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4
제 54화
“그분께서 결국 오셨구나.”
“네. 거기다가 화주의각에서 사람까지 보내 왔습니다. 궁귀의 딸, 왕각연. 자신들이 포기했던 환자를 치료해 버렸으니 체면이 크게 상했던 모양입니다.”
“어째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불청객이 한꺼번에 찾아오는군.”
제갈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호가 말을 이었다.
“걱정이 되어 왔다는 말을 하면서 환자인 왕각연을 보러 왔다고 하더군요. 그래 봤자 이미 완치 단계라서 알 리가 없겠지만요.”
왕각연. 궁귀의 딸.
그녀가 치료를 받은 지도 이미 몇 달이 지났다.
상당한 대수술을 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야 했지만, 이제는 건강을 되찾아 완치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일반인이라면 좀 더 자리보전을 해야 할 중상이었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건넨 선천진기의 공력이 그녀의 회복력을 끌어올린 덕이 컸다.
“트집을 잡으러 온 것이겠군. 우리 쪽에서 거절한다면 그거대로 흠을 잡을 수 있을 테니 그쪽 입장에서 나쁜 수는 아닐 터.”
“그래서 보여 드렸습니다. 지금쯤 우리 쪽 의각원들과 함께 진맥 중일 겁니다. 궁귀에게도 귀띔을 주었습니다.”
“잘했다. 하지만 우리 쪽 의각원들의 부담이 크겠구나.”
“그쪽에서는 어떻게든 흠을 잡으려 할 거고, 이쪽에서는 막아야 할 테니까요. 허나, 주인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십니다. 표면상으로는 고작해야 타 의각원들의 방문이니 그에 맞춰 대응하면 될 일입니다.”
제갈린은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보다 지금 우리 희가 만나고 있는 분이 걱정이지.”
“네. ‘그분’이 직접 왕림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술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하신 거겠지.”
“계속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까요?”
“그분이 언제 우리가 막는다고 막아질 분이시더냐. 내버려 두길 원하시는 것 같으니 그리하자꾸나.”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화주의각원의 패악질이 예상 이상으로 컸다.
* * *
“아니, 환자가 무슨 노리개요?”
“어찌 그리 심한 말을 하십니까!”
“검증도 안 된 의술로 환자를 치료하다니, 그 이상으로 빗댈 말이 뭐 있겠소? 우리 쪽에 맡겼으면 스무 일이면 다 치료되었을 거요!”
“그게 무슨…….”
백린의각원의 말문이 막혔다.
환자를 버려 놓고서는 이제 와서 치료가 가능했던 것마냥 꾸밀 줄은 몰랐다.
‘허 참, 화주의각의 뻔뻔함에 치가 떨리는구나.’
화주의각 소속 의원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환자 보호자가 백린의각을 선택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생각하오. 우리 화주의각의 덕이 불민하여 그만한 신뢰를 못 준 것인 것을…… 허나, 검증도 안 된 의술로 환자를 가지고 논 것은 어찌 말할 것이오!”
“환자는 다 죽어 가던 상황이었소. 말 똑바로 하시오. 그 부술이 아니었다면 환자는 살아 있지도 못했소.”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 화주의각의 의술이면 충분히 구할 수 있었소.”
“화주의각에서 받아 주지 못한다고 한 답신을 이미 환자 보호자가 보여 주었소. 왜 자꾸 거짓말을 하시오?”
“받아 주지 못한다고 했지 치료하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소. 각주께서 친히 나서서 진맥을 하시고서는 방도를 찾고 있다고 하셨으니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이번 궁귀 사태로 인한 무림 문파들의 동요가 생각보다 컸었던 모양이었다.
그만큼 화주의각이 품은 독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면 불러 오시오.”
“누굴 말씀이시오? 각주님은 이런 일로 오실 분이 아니외다.”
“어찌 하늘 같은 백린의선님을 타 의각원인 내가 오라 가라 할 수 있겠소. 그냥 그 제자란 분을 모셔 오면 될 거 아니오.”
“허.”
“떳떳하면 못 부를 게 없지 않겠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폭발하듯 열렸다.
콰앙!
“말 잘했다! 이 개잡놈의 화주의각 놈들아!”
궁귀였다. 궁귀의 양팔에는 백린의각 호위 무사들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소식을 듣고 물소처럼 달려오는 궁귀를 호위 무사들이 몸을 던져 막았으나, 궁귀는 화경에 이른 고수!
당연히도 실패한 모양이다.
시뻘겋게 물든 궁귀의 얼굴은 말 그대로 야차와도 같았다.
“이 개잡놈들 때문에 내 딸이 무슨 고초를 당했는데!”
화경에 이른 고수가 내뿜는 살기에 화주의각원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궁귀는 당장이라도 놈들의 머리통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화주의각원은 다급하게 말했다.
“의, 의각 내에서 살생은 엄히 금해지는 것 모르오? 진정하시오!”
“진정은 무슨 놈의 진정! 우리 은공만 아니었으면 네놈들은 이미 황천에서 나를 봤을 것이다! 오냐! 모처럼 죽여 달라고 제 발로 찾아왔으니 내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의각 내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입원해 있는 강호인들은 자리를 떠난다.
해검지가 지켜지지 않는 의각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백린의각의 명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흉사도, 이 이상의 흉사가 없었다. 그러나 궁귀에게 있어 이놈들은 딸을 죽일 뻔한 원수.
화경에 이른 고수가 내뿜는 기운에 의각원들이 하나둘 실신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작고 평온한 어조였다.
“진정하세요.”
놀랍게도 그 목소리에 궁귀의 살기가 흔들렸다.
“은공.”
“여기는 의각입니다. 강호의 은원은 나가서 해결하세요.”
막 할머니의 처치를 끝내고 온 진천희였다.
진천희의 명령에 궁귀는 결국 살기를 거두었다.
공기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화주의각원들이 급히 숨을 내쉬었다.
진천희가 말했다.
“저를 보고자 하신다는 말을 들었네요.”
* * *
화주의각원들은 진천희의 태연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젊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건 젊은 수준이 아니라 어렸다.
장침이나 제대로 쓸까 싶은 조막만 한 손을 내려다보다가 화주의각원이 물었다.
“혹시 소협께서는 반로환동의 고수이십니까?”
반로환동.
시간을 거스르며 어려지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어려질 뿐만 아니라 육체가 무공에 맞게 재구성되고, 몸 안의 어떤 탁기든 정화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눈빛이 깊어지고 외모가 무척이나 아름다워지는데, 진천희의 미모가 범상하지는 않다 보니 그리 물은 것 같았다.
진천희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이제 갓 무공을 사사받기 시작한 풋내기일 뿐인걸요.”
풍겨 오는 기도를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아이치고는 눈빛이 지나치게 깊다는 게 조금 걸렸지만 화주의각원 모두 안심한 기색이었다.
궁귀가 말했다.
“은공을 조금이라도 음해하려 하면 내 궁귀란 별호를 걸고서라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마세요.”
“은공.”
호랑이처럼 포효하던 궁귀가 진천희의 말 한마디에 다시 누그러진다.
“저분들은 그저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온 것뿐인걸요. 그러지 마세요.”
기이했다. 말투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였지만 그 뜻은 어른의 것이었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 일부러 아이인 척 장난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궁귀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하시다면 부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곁에 있게 해 주십시오. 은공.”
“…….”
진천희는 말을 잃고는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화주의각원들을 걱정하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실 진천희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판이 좋게 깔렸군. 궁귀가 잘 날뛰어 주었어.’
화주의각원들이 잡고 있던 키가 이젠 진천희에게 넘어왔다.
진천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알겠어요. 왕 대협은 너무 절 걱정하셔서 탈이에요.”
“은공에게 대협이라고 불릴 면목이 없습니다. 남들처럼 궁귀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렇게 진천희에게 정중히 말하고는 화주의각원들에게 일갈했다.
“너희는 오늘 은공 덕에 산 목숨인 줄 알아라! 혹시라도 은공의 명예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고자 한다면 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즉, 백린의각을 나서는 순간 목을 벨 것이야!”
화경의 고수가 감정을 담아 노호성을 터뜨렸다.
쩌렁쩌렁 울리는 기세에 진천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진천희는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화주의각원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래서, 궁금한 게 있으시다고요?”
“그…… 그것이…….”
화주의각원들이 목울대로 침을 꿀꺽 삼키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환자와 의원의 관계로만 생각했지, 궁귀 놈이 이렇게 남아서 주군으로 모시고 있다는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거기다가 궁귀의 무력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높아졌다.
‘분명 진신진기까지 끌어 써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을 줄 알았는데?’
‘딸을 옮기고 처치까지 했다면 분명 진신진기를 넘어 선천진기까지 써서 버텨야 했을 것이라고 약선께서 말씀하셨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것인가.’
의보와 각 개방을 통해 정보를 모으고, 취합하고, 예측했던 이야기들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궁귀는 여전히 고강했다. 그것도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았다.
* * *
질문이 이어졌다.
진천희는 차를 천천히 삼키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이상은 사조로부터 내려오는 비급에 관련된 일이니 말할 수 없어요.”
뭐 이리 비밀이 많단 말인가. 그러나 비인부전의 강호이다 보니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진천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조께서는 먼 대륙에서 온 분으로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분이시거든요.”
“그래도 알아야 하지 않겠소.”
“알겠어요.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지셨어요.”
“히포…… 뭐?”
“저희 사문은 입문하기 무척 어려울뿐더러, 한 명의 의원이 되기까지 매우, 매우, 혹독한 시련을 거칩니다. 한 명의 의원으로 인정이 되었을 때 선서를 하지요.”
개소리인 듯하지만, 사실 반은 진실이었다.
“분명 소협은 기억상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소만…….”
그 말에 진천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대부분의 기억은 잃었지만 사조와 사문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네요. 참으로 다행이죠.”
내가 기억한다는데 니가 어쩔 것이냐.
진천희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는 차분히 안면 근육을 움직였다.
“이렇게 사조까지 밝혀 드렸어요. 저는 할 수 있는 걸 다 한 셈인데요.”
혼란스러웠다.
어째 개소리 같으면서도 그럴듯한 느낌이 좀 든다.
“사조와 사문에 대해 부모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소?”
그 말에 궁귀가 일갈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설마하니 은공께서 사문과 사조를 거짓으로 말할 분 같으냐!”
무림인에게 문파의 뿌리가 되는 사문과 사조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원래라면 그것은 같은 문파원이 아니면 공개조차 꺼리는 일이었다.
진천희는 그것을 무릅쓰고 공개하는 셈이었다.
사실은…….
‘히포크라테스 말고, 그냥 자일리톨 휘바휘바 같은 이름으로 말할 걸 그랬나? 아냐아냐, 뭐 일단 어느 정도 진실은 진실이니까.’
진천희가 말했다.
“부모님의 이름을 걸고 어찌 거짓을 고하겠어요.”
진천희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이나 무림이나 뿌리 깊은 유교 사회 아닌가.
부모님 이름을 걸고 하면 뭐든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