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81
제 480화
낭인왕이 말했다.
“혈선교는 늘 천기를 없애고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겠다고 난리를 치거든. 그리고 우리는 그런 혈선교가 멸망을 당기는 것을 막아냈지. 그러다가 네가 등장하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녀가 빈 술병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양팔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천천히 압축해 나갔다.
그그극-
마침내 도자기로 이루어진 병이 녹듯이 부서지며 안에 남아 있던 술 방울들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술병을 압축시키고 또 압축시켜 나간다.
마침내 그것은 그녀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었고, 그녀의 두 손은 흡사 합장을 하듯 서로 맞잡았다.
가공할 기운이 그녀의 손안에서 폭발하지 않은 상태로 한 점에 수렴하고 있었다.
그것은 진천희도 모르는 경지였다.
그것을 취기만으로 이루어낸 낭인왕은 이렇게 말했다.
“혈선교 놈들과 지긋지긋하게 싸우는 것 자체가 ‘천기’ 아닌가. 부수려는 놈과 지키려는 놈의 싸움조차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연극’의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면 [천기]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천기를 지키는 것에 의미는 있는 건가?”
이윽고 마침내 그녀는 손을 펼쳤다.
커다란 손바닥 오목한 한가운데에는 동그란 구슬, 묵빛의 금속 같은 것이 남아있었다.
“뭐, 그래서 우리도 제법 혼란해. 솔직히 혈선교처럼 신탁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고. 천기라는 막연한 무언가를 지키겠다고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혈선교 놈들은 일관되지. 여전히 난리를 피우고 사람을 죽여서 멸망을 당기기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지.”
“…….”
“이게 네가 만든 상황이야. 감상이 어때?”
“…….”
진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종 말을 듣고만 있었다.
긴 침묵 후,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뭐…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죠. 딱히 별다른 감상은 없습니다.”
“뭐?”
“으음, 일단 천기를 지키는 것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오신 것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 그게 수 대를 거치다 보니 조종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죠. 진상이야 제삼자인 제가 왈가왈부할 건 아닙니다.”
“그게 끝이야?”
“네, 뭐. 아무래도 존재 가치가 부정당한 기분이 드신 것에 대해서는 애도를 표합니다.”
낭인왕과 묵달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진천희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천우도 자신의 형이 이런 답을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아는 형은 언제나 시종일관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에 공감하는 태도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정확하게 선을 긋는 것 자체가 그간 볼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으음, 다들 저보고 뭔가 책임을 질 준비가 되었냐고 한다거나, 그 무게를 네가 질 거냐고 묻고… 그러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천기를 찢지 않으려면 뭐……. 진료 거부를 해야 합니까?”
진천희는 그리 말하며 다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높으신 분들이 정한 운명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천기순행이 고생을 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제가 그래도 혈선교는 진료 거부를 하겠습니다. 그쪽은 뭐 저 말고 다른 의원을 찾아가든가 하겠죠?”
“감상은 그게 전부인 것이냐?”
“음……. 어제 아이한테 두 번 먹는 탕후루가 얼마나 맛있는지 가르쳐 주었거든요. 홍시로 만들었는데, 손에 홍시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더라고요. 걔는 이제 어른이 되어도 홍시를 먹으며 오늘을 생각하겠죠.”
그 말에 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어젯밤.
진천희는 아이들에게 죽을 먹이고 진맥을 했다.
그러고는 약속대로 홍시를 꺼냈다.
그때만큼은 식탐을 부려도 누구도 맞거나 부러지지 않는 밤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냥, 그날 달이 참 밝았다고요. 천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애들 홍시를 뺏어서야 쓰나.”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 작게 키득였다.
그 말의 진의를 이해하는 이는 천우뿐이었다.
허나, 낭인왕도 짐작하는 바가 있는지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지엄한 하늘보다 눈앞의 홍시가 더 중한 사람이군.”
“천기는 못 먹잖아요?”
“그래. 홍시를 먹이는 게 더 중요한 인간이야.”
그녀의 태산 같은 어깨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다.
턱을 괴고는 생각에 잠기더니 이리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항주에 있는 동안 마음껏 홍시를 먹여 주도록 하지.”
“오오.”
“거기까지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다. 항주는 나의 영역이니 다른 천기순행이 귀찮게 하지는 못할 거야. 허나, 거기까지. 항주를 나갔을 때 생기는 일은 알아서 책임지시게.”
“제 특기군요. 알아서 하는 것.”
“좋아. 왜 네가 일광인지 아주 잘 알겠군. 아쉬워. 우리 쪽에도 너만 한 인재가 있었다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를 텐데.”
그녀는 혀를 살짝 찼다.
진천희가 물었다.
“낭인 삼백 명은…….”
“그 또한 보내주겠다. 괜찮은 녀석으로 뽑아서 보내도록 하지. 그러니, 내 묵인하에 마음껏 활개 쳐 보게나.”
“감사합니다.”
“허나, 경고하건대 홍주방은 쉽지는 않을 거야. 그 위에는 하오문이 있지. 천기순행은 어찌 되었건 대의를 위해 뭉치는 자들이니 어떠한 선을 지키며 살아가지. 허나, 가장 무서운 건 인간의 악의다. 네가 그걸 당해낼 수 있을까?”
“하……하하하.”
“금혈방과 친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하오문은 어디까지나 하오문이지. 천기순행도 각자 생각이 다르듯, 그치들도 마찬가지일 게야.”
그것은 황금으로도 살 수 없는 낭인왕의 조언이었다.
진천희는 깊이 포권하며 감사를 표했다.
* * *
같은 시간 하오문.
하오문을 이루는 다섯 문파의 문주가 전부 모였다.
금혈방, 홍루각, 투도문, 도박파, 오살지파까지.
그리고 이들 다섯 문파의 우두머리 중에서 하오문주라고 부를 수 있는 이가 바로 홍루각주.
그는 붉은색 옷에 긴 곰방대, 그리고 기이하게도 안경을 끼고 있다.
서역 상인에게서 산 것으로, 시력을 맞추는 기능이 있는데 둥근 안경알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나 그는 언제나 안경을 끼고는 했다.
까끌한 턱을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하오문주입니다. 피차 우리 사이에 본명은 아무래도 상관없겠지요. 홍류라고 불러 주십시오.”
하오문주가 직접 나서는 일은 흔치가 않았으나, 그만큼 항주라는 땅이 하오문에 중요한 거점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오문주 앞에는 각 문파의 간부가 앉아서 현 상황을 보고했다.
우선 먼저 입을 꺼낸 것은 투도문이다.
“일광이 또 미친 짓을 다시 시작했소. 항주를 평정하여 이 부조리한 상황을 타파하겠다더군.”
그 말을 들은 오살지파가 투덜거렸다.
“아니, 의원이면 처박혀서 환자 살덩이나 만질 것이지.”
그 말에 도박파가 답했다.
“일광의 속을 어찌 알겠소. 어쩌면 진짜로 협객이 되고 싶은 걸 수도 있고.”
“요즘 세상에 협객이라? 차라리 항주의 이권을 노리고 민심을 잡기 위해 나선 거라면 말이 되겠군그래. 어찌 생각하나, 금혈방?”
그 말에 금혈방에서 파견 온 이는 답하지 않았다.
“이번 금혈방에서 보낸 놈은 꽤나 과묵하군그래.”
하오문주가 말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게, 하오문주.”
“우리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음, 정확히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 정도 되겠죠. 그 세 다리 건너 친구인 흑룡파가 당했고, 그 흑룡파에게 상납받던 홍주방도 곧 공격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크흠…….”
“허나 아시다시피 우리 하오문은 백린의각과 이런저런 이권이 엮여 있지요. 특히 그쪽 금혈방과는 꽤 각별한 관계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
금혈방은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하오문주 홍류는 안경 아래로 웃으며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더 다그치지 않고 말을 돌린다.
“어찌 되었거나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여러분들을 호출하게 되었습니다만?”
이윽고 금혈방이 입을 열었다.
“철혈당 당주 철립이 금혈방주 황금왕을 대신하여 한 말씀 드립니다. 저희 금혈방은 일광의 뜻을 적극 지지하는 바입니다.”
그 말에 오살지파가 투덜거렸다.
“은혈당 사마현 꼬맹이가 올 줄 알았건만 의외로군.”
“아, 은혈당주는 현재 황금왕 님의 시험을 받는 중입니다.”
그 말에 모인 다른 하오문 사람들이 놀란 기색이었다.
“호오? 황금왕 그자가 직접 시험을 내렸다고?”
“네. 부러운 일이지요.”
“죽을 수도 있겠군.”
후우-
하오문주가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은혈당주 사마현 소협의 무훈을 빕니다. 어찌 되었건 금혈방의 의견은 알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꺾자 안경 줄이 차르륵 흔들렸다.
투도문이 말했다.
“금혈방은 어차피 돈이 되는 쪽이 그쪽이니 그리로 갈 것 같았지. 우리 투도문은 기권이오. 애초에 우리 문파의 주업은 도둑질인데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렇지 않아도 저희 방파에 투도문의 도둑이 들긴 했지요.”
“오, 그렇소? 거참 신기하군그래.”
투도문은 뻔뻔하게 답을 했다.
개방이 모든 거지를 통솔할 수 없듯, 투도문이 모든 도둑을 통솔하는 건 불가능하다.
허나, 그것은 하오문의 대다수가 그렇다.
어찌 보면 한없이 모래알 같은 게 또 하오문이다.
하오문주가 물었다.
“도박파와 오살지파의 의견이 궁금합니다만?”
“도박파는 이 일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항주에서 만약 무른 모습을 보이게 되면 모두가 하오문을 비웃을 겝니다.”
“오살지파도 마찬가지요. 소각주에게 혈채를 물어야 하오.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백린의각에 피를 봐야 한다고 보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흑도들이 뭐라 생각하겠소.”
“흐음.”
하오문주는 미소를 유지한 채로 잠시 침묵을 유지한다.
흑도에게 있어 악명은 중요하다.
스스로의 은원도 갚지 못하는 자는 흑도라고 할 수 없다.
악명은 흑도의 무기이니.
만약 하오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면 통솔하고 있는 악인들도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터.
허나, 그건 흑도들의 이야기.
금혈방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래서, 일광 뒤에 있는 혈린광살은 어쩔 겁니까? 그 녀석 귀계가 장난 아닌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만. 그놈이 날뛰면 하오문은 반쪽이 날 겁니다. 일전의 주왕 건을 다시 들출 수 있고요.”
하오문주가 답했다.
“이 자리에 모인 다섯은 모두 혈린광살이 혈린광살 짓을 할 때부터 강호에서 지내왔지요. 일부러 젊은 자는 회의에 보내지 말라 하였는데 각 문주들이 지켜 주셔서 다행입니다.”
혈린광살이 미쳐 있을 때를 모두가 기억했다.
그때 얼마나 많은 흑도들이 지도에서 사라졌는가.
그가 죽을 날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다렸는가. 죽지는 않더라도 곧 쇠약해질 게 틀림없다고 모두가 기다렸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가 제자를 들일 때까지는.
오살지파가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끝을 봐야 하오. 여기서 물러나면 하오문은 뒤가 없는 법이니.”
“……기권 하나에 제재가 둘. 일광과 협조해야 한다는 의견이 하나. 알겠습니다.”
이제 하오문주의 표가 남았다.
그는 안경을 슬쩍 치켜올리며 답했다.
“하오문주인 저는…….”
그의 답에 모두가 눈을 홉떴다.
하오문의 방향은 그렇게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