 가족을 구한 은혜까지 입힌 상태였다.
그의 성정을 보았을 때 평생토록 이 은혜를 잊지 못할 터였다.
궁귀가 말을 이었다.
“거기다가 제 딸의 무위가 전보다 강해졌다고 합니다. 아비로서 이보다 경사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궁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부모였다.
그것도 바보처럼 아이만 바라보고 사는 부모.
“어디 한번 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갈린이 손을 내밀자 딸, 침상에 있던 왕각연이 팔을 내주었다.
한참 진맥을 하더니 스승님이 말했다.
“세맥이 전부 뚫려 있군요.”
그 말에 궁귀가 놀라서 소리쳤다.
“세맥 말씀이십니까?! 전부?”
십오 일 동안 생사의 문을 드나들며 영약과 진기, 그리고 각종 대법으로 몸을 연명해 왔다.
그리고 제갈린의 기문진에서 마지막 한계까지 버티며 아버지의 선천진기까지 받았다.
그녀 역시 놀란 모양인지 한참 눈을 크게 떴다.
제갈린이 말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열린 것입니다. 이대로 두면 다시 닫히겠죠.”
“그렇다는 말씀은…….”
“지금부터 열흘 동안 운공을 하시며 모든 세맥에 내공을 보내셔야 합니다. 의각원들이 침술로 보조할 터이니 열흘만 버티시면 앞으로도 세맥이 뚫린 상태로 계속 지낼 수 있습니다.”
내공은 몸에 있는 수많은 맥을 지나간다.
기라는 것이 혈관을 따라 움직이는지 신경을 따라 움직이는지는 진천희도 알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지구의 의료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벌모세수 후 탁기가 진액이 되어 밖에 배출되는 걸 보면 아마 신경보다는 혈관 쪽에 가깝지 않을까 추측하고는 한다.
무림인에게 전신 세맥이 뚫린다는 건 의미가 크다.
내공을 원하는 형태로 다루기 쉽고 축적하기 쉽다는 뜻이니 같은 무공을 쓰더라도 파괴력과 응용력이 달라진다.
왕각연이 눈물 맺힌 눈으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빠도 정말…… 고마워요.”
“아니다. 아니다. 이 은원은 결국 못난 아비로 인해 시작된 것이 아니더냐. 감사해야 할 것은 이분들이시다.”
제갈린이 냉정하게 답했다.
“저희에게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렇게 어린아이를 때려서 은원을 풀려 했던 흉수들이 나쁜 놈들이죠.”
그것도 정파의 사람이다. 스승님은 거기까지는 불문에 붙였지만, 대체 뭐가 얽혀서 이런 아이한테 악독한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진천희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궁귀가 더 미쳐 버렸는지도 몰랐다.
눈앞의 환자는 진천희 또래의 아이였으니까.
궁귀는 다시 크게 절을 했다.
“이 은공을 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딸도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으로 아빠를 따라 침상에서 일어나 큰절을 하려 했다.
제갈린은 놀라서 그녀를 막았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사실 거기다 제가 한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는 진천희를 바라보았다.
왕각연이 말했다.
“사실 아빠에게 들었어요. 진 소협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요. 그리고…….”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궁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진천희가 물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씨익 웃었다.
“네. 아빠는 그냥 아빠인걸요. 아빠가 못다 이룬 협행은 제가 대신하죠. 뭐. 헤헤헤!”
눈물 젖어 빨개진 눈으로 딸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어요. 아빠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바보니까. 혹시 모르니 열심히 무공을 배워야겠다고 늘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청 수련했어요.”
제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시간을 몸이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소저의 세맥이 타통된 것도 모두 나이에 비해 더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연도 노력을 해야 쥘 수 있는 셈이었다.
왕각연이 아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울지 좀 마. 괜찮아. 나 잘 살아 있잖아. 응? 아빠. 나 이제 괜찮아.”
“…….”
궁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냥 딸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진천희는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도 태연하다니, 쟤 진짜 나중에 궁신이나 궁존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네.’
거목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벌써부터 그릇 크기가 남다르다.
애초에 정파로 추정되는 어른 흉수들을 상대로 첫 실전에서 죽지도 않고 싸우며 버텼다는 건 이미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그녀는 진천희와 비슷한 또래이고 이대로만 자라 주면 강호인들 입에 자주 입에 오르내리겠지.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았네.’
한 번의 선행으로 궁귀와 미래의 궁신에게 은혜를 입혔다.
진천희가 순진한 척 물었다.
“저어…… 그러면 다 해결된 거죠?”
그럴 리가 없지. 이제 이다음 문제가 남았다.
밑밥을 뿌렸으니 수거해야 할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궁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물었군. 이제 당겨 볼까.’
손이 근질근질하다.
진천희는 강태공의 기분을 느끼며 줄을 당겼다.
* * *
환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기에 진천희는 궁귀 왕채백과 같이 밖으로 나왔다.
스승인 제갈린은 아직 정양이 필요한 상태이기에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바람이 차다면서.
사실상 이다음은 진천희에게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다음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 소협.”
복수를 하고 싶어도 이제 그에게는 그것을 이룰 힘이 없다.
일하러 나가고 싶어도 그간 쌓아 온 은원들 때문에 비명횡사하기 십상이다.
어른과 아이는 후원의 대나무 숲을 그렇게 걸었다.
“의각에 늘 죽림이 무성하다는 것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백린의각의 죽림은 특히나 수려하군요.”
대나무는 의각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재료다.
뿌리는 약재로 쓰고, 수액은 약초를 숙성시키는 데 사용한다.
몸통은 죽간이 되니 비싼 종이를 아낄 수 있다.
거기다 환약을 담는 함으로 쓰기도 그만이다.
잎사귀는 찻잎으로 사용하며, 죽순은 잘게 잘라 부드럽게 푹 고아서 환자식에 넣는다.
대나무는 토질을 크게 타지도 않고 비만 잘 내려도 알아서 쑥쑥 자라니 의각은 언제나 죽림이 무성하다.
“요즘은 의방에서도 죽림을 만들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만 의각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바람이 불자 대나무가 흔들렸다. 잎이 부딪치며 마치 비가 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대나무 숲의 장점이 하나 더 있다.
소리가 멀리까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예 조용한 곳이라면 청력을 기울일 수 있겠지만, 대나무 숲은 조용하면서도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거기다 사람이 오면 이쪽에서 바로 눈치챌 수 있어서 밀담을 나누기에 그만이었다.
강호의 비사와 숱하게 함께해야 하는 의각으로서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자세히 보면 대나무도 뭔가 진법처럼 배치해 놨고 말이지.’
기문진법의 대가 제갈린이 조성한 숲이다.
범인은 모를 이치가 담겨 있을 건 자명했다.
대나무 숲 한복판에 도착했을 때, 궁귀 왕채백이 말했다.
“강호의 수많은 의뢰를 받으며 일류 무사가 삼류 무사가 되는 일은 종종 보아 왔습니다. 그들의 결말 역시 보아 왔고요. 각오한 일입니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다시 대나무 숲에 바람이 일었다. 빗소리가 밀려왔다.
그는 말을 이었다.
“저는 소협의 은공 덕에 좀 더 사정이 낫다 할 수 있습니다. 제 딸, 각연이가 그 어린 나이에 벽을 뛰어넘었으니까요. 딸이 부모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되다니 부모로서 그 이상의 보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입가에는 작게 미소가 걸렸다.
죽음을 각오한 자의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