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674
제 674화
뿌옇게 뜬 시야를 소매로 닦으며 진천희가 급히 천우를 불렀다.
“스승님……!”
천우가 우당탕 들어온다.
“녀석, 제 스승이 곧 죽는다는데 기운이 팔팔하구나.”
“……너무하십니다. 스승님. 어떻게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허허헛! 마지막까지 놀려 먹는 맛이 있는 제자로고.”
권제께서는 그리 말하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천우야. 좌선을 하고 등을 돌려라.”
그 말의 뜻을 천우는 곧바로 깨달았다.
“스승님, 설마? 아니 됩니다! 아니 됩니다!”
“어서! 이 스승의 명을 거역할 생각이냐!”
“하다못해 장문인께…….”
“그놈에게는 이미 말해 두었다. 너로 정했다고. 알아서 하라더구나. 언제는 사숙이 자기 말 들었냐고. 다른 장로 놈들도 마찬가지고.”
“다른 제자분들도 있잖습니까.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 태반이 죽었지만 개중에는 살아있는 놈도 있지, 하지만 무당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갔던 놈은 네놈밖에 없더구나.”
“스승님.”
“네 녀석은 사형들 대신 전쟁터로 갔지, 그리고 사형들 대신 파계한 무당파 제자들을 처리하러 다녔어. 타락하여 흑도들과 함께 양민들을 괴롭히는 놈들로 변절했지만. 허나 한솥밥을 먹던 사이다. 그들을 처단하는 게 어디 쉬울 성싶으냐.”
“……!?”
진천희가 눈을 크게 떴다.
천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하지 않았던 이유.
“그로 인해 모든 무당의 도인들이 너를 배척했어도 너는 묵묵히 했다. 무당의 우(愚)는 무당의 손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어느 도문이든, 불문이든 파계하고 흑도로 변절하는 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변절한 자를 누군가는 처리하러 가야 했다.
흑선도. 줄여서 흑선.
무당에서는 그렇게 처리하러 가는 자를 그리 불렀다.
허나, 그런 일을 도맡아하는 자는 당연히 같은 문파 내에서도 쉬쉬하며 배척하게 되기 마련.
그걸 맡은 게 천우였다.
천우가 말했다.
“그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간 것입니다. 달리 무당을 위해 간 게 아닙니다. 스승님.”
천우가 속내를 끄집어낸다. 자칫 위험해질, 무당에서 말해서는 안 될 속내였다.
이런 상황이 아니면 결코 말하지 않았을 속내.
허나, 권제는 그저 웃는다.
“그래. 그게 나의 길이다. 내가 언제 무당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보았느냐. 나는 언제나 나를 위해 움직였고. 그렇기에 자유로웠다.”
“그래서 장로님들이 싫어하시죠.”
“꼬우면 덤볐겠지. 크크크큭-”
권제는 옛 과거를 회상하며 웃는다.
“그래도 내 집터다. 날 위해서 한 것이지만 무당에 해가 될 일은 그리 하지 않았다. 정형이 그놈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만.”
권제는 허리를 편다.
방금의 기력 없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곳에는 한 명의 무인이, 그리고 전설이 있었다.
“천우야. 어서 좌선을 하고 등을 돌리거라.”
“……스승님.”
“어서! 이 스승의 명을 거역할 생각이냐. 천희야. 네가 이 일의 증인일 것이다.”
진천희는 이를 악문다.
“…….”
꽉 쥔 주먹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거인이. 무당의 거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아갔던 그 흔적을 후인에게 남기려 하고 있었다.
그 무게에 젊은이는 어깨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것이 발자국인가.
무학의 끝.
생의 끝.
산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인간의 마지막 메아리였다.
천하 십 대 고수이자, 하늘에 닿기 위해 평생 갈고닦아온 자의 메아리.
천우가 고개를 젓는다.
“전…….”
“이것은 무당을 위한 일이기도 하느니라. 스승의 마지막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허나 그의 무학으로는 역부족이었음을 권제는 알고 있었다.
무엇이 부족했을까. 생사결이 부족했을까. 타고난 오성이 부족했을까?
어쩌면 운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부족한지는 모르나, 타협은 없다. 주어진 시간을 다 쓰지 않았나.
백 년이면 받을 만큼 받은 셈이다.
어린 제갈이 어떻게든 연명할 수 있도록 머리를 짜보겠다 부추기지만 노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미망(迷妄)이다.
여기서 억지로 시간을 늘리는 데 집착하면 그것이 미망(未忘)이 되어 평생을 잡아먹게 될 것을 노인은 알고 있었다.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것은 미망이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다.
명길진인이 아니다.
무당권제가 아니다.
허나, 이 착한 의원 놈은 그것을 모른다.
죽음을 앞둔 노인, 그것도 무인인 자의 망집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 망집을 억누르며 노인은 말한다.
“나는 너를 남기고자 하니. 그러면 된 것이야.”
아아, 시간은 어찌하여 이리도 짧은 것인가.
명길아. 아둔한 명길아.
백 년을 쓰고도 하늘에 닿지 못하는 아둔한 태극이여.
권제의 몸에서는 알 수 없는 위엄이 쏟아져 나왔다.
천우는 결국 이기지 못하고 권제의 앞에 좌선을 했다.
“그래. 착하지. 이놈아. 이 흉악하고 어린 태극아.”
그리 말하며 권제께서는 든든하다는 듯 천우의 너른 등을 한번 쓸었다.
‘그래. 이 등이었지.’
처음에는 무당파에 입문한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 등이었다.
아이는 모든 게 미숙했다.
누구보다 눈이 뛰어나지만, 하나밖에 없었고, 하나밖에 없으니 거리감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부족했다.
일합, 고작 일합으로 생사가 갈리는 강호에서 거리 가늠을 못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큰 단점이었다.
‘금방 떨어져나가리라 생각했다. 천우야.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속가제자가 되거나, 아니면 속가제자도 되기 전에 도망치리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지.’
천우의 손등은 한 번도 깨끗한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떠난 자리.
딱, 따닥, 딱!
혼자서 목인을 두드리며 혈도를 외우고, 다시 두드린다.
손에 가시가 박히는 일이야 무수히 많았고, 아픈 티를 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강해진 천우를 다른 무당의 아이들이 괴롭혔다. 권제는…….
‘그 또한 무인(武人)이 되는 과정.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차라리 검을 쥐지 않는 편이 좋다.’
그저 지켜볼 뿐.
그는 당시 썩어가는 무당에 신물이 나던 때였다.
허나 먼저 엎을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영 마음에 들지도 않던 때. 늙은이 투덜거림이나 하던 때.
그날 밤 봤다.
빡, 빠악!
천우가 자고 있던 사숙 놈의 다리를 분질러서 질질 끌고 가는 것을.
사숙은 입에 재갈까지 물고 있어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놈이 다른 애들을 시켜 천우를 괴롭히던 주모자였으니까.
20:1의 싸움.
아직 천우는 거리감이 없다.
눈으로는 볼 수 있으나, 그 거리를 가늠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주모자부터 족친 것.
기껏해야 하정진인이나 붙잡아 이를 줄 알았는데, 이놈은 미친놈이었다.
어린 천우는 권제의 시선을 느낄 수 없다.
-뭐지? 기분 탓인가?
당시 배운 게 별로 없을 때기도 했고 아득하게 높은 경지의 권제를 놈이 무슨 수로 알겠나.
그러나 그때 놈은 기묘하게도 권제가 있는 곳을 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이윽고 고개를 한번 휘휘 젓더니 다시 그 사숙을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다음 날, 그 사숙 놈은 수련 중 부상을 핑계를 무당산을 내려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딱, 따닥, 따닥.
그리고 그날 밤 천우는 다시 혼자서 목인을 두드렸다.
새벽에는 마보 자세를 유지하며 기초 체력을 키우고, 밤에는 목인을 두드리는 따분한 나날.
권제가 가끔 마실 다녀올 때마다 그 아이는 거기서 목인만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은 목인 대신 자신을 괴롭혔던 사숙을 두들겨서 어딘가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사숙은 두 번 다시 무당산에 돌아오지 않았다.
정신 차려 보니 아이들 중에 누구도 천우를 괴롭히지 않았다.
당연했다.
천우를 괴롭히면 왜인지 사라져 있으니.
천우의 도복은 이제 똥통에 담기는 일이 없었고, 신발에 벌레가 잔뜩 채워지는 일도 없었다.
누구도 어른에게 말하지 못했다.
천우는 증거를 절대 남기지 않았으니까.
독한 새끼였다. 그리고 약은 새끼였다.
딱, 따닥, 따닥.
이놈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천둥이 쳐도 다시 목인을 때린다.
권제가 보기에 이놈은 거리감을 본인 팔 길이로 익히고 있었다.
그걸 몸에 박아 넣는 과정.
암기로는 안 되고 본능에 각인하다시피 해야 되는 그 과정.
그렇게 해도 두눈박이 강호인들을 못 따라갈 수도 있다.
그 미친 짓을 어린놈이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수련하며 웃는 일은 별로 없다.
가끔 형님에게 서신이 오면 한동안 기분이 좋아서 목인을 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고, 마침내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고.
정신을 차려 보니 직계 제자로 삼아 매일 가르침을 주고.
-무당파를 대신하여 흑선도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무당의 검으로서 무당의 가르침을 버린 자들을 이 손으로 거두려 합니다.
-네. 한동안 파계한 사숙, 사질들을 만나 볼 듯합니다.
거친 태극은 어느새 노인보다도 훌쩍 커졌다.
큰 키로 세상을 내려다보며 오만 따위는 모른다는 듯 뚜벅뚜벅 걸어갔다.
무당은 비록 도를 닦는다 하나, 검수가 되면 살인은 익숙해진다.
허나, 안면도 없는 흑도를 베는 것과 한솥밥을 먹었던 자들을 베는 것은 다른 무게.
모두가 천우를 꺼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천우의 몸에서도 피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할까요? 사부님.
-그렇군요. 이 또한 무인으로서의 길. 알겠습니다.
이 영악한 듯 아둔한 놈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과거 권제가 갔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딱히 무당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면서도.
‘가장 무당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바보 같은 놈.’
-형님께서 곤경에 처한 듯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도인인데 어찌하여 살생이 끊이지 않는 걸까요.
그 답은 권제도 모른다.
이 아이는 남보다 험한 길만 골라가면서도 우는 법이 없었다.
-사부님. 오늘은 배꽃이 아름답군요.
-아직도 유능제강은 어렵습니다. 어찌하여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지 머리는 알고 있으나 몸은 터득하지 못한 듯합니다.
-……사부님. 제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습니까?
아아, 이 개 같은 놈은 언제나 자신을 사부로 여겨서 따라왔다.
다른 제자들은 죽거나,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리곤 했는데 끝까지 붙어서 스스로 진창을 굴렀다.
“바보 같은 무당의 아이야.”
그러고는 천우의 등에 격체진력으로 내공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무당을 위해 살지 말거라. 그저 나처럼 무당에 해를 입히지 않는 것 정도면 족하다. 우리는 검은 머리 짐승 아니더냐. 그러니 은혜 따위는 잊어라.”
도인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내가 주는 것도 결코 은혜가 아니다. 말년에 네놈이 재롱 떨어준 값을 이제 갚는 것뿐이니. 우리는 서로에게 빚이 없다.”
그 말에 천우가 말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저는… 스승님을 줄곧…….”
“입 다물어라. 곧 진기를 불어넣을 것인즉. 너는 나를 잊어라. 내 가르침은 남기고, 나를 잊고 나아가면 된다.”
그렇게 내공을 넣으며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천지간에 태극뿐이라 하였으나, 그 태극은 우리가 생각하는 음양과는 또 다른 태극이니, 밀고 당기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구결.
권제께서 마지막으로 얻은 깨달음을 천우와 진천희에게 전수하는 것이었다.
영원 같던 찰나가 계속되었다.
마침내 마지막 내공까지 전수를 마치고는 권제께서 손을 떼었다.
그는 미소를 지은 채 좌선을 했다.
노인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살았다.
천우가 보였다.
어리고 난폭한 태극은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렇군. 내 백 년의 시간은 너를 만나기 위해 있었던 거였어.”
이제야 인연(因緣)이라는 놈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다.
그럼에도 즐겁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십 년이, 열 번의 봄이 그를 이끈다.
그럼에도 인간의 욕심은 만족하는 법 없이.
‘너를 더 일찍 거두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래도 즐거웠다.
어린 우수(雨水)가 선물한 열 번의 봄.
열 번의 봄이 너로 인해 즐거웠어.
그러니 너무 울지 말게나.
어린 제자여. 어린 벗이여.
“……즐겁게 노닐다 가는구나.”
권제는 마지막 숨을 내쉰다.
기울어지는 법도 없이 그렇게 앉은 채로 숨이 끊어졌다.
“스승니이이이임!”
천우가 오열하며 권제를 끌어안았다.
무당의 거인이 하늘로 떠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