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28
제 427화
마치 4층 대저택같이 거대한 게르(ger, 유목민의 천막).
그 내부.
유목민 특유의 복장을 한 자들이 도열해 앉아 있었고, 최상석에는 거대한 늑대 가죽을 깔아 놓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에는 키가 10척이나 되는 거한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흰 머리는 이자의 나이를 알려 주었고.
그럼에도 온몸에 꽉 차 있는 근육이 이자는 나이를 초월하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 거한 앞에 새하얀 무복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유려한 턱선이 미남자임이 분명하였으나, 쓰고 있는 가면은 이자가 범상치 않은 자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동시에 얼굴을 가리고도 거한 앞에서 태연하다는 것은, 둘 사이에 어떠한 신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카후라이 칸이여. 본교에서 내어준 혈생과의 효과는 어떠한가? 본교의 보물이자 지보의 효험을 확실히 느꼈겠지?”
칸은 역대 유목민들의 대족장이자 왕을 뜻하는 말.
수백 년간 유목민들 중에서 칸을 자처하는 자가 수두룩하였으나, 실제로 칸이라는 위명에 걸맞은 세력을 모은 이가 없었다.
카후라이 칸이라는 이 노년의 사내는, 그래도 스물두 개의 부족을 복속시켰고.
현재로서는 유목민들 중에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했다 볼 수 있었다.
특히 오 년 전부터 무섭게 활동을 시작하여 단시간에 이만큼이나 거대해진 것.
“후…… 확실히 혈선교의 지보. 그 힘을 온몸으로 느꼈다. 마른 나무 껍데기 같던 피부가 펴지고, 근육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가면의 미남자는 답했다.
“허나, 본교의 지보라고는 해도. 역천을 행하게 해주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혈생과는 오 년의 젊음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알고 있다. 그래서 혈선교의 사자여. 무슨 일로 왔지? 일전에 혈생과에 대한 대가는 이미 지불했을 텐데?”
그 순간, 미청년이 새카만 흑옥 상자를 꺼냈다.
달칵-
상지를 여는 순간.
새빨간 향이 사방으로 확 퍼져 나갔다.
사과와 꿀이 섞인 것 같은 짙은 향에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그야말로 달콤한 지옥의 향이었다.
사람의 얼굴을 한 새빨간 열매를 보며 카후라이 칸은 입맛을 다셨다.
꿀꺽.
“여기 혈생과가 하나 더 있지. 이것을 섭취한다면 다시금 오 년의 시간을 젊게 살 수 있으리라.”
“……대가는?”
칸의 목소리가 탐욕으로 떨렸다.
“이번에는 제국민들의 피가 필요하다.”
“크크크크. 신기하군. 마침 이제 부족을 통합했으니, 남은 것은 확장이라 생각하였는데. 혈선교가 이번에는 살찐 제국 돼지들의 재물이 필요하신가?”
그 순간, 대답 대신 허공섭물로 혈생과가 두둥실 떠올라 카후라이 칸에게 날아갔다.
탁-
그는 망설이지 않고 혈생과를 붙잡았다.
계약을 하겠다는 대답 대신 그는 혈생과를 곧바로 한입 베어 문다.
아드득-
사과의 과육이 터지는 소리와 어째서인지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가 함께 울린다.
“그러면 원천군, 혈생교의 사자여.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사내의 이름은 원천군.
과거 동천군과 함께 무림맹을 습격했던 십천군 중의 하나.
그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네.”
033. 끓는점 (boiling point)
소집령.
이것은 백린의각에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중원 무림 문파 전체에 내려진 것.
반동분자 세력인 마교를 제외한다면, 사도련의 일부 문파에도 소집령이 내려올 정도의 일이었다.
사도련에 속한 대문파 정도면, 이놈들이 범죄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거대 사업장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그리고 그 사업장을 통해 이익을 얻은 문파들은 모두 소집령이 내려왔다.
도박과 사채가 불법이 아닌 시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설령 다소…… 탈법적 사업장이라고 해도 규모 있는 지역 밀착형 범죄를 저지르다 보면 이들의 정보를 금의위와 동창이 안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사업장에 타격을 받고 싶지 않다면, 부르면 가야 한다.
그러나, 사도련에도 소집령에 끌려오지 않는 자들이 있다.
지역 밀착형 범죄 집단이 아닌, 약탈 형태로 떠돌아다니는 놈들이다.
주로 수적, 산적, 해적이 그랬다.
장강황하수로채, 녹립십팔채, 해사방.
이 세 집단은 언제든지 거점을 버리고 튀어 버리는 메뚜기 떼 같은 놈들이라 세금도 안 내고 소집령에도 응하는 법이 없다.
대신 이놈들은 사도련의 다른 문파에 돈을 많이 내야 했다.
사도련의 다른 이들은 끌려가는데 자기들만 안 끌려가면 형평성이 맞지 않으니까.
그런 규칙을 정한 것은 술제다.
열 받은 지역 밀착형 사파가 ‘너희들만 무임승차하냐.’고 세 집단을 몇 번 들이받았기 때문이라나.
그런 여러 가지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거대한 제국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
* * *
“입수한 정보로는 문주급에서 움직인 것은 나 하나뿐이라고 하더구나. 부문주, 부가주들도 어떻게든 안 가려고 수작질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니, 아마 편히 다녀올 수 있을 거 같구나. 희야.”
“문주나 가주는 그렇다 쳐도, 부문주와 부가주까지 안 움직이려고 하는군요.”
“이득이 없는 일이니 그렇겠지. 심지어 임시로 전출 보낼 부문주를 임명하다가 걸린 곳도 있다고 하니 말 다 했지.”
“황상께서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니까요.”
“황상만 그렇겠느냐. 복심인 제독태감의 동창도 보통이 아니니 사실 헛수고를 하는 셈이지.”
백린의각. 제갈린의 전용 마차.
이 특수한 마차는 흡사 움직이는 집과도 같았다.
거대한 마차 안에 침상과 난로, 거기에 약재함과 의료 도구를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과거 구음절맥에 의한 냉증을 완화하고, 이동 치료소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마차였는데, 지금은 더욱 개량했다.
겉에 철판을 덧댄 것은 기본.
지금은 그 귀하디귀한, 스스로 열을 낸다는 열화석을 침대에 깔았으며, 추가 확장 형태로 변형하면 야전 치료소로도 쓸 수 있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간호 요새라 할 수 있다.
그런 마차와 함께 백린의각의 의원들 수십여 명.
거기에 백린의각 무력대 중 일 대, 이 대, 삼 대의 3개 대가 출동했다.
그 숫자는 무려 600여 명.
거기다 전원이 고수이니, 중소 문파 정도는 숨만 쉬어도 으깰 수 있는 수준!
‘스승님…… 방죽이 너무 과합니다!’
허나 이런 말을 하기에는 진천희 자신이 저지른 일이 많아서 차마 말을 못 하겠다.
“뭔가 이득이 생기면 좀 더 자발적으로 나설 것 같은데 말이죠.”
“흐음, 글쎄다. 일단 군역 대신이라 딱히 큰 이득이 없는 게 크지. 큰 공을 세우면 장군으로 출사할 수야 있겠지만…….”
“……대형 세가가 그것을 좋아하지는 않죠.”
“중소 세가라면 군문에 투신하여 녹봉을 받는 거니 기뻐야 하겠지. 허나, 대형 세가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하던 사업을 하는 게 더 이득이기도 하고. 보통 그런 곳에서 자란 자제들은 자유로운 성정을 가지게 되어, 군문에 적응하기가 어렵단다.”
좋게 말해 자유로운 성정이지, 사실 개 같은 성질이라는 말이 맞다.
태어날 때부터 지배층으로 자라온 아이들은 백회혈이 닫히기 전에 벌모세수를 하고, 영약을 밥 먹듯이 먹고 자라며 근골을 만든다.
수련이야 혹독하지만, 그 혹독한 수련이야말로 그들 스스로를 특별하게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자란 세가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굉장히 모난 성격으로 자라는데.
유교 사회에서 자란 모난 성격이라 철저하게 계급주의적이다.
한마디로 의외로 사회생활을 해먹으면서 강약약강이 되기 쉽다는 뜻.
그런 놈들이 군문에 들어갈 리가.
당장 우리 세가 지역에서는 왕으로 살 수 있지만 군문에 들어가면 폐하 모시는 졸병을 해먹어야 하는데?
황보세가 같은 전통 있는 군문 유착 가문이 아닌 이상에야 뻔하지.
“포상금은요?”
“으음…… 세가에서 원할 만큼의 포상금을 내리실 성격이 아니시지, 황상은.”
‘은왕야께서 한알뜰하시지.’
그렇지 않아도, 뼈를 갈아서 통치를 하고 계시지 않나.
그냥 목줄 붙잡아다가 꽂아 버리면 될 걸 과소비하실 성격이 아니다.
진천희가 말했다.
“행정적인 편의 정도가 다겠군요.”
“그렇지. 허나, 그것은 백린의각처럼 확장을 시작한 곳에나 좋을 뿐. 있던 것을 유지하는 곳은 그리 매력적이진 않단다.”
“하던 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겠군요.”
“그래. 눈치가 빠르구나.”
진천희는 생각에 잠기다가 물었다.
“만약 소가주나 가주급이 나가 있을 때 타 문파가 그 문파를 습격하게 되면 어찌 되죠?”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 다만 그 경우 습격이 있은 지 딱 석 달 후에 이름 모를 마을 주민이 역모의 증거를 찾았다며 관아를 통해 습격한 문파를 고발했고, 정확히 당일에 금의위가 와서 포위한 후에 재판이 일주일 정도 진행된 뒤 삼대를 멸했던 사례가 있긴 했단다.”
“……그렇게까지 한 건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겠군요.”
분명 이름 모를 마을 주민은 인피면구 뒤집어쓴 동창이리라.
스승님이 말했다.
“만약 가주, 소가주급이 나간 사이에 습격을 하는 게 허용된다면 어느 세가든 드러눕기 시작할 터이니 이것만큼은 강경하게 처리하는 편이지. 또한, 아마 나가 있는 동안 동창의 일부가 차출된 가문 근처에 위장한 채로 있을 거란다.”
“황상께서는 꽤나 철저하신 편이군요.”
“그렇지. 그리고 뒤가 없는 사파 몇이 복면 습격 좀 한다 해도 백린의각이 만만하지 않지.”
“그렇죠.”
왠지 유호가 백린의각을 지키는 한에는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이 부채를 펼쳐 천천히 흔들었다.
“다만, 이게 우리 쪽이 큰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은 맞단다.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고, 너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느냐.”
“그렇긴 하지만요. 허나 별수 없잖아요.”
“너는 참 신기하구나. 어떤 것에서는 결코 타협하는 법이 없는데, 또 이런 것은 타협을 하니 말이다.”
“그런가요? 저 진짜 타협 많이 하면서 사는데.”
진천희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가 뜯고 있는 것은 사마현이 선물해 준 칠은금이다.
디리링-
음공에 특화된 신물답게 울림이 청아하다.
제갈린은 그런 제자의 금 타는 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일대주 관삼이 전음을 보냈다.
[각주님. 일단의 무리가 접근 중입니다. 군기(軍旗)를 들고 있는데…… 주왕부의 깃발을 든 이들입니다.] [국경이 생각보다 심상치 않은 모양이군. 주왕부의 병사들인가?] [주왕께서 직접 계신 모양입니다.] [합류하도록.] [예. 각주님!]백린의선의 명을 받들어 일대주가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말을 멈추었다.
진천희와 제갈린은 의관을 정제하고 밖으로 나와 예를 표할 준비를 했다.
“주왕 전하 납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