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377
제 377화
다음 날 비가 내렸다.
덥고 습한 사천 지역답게 비도 자주 내리는 편.
사마현은 거래를 이어 나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진천희는 어제 전투의 여파가 남아 있어 쉬고 있었다.
‘오늘은 뭐 해 먹지? 남이 주는 요리나 그냥 받아먹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당아가 찾아왔다.
‘어? 오늘은 가면은 벗었네?’
늘 가면을 쓰고 다니던 그녀가 오늘은 웬일인지 평범한 얼굴로 찾아온 것.
“역시 멀쩡하군.”
그녀는 진천희를 보더니 옆에 털썩 앉는 게 아닌가.
“당 소저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음. 괜찮다.”
‘내가 많이 다쳤나 걱정되어서 온 건가. 그럴 거면 생사결은 대체 왜 한 건지.’
의료인 마음으로는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무인 입장에서는 또 이해가 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한층 더 실력을 도야해야 하니까.
“어제의 싸움을 복기하고 싶어서 왔다만.”
“저 힘듭니다.”
진천희가 단박에 거절하자 당아가 쳇, 하며 혀를 찼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말로써 싸우는 건 어떤가?”
“논검(論劍)이군요.”
직접 싸우는 건 아니다. 싸우는 것을 가정하고, 말로써 싸우는 것을 뜻한다.
논검의 경우 서로의 자세와 속도까지 밝히는 것이 보통.
그렇다고는 하지만, 사실 실전 비무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래도 당아와 진천희 두 사람은 이미 한번 병장기를 부딪친 사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니 논검을 할 만했다.
서로가 어떻게 움직일지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무협의 낭만이긴 하지.’
받을지 말지 고민하며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당아가 먼저 말했다.
“일전 비무에서는 내가 졌으니, 선공은 내가 하겠다. 당가독룡편 삼초식 독룡초래로 공격한다!”
독룡초래(毒龍招來).
독룡을 불러낸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채찍을 양손으로 잡아 당겼다가, 그 반동을 이용해 상대에게 채찍을 튕겨 내듯이 휘두르는 초식이다.
쾌속함을 중심으로 하는 초식. 물론 진천희도 이 초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방위는 어디입니까?”
“흉부를 노리는 것으로.”
“그렇다면…… 저는 뒤로 일보 물러서면서 태을단선검의 사초식 천원검단(天元劍斷)을 사용하도록 하죠.”
천원검단.
검으로 원을 그리면서 궤적 안에 들어오는 공격을 걷어내듯이 튕겨 내는 방어 초식.
물론 여기에 검기나 검강이 서리면 튕겨 내는 게 아니라 절단해 버리는, 공수를 겸비한 무시무시한 초식으로 변모한다.
“호오……. 그렇다면 나는…….”
둘은 그렇게 계속해서 논검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이 논검비무는 결국 그 끝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응룡의 보옥과 현원전단신공을 극성으로 수련한 진천희가 수 싸움에서 질 리가 없으니까!
“크윽… 그리되면 내공이 부족해지겠군.”
“네. 그리되겠죠.”
“음, 패배를 인정하겠다.”
당아는 생각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쉽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왜 너는 나한테 맞장구를 쳐 주는 것이냐?”
“네?”
“이상해서 말이다. 당가의 심마에 빠졌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가 어르신들처럼 과거가 생각난다며 각혈하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것도 아니고.”
현이가 없어서 다행이다.
아니, 그 녀석 성격을 생각하면 대놓고 말해도 별 반응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용해 먹으려는 건 맞으니까, 하고 긍정할지도 모르지.
당아는 턱을 괴고 비스듬히 앉아 진천희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렇게 나와 놀아 주었던 거지?”
“재미없으셨습니까?”
“재미있었다. 그게 문제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음……. 아버지는 계속 나를 걱정하고, 당가의 어르신들은 날 보면서 힘들어하고. 즐겁기는 했는데……. 가끔 외롭기도 하고.”
그녀의 시선이 천장에 닿았다.
“왜 이렇게 잘해 주는지 모르겠네.”
진천희는 잠시나마 그녀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해 주었다.
비웃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 기이한 시선.
그게 당아는 좋은 추억이 되었다. 돌아가서 깨달음을 곱씹다 말고, 그날의 그 ‘놀이’를 되새길 만큼.
그녀가 손목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진맥을 해 달라고 했지?”
“가주께서는 그리하셨죠.”
“크크큭, 고쳐질 것 같으냐?”
“……음… 아직 진맥을 하기 전이지만……. 당 소저께서 원하신다면 고쳐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대로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과연 운명의 대적자.”
그렇게 말하고는 본인도 재미있는지 그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하지만 이대로 그냥 사는 건 따분하단 말이다.”
진천희는 제법 근육이 들어 있는 당아의 손목을 잡았다.
물론 그 거대한 채찍을 종잇장처럼 휘두르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이는 굵기다.
허나, 천 번, 만 번, 십만 번은 홀로 벽에 대고 휘두른 팔이기도 했다.
“그러면 진맥하겠습니다.”
“그래.”
진천희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진기진맥을 했고.
당아의 눈은 빗줄기를 좇아 그리고 있었다.
이윽고 진천희가 눈을 뗐을 때 당아의 시선은 어쩐지 빗방울 대신 진천희의 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픈 곳이 있는가?”
“당가의 진기가 독기로 이루어져 있음을 재확인하긴 했습니다. 이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신진대사 반응이 상당히 다르군요.”
“그건 당가의 다른 무인으로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네. 또한 내분비가 과분비되는 경향도 있긴 합니다. 이는 물론 육체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만 심리적인 부분도 건드리기 마련이죠.”
“그래서?”
진천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 소저의 신체는 상당히 강건하며 혈기왕성하십니다.”
“좋군.”
그녀가 피식 웃었다.
가면을 쓴 혈편왕이라면 오금이 저릴 법하기도 하지만, 가면을 벗은 당 소저는 아직도 앳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진천희가 말했다.
“심신을 보조하는 성질의 내공을 익힌다면 좀 나아질 수도 있겠지요.”
“제갈세가의 현원공 같은 건가?”
바로 짚어낼 줄은 몰랐다.
진천희가 답했다.
“여기까지는 가주님께 말씀드릴 이야기입니다만……. 결국 당 소저의 선택이잖습니까.”
“그렇지. 현원공이나 그런 걸 익히고 어른이 된 척을 할지, 아니면 좀 더 이 시기를 즐길지.”
당아는 미친 게 아니라 그저 즐겁기에 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진천희가 눈치채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들은 부끄럽다 하는데 왜 나는 재미있기만 한 건지. 그것도 여전히 심마의 영향인가?”
“으음……. 이건 모르겠네요. 성격인지 어쩐지는.”
진천희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당아는 즐겁게 보았다.
“어른들을 너무 걱정시키면 안 되긴 하지.”
그동안 충분히 놀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더 놀고 싶다.
“혈편왕으로서 지내고 싶고, 하고 싶은 말도 마음껏 하고 싶은데……. 크크큭.”
당아의 시선이 다시 빗줄기를 향해 갔다. 그녀는 악동처럼 웃었다.
“지금의 상태라면 무슨 말을 해도 좋으니까 말이지.”
화경에 들었을 때 이미 그녀는 주변과 자신을 인지했다.
또한 당가의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착한 아이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 자유를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할 것임도 깨달았고.
그 삶이 얼마나 지루할지, 그녀의 재능이 그 본질을 간파하고야 말았다.
가주님의 걱정과 달리 진천희가 보기에 지금의 당아는 매우 정상적이고 총명하다.
애초에 무학이라는 게, 심마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매일매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논검을 하면 할수록 그녀가 어떤 정신 상태인지 알게 되었고.
그렇기에 진천희는 멀쩡한 정신으로 지금을 즐기고 있는 당아가 마음에 들었다.
남이 뭐라고 하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건 진천희 자신도 마찬가지.
광의(狂醫)라는 소리를 들어 가며 미친 짓을 하고 있지만 즐거웠다.
‘때로는 나를 관철시키기 위해 타인의 시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때가 있긴 하지.’
세상은 파도와도 같아서 어린 바위는 늘 부딪쳐 동그랗게 만들어진다.
그것을 어른이라고 한다면.
뾰족한 부분 하나는 남기고 싶은 게 진천희의 마음이었고.
그러니 그런 당아를 깊이 이해할 수밖에.
“흐음.”
“현원공의 일부를 가르쳤다고 하겠습니다. 약간 조절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가주님께서는.”
“믿으시겠지. 아버지는.”
“…….”
쏴아아아…….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져 간다.
그녀는 한참 비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건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실은 어른들이 나 때문에 당황하는 게 좋았어.”
“그렇군요.”
“세가의 자제이기에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서 모조리 대가리를 깰 수 있는 게 즐거웠어.”
“그건 즐거울 만하죠.”
“그치. 당가를 욕했단 말이지. 물론 대놓고는 아니고, 한참 곱씹어야 알 수 있는 은근한 말투였지만,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런 놈들을 작신작신 두드리는 게 얼마나 기쁜지.”
“저도 사부님 욕하는 거 못 참습니다. 돌려서 욕하는 것도 못 참고요.”
그녀는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빗방울이 만들어 낸 습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물 때문인지.
소매에 두 방울의 얼룩이 생겼다.
“……나는…… 더 유년기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게 이제는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네. 이제 클 때가 된 거지.”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진천희의 시야로 보면 여전히 그녀는 어렸다.
하지만, 이곳의 시선으로 당아는 성인이고.
당가의 소가주로서 평생을 참으며 살아야 할 터였다.
그것은 사천을 책임지는 세가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마음껏 할 수 있는 건 무학에 대한 성취뿐, 그 외에는 결혼조차도 부모님이 정해 주는 사람과 해야 할 터였다.
데릴사위여도 결국 아무와 혼인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당아가 그렇게 유년기를 놓을 결심을 할 때.
진천희가 문득 제안했다.
“그러면 이러면 어떨까요?”
“음?”
“가면을 쓰면 혈편왕이라고 하고, 안 쓰면 평범한 당가의 자식처럼 사는 거지요.”
옛날에 봤던 만화에 이런 설정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인지.”
“아니아니, 어차피 반만 돌아왔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쩌겠어요. 백의신룡인 저도 잘 모른다고 하면 되잖아요? 실제로 진맥만으로 봤을 때도 그렇고.”
화주의각도 답을 못 내리고, 백린의각도 답을 못 내렸는데 아버지 입장에서 알 도리가 없지 않나.
이것도 당아가 심성이 모질지 못하여 주변에 맞추고 살 결심을 한 것뿐.
미친 척하고 계속 이러고 놀고 있으면 부모로선 알 도리 없지 않나?
진천희가 장난스럽게 맞장구쳤다.
“꼭 남한테 맞출 필요는 없잖아요?”
“……!”
그 순간, 당아의 눈에서 더 많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되나?”
“네.”
“이대로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러고 놀아도 될까.”
“놀기만 하겠습니까. 당 소저라면 가주의 일도 잘하실 겁니다.”
“할머니가 되어도 이 놀이가 부끄럽지 않다면.”
“잘됐죠.”
“……부끄러워진다면.”
“그때는 제가 진찰해 드리겠습니다. 주화입마까지는 안 번지게.”
“참 이상한 의원이야. 그대는…….”
“하하하. 그리고 안 돌아와도 괜찮아요. 당 소저는 이미 너무 강해서.”
“빌어먹을……. 두 번이나 이겨 놓고. 사람이 양심이 없네.”
“저는… 음…… 저는 특이한 상황이니까요.”
진천희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어디가 특이한지는 말하지 않았다.
당아는 소매로 얼굴을 한참 덮었다.
진천희는 그런 당아 곁에서 그녀의 마음 정리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