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37
제 436화
“누구시죠?”
“아,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네. 내 전령 노릇을 하는 대신, 이 녀석의 죽음을 잠시 유예해 주기로 약속했거든. 나는 혈선군의 원천군이라고 하네. 과거 무림맹을 습격할 적에 함께했었지.”
혈선교!
진천희가 눈을 크게 떴다.
“……역시 당신들이 이 전쟁 뒤에 있었던 거군요.”
“오……. 놀라지 않는군? 적어도 수 초 정도는 몸이 굳으리라 기대했는데 말이야. 과연 천기를 흐트러뜨리는 자. 우리에게 이만한 수치를 주는 이가 많지 않지.”
흡사 뱀이 쉭쉭거리는 듯한 목소리.
성대를 쥐어짜서 말이라는 행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원천군이라는 자가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우리가 이 전쟁을 직접적으로 일으킨 건 아니야. 물론…… 저들 숙신족의 칸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긴 했지. 허나, 그것을 받아들인 건 저들의 선택 아니겠나? 애초에 이들은 사냥과 약탈이 미덕인 자들이라네. 우리 혈선교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전쟁은 일어났겠지.”
“말장난이군요. 심지어 동맹에 대한 신의도 없어 보입니다만.”
“크크큭. 그래. 뭐라고 말하든 반선의 씨앗이 말을 들어줄 리가 없지. 역시 마음에 들어. 이 상황까지 와서 미치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
진천희는 피곤한 눈가를 눌렀다.
“그래서, 이렇게 전언을 보내는 이유는?”
“침착하군, 역시 올곧아……. 아…… 역시 반백 년 넘게 동정을 유지하는 영혼이란 어찌나 아름다운지.”
개새끼인가.
전생부터 계속된 모태 솔로를 이따위로 조롱하는 건가.
“……용건이 없으면 갑니다.”
괜히 놈들에게 말려들 생각은 없다.
끊고 가 버리려는 진천희에게 원천군은 화급히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게나! 우선은……. 우리 혈선교는 정식으로 다시 행동을 개시했음을 알려 주려고 왔다네. 자네는 우리 혈선교의 숙적이라고 할 만한 존재니까.”
“…….”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지 일단은 들어주겠다는 듯 진천희가 냉막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천기 역천자.”
“……?”
“우리는 자네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네. 그리고 순행 천기 놈들은…… 아마, 자네를 노리겠지. 어떤가? 우리와 손을 잡지 않겠나?”
그 질문에 진천희는 담담히 물었다.
존댓말이 아닌 반말.
“그렇다면 더 이상의 악행을 멈출 수 있나?”
“악행이라니……. 우리는 우리를 따르는 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뿐일세. 불로장생, 무병장수, 부귀영화, 영원한 젊음까지. 모두가 원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 질문에 진천희가 피식 웃었다.
“사람 배 갈라서 창자를 짐승에게 주고, 남은 살은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고, 저 밖에서 화살 비를 쏴서 수만 명이 사망하고. 이것을 악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너희들이 유일하게 스스로를 정당하다 말할 수 있는 건, 사람을 죽여 몇백 년 후의 탄소 배출을 경감시킨다는 것뿐이다.”
“……탄소, 뭐?”
그 순간, 진천희의 손이 원천군의 전령,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우득-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진천희의 눈이 시퍼렇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쩐지 그 눈이 만년설의 단면과도 같다는 생각을 원천군은 했다.
원천군은 히죽 웃었다.
“흐음…… 우리의 행위가 어째서 정당한지 자네와 문답을 나누고 싶다만……. 어차피 시간은 많지 않겠지…… 몇 가지만 말하고 가도록 하겠네.”
두득-
“말해 봐.”
진천희는 눈앞의 화상 환자이자 혈선교의 간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온 힘을 다해 치료한 환자가 사실 혈선교와 붙어먹었다는 걸 아는 건 참 기분이 더러운 일이다.
막사의 모든 정보가 이미 빠져나갔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다행히 자세한 병력 정보는 나도 모르니 크게 중요한 정보가 흘러가지는 않았겠군.’
군 기밀은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다.
병사들은 자신이 배치된 곳만 알고 있지 전체적인 그림은 모른다.
그게 중요했다.
원천군이 말을 이었다.
“숙신족의 칸은 나이가 많아. 그리고, 그는 노쇠해지고 있는 육신이 싫어서……. 젊음을 되찾고자 본교의 보물 혈생과를 먹었다네. 혈생과는 대략…… 천 명 정도의 사람을 제물로 특별한 의식을 치르면 열리는 과실인데, 약 5년 정도 전성기 시절의 젊음을 유지해 줄 수 있지. 즉, 그가 원해서 그런 걸 가져다준 거라는 것이지.”
“그냥 가져다준 건 아니겠지.”
두득-
진천희가 손에 힘을 주자 원천군이 급히 말했다.
“아아, 우리도 손해는 볼 수 없어서, 혈생과 하나를 내어 줄 적에는 대략 만 명 정도의 생명을 요구하네. 그건 양해를 바라네. 독과점이니까 비싸게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백린신단을 독과점하고 있는 백린의각 소각주 공?”
“미친놈들.”
경멸이 스민 푸른 눈동자.
원천군은 그걸 대면하니 소름이 돋았다.
‘이 정도인가. 반선의 씨앗을 정면으로 대면한다는 것은……!’
반백 년 동정의 영혼 때문인지도 모른다.
극상의 제물이자, 혈선이 가장 원하는 인재!
“하하하, 미치기는! 세상사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진시황도 불로장생의 비약을 찾으려고 그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나, 천기 순행 놈들에게 결국 죽고 말았는걸!”
괜찮은 정보다.
진천희는 그리 생각했다.
가슴속에서 불이 나는 것과는 별개로 원천군은 입이 가볍다.
놈이 주고 있는 정보들은 모두 진천희가 앞으로 무엇을 어찌해 나가야 할지 계획을 짜는 데 도움이 되었다.
“…….”
“아니면 뭔가? 우리가 하는 것은 사도고, 황제가 하고 있는 것은 정도인가? 그대와 친한 풍 황제가 만약 불로장생을 원해서 수만여 명을 제물로 삼겠다고 하면 어쩔 건가? 그를 죽일 것인가?”
진천희는 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하든 의미가 없는 일.
원천군은 흥에 취해 주절거렸다.
“아니아니, 이야기가 너무 새 버렸군. 칸은 혈생과를 먹었고, 그저 더 젊어지고 싶어서 이 전쟁을 일으킨 것뿐이야.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없다 하더라도 전쟁은 났을 걸세. 영민한 그대라면 알겠지. 칸은 부족을 너무 키웠고, 더 이상 초원만으로는 식량이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식량 수급을 위한 약탈과 점령.
수능용으로 기억하기도 뭐할 정도로 흔하디흔한 전쟁의 동기다.
“칸이 아니라면, 칸의 아들이 했겠지. 그들은 이번에 크게 약탈을 하고, 동시에 땅을 점령한 다음 제국민을 노예로 부려 농장을 경영하겠지.”
“그 후에는?”
“그리고 다시 전쟁을 하려고 하겠지. 필시 어마어마한 피해가 나게 될 거야. 왜냐하면 오 년이 지나면 인구가 늘 거고, 또다시 칸은 젊어지고 싶어질 테니까. 시간은 흘러간다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지.
원천군은 흥얼거리듯 노래를 불렀다.
진천희가 말했다.
“내게서 원하는 게 뭐지?”
“전쟁을 멈추고 싶다면 우리와 손을 잡게나. 칸을 암살하고, 유목민들을 전부 찢어 죽이세! 제국민이 아닌 숙신족을 제물로 삼아 제국의 평화를 지키는 거야!”
아아, 악마의 속삭임은 왜 이리 달까.
환자의 살을 꿰매다 지쳐 버린 자에게 이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그렇다네. 자네라면 할 수 있어. 우리야 한낱 짐승 새끼들이니 인간이 말하는 길(道) 따위는 모른다네. 허나, 자네라면! 자네라면 충분히 이룰 수 있겠지. 수만, 수십만을 살릴 수 있다네. 그 칸을 죽이기만 하면 되네. 이 얼마나 쉽나.”
다행이었다.
궐련을 빨지 않아서.
궐련에 들어 있던 그 약초는 너무나도 달콤해서 비록 명치의 고통은 느끼지 못하게 해 주나, 만약 그것을 빨고 이들을 만났다면, 어쩌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몰랐다.
어떤 현실감은 통증에서 온다.
아픈 자만이 상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중압감이나 책임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정확한 단어는…… 어떤 선택에 따를 자괴감과 죄책감,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 절망과 두려움.
진흙탕처럼 추한 감정이었지만, 인간이란 그런 것.
청년은 가시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길을 택한다면.
그 선택에 대한 죄책감을 다시 약초의 힘으로 무디게 만들었겠지.
“……왜 하필 나지?”
통증이 선명하다.
그것은 사지에서 오는 고통이 아닌 명치에서 오는 것이었다.
심마(心魔)였다.
하지만 자신이라는 인간이 살아 있는 자국이다.
엄지손가락으로 쿡 누르는 것 같던 감각이 이제는 뾰족한 돌로 퍽퍽 때리는 것만 같다.
뗀석기 시대 때 발견된다는 손도끼로 친다면 대충 이런 감각일까.
하지만, 이다음은 고통에서 도피한 자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기에.
“스승님이라면 나보다 더 잘 선택하실 텐데.”
스승님은 철의 길을 가신다고 하셨다.
“그는 반선의 씨앗이 아닌, 그저 씨앗을 통해 운명이 바뀐 자일 뿐. 반선의 씨앗 그 자체만은 못하지.”
“그리고 하나 더 있지. 스승님이었다면 환자의 목구멍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목을 베셨어.”
“크크큭, 그 또한 부정하지 않겠네. 답을 들려주게, 반선의 씨앗. 칸을 암살하게나. 그리고 우리와 함께 길을 가게. 사람의 길이 짐승의 길보다 뭐가 더 나은지 알 수는 없으나, 한번 보여 주게나.”
“…….”
진천희는 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허나, 그 선택의 기로라는 것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한 인간의 어깨로 질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지옥의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듯 위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람이 만든 천막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천막에는 핏방울이 묻어 있었다.
‘아, 결국 다 못 닦았구나.’
어제는 환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바동거렸다.
악몽을 꾼 건지, 상처가 뜯어지면서 삼류 고어 영화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심마였다.
기혈이 뒤틀리면서 생기는 현상 중의 하나로, 제아무리 강호인이라 할지라도 전쟁은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그 환자는 결국 사망했다.
여벌 혈액도 부족했고.
손쓸 새도 없이 그가 혀를 깨물고 자진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랬다. 어떤 죽음은 자국을 남긴다.
청년은 지옥 길 위에서 그 흔적을 보았다.
지옥에 구름이 있다면 이런 모양이 아닐까.
천장에 붙어 있는 까만 점을 보며 생각했다.
굳이 악마의 형상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전쟁을 못 견디고 광증에 미친 무인의 핏자국 정도면 훌륭한 형상이리라.
그리고 천이문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미쳐 버릴 것 같은 머릿속을 붙잡아 억지로 혹사시켜 보니, 이 사람들이 말하는 천기 순행이라는 자들과 천이문이 관계가 있어 보였고.
무엇을 선택하든 다음번에는 천이문이 죽이러 올 것 같기는 했다.
저자의 말이 진실이라면 진시황조차 죽인 자들이니, 자신의 목 정도는 그보다 쉽겠지.
흑과 백이 이어지는 철로, 그 가운데 어딘가 회색 귀퉁이에서 청년은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