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362
제 362화
해사방 무리들을 보낸 후.
진천희는 잠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졌다.
‘역시 지치는구나.’
치료를 하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이 아니나, 그보다 힘든 일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
지구에서도 종종 겪었던 일이기도 했다.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은, 즉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한다는 거고.
본질적으로 봤을 때 사람, 그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좋은 의사가 되기 어렵다.
다양한 사정의 환자와 다양한 성격을 가진 환자 보호자.
의국 내의 정치적인 상황.
논문에 도움이 될 환자를 우선 치료해야 할지, 아니면 당장 이 치료법이 필요한 환자를 우선해야 할지.
보험이 되는 기존 약과 보험은 되지 않으나 부작용이 적은 신약.
수많은 기로에서 선택을 하고, 또 선택을 해내가야 했고.
그 선택의 책임은 고스란히 담당의가 져야 할 책무였기도 했다.
‘여기도 크게 다르지는 않네.’
어찌 되었건 사람을 치료하는 것보다 인간을 상대하는 게 더 힘들다는 건 똑같다.
현대가 좀 더 나은 점은… 그래도 환자 내놓으라고 칼부림을 하지는 않…….
‘아, 있었지. 그런 적.’
환자가 남길 유산을 가족들이 얻어내기 위해 극단적인 다툼까지 간 적이 있긴 했다.
연로하신 환자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있었고.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 앞에서 서로 보호자를 맡겠다고 싸웠다.
결국 경찰까지 왔던 일이었다.
‘그 또한 인간사인가.’
재미있는 건 자식들 중 누구도 진정으로 그 환자가 낫기를 바라는 이가 없었다는 것.
그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시한부여야만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맨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다며 연명 치료를 거부했고.
의사로서 그때 참 많은 고뇌를 해야만 했다.
그랬다.
의사의 일이란 사람의 병을 치료하여 목숨을 연명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나.
사람이란 무엇 하나 뗄 수 없는 여러 인연 속에 살고 있어 평범하게 치료 하나 받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다.
‘공유빙의 일이 이제 문제로군.’
진천희가 알맞게 끼어든 덕에 혈선교는 다 잡은 피독주와 투괴의 시신을 포기해야만 했고.
그렇다고 ‘이거이거, 못 먹었으니 어쩔 수 없구만.’ 하고 혀 차고 돌아갔으면 걔들이 혈선교가 아니지.
이제 그녀의 용모 파기는 정사마 모두가 다 알게 되었다.
투괴야 괴(怪)라는 별호답게 자기 몸은 자기가 챙기고도 남음이지만, 무공을 익히지 못한 어린 손녀는 견딜 수가 없을 터.
이제 공유빙은 평생 인피면구를 쓰며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정사마 어딘가에 납치당해 투괴의 협박용으로 쓰이거나.
운이 나쁘다면 투괴에게 은원이 있는 무인이 죽여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몸은 치료했으나 환자의 현실은 이제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뜻.
투괴가 가장 무서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차라리 백린의각으로 취직하라고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공유빙은 소설에서 금방 죽는 단역이다 보니 투괴보다도 분량이 적다.
그녀의 특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백린의각에는 가족을 보호해 주는 제도가 있다.
투괴가 취직하면 공유빙도 보호해 줄 수 있다.
제아무리 혈겁을 흩뿌린 마두라고는 해도 금분세수한답시고 대형세가에 몸을 의탁해 버리면 답이 없지 않나.
‘의각 안에 숨겨 버린다면 괜찮아.’
역용술을 가르쳐 용모를 5년에 걸쳐 바꾸거나 아니면 의원이 대신 조금씩 바꿔서 5년 정도 버틴다면 제아무리 하오문, 개방이라도 못 찾아내게 할 자신이 있다.
‘허나…… 투괴께서 받아들일지가 문제로군.’
의각에 들어온 이상 더 이상 훔치는 일은 불가능하다.
물론 비밀리에 약간 물건을 빌려오는(?) 일은 있을 수도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업무가 될 것이고.
공식적인 일은 환자 호송 및 약재 이송 같은 이송 관련 업무를 맡게 될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땡큐지?’
환자들 중에는 육순에 드신 장문인급만 되도 은원이 드글드글해서 환자 호송에 애로 사항이 많다.
백린의각에 직접 쳐들어갈 수 없으니 환자 호송길을 노리는 것.
허나, 허공답보에 등평도수까지 하는 투괴가 끼면 어떻게 될까?
‘……그래. 이게 무림식 드론이지.’
인간 모터에 이어 인간 드론!
기(氣)와 오행(五行)이 있는 세계에서 산업혁명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석탄보다 인간 가는 게 훨씬 효율이 좋은 세계 아닌가!
‘근데 도적질은 공식적으로는 그만하셔야 하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네…… 으음.’
손녀 이야기를 하면서 살살 꼬시면 되려나.
그러면 환자 안전도 지켜 줄 수 있는데…….
‘도둑의 도(道)가 중요하신 분이시니…….’
* * *
“당연히 좋지! 오히려 찬성일세.”
“네?”
진천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투괴가 바로 답했다.
“도둑으로서의 일은 더는 못 하시게 되는…….”
“……공식적으로는 말이지. 허나 상관없지 않나? 지난번 무당파에서 달기의 기보를 훔친 것도 나니까 말이네.”
“푸훕!”
진천희는 먹던 차를 뱉었다.
쿨럭쿨럭.
한참 기침을 하다 물었다.
“투괴께서 훔치셨다고요?”
그때 무당에서 달기와 연관된 ‘그 물건’을 훔쳐 왔을 때 스승님께서 담담히 이렇게 말했었다.
-삼절추호께서 큰 도움을 주셨단다. 그분과 그분의 친구, 친구의 친구분들이 큰 도움을 주셨지.
삼절추호 누님의 친구, 또는 친구의 친구가 무영투괴셨……습니까?
진천희는 당황스러워서 한참 웅얼거렸다.
‘와아, 강호 참 넓고도 좁다.’
과거의 수수께끼 하나가 이렇게 풀렸다.
하긴 제아무리 무당파가 나가 있던 때라고는 해도 지보 하나 훔치려면 많은 공이 필요했겠지.
더 무서운 것은 훔친 다음에도 훔쳐진 줄도 몰랐다는 거다.
그때만 해도 삼절추호 누님의 인맥이 상당하구나. 과연 낭인들의 ‘친구의 친구’는 무섭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설마하니 무영투괴와 이어져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혈린…… 아니, 백린의선과는 과거 묵은 은(恩)이 있었고. 삼절추호는 동생을 찾는 마음이 애틋하여 몇 번 도와준 게 연이 닿아 버렸지. 뭐, 훔치는 것은 전문 아닌가. 가장 어려운 건 훔친 다음이지. 그 또한 백린이 처리해 준다고 하니 못할 건 아니었지.”
“……그… 그렇군요.”
그녀는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도둑질로 나이를 먹다 보니 많은 생각이 들더구나. 과연 도(道)란 무엇인가 하고. 본 괴(怪)는 비록 천한 도둑이나 자부심이 있었단다.”
“어떤 자부심이지요?”
“물건을 탐하되 사람 목숨은 탐하지 않는 자의 자부심이지. 비동에 보관되어 먼지만 뒤집어쓴 물건을 밖으로 꺼내는 것은 우리 같은 양상군자(梁上君子/ 기둥 위에 숨어 있는 자를 일컫는 고사성어. 도둑을 고상하게 일컫는 말)의 일 아니더냐. 그 과정에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극소수였으니.”
그녀 역시 살인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죽을 것 같으면 살수를 펼친 일도 종종 있긴 했던 모양.
허나, 그것은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은 일이었고.
보통은 물건을 포기하지 사람을 죽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공식적으로 투괴의 일을 포기한다 하면, 사조께서 기함하시겠지. 도둑의 도(道)를 저버렸다고. 허나 사부님께서 들으셨다면 달리 말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가야.”
“…….”
작은 다실.
바람과 함께 풍경 소리가 딸랑, 하고 울린다.
작은 적막 속.
둘 밖에 없는 다실이나 꽉 차 있는 기분이 들었다.
깊은 다향을 느끼며 투괴가 말했다.
“양상군자(梁上君子)란 무릇 물건과 물건을 옮기는 것이 바로 도(道)라고 할 수 있지. 사람과 사람을 옮기는 것도, 약재와 약재를 옮기는 것도 넓게 본다면 상통한다 할 수 있으니.”
그녀는 미소 지었다.
“물론 5년 후, 손녀가 자라서 의각을 떠나고자 한다면 그 후에는 본 괴(怪)도 함께 떠날 수 있겠지. 어쩌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허나, 당장의 5년이라면. 그래.”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은 분명 젊은이의 것이었으나 눈은 노회한 무인의 그것이었고.
그 눈빛은 현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빈객으로서 함께해도 좋겠지.”
빈객(賓客).
지구로 치면 춘추전국시대부터 있던 제도로.
권세가에서 빈객이라고 해서 손님 자격으로 먹을 것을 주고, 돈도 내주는 행위가 있었다.
물론 이 빈객들은 평소에는 일 안 하고 탱자탱자 놀지만, 때가 되면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일을 해내게 되는데.
유명한 고사로 바로 춘추전국시대 맹상군의 계명구도(鷄鳴狗盜)가 있다.
직역하면 닭과 개 울음소리를 잘 내는 도둑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맹상군의 빈객들 중 이 닭과 개 울음을 잘 내는 손님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맹상군이 진나라 왕 밑에서 일하다가 일이 잘 안 풀렸는지 죽을 위기가 생겼는데.
여기 이 닭 소리, 개 소리 잘 내는 손님 덕에 목숨을 구명했다.
‘개 소리 잘 내는 빈객이 그 개 소리를 이용해 왕의 가죽옷을 훔쳐 애첩에게 줘서 풀려나고, 그렇게 도망치던 중에 닭 소리 잘 내는 빈객이 도와주었다고 하던가?’
새벽닭 소리를 우렁차게 흉내를 내자, 관리가 새벽닭이 우는 줄 알고 관문을 열었고.
덕분에 관문을 벗어나 도망칠 수 있었다고 했었지, 아마.
나라 이름과 관계된 사람 이름은 쪼오끔 다르긴 한데.
무협 월드답게 여기도 같은 사자성어와 빈객 제도가 있다.
그런 유래가 생긴 이후로 관리나 권문세가들도 빈객을 들이지만.
강호의 대형 문파나 세가에서도 이렇게 빈객을 들이는 전통이 있긴 했다.
다만 약간 세속적인 이유 때문인지, 구파일방 같은 종교에 뿌리를 둔 문파들은 시행하기 어려웠고.
대신 팔 대 세가와 같은 씨족 중심의 문파나 종교와 관계없이 표국이나 상단업에 근간을 둔 중간 지대 대형 문파들은 빈객 제도를 활발히 이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수 소리는 들으나 소속이 딱히 없고.
그렇다고 강호에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인데 뭔가 쓸모가 있어 보이는 자들이 빈객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물론…… 본 괴를 빈객으로 들인다면 다른 문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네만.”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강호에서 투괴라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 투괴를 빈객으로 들인 문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때문이겠지.
진천희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흔들릴 정도로 본 각(本閣)의 뿌리가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고작 그것에 흔들린다면 그것은 제 부족함일 뿐이지요.”
진천희는 생각에 잠기다가 빙긋이 웃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팔아 치운 보물도 꽤 있음을 알지만, 아직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은 기물, 신물도 많음을 압니다.”
“값을 치를 수 없는 것들이지. 자칫 강호 밖으로 나간다면 혈풍이 부는 것들.”
비급, 영약, 지보.
어느 정도야 장물로 팔아치울 수 있을 터나, 혈풍이 불 만큼의 물건이라면 그것은 장물로 처리하기도 어려워진다.
금혈방의 황금왕은 돈에 미친 자.
그러나 얻을 수 있는 돈보다 관리비가 많이 들면 가차 없이 거부하는 자제력도 있었고.
또한 투괴 역시 굳이 그것들까지 밖으로 유출하지 않는 것은.
도둑으로서의 일말의 미학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훔치는 자이지 혈풍을 만드는 자가 아니었기에.
“네, 그것들은 각 문파의 주인들에게 돌려주셔야 할 듯합니다.”
“그것으로 손을 씻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만.”
진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는 백린의각이 처리하도록 하지요.”
기이했다.
이 청년이 푸른 눈으로 미소를 지으니 왜인지 정말로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 그렇기에 의(醫)와 광(狂)이 공존하는 것이겠지.’
투괴는 이 청년이 썩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그녀의 길과 이 청년의 길은 비슷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그 미학이 특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