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46
제 545화
그때 목소리가 불쑥 상념을 찢었다.
“은공.”
“음?”
고개를 들어 보니 시야에 가득 찬 것은 사마혜, 그녀였다.
“어라, 혜아야. 너는 왜 안 쉬고?”
“은공도 안 쉬니까 저도 왔죠. 뭐, 이번 비무에선 다친 데도 없고. 와, 바둑인가요?”
사마혜는 앞에 앉았다.
“음…. 흑돌도 백돌도 정신이 없네요.”
“그냥 혼자서 마구 놓아 본 거야.”
“생각할 게 많아 보이시는데 도와 드려요?”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아아, 혜아는 알고 있겠구나.’
항주 분타주가 이 판도를 못 읽을 리가 없지.
사마현이 동생에게 정보를 숨길 녀석도 아니고. 아마 혜아가 원하는 정보는 뭐든 알려줬으리라.
“고민 있으면 들어드릴까요? 소각주님?”
그 말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알겠습니다. 항주 분타주님. 분타주로서의 시각이 필요하군요.”
“좋습니다. 저는… 백돌을 쥐겠습니다. 보아하니 백돌이 더 유리해 보이거든요.”
“지는 걸 싫어하시는군요.”
“당연하죠. 소각주님. 항주 분타주는 지면 그날 밤 잠을 못 자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여기까지 올라왔지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백돌을 딱 소리 나게 놓았다.
“제가 선공합니다? 소각주님.”
“와, 누가 먼저인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막 놓으시는군요. 항주 분타주님.”
“저는 지는 것도 싫지만, 유리한 걸 놔두고 불리한 길로 가는 것도 싫어합니다. 소각주님.”
“비무 때 알아보았습니다. 분타주님.”
그 말에 사마혜가 그만 깔깔 웃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은공. 정사대전에 대해 어떤 고민이 있으신가요? 유리한 걸 좋아하는 이 혜아가 조언해 드리도록 하지요.”
사마혜는 자신의 말이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걸까.
사 대 당주들조차도 백린의각의 소각주와 논의하는 것을 버거워했다.
단순히 의술에 대한 논의라면 다행이나, 앞으로 백린의각의 향방에 대한 이야기라면 언제나 스승님께 넘기곤 했지.
당연했다.
제갈세가의 사고 속도를 따라오는 이가 거의 없기 때문.
그렇기에 진천희의 대화 상대는 늘 스승이었고, 이러한 일은 스승님과 논의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사마혜가 말했다.
“중간에 안 도망갈 테니까 걱정 마세요. 말 상대 정도라면 해드릴 수 있을 테니.”
상대는 사마혜.
사마씨도 책사로서 이름이 높으나, 분가의 분가의 분가의 분가의… 분가 사마씨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제갈세가처럼 손이 귀해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여타 무공세가처럼 검문(劍門)을 만들어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한국의 김, 이, 박과 비슷하달까?
그래도 삼국지를 좋아하는 현대인인지라 또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
팬심이랄까.
“우선 은공, 고민이 무엇입니까?”
그 말에 진천희는 다섯 글자를 내뱉는다.
“……관무불가침.”
“의외군요. 소각주님? 이 시국에 그걸 생각하다니. 음…. 생각해 보면 제국은 영토가 넓고, 강호인들은 얼마든지 훌륭한 자객이 될 수 있죠. 황실은 이 판의 뒤에서 계속해서 조종할 테니. 그것을 고민하는 게 맞죠?”
딱-
진천희는 흑돌을 쥐었다.
“네, 맞습니다. 분타주님. 황실에 있어 강호인은 눈엣가시죠. 애초에 관부는 제국 전체의 치안을 유지할 역량이 없습니다. 아니, 인류사 어디서도 중앙집권 권력이 밑바닥까지 미친 적이 없어요.”
현대에 행정이 잘되어 있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에서조차 섬이 수천 개.
이 중에 유인도가 400여 개이고 나머지는 무인도인데,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는 섬도 있다.
이 수천 개의 섬에 행정력이 골고루 미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던가.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계적으로 봤을 때 대한민국만큼 공권력이 영토 구석구석 미치는 곳도 드물지.
‘작금의 강호는 섬이 아니라 도시가 이런 상황이니까.’
통신과 전자 기기가 없는 것도 큰 문제고.
있다고 해도 당장 거대한 미국 같은 곳도 시골 마을에서 연쇄살인마가 검거되면 시체가 수십 구 나오지 않던가.
통신 기기가 있어도 안 되는 곳은 안 된다.
‘결국 이 시대는 더욱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행정이 되는 셈이지.’
그래도 주먹구구의 구구를 맡고 있는 현령 대리로서 항변하자면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는 있다.
“네. 거기다 칼로써 돈을 번 세가들은 시간이 흘러 고관대작들과 유착을 합니다. 황제가 바뀌어도 이 유착 관계는 없어지지 않죠.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고, 가진 자들은 더 가지고 싶어 하니까요. 그게 작금의 정파와 사파죠.”
딱-
흑돌이 내려앉았다.
“이 혜아가 제대로 짚었군요. 은공. 그렇다면 해사방 토벌은 이례적이었던 거네요.”
따닥-
백돌이 앉고.
진천희가 답했다.
“네. 해사방은 성주에게 충분히 돈을 바쳤으니까요. 원래라면 그 정도 대규모 토벌이 나와서는 안 됐던 겁니다. 그러니까… 네. 저는 이게 지금 관무불가침의 본질이라 봅니다.”
탁!
흑돌이 백돌을 가로막았다.
“의외군요. 정사대전을 고민하시는데 오히려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황궁을 경계하다니.”
“…….”
“지금 이 판을 그렇게 보고 계시는 분은 소각주님뿐입니다.”
“칭찬입니까?”
“만약 관과 무림,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면 어디를 택하실 겁니까.”
그 말에 진천희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제가 있을 곳은 백린의각입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두 사람은 오지 않는 환자를 기다리며 밤새도록 바둑을 두었고.
그날 밤 사마혜는 잠을 자지 못했다.
패배한 날은 못 잔다는 말이 바둑도 포함이었나.
* * *
다음 날 밤.
진천희는 쪽잠을 자다가 문득 눈을 떴다.
함께 자고 있던 황구는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다.
하지만 이 기이한 감각은 분명…….
머리는 아니라고 했다.
무림맹의 본단, 그 한쪽에 자리한 백린의각 치료소.
백린대가 수호하고 있기도 하고, 간단한 진법도 있으니까.
느릿하게 하품을 하며 길게 풀어헤친 머리를 대충 묶어 올렸다.
“놀랍네요. 제 방에 사람이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자객은 아니신 것 같고, 어디서 오셨습니까?”
진천희의 목소리에 황구가 살짝 눈을 뜨더니 화들짝 놀라 짖었다.
컹!
문 밖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으니까.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상대가 그만한 존재인 거야.’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
“들어오시지요.”
의관을 대충 정제하고 부르자 그제야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벽안신의 진천희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모용세가의 암영당주인 모용립이라고 합니다.”
진천희는 현원전단신공으로 뇌 내 구글링을 했다.
모용세가.
요녕성을 공손세가와 함께 반씩 지배하고 있는 자들!
최근 공손세가에서 세력을 확장한 결과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 이상 규모가 커졌다고 하던가.
모용세가의 뿌리가 그로 인해 흔들릴 정도는 아니나, 외적인 세력의 크기는 이미 공손세가에 뒤처지는 상황.
그런 모용세가의 암살 조직이자, 정보 조직이 바로 이 암영당.
‘대체 왜 정파가 굳이 암살 조직을 휘하에 꾸리는지는 묻지 말자.’
산적질, 수적질 안 하는 것만으로도 얘들은 정파가 맞으니까.
‘일단 암영당주면 최소 초절정은 되겠네.’
소설에서는 눈먼 혈사에 죽어서 활약할 기회가 없던 자였다.
지존천마에서 약자는 파리 목숨이지만 강자는 건수만 있으면 보내 버렸으니까.
어찌 보면 깨달음과 사망률이 균등하여 파워 밸런스가 유지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너무 센 놈이 나오면 걔는 등선시켜서 날려 버리고.
“모용가의 암영당주께서 이리 불쑥 찾아오시다니 조금은 놀랐습니다. 잠시 앉으시지요. 차라도 대접하겠습니다. 혹시 팥차 좋아하십니까?”
“그 팥차를 받으면 백린의각 연구동으로 끌려간다지요? 다른 차라면 마시겠습니다.”
“과연 암영당이군요. 의각 내의 우스갯소리까지 아시다니.”
“과찬이십니다. 그보다 다른 차는 없으십니까?”
“우엉차는 어떠십니까? 약초들도 함께 가미되어 있어 몸을 보하는 데 그만입니다.”
“어째 죄다 약차로군요.”
진천희는 작게 웃으며 다기를 준비했다.
“스승님께서 걱정이 늘 많으시거든요.”
그리 말하며 우엉차를 준비했다.
불을 피울 필요는 없다.
손에서 일어나는 열양기만으로도 차를 데우는 것은 문제없었으니까.
“귀한 내공을 고작 차 끓이는 데 쓰다니. 과연 듣던 대로 기재(奇才)는 기재군요.”
“손을 만나 차 끓여 대접하는 것만큼 중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을 베는 것보다 훨씬 귀한 일이죠.”
‘과연 일광은 일광이다’라고 돌려 까는 모용립에 대고 야밤에 찾아온 네놈 배때기에 칼 찌르는 것보다 낫지 않냐며 돌려 답하는 진천희.
겉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은 연신 부드러운 미소로 싱글벙글이다.
찻잔 속 찻물이 부풀어 오르며 황금빛을 자아냈다.
비록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우엉차이지만 약향이 그윽하기가 그지없었다.
같이 곁들였다는 약초향인가 했는데 우엉만으로도 이런 향을 만들어내는 게 신기하기가 그지없었고.
모용립은 한 모금 삼키고는 내심 감탄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차를 한 모금 삼키기가 무섭게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예는 갖추겠으나 빨리 본론만 말하고 꺼지라는 무언의 신호.
‘역시 듣던 대로 한성격 하는군.’
웃긴 건 의원으로서 사회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
그동안 이자가 해왔던 일들만 나열하면 꼭 무슨 머리 푼 광인 같은데, 만나 보면 제대로 예를 갖추고 있는 인간이라는 거다.
다만, 한성격 한다는 게 문제지.
“정사대전이 곧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맹주께 들으셨겠지요. 본 가에서는 백린의각과 동맹을 맞고 싶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 가문은 과거 제갈세가의 혈사에도 관여한 바가 없으며 그 이후에 제갈세가의 마지막 혈족인 백린의선께도 그 어떤 해를 끼친 적이 없지요.”
“…….”
“즉. 저희는 은원이 없기에, 가장 적합한 동맹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공손세가와 제갈세가, 즉 백린의각이 이미 동맹이라는 것은 아시지요? 때문에 공손세가의 의견도 필요합니다.”
즉.
네놈이 제갈세가와 은원이 없다고는 하나 동맹인 공손세가와는 은원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그 은원을 어떻게든 정리하지 않는 한 이쪽도 어쩔 수 없다는 뜻.
진천희의 대답을 들은 모용립이 답했다.
“저희는 백린의각에서 공손세가와의 동맹을 재고하고, 저희와 동맹을 맺기를 희망합니다.”
‘이거 참… 음흉한 인간일세…….’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는 모용세가가 공손세가보다 더 잘해줄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하나같이 대단한 이권들이었다.
그것을 양보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모용세가가 결심을 했다는 뜻.
일단 당장은 답하지 않는 게 좋겠지.
그저 웃으면서 그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칠 뿐.
“우선 스승님과 논의해 보고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글쎄요. 소각주께서도 그 정도는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알고 있습니다만.”
거기까지 알아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