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56
제 455화
시간이 없다.
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도 시간이 없었다.
청년은 단 한 줌의 망념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을 관조하며 나아갔다.
‘그렇겠지. 애초에 이 세계로 [빙의]한 것도 내가 처음일 거고.’
그 청년을 전쟁터에 담가 핏물로 끓였다.
‘그건 어떨까……? 모르겠는데. 이능과 주술이 있고, 응룡이라는 초월적 존재마저 있는 세계에서 그것은 조금 더 [연구]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건 네 말이 맞아. 그래서 너는 [나]인 거지. 내 안에서 자라난 또 다른 [나]인 거야.’
‘그런 거지. 너의 부정적 사념에서 자라난……. 누군가가 대신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만들어 놓은 업(業)이니까. 그래도 뭐, 너와 다를 건 없잖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어.’
‘뭐가?’
‘지금 꼭 나와야 하는 거야? 눈앞의 일이 더 중요하지 않나?’
보통 이렇게 내면의 심마와 마주하면 미쳐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결과가 잘 안 풀리면 오독문 부문주처럼 광인이 되어 독기를 뿌리거나, 아니면 무당파 장문인처럼 기혈이 뒤틀려서 골로 가는 거고.
잘 풀리면 스승님처럼 한 단계 높은 경지로 도약하거나, 요천군처럼 맨정신으로 세상을 증오하면서 살거나.
그리된다.
허나, 진천희는 조금 달랐다.
‘[나] 돌아가면 풍주하 환자 외상 치료해야 하지 않니?’
그 순간.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핏방울이 다시 천천히 날아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절창(切創)을 입은 환자, 자창(刺創)을 입은 장수, 할창(割創)을 입은 보급병, 교창(咬創)으로 사경을 헤매는 강호인.’
진천희는 앞으로 걸어간다.
‘어차피 야전에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의각 때처럼 대단한 처치는 못 해. 단순 브루즈(bruise/타박상)는 그래, 그렇다고 치자. 어차피 전쟁터에서 멀쩡한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시비어 라서레이션 (severe laceration/중증 열상)은 빨리 잡아야지. 하의원도 수처(suture/봉합)는 잘할 수 있게 가르쳤고. 허나, 급소를 찔린 거면 출혈을 못 잡을 테니 대다수는 도착하기 전에 어레스트(arrest/심장 정지)일 가능성이 높을 거야. 그래도 이번에 양성해 놓은 O.S(정형외과) 애들 드디어 실전 투입인데 잘하는지 확인해야지? [나]야.’
강호인 누구도, 심지어 같은 의각원들조차 못 알아들을 말을 지껄이며 진천희의 정신이 가속했다.
몸 안의 기운이 들끓어 올랐다.
‘잘 들어. 네가 [나]라면 알겠지? 이 일을 끝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의원은 끝내고 나서 처치가 더 중요해.’
과거 어린 진천희는 나무를 부수고 나무를 치료하는 미친 짓을 반복해 왔었다.
당시에는 무공과 치료를 같이 한다고만 막연히 생각했으나.
어찌 보면 그것은 각오와도 같았다.
승려가 108번 절을 하듯.
신부가 매일 아침 미사를 드리듯.
그것은 각오이고 의식이었다.
의원은 사건이 끝났을 때부터가 진짜 일이었으니까.
피의 잔치가 끝나고 모든 무인들이 짐을 싸서 돌아가기 시작할 때, 그때 의원은 일이 시작된다.
‘이런 때 나타나서 내 시간 허비하지 말고, 골든타임 놓치지 않게 해 줘라. 아니면 그것도 네가 대신 하든가.’
달리기 시작하는 진천희의 심장이 흡사 폭주 기관차처럼 뛰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맞아. 그래. 맞아, 그랬지.’
천마신공으로 심어진 마성의 씨앗.
그것이 발아하며 심마를 먹고 자라났다.
그렇게 자라난 진천희의 이면을 두고 마교에서 말하는 순수한 사악한 광기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본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벽안광의.
-왜 사람은 사람을 구해야 하는가.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했던 그 질문.
그 속에서 이미 청년은 어느 정도 자신만의 답을 찾았다.
허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명쾌하게 무언가 딱 떨어질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다.
인생은 수학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사람은 사람을 죽여 댈 거고, 전쟁이고 혈사는 끊이지 않을 거야. 나는 그런 놈들을 왜 살려야 하는가 혼자 대가리 깨고 있겠지. 그런데 그것도 결국 의미 없는 이야기야.’
일단 의각에 왔으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우선 살린다. 그냥 살린다. 어쨌든 살린다.’
단, 그 새끼가 혈선교 놈이라 방금 어린아이 수십 명을 인신 공양하고 온 놈이면 그놈은 뺀다.
그건 다른 의원 찾아봐라.
‘고민은 그 이후다. 배은망덕에 통수만 쳐 대는 인간들로 이 세상이 가득하여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고 심마가 오고, 자아가 분열된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살린다.
그러나 [나]는 부처가 아니기에 모든 중생들을 관용으로 보지는 못하겠다.
그러니 카후라이 칸.
‘너는 혈선교와 붙어먹은 이상, 암으로 규정하여 절제(切除)한다.’
의원은 달렸다.
심마는 그런 본체의 정신 상태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배송당주님. 주왕 전하를 모시고 가 주세요. 지금 동창의 속도로는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앞으로 달리며 전음을 보낸다. 긴급한 순간에, 무영투괴 공야건은 짧게 질문했다.
-내가 전선에서 이탈해도 되겠나?
-괜찮습니다. 주왕 전하가 더 급하니까요.
-그렇다면……. 무운을 빌겠네.
투괴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전장에서 이탈해 뒤로 움직였다. 개인이 소형 원자폭탄의 위력을 내는 이 세계에서, 풍주하는 그 몸뚱이로 많은 이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
그것을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동안 백성들의 세금을 받아먹었으니 해야 하는 왕의 의무다.
그렇게 투괴가 뒤로 물러나는 사이, 진천희는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생각을 했다가 폐기했다.
그리고 남은 몇 개 중 하나를 선택하여 움직였다.
“쥐새끼처럼 도망가려는 거냐! 그렇게 놔둘 줄 알고!”
거마(巨馬)가 땅을 박차며 돌진한다.
그 위력은 흡사 전차와도 같아서, 이대로 당장 막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이미 그에 대해서는 대비했다.
-뇌진!
삐이익!
창공을 비행하던 뇌진이 하늘에서부터 번개를 떨어트린다.
번쩍!
그렇게 내리쳐진 낙뢰는 그대로 카후라이 칸을 때린다.
허나, 뇌진의 낙뢰는 위력은 강하나 정확도는 떨어지는 것이 단점.
괜찮다.
이 광야에선 저 웅장한 거체를 놓치고 싶어도 놓칠 수가 없으니까.
콰과과과광!
그를 둘러싼 강력한 힘이 번개를 막아내지만, 그럼에도 그의 몸이 움찔하고 경직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전기에 의한 신경계 경직.’
그리고 그것은 그가 탄 거마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전차 같은 힘을 품은 채로 달리던 말은 굳어진 근육 때문에 그대로 땅에 처박힌다.
워낙 튼튼하니 별다른 상처는 없지만, 그럼에도 돌진은 저지당한 것이다.
말에서 뛰어오른 카후라이 칸이 땅에 내려선다.
“당신의 상대는 저입니다.”
진천희가 그 앞으로 나섰다.
“번개를 떨어트리다니. 무엇 하는 놈이냐?”
“백린의각 소각주 진천희. 그게 제 이름입니다.”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거마가 다시 일어섰다. 그러고는 푸르릉거리며 카후라이 칸의 뒤에 섰다.
“들어 본 적 있어. 그래. 들어 보았다. 신묘한 약을 만들었다는 녀석이로구나. 백린의각에서 만들었다는 약으로 내 부족의 아이들도 제법 많이 살았지.”
카후라이 칸이 진천희를 직시한다.
“그렇다면 네 녀석은 의원이 아니냐? 그런데 왜 거기 서서 검을 들었지? 네놈도 저 허울 좋은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거기에 서 있는 것이냐?”
카후라이 칸은 노회한 대족장이었다.
수십 년간 숙신족을 지배하고, 제국을 괴롭혀 왔으며 다른 부족들을 끌어들여 통일했다.
지구의 역사를 아는 진천희는 이런 인물이 어떤 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영웅!
대제국을 만들었던 알렉산더 대제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만들어낸 칭기즈칸을 후세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불렀던가?
대군이자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그것은 이 현세에서 더욱 극심할 것이다.
비록.
젊음을 얻고 싶다는 노욕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지만, 저자가 영웅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영웅의 기백이 진천희를 짓눌렀다.
“물러나라, 어린 의원아. 너와 같은 의원은 나의 제국에서도 귀히 쓰일 터다. 너희가 나의 가축을 살찌우고 치료할 것이며, 나의 가족과 나의 자손을 돌봐줄 터이니 어찌 귀하게 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물러서 비켜라.”
그리 말하며, 대족장이자 대군주인 카후라이 칸은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그것을 내버려 두면서 진천희는 가만히 서 있었다.
여전히 반짝이는 빙정검을 손에 든 채로. 그의 앞에 서 있다.
“네 녀석의 의도인 시간 끌기를 위해서 조금은 어울려 주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내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니!”
그가 월도를 들었다.
그러나 그 흉흉한 기세 앞에서도 진천희는 침착했으며, 고요한 안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카후라이 칸의 눈이 꿈틀거린다.
“크흐흐흐. 질문이라. 무엇이냐?”
“당신은 전쟁이 온당하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토록 많은 이들이 죽고 있는데, 죄 없는 이들이 삶을 잃고 있는데.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하?”
카후라이 칸은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웃었다. 광소했다. 폭소했다. 대소하며, 그는 잠시 싸움조차 잊었다.
“크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그리고 갑작스레 웃음을 뚝 멈추고 만다.
“네놈. 누가 제국 놈 아니랄까 봐……. 네놈들이 말하는 인의 같은 것을 설파하고 싶은 모양인데…….”
고오오오오.
공기가 달궈진다. 끈적하고, 진득한 살기가 카후라이 칸에게서 뻗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냥꾼이다. 우리는 목동이며 말을 탄다. 네놈들이 밭을 갈고, 성벽에 의지해 살아갈 때! 우리는 태풍과 싸우며, 가축을 먹이려 다른 자들과 늘 전쟁을 해 왔다!”
그의 팔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죄? 죄라는 단어가 왜 나오는 것이냐! 우리는 사냥을 하고 전쟁을 하며 살아갈 뿐. 네놈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우리를 야만족이라 업신여기는 것이야말로 온당하다고 생각하나! 그러니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이것은 내 최후의 자비이니. 비키거라. 그렇지 않다면 도륙할 것이다!”
진천희는 분노를 토해 내는 카후라이 칸을 보며 속으로 결심했다.
삶의 가치는 모두가 다르다.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 방식이겠지.
철벅-
발아래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물이 고였다.
이 핏물은 강이 될까?
바다가 될까?
바다가 되었을 즈음이면 모두가 살육은 잊고 대제(大帝)로서 그를 맞이할 것이었다.
그게 세상이고 역사임을 알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여기서 당신을 막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