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601
제 600화
북해빙궁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
대전(大殿).
진천희는 발밑에 난 긴 검흔을 본다.
진천희 자신이 빙정검으로 그은 자국.
그러다가 문득 그 위로 희미하고 날카로운 두 줄의 검흔을 보았다.
‘아, 이건 스승님이다.’
무인들이 모여 있을 때는 가려져서 볼 일이 없었는데, 두 줄의 검흔은 스승님의 특징이다.
그때는 괜찮은 명검도 없이 남이 준 철검을 썼다 했는데, 그걸로 이렇게 오랫동안 흔적을 남길 정도면 당시 스승님이 몹시 화가 나셨던 모양이다.
그 자국을 이제 제자가 밟고 선다.
대전 한복판을 궁주, 소궁주 그리고 혈선교의 십천군 두 명이 가로막고 있었다.
조천군과 금광성모.
허나.
‘교주는…… 역시 없어.’
진천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그자는 결정적인 순간에만 나타나는 성정인가 보네. 천마님이 등선을 앞두고 ‘인과율’인가 뭔가 때문에 크게 활동을 못 한다고 했는데. 교주 역시 비슷한 제약이 있다고 봐야겠지.’
천마님만큼은 아니더라도 힘을 마구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세계는 혈선교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터이니.
‘그래. 그러니까… 수호교의 심장인 성지(聖地)를 오염시키고 장로들까지 전부 도살하는 수준의 이득이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가.’
겉으로 보았을 때는 하는 행동 모든 것이 유들유들하기 그지없으나, 그 행동은 지극히 이성적인 자.
‘그래. 지존천마에서 여하륜이 싸웠던 곳도 북해빙궁이었으나, 당시 혈선교주가 나타나진 않았지.’
거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북해빙궁 그 자체는 그리 혈선교주에게 득이 되는 장소는 아니라는 뜻.
그렇기에 그만한 이득을 남기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데에 걸고.
다시 행마를 움직였다.
도박은 성공했다.
“그르르륵-”
문득 가운데에 있는 소궁주의 상태가 안 좋은 게 느껴졌다.
입에서 거품을 흘리면서 살기를 뿜고 있으나 이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거기에 궁주까지.
“……그으…… 그어어-”
상체가 좌우로 흔들린다.
그걸 본 성녀가 충격에 휩싸였다.
“아버님이… 광혼인이 되었……? 아, 아버님!”
충격으로 그녀의 몸이 쓰러지려 하자, 공손영이 급히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성녀!”
“아, 아아아…….”
궁을 잃고, 사람을 잃고, 친한 이들을 잃고, 마침내 광혼인이 되어 꼭두각시 노릇까지 하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그녀는 오열하는 것조차 잊었다.
그 모습을 조천군은 비웃는다.
“크크큭, 예상외였다. 분명 네놈들은 천빙산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성녀가 고집을 꺾은 모양이지?”
‘역시나 이놈들이 정한 무대는 거기가 맞구먼.’
진천희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제가 점을 보니, 천빙산의 방향이 불길하다 나왔지요!”
“뭣이?! 고작 그런 이유로 안 갔단 말인가!”
“선조께서는 동남풍을 불게 하여 전장을 바꾸었고, 오장원에서 별이 떨어짐을 보고 미래를 깨달았습니다. 그 힘이 제게도 있는바!”
“네놈은 거진 양자잖느냐! 무슨 피가 흘러서 힘이 있다는 거냐!”
진천희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후, 보이십니까. 성녀님. 제 점괘가 맞았습니다. 갔으면 거대한 흉성이 내려와 우린 전멸이에요.”
그렇게 말하니 조천군이 뜨끔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휴…… 흉성?”
혈선교주를 떠올리는 게 틀림없다.
조천군이 말했다.
“빌어먹을. 천기가 흐트러진 이때에 대체 무슨 수로 점괘를 적중시켰는지 모르겠으나, 여기까지 맞혔으니 믿어 주어야겠군.”
“크헤헤헷!”
진천희는 일부러 밉살맞게 웃어 보였다.
조천군은 그런 진천희를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네 말대로 북해빙궁에 왔으니 흉성은 오지 않는다. 귀찮고, 비합리적인 일을 싫어하시거든.”
약간 상사를 까는 듯한 말을 흘리고는 조천군이 말했다.
“어찌 되었건 이미 궁주와 소궁주의 힘을 개방시킨 지금. 그렇다 하더라도 네놈에게 승산은 없다!”
공손영이 일갈했다.
“궁주를 세뇌시킨 건가! 다른 광혼인들처럼!”
“아, 혹시나 해서 그런데 그런 건 아니네. 고(蠱)를 쓰지도 않았고. 그저 욕망에 조금 더 솔직하실 수 있도록 부추긴 것뿐이야. 아들을 되살리고, 북해빙궁을 더 위대하게 하고 싶다는 망상을 부채질한 것뿐. 아, 그리고 그건 일광. 네 덕분이기도 했지.”
“흠? 저요?”
“네놈이 빙정검을 들고 무명을 떨치면 떨칠수록 심마는 더욱 깊어져 갔으니 말이다. 그 자리가 자신의 아들 자리였어야 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하하핫!”
진천희가 말했다.
“부질없는 망상이군요.”
“뭐, 어떤가. 그래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토록 욕망에 솔직한 모습이라니.”
“그르르륵-”
인간의 언어조차 잃고 북해빙궁주는 낮게 울었다.
“욕망에 솔직하다기에는 짐승 그 자체로 보이는데요.”
“뭐. 비슷하다 할 수 있지. 혈선교 본연의 모습 아닌가.”
성녀가 낮게 뇌까렸다.
“미친 새끼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이었다.
그리고 성녀는 하나 남은 팔로 석장을 움켜쥔다.
“소의선님, 그리고 공손영 대협. 비록 제가 팔 하나를 잃었다 할지라도,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켜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 미친놈들을 반드시 처단하지요.”
목소리에 울음기가 조금 남아 있었지만 진천희는 일부러 모르는 척 답했다.
“알겠습니다.”
조천군은 성녀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다.
“크하하핫! 가장 먼저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던 규중의 꽃이 의외로 잡초였군그래. 아닌가, 잡초로 만든 것은 바로 네 녀석, 반선의 씨앗인가?”
“…….”
“이렇게 된 거, 자네들을 모조리 죽여 천빙산을 더럽히리라!”
조천군이 카두세우스의 지팡이를 흔들자, 주변에서 용린인 스무 명이 나타났다.
크륵-
기묘하게도 이들은 제대로 혈선교의 무복을 입고 있었고.
눈빛도 또렷하여 이성이 있어 보였다.
“용린인에게 이성이 있다니?”
공손영이 어이가 없어 묻자 조천군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용린인? 우리는 혈아룡이라고 부르는데 사람(人) 취급을 하는군. 뭐, 혈룡체의 하위 단계일세. 혈룡의 힘을 조금이나마 이어받은 자들이지. 본 교의 정예들 중 혈선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니 쉽지 않을 게야. 끌끌끌끌.”
그는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 쳐라!”
적들이 밀려들어 온다.
* * *
사고가 가속된다.
주변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그 찰나의 순간에서 진천희는 생각했다.
‘용린인은 공손영 누나, 왕자, 성녀가 맡는다. 궁주와 소궁주는 하륜이가. 그리고 조천군은 내가! 좋아. 오케바리~’
생각을 끝냄과 동시에 각각의 사람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육합전성이라고 부르는 기예!
한 번에 여러 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술이다.
[누나. 왕자와 함께 성녀를 지켜 줘요. 용린인들을 상대하면 됩니다.] [성녀님. 방어에 치중하세요. 궁주는 하륜이가 쓰러트릴 겁니다.] [왕자님. 성녀를 지키세요.] [하륜아. 궁주와 소궁주를 처리해 줘.]그리고 답변을 듣기도 전에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목표는 조천군!
‘우선은 원거리.’
고속으로 내달리며, 손을 뻗는다.
탄지천통 유유기탄.
타타타탕!
기탄이 번개처럼 날아간다.
그러나 어느샌가 나타난 신물에 의해서 기탄은 허공에서 막혔다.
터터터텅!
‘저건 뭐야!’
그것은 방패였다.
반원형의 그것은 금속을 두드려 만든 방패였는데.
놀랍게도 하늘을 스스로 비행하며 기탄을 막아낸 것이다.
물론 막아냈다뿐이지 손상을 입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기탄에 가격당한 철판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놀라운 모습이었지만, 진천희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빙정검을 꺼내들고 덤벼들었다.
콰쾅!
방패가 빙정검을 막아선다.
“하하핫! 이 조천군은 본시 서대륙 사람이지. 불로불사를 찾아 이곳에 오면서 가진 힘을 전부 소실하고 말았다만, 동대륙의 주술을 익혀 이 정도는 가능하게 되었다네.”
방패 뒤에서, 조천군이 즐겁다는 듯이 말하더니 품에서 부적을 꺼내어 땅에 내던졌다.
그리고 그 호흡에 맞춰 카두세우스의 지팡이를 땅에 찍었다.
“일어나라. 토용병이여! 옛 황제를 지키듯. 나를 지켜라!”
우드드득!
흙과 돌이 뭉쳐진 지면이 불쑥 일어선다.
‘진시황릉의 토용병!?’
사람의 형상의 흙 인형들.
이 토용병이 진시황릉에서 나온 건지 아니면 옛 고대 황제의 것들 중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으나 토용병까지 부릴 줄이야!
‘내가 세외에 있긴 하구나.’
완농에서 느꼈던 충격을 다시 느끼고 있다.
다행인 건지, 이 조천군이라는 놈은 그동안 싸워왔던 십천군들 중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놈으로.
싸우는 와중에도 자기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그래. 십천군 중에 제정신인 놈이 하나도 없었지.’
심지어 생포한 금천군조차 영혼을 수없이 바꾸는, 제정신이 아닌 사술 속에 자신을 노출하지 않았나.
이놈도 본인 정신을 깎아 먹을 사술을 수없이 써왔겠지.
‘일단, 이놈이 서대륙 출신이라는 게 가장 귀찮은걸? 주술도 완농에서나 보는 그런 주술이 아니야. 완전히 체계가 달라. 덕분에 까다로워졌어.’
진천희 자신도 치료사들을 통해 주술에 대해 공부를 했긴 하나, 조천군이 쓰는 주술은 그중 가장 이질적이었다.
‘강호 왔으면 너는 사술(邪術)이라고 공적 됐을 거다.’
뿌리가 없으면 사술(邪術)이라고 하는 게 이 바닥 아닌가.
꼬우면 본인이 천하 십 대 고수 자리까지 가서 개파조사 해보든가!
쿠그그극!
토용병들이 빠른 속도로 밖으로 튀어나왔다.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무려 열 기가 튀어나온 것!
그사이, 조천군은 아주 빠른 속도로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실전을 꽤 해본 솜씨.
그리고 뒤쪽에서는 진천희의 동료들도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시간을 지체해서도 안 돼!’
희생을 줄이려면 한시라도 빨리 조천군을 제거해야 한다!
초월심무 인의.
초월심무 생사예지.
그 두 개의 절대절학이 발현되고, 진천희의 두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나며 반짝인다.
그 순간, 수없이 많은 ‘진천희’들이 ‘진천희’에게 속삭였다.
‘하륜이는 역시 강해.’
‘누나가 성녀와 왕자 쪽에 합세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겠어.’
초월적인 인지능력과 사고능력이 발현되자, 진천희의 의식이 쪼개진다.
‘금광성모가 없어?’
‘이번에도 도주한 걸 보면, 서포트 전문의 십천군인가. 하긴. 축지법 같은 술법을 쓰던 걸 보면 그럴지도.’
‘일단 조천군을 먼저 제압해야겠어.’
‘저거 아무리 봐도 판타지 소설에 단골로 나오던 마법 방패 같은 거 아냐?’
‘이 새끼…… 연금술사면서 마법사였다가 주술사로 전직했구나?’
‘일단. 토용병부터 시험해 보자.’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탄지천통을 쏟아냈다.
그러나 토용병들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갈 뿐이지 그들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관통은 안 통하나? 그렇다면…….’
진천희의 검에 새파란 검기가 서린다.
그의 진기를 받아먹고, 빙정검이 한음지기로 변환시킨 것이다.
한음지기의 검기가 토용병을 가르자, 그대로 얼어붙으며 허물어진다.
‘기운이 침식해서 주술을 깨트린 거로군! 좋아. 검으로 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