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54
제 553화
‘이 사람들, 전쟁하자고 난리를 쳤던 거는 상대가 약해 보여서 그랬던 거였어? 참, 나…. 세외에서 3개 문파가 참전한다는 것만으로 저러고들 있는 거 보니 참…….’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진천희는 그냥 조용히 듣기만 했다.
‘설왕설래(說往說來)가 괜한 게 아니네.’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다들 얼굴에 핏대가 서 있었다.
‘무공을 익혀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다들 나이가 있으셔서 고혈압과 뇌졸중으로 쓰러지실 정도로 열을 내시네……. 무공 만만세야. 무공 아니었으면 이미 여기가 중환자실이 될 뻔했어.’
“저들이 양민을 해하기를 수년째가 아니오? 저들과 싸워 피해 입을 것을 두려워해서 의(義)와 협(俠)을 외면한다면 세인들이 우리를 정파가 아닌 모리배라고 볼 것이오!”
모용세가 가주 모용신. 그가 근엄하게 한마디 하면.
“아. 그러셔서 장강에 수재민이 생겼을 적에 양민을 안 돕고 도리어 식량 장난질로 돈을 버셨어요? 어이구, 그러셨구나.”
설견이 끼어들어서 비아냥거린다.
“설 방주! 그 이야기는 본 안건과는 관계없소만?”
“왜 없는 거요? 앙? 지금 대의명분 가지고 이 지랄들 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모용가주 당신이 그런 소리 할 건 아니지!”
“천둥벌거숭이 같으니…. 어린 나이에 방주가 되었다고 해서, 강호의 시류를 모르는가?”
“글쎄올시다~. 정보는 우리 개방의 몫인데 내가 시류를 모를 리가 있을까나?”
서로 반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혼잣말을 하는 건지 모를 화법으로 으르렁거린다.
진천희는 그걸 보고 생각했다.
‘음! 예전에 하도 많이 봐서 아무 감흥이 없네. 하기사 인간사 다 똑같지. 다만 여기서는 저러다가 칼부림 나서 서로의 멱을 따려고 드는 거고, 21세기 지구의 대학병원에서는 서로 ‘심정적인’ 원수가 되고 끝난다는 게 다르지만…….’
진천희는 지구 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대학병원의 교수쯤 되면 이런저런 프로젝트도 하고, 연구도 하고, 논문도 내야 한다.
대학병원장 및 이사들에게도 잘 보여야 하고, 수술 실패율도 낮춰서는 안 되는 고된 직업이었다.
돈이야 그럭저럭 잘 벌지만, 애초에 보육원 출신의 고아인 진천희는 다른 의사들과는 스타트 라인이 달라서 어디 가서 부자라고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그래도 가진 것 하나 없는 흙수저 출신으로 성공하긴 했다만, 연애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생활을 하던 중에 보게 되는 추잡한 일은 한도 끝도 없다.
접대다 뭐다, 예산을 주네 마네, 병상이 있네 없네, 간호사를 배정해 주겠네 안 해 주겠네…….
‘스승님도 참… 내가 애인 줄 아시나. 이런 거야 옛날 옛적에……. 하긴. 여기서는 이런 일을 거의 겪지 않았으니까. 스승님이 보시기에는 딱 좋은 경험을 할 기회였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산사차와 다과를 즐겼다.
“그래서. 소승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백린의각 소각주인 진천희 의원께서 직접 북해빙궁을 설득해 주면 어떨까…… 하고요.”
‘억. 갑자기? 뜬금없이? 잠깐. 내가 대화의 흐름을 놓쳤구나. 너무 다과에 집중했어. 이러면 안 되지. 합!’
현원전단신공의 놀라운 효능!
딴생각을 하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대화마저도 다시 기억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
그 결과.
진천희는 대화의 내용을 깨달았다.
사도련이 전쟁을 준비 중이지만, 무림맹 입장에서는 선제공격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
무림맹은 정파이며, 명분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다.
만약 명분 없이 사도련과 전쟁을 하려고 한다면…….
자칫 제3 세력이 끼어들 빌미를 줄 수 있다.
황궁이라든가, 황궁이라든가, 황궁 같은 그런 곳.
지금도 골드&실버 왕야가 세금도 제대로 안 처내는 민간 무력 단체 강호 놈들을 조져 버릴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나.
이분에게 있어 조선왕조는 꿈의 드림이겠지.
칼 좀 썼다 하면 죄다 벼슬길에 오르려고 무과에 응시하지 않던가.
하지만 여기는 강 to the 호.
벼슬? 그거 할 바에는 내공이나 더 쌓는 게 낫지 않나?
이런 미친놈들이 모여 있는 세상.
심지어 정사대전이라는 내전도 준비 중이다. 양민이 휩쓸릴 걸 생각하니 엿 같을 거다.
기왕 하는 김에 확 다 보내버릴 플랜을 짰을까요. 안 짰을까요?
때문에 무림맹의 포지션은 이렇다.
-저놈들이 우리를 빨리 공격하면 좋을 텐데.
즉. 선빵을 맞은 다음에야 ‘명분’이 생겨 사도련을 징죄할 수 있다는 것.
‘여기서 문제점은 사도련이 동맹 세력을 전부 끌어모으는 데 걸리는 시간이겠네. 지금 동맹을 맺는 와중이라고 했으니… 아직 교섭 단계일 거고. 교섭 다 끝나고 무인들이 모이려면……. 허이구. 정사대전 나려면 적어도 일 년은 걸리겠네. 이게 리얼 타임 무림 세계의 시간선이구나. 오래 걸리네.’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것처럼 구는데 석유 연료를 안 쓰는 세계라 그런가.
일 년 대계 정도는 당장 할 것처럼 구는구나.
현대인은 참 다행인 것이에요.
여기까지 생각한 것이 또 눈 두 번 깜빡거리는 사이였다.
‘하긴. 뉴튜브를 보면 성을 둘러싼 공성전만 해도 일 년이고 이 년이고 걸렸었다고 했으니까…. 그동안 북해빙궁 쪽은 동맹에서 탈퇴시켜 보자는 게 독고선 총군사의 계책이라는 건가? 그리고 그걸 나한테 시키고 싶은 거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야? 이 사람들 참 날강도 같은 심보네.’
차를 호록 마시며 이다음 파트를 생각하는 데 걸린 시간이 눈 세 번 깜박이는 정도.
진천희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흡사 산수화를 그리듯 차분하게 혀를 놀렸다.
“신승께서 권하시니 따르는 것이 마땅하지만, 저희 백린의각은 본시 맹에 속하지 않으며 사파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희가 북해빙궁에 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아닐는지요.”
어딜 공짜로 부려 먹으려고 들어? 뭔가 내놔 봐요.
진천희의 속내는 이랬다.
“진 소각주. 자네는 강호 평화를 위한다는 생각이 없는가?”
하북팽가(河北彭家)의 가주 팽도천.
그 역시 천하 십 대 고수에 버금가는 고수이지만, 해사방주에게서 도왕의 이름을 빼앗지 못하고 있던 자다.
그의 말에 진천희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언제나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양민들을 치료하고, 그들이 병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예방 정책을 진행하고 있지요.”
동문서답 같지만 그 말에 숨겨진 의미는 이러했다.
응~ 나 너희들보다 사람들 더 많이 살려. 너희들이나 잘해~
그런 의미를 알아들은 것일까?
팽도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자자. 너무 그렇게 날을 세우지 않는 게 좋지 않겠소? 백린의각은 맹에 속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정파라고 할 수 있는 곳이오.”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가주 남궁철.
남궁운이 자라면 저렇게 될 것 같다 싶은 호남형의 미중년이었는데, 그의 말에 팽도천은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진주언가의 가주 언권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당파의 장문인이 언권에게 맞선다.
그렇게 다시금 서로 말로 싸우기 시작한다.
진천희는 회의장의 사람들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맹주는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였고,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철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서로를 향한 호의, 질시, 분노, 증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엉키는 것을 보며.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와, 이렇게 고수가 되고, 권력도 쥐고, 나이를 먹어도 결국 사람은 다 똑같구나.’
어차피 전쟁을 막을 수 없다.
숙신족의 전쟁도 그러했으니까. 이번 전쟁은 그때와는 달랐다.
사도련과 무림맹.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꺾어야만 하는 전쟁인 것이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과는 꽤나 다르다.
어찌 보면 내전에 가까운 일이었고, 강호라고 하는 특수한 집단의 싸움일 뿐이다.
‘내려 놔야겠구나. 내가 모두를 지킬 수 없어. 언제까지나 이들의 싸움을 말릴 수도 없지.’
거기까지 생각한 진천희가 입을 열었다.
“저희 백린의각이 북해빙궁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다들 조용해진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말해 보게.”
맹주 악진의 말에 진천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강호를 이끌어 나가는 이 자리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백린의각은 만민 의료 복지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바,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 북해빙궁과 교섭을 할 의향이 있습니다.”
온화한 표정으로 주변을 쓱 한번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신다면 저희 백린의각은 기꺼이 북해빙궁과 무림맹의 가교 역할을 하겠습니다.”
화사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말을 해나갔다.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나?”
“토지를 주십시오.”
“무엇이?”
“아니. 토지라니?”
웅성웅성.
어떤 이는 분노하고, 어떤 이는 차분하다. 그러나 다들 진천희의 발언을 곱게 보지 않고 있었다.
“다들 조용하시오.”
맹주 악진이 내공을 실어 나직하게 말하자, 다들 그제야 조용해진다.
그러자 신승 원선 대사가 입을 연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진 시주가 단순한 사리사욕을 위해서 토지를 요청하지는 않았을 터. 무엇을 위해서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이 노승이 알 수 있겠습니까?”
“약초밭을 만들려고 합니다. 지역이 다르면 기후가 다르고, 기후가 다르면 토양도 다르지요.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는 갑이라는 약초가 잘 자라는 반면, 어느 지역에서는 을이라는 약초가 잘 자랍니다.”
“약초라?”
“네. 만민 의료 복지를 위해서는 더 많은 양의 약재를 더 값싸고, 더 질 좋게 생산해야 하죠. 도심 지역의 토지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각 문파에서 가진 것들 중에 외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의 토지를 주시면 됩니다. 단, 약초 재배에 용이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겠죠.”
진천희의 말에 대다수의 표정은 이랬다.
‘이 새끼 진짜 미친놈이네…….’
“그럼. 저로서는 더 이상 이 회의에서 할 이야기는 없는 듯합니다. 부디 저의 의견을 심사숙고해 보시고, 이후 저를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천희는 포권을 하고서, 걸어 나갔다.
진천희가 회의실을 나갈 때까지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 * *
다들 엄청난 복안이 있는 줄 안다.
진천희는 제갈세가니까. 제갈세가의 신묘한 계책을 뒤에서 꾸미고 있을 거라고.
정작 진천희는.
‘크큭, 질러 버렸나. 진정해. 내 안의 K-드래곤!’
방금 저질렀던 짓에 약간 좀 후회가 들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작은 진천희들이 ‘방금 행동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이거 엿 되면 책임지실 거예요?’ 하면서 청문회를 열고 있고, 몸뚱이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백린의각 치료소를 향해 운전 중이다.
화주의각 때도 그랬지만 현대인은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대화가 안 된다.
뭐, 그런 이야기 있지 않나.
저 지구 어딘가에는 ‘꿈’이라는 단어가 그 나라 말로 없는 곳이 있다고.
마을 사람들도 중세 정도 수준으로 살고 있고, 통신 장비? 이런 건 당연히 없고.
근로기준법이나 인권 자체가 없는 세상에서.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 자체가 그냥 모르는 말이라고.
개념이 없으면 설득도 요원하다.
‘그래. 너희들끼리 싸워라. 안 말리련다. 혈선교가 파 놓은 함정도 아니고, 지네들끼리 치고 박겠다는데……. 내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말리겠냐. 북해빙궁 설득하는 것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나도 몰라.’
관무불침 카드는 쓰지 않는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어차피 자신은 스승님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귀계가 있겠나.
이번 싸움에서는 공손세가나 금혈방처럼 체질이 개선되어 전쟁이 더 손해를 보는 구조로 몇 문파를 포섭한 것까지.
대충 반까지는 아니어도 30% 정도 뚝 떼서 평화를 외치게 한 것까지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싸우고 싶어 죽겠다는 놈들 말리는 것도 어지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