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40
제 539화
천우는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무당의 장로님들 중에도 고생을 많이 하신 분들이 오히려 여유로워지더라고요. 이상한 농담도 많이 하시고.”
“세상에 초탈해 가는 과정 같은 거야?”
“…….”
그 말에 천우는 팔짱을 끼고 골똘하게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권제께서 말씀하셨는데, 사람이란 결국 어찌 되었건 살아진다는 걸 깨닫게 되면 그리된다 하셨어요.”
‘음, 맞는 말이군. 내 왼팔이 박살 나기 직전인데 십천군 둘에 천기순행자 둘을 만나도. 어쨌든 살아졌으니까.’
그때는 진짜 뒤지는 줄 알았지. 거기서 여하륜이 도착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그러니까 그 녀석이 ‘주인공’인 거겠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무대에 난입해 판 자체를 뒤집어엎는 존재가 바로 주인공이니까.
“그래. 천우야.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야. 몇 번 뒤질 뻔해 보니까 세상이 좀 달라 보이긴 하더라고.”
수술도 그래.
연차가 쌓이고, 많은 케이스를 접해 보면서 점점 더 여유롭게 보이는 법이지.
물론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마음은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결국 짬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고.
백린의각 상의원쯤 되면 어지간한 일은 그들 특유의 아재개그로 받아치기 시작한다.
일을 대충한다는 것과는 또 달라. 여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붙은 거니까.
‘그래도 내 모오닝 스페셜 티는 쉽지 않을 거다. 케헤헤헤헤!’
우리 연약한 상의원 놈들 잘 챙겨 줘야지.
이 칼 든 유교 사회에서 상급자가 타주는 아침 차를 몇 번이나 마셔 봤겠냐.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슬슬 상의원 기상 시간이 다가온다.
늦게 잡은 기상 시간이다 보니 해가 뜬 지는 한참이다.
이윽고.
콰다다당!
다른 상의원 숙소에서 뭔가 난리가 나는 소리가 울렸다.
“천우야. 애들이 드디어 하나둘씩 일어나나 봐.”
“형…….”
“뭐, 이러다 보면 나중에는 하의원 애들도 안 시키고 자기 손으로 차 끓여 먹는 날도 오겠지? 안 그러니, 천우야?”
천우는 형의 향기로운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와… 형. 점점 더 권제님 닮아 가는 느낌이.’
무당권제께서도 무당 행정이 엿 같다는 판단이 드시면 뜬금없이 장로들을 모아 놓고 이런 짓을 하곤 하셨다.
이 노쇠한 몸으로 손수 깎은 사과인데 한번 먹어 보라면서.
그러면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장로님들이 사과 먹고 체한다.
형이야 요리를 자주 해 주니 그거 받아먹는 건 모두 익숙한 행복이지만 차는 또 다르지.
‘이렇게 사람을 멕이는군요. 형.’
천우는 생각했다.
나도 장로 되면 형처럼 해야겠다고.
너 잘라 버린다고 윽박지르는 건 하수구나. 고수는 아침 차를 끓여 주는구나.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오~ 형~ 굿모닝이야~”
“현아… 너 발음이… 내가 저런 발음도 했었니?”
“아니? 내 발음이 어땠는데?”
‘외국 놈이 무협 세계에 떨어진 줄 알았다. 인마.’
진천희는 차마 하지 못할 그 말을 삼키고는 사마현을 맞이했다.
* * *
“응. 혜아는 바쁘지.”
사마현은 진천희가 건네준 탕약 아메리카노에 설탕을 콸콸콸 쏟아부으며 말했다.
“어쩐지 새벽부터 없더라.”
“후기지수들 중에는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야 하는 애들도 있거든. 걔들이랑 교류하려면 그것보다 일찍 일어나서 교류해야 해.”
하긴, 있는 놈이 더 하다고, 명문 정파일수록 자식 교육이 장난 아니지.
애 인성이 좀 떨어져도, 실력 떨어지는 꼴은 다들 못 보니까.
“엄청 부지런하네.”
“응. 나나 혜아나 부모가 없잖아? 걔네들은 몇 번을 실패해도 세가가 뒤를 봐주지만 나나 혜아는 그런 기회가 없어. 한 번에 성공해야 하고, 성공하면 두 번 다시 떨어지면 안 돼.”
“현아.”
“우리가 형을 만난 건 행운이야. 하지만 그 행운에 안주하면 결국 그 자리에 맴도는 거지. 천우 형도 마찬가지 아니야?”
후룩-
천우는 설탕 없이 탕약 아메리카노를 즐기다가 이렇게 말했다.
“하하하, 형. 저는 그저 무(武)의 끝을 보고 싶은 게 우선입니다. 그러니 무당파지요.”
같은 급으로 묶지 말라는 노골적인 답변에 사마현이 투덜거렸다.
“가가~ 보이십니까? 저 요망한 것이 신첩을 또 나쁜 놈으로 만들고 있사옵니다~”
“알았어. 현아. 그만하자.”
진천희는 사마현이 또 소매에 달라붙을까 봐 화들짝 답했다.
“아무튼 천우 형은 혼자서 고고한 척은 다 해요. 누가 위선적인 정파 아니랄까 봐~”
“후, 현아.”
“가가~ 소녀 억울하옵니다~”
“그래. 알았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자. 어… 혜아를 노리는 후기지수가 많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 한창 젊을 때잖아.”
에라, 모르겠다. 수류탄 투척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마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한다.
“그렇지. 의술을 배운 고아 여식이라니. 심지어 분타주잖아? 어지간한 세가 며느릿감이지.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우리 남매 미모가 좀 예뻐? 날파리들 잔뜩 꼬이지.”
“……그렇구나.”
“괜찮아. 형. 본디 손속이 매서울수록 정원은 푸르러지는 법이지. 우리 혜아를 건드리는 놈들은 죄다 백린의각 항주 분타 거름으로 만들어 줄 거야.”
항주 분타 벚꽃이 왜 그리 붉은지 아십니까.
분타주 꼬시려다 오라비에게 뒤통수 맞고 쓰러진 시신들이 파묻혀 있기 때문이지요.
세기말 만화책이 떠오르는군.
요즘 애들은 이 고전을 모르려나.
“진짜로 죽이면 안 된다.”
“무슨 소리야? 내가 그래도 금혈방 후계자인데 그렇게 사람을 막 죽이겠어? 사귀기 전에는 안 죽여. 사귀고 울리면 죽여야지. 아니, 사귀려고 시도를 해도 죽여야지. 걱정 마~ 형~ 후후후후.”
“너무 그런 거 민감하게 굴면 안 돼. 혜아도 이제 성인이다.”
“형. 생각해 봐. 우리 혜아가 어느 세가에 시집을 갔는데 시아버지란 사람이 반찬이 뭐냐고 밥상 엎고, 시어머니란 사람이 너는 배운 게 없어서 제사도 못 지내냐고 신발 던진다고 생각해 봐. 그리고 남편이란 놈은 매일 밤 모르는 여자들을 끼고…….”
“…후, 내가 혈선교 외에는 손에 피를 보지 않으려 했건만. 어딜 혜아를 괴롭혀? 저 어린애를!”
“그래. 형. 그거야… 안 죽이고 어떻게 배기냐고.”
어쩔 수 없네.
항주 분타 벚나무에 시신을 묻을 수밖에 없겠어.
원래 벚꽃은 빨간 게 예뻐.
그때 다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빠!”
사마혜가 일을 끝내고 온 모양이었다.
* * *
사마현과 사마혜는 그간 쌓인 이야기를 하고.
천우와 진천희는 그런 둘의 대화에 적당히 호응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식사 시간이 되어 모두가 자리를 옮겨 객잔으로 향했다.
“형, 뭐 먹으러 갈래?”
“게… 게살탕수?”
진천희는 흡사 산타에게 소원을 비는 어린아이처럼 꿈의 메뉴를 불렀다.
“아, 가 볼까?”
“좋아!”
허나, 가서 당당히 점소이에게 게살탕수를 주문했건만. 점소이는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요, 대협. 이미 다 팔려서 지금은 재료가 없습니다요.”
크윽,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었던 건가.
진천희는 그리 생각하며 결국 불도장과 동파육을 시켰다.
각자 요리를 시키고 차를 천천히 삼키고 있으니 어느샌가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뭣이?! 네놈이 바로 그 암혈귀란 말이냐!”
“크크크큭, 기다리고 있었다. 월봉 진인. 덤벼라!”
신성한 객잔에서 또다시 싸움이 일어나는가.
용봉지회에서는 의외로 흔한 풍경.
허나, 진천희는 편안하게 먹고 싶었다.
콰창!
국수 그릇과 대나무 찜기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주인 잃은 라유가 바닥을 흠뻑 적시며 흘러 내려갔다.
놀란 점소이가 머리를 부여잡고, ‘에구구! 대협들, 제발 밖에서 싸워 주시지요!’라고 외쳤다.
사마혜가 바짝 긴장해서는 오라버니의 옷깃을 붙잡…긴커녕 허리춤에 걸린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내 족발 냉채를 건드리는 놈은 손모가지 잘릴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과연 항주에서 갈고닦여진 생활력인가.’
절정 고수라고는 하나 실전을 겪질 않았을 터인데, 자칫 무인들의 피와 살이 튈 수 있는 상황에서 족발냉채를 지키기 위해 준비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냉정함이었다.
그리고.
“저어, 그만하시죠?”
진천희가 분연히 일어났다.
놈이 흰 쌀밥만 안 밟았어도 내버려 두었을지도. 허나, 이 객잔 주방장이 얼마나 피땀 서린 밥을 만들어 냈는지 모를 것이다.
그걸 밟았으니.
“그만하라고? 크큭, 월봉 진인. 저자는 사문의 원수다!”
“암혈귀! 네놈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느냐! 네놈이야말로…….”
“…하하하. 그만하시죠? 밥 식습니다. 대협.”
식을 밥은 없다. 이미 바닥에 흩뿌려져 버렸으니까.
문득 두 무인은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특징적인 머리 장식, 사람인가 싶을 만큼의 미색, 허리에는 딱 봐도 귀한 보검.
무엇보다 발치에 앉아 있는 개 한 마리. 머리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
“……커, 헙. 일광?!”
“그리 부르는 분도 계시지요. 아무리 은원이 중한들 이 멋진 객잔을 부숴서야 되겠습니까.”
“…….”
“은원은 용봉지회에서 푸시고 지금은 식사를 하시지요.”
둘은 진천희를 한 번, 원수를 한 번 바라본다.
‘일광……. 그놈이 왔나.’
‘재수 없게 되었군. 이러다가 어차피 모두 피 볼 거 치료하기 좋게 미리 피 보게 해드리겠다며 먼저 팰 수도 있는 놈 아닌가.’
그게 일광의 방식임을 두 무인은 아주 잘 알았다.
‘……잘못하면 낙향이다.’
‘강제로 고향으로 보내겠군.’
거기까지 생각한 두 무인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
“크흠, 어쩔 수 없군. 용봉지회가 다 끝난 후에 풀 수밖에!”
“어쩔 수 없군! 커흠!”
두 무인이 자리에 차분히 앉는다. 하지만 진천희는 놔주지 않았다.
“점소이분이 힘드십니다. 주문 새로 하시기 전에 치우는 걸 돕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크, 크음. 알겠네.”
“좋은 분들이시군요. 기쁩니다.”
진천희는 환히 웃으며 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결국 두 무인은 자신이 엎어 버린 음식들을 치우기 시작했고. 진천희는 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야~ 형 위명이 대단한데?”
“응,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천하 십 대 고수이니까, 이제는 좀 말을 들어주시네.”
반면 사마혜와 진천우는 경악했다.
‘저놈들이 싸움을 멈춘다고?’
‘형… 정말… 그동안 광……. 아니 무명이 더 대단해졌군요.’
이제 강호에 진천희가 또라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인은 없는 게 아닐까.
‘아니야. 형이 미쳤다니. 평화를 위해 좀 더 빨리 손속을 쓰는 것 뿐.’
천우는 그렇게 형을 합리화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형. 정말 멋지십니다.”
“크헤헤헤, 그래?”
진천희는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탕초리척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바삭-
“와, 여기 튀김이 진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