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05
제 504화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필요해서 사는 게 있고, 내 인생에 딱히 필요는 없는데 자랑하려고 사는 게 있고, 또 남들이 다 사니까 나도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사는 게 있다.
이 흐름이 만들어지면 유행이 된다.
정회에서 일이 생기자마자 내로라할 대소 신료들이 거울을 주문했고.
거기에 주왕 전하를 따라 ‘명경청경(明鏡靑鏡)’을 쓰는 자들도 생겼다.
자기만의 시구를 적어서 부와 풍류를 동시에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생겼다.
“제국의 모든 명사들이 거울 하나 사려고 안달이니 원. 쯧쯧쯧.”
“대인(大人)은 수경을 보며 마음을 닦고, 소인(小人)은 명경을 보며 얼굴부터 닦으려 하는구나.”
이 현상을 풍자하는 시를 읊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는 또 신식 거울 위에 적혔다.
풍자글도 거울에 쓰면 왠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먹으로 붓질을 하면 물방울이 지거나 글씨가 오래가지 못하기에, 특수한 유연먹을 사용해서 거울 위에 적었는데.
졸지에 그 유연먹도 불티나게 팔려 매진이다.
미쳐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황금왕의 다른 후계자들이 분노하는 것은 자명했다.
그중 한 명.
금치적.
형인 금치산은 그렇지 않아도 항주를 걸고 하오문의 대표 중 하나로서 비무를 벌이다 진천희에게 패배한 전적이 있었다.
그렇게 패배한 이후로 도박문 내에서 형님의 입지가 점차 줄어들어가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피부로 느끼고 있다.
“웬수 같은 일광…….”
까드득-!
잇새로 핏물이 배어 나온다.
금혈방의 입지를 빼앗으려는 사마현도 눈엣가시 같은데 거기에 일광까지 끼니 더더욱 화가 치민다.
“본교와 만나는 날 이런 소식도 듣게 되었군.”
마교의 흑운이 그의 앞에 앉아있다.
그의 몸은 평소보다 깡말라 있었고, 손등에 핏줄이 보일 지경이었다.
“피차 일광에게 원한이 있는 사이 아닌가. 차라리 이 또한 하늘이 정한 운명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오.”
“흐음. 그렇긴 하지.”
과거 흑운은 진천희에게 두 번 패퇴했다.
하나는 패천무상신공 쟁탈전에서, 둘째는 투괴 추살령이 내렸을 때.
이 두 번의 패배는 흑운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일단 공방을 부수고 불을 지르는 게 우선이어야 하네.”
“좋소! 내가 고용한 낭인들이 도울 것이오. 허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오.”
그 말에 흑운이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
“당연히 일광의 목을 쳐야지. 정정당당하게 싸운다면 힘이 들겠으나 암살이라면 어떠한가?”
“암습을 하자는 것이오?”
“왜. 불편한가?”
그 말에 금치적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흑도의 삶인데 오히려 환영하는 바이오! 반드시 그놈의 수급을 취해 술잔으로 만들고 말겠소이다!”
“좋은 자세네.”
흑운은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일광의 무명을 그도 알고 있다.
허나, 제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목이 반 뼘이라도 베이면 죽는 법.
‘그 개와 새를 어떻게든 하는 것이 우선이겠군.’
특히 그 개.
그 귀신같은 후각을 생각하면 개부터 처리해야 한다.
* * *
“희가 또 사고를 쳤구나. 이 녀석은 언제나 내 예측 밖에 있단 말이지…….”
제갈린과 유호는 황도에서의 일을 끝내고 돌아가기 위해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사실상 제갈린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유호가 혼자 짐을 다 싸고, 호위 무인들 통솔도 다 하고 있다.
제갈린은 그저 부채만 허허롭게 부칠 뿐.
예전에는 이게 당연했으나 진천희란 놈을 겪고 나니 유호에게도 제법 반항심이라는 게 생기고 있다.
그놈 말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하늘 아래 평등하다는데 왜 나는 이렇게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니지. 그래도 백린의선은 은인 아닌가. 진천희 망할 개잡놈이랑 비교할 것은 못 되지.’
혈압이 저절로 솟았다가 내려간다.
원래도 저혈압 걱정이 없었는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예정이다.
“……뭐, 그래도 잘됐지 않습니까. 주인님, 이번에 도련놈 몰래 하시는 일이 있었는데……. 절대 들킬 일은 없겠군요.”
“그거야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지. 그래서 유호, ‘그것’은 잘 보냈는가?”
그 말에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잘 보냈지요. 그리고, 적절하게 표가 나도록 조치해 두었습니다.”
“그래. 잘됐군. 이걸로…… 과거의 ‘혈채(血債)’를 받아낼 수 있겠어.”
제갈린은 냉혹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호는 생각했다.
‘옛 모습으로 돌아오셨군.’
지금 제갈린의 모습은 과거 혈린광살 때와 진배없었다.
혼자의 힘으로 세가의 은원을 갚겠다고 칼을 들었을 때 그 자체.
그랬던 그가 모든 것을 놓으며 지내다가, 제자를 만나 말년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제자를 지키기 위해 혈린광살의 탈을 썼다.
유호가 한 일은 별것 아니었다.
그의 주인인 제갈린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약을 사도팔문 중 하나인 혈부문에 ‘은밀하지 않게’ 보낸 것.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에는 여러 가지 수가 섞여 있었다.
혈부문에서는 몇 년 전부터, 소문난 영약을 모아왔다.
다른 문파나 가문보다 값을 더 주고 모으던 이들에게 백린의각의 비전으로 연단한 영약을 보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상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으며, 다른 의각들도 이런 활동은 하니까.
그러나. 대다수의 거래는 은밀하고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유호는 특별히 ‘은밀하지 않도록’ 영약을 보내 두었다.
거기다가.
이번에 만든 영약은 강호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의 공능을 지닌 귀물이라는 점도 특별한 점일 것이다.
제갈린이 보낸 영약은 특별한 방법으로 먹어야 하는 영약으로, 먹으면 적어도 일 갑자의 순후한 내공을 손에 넣을 수 있으며. 주안(朱顔)의 효과가 있어 10년은 젊어져 보인다는 귀물이다.
혈선교가 아닌 이상, 보통 그것을 만드는 것도 힘겨울 뿐더러 그런 귀물을 만들면 자신이 삼키거나 또는 소중한 이에게 보내는 것이 정석이다.
허나 혈린광살은 그것을 옛 원수에게 보냈다.
-크크큭……. 혈린광살, 생각해 봐라. 곧 뒤져 없어질 네놈이다. 어차피 앞으로 몇 년 못 살 몸뚱이. 이 넓은 강호에서 제갈세가의 원수를 다 잡아낸다는 게 말이 되겠느냐.
-증거? 그래. 증거를 가져와 봐라. 제갈세가가 흑도가 아니라면 그 은원에도 증거가 있을 터. 왜? 못 가져오겠나?
당시 증언을 해줄 증인은 돌연 피살당했다.
흔한 일이었다. 증인이 하루 전날에 돌연 죽는 것은. 대비를 한다 하더라도 그랬다.
제갈린은 아직 어리석었고, 혼자였다.
증거는 없고 그냥 심증으로 이 짓을 벌인다고 말한다면 그때는 무림맹도 혈사를 봐주지 못할 것이고.
당시 어린 제갈린을 많이 봐주었던 무당권제께서도 거기까지는 어찌할 수 없을 터.
증거가 확실한 이들만을 추려 은원을 갚는 게 제갈린이 할 수 있는 전부.
심증이 아닌 물증까지 찾아내는 것조차도 기실 제갈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짓이기도 했다.
-심증뿐이라면 잊지 그러나? 나는 제갈가 멸문에 관여한 적 없으니까. 살아 있는 증인도 없다 하지 않았나. 참 억울하군.
다른 이들이 보면, 제갈린이 과거의 원한을 전부 잊은 것처럼 보이리라.
‘그냥 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준비 과정이 필요해 먹는 데 약 60여 일의 시간이 걸리던가.’
이것이 혈린광살의 노림수다.
그렇기에 얻는다고 한들 영약을 바로 먹을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영약에 대한 정보를 혈린광살은 기꺼이 흘려보냈다.
“이 일의 중심은 혈부문. 거기에 정파와 사파 가리지 않고, 서넛 정도가 같이 휘말려 싸우게 되겠지. 모처럼 준비한 무대인데 참가자들이 많았으면 좋겠군. 그렇지 않은가, 유호?”
섭식하는 데 준비 과정이 필요한 귀물.
그것을 취하는 자는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내공을 얻을 수 있으리.
그 정보가 들불처럼 번져 나가면, 그 들불에 욕망 때문에 휘말려든 이들이 서로를 죽여 댈 것이다.
단지 하나의 영약을 위해서.
상상 이상의 생명들이 피를 흘리며 죽으리라.
“…….”
유호는 침음을 삼켰다.
만약 진천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 될까.
스승이 제자를 위한 방죽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냉혈한이라는 것을.
진천희가 스승님을 보는 시선과는 달리.
제갈린은 애초에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감성을 갖게 된 자였고.
세상과 제자를 바꾸라 하면 기꺼이 제자를 선택할 자였다.
물론 대뜸 보내지는 않았다.
어느 문파에서 일을 치를지 고만하던 와중에 마침 눈에 띄는 쓰레기가 있었으니.
혈부문주가 예전부터 영약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차.
백린의각에서 제작해 판매해 달라고 하며, 항주에 있는 진천희와 하오문 사이의 분쟁을 이용해 힘을 보태니 마니 하며 은근히, 허나 사실상 약점을 잡은 듯 협박하려 했던 게 그 시작.
과거 혈린광살이었던 제갈린이 준비한 혈부문의 증인이 하루 전날에 피살당했다.
그때 어린 제갈린은 아직 강호를 믿었었다.
그리고 악(惡)은 혈린광살이 백린의선이 될 때도 잘 자라서, 그때의 버릇이 남아 다시 수작질을 한다.
“뭐어, 어차피 혈부문도 쓰레기고, 여기에 끼어들 문파들도 위선악인 문파였으니. 이참에 청소가 잘되었으면 좋겠네. 게다가. 사도련의 움직임에 제동도 걸어줄 수 있을 터. 일석삼조가 아니겠나?”
제갈린은 서늘한 목소리를 내뱉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랬다.
제자가 사람을 살리는 동안, 스승은 차도살인을 시작했다.
“하지만 도련놈에게는 비밀이시겠죠?”
“그럼. 우리 희가 굳이 알 필요 있겠나? 어차피 이후에는, 희가 싫어하는 오물들을 반은 쓸려나간 이후일 터인데. 그 모습만 보여주면 그만이지.”
“못 말리겠군요.”
“자. 그러면. 슬슬 가세나.”
제갈린은 황도를 떠났다.
* * *
‘아아, 모르는가. 이것이 바로 ■■라네.’라는 밈을 웃자고 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신기술이 돈이 되는 건 어느 시대나 똑같다.
그렇기에 기업들은 특허를 따기 위해서 하나같이 혈안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거고, 그렇게 특허에 기여한 연구원들은 월급만 받고 팽당하니까 소송을 하는 거고.
이 시대에는 특허가 없기에 언젠가는 이 기술이 외부로 풀리기야 하겠지만, 그동안 벌 수 있는 돈은 모두 벌어두는 게 좋겠지.
“이놈 본 적 없는 놈입니다요! 막씨네 집에 저런 자식 없어!”
항주 빈민가를 중심으로 쌓아올린 인망이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다.
거울 공방에 들어온 장인들을 중심으로, 항주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외부인들을 가려내고 있었다.
항주가 인구 밀집도 높은 도시라고는 해도, 현대 서울 주거 문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
사마혜를 항주 사람들이 모두 기억하고 있듯이, 그들만의 인맥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