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78
제 78화
진천희는 백린의각 청송 지부의 다른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주님을 살렸어. 이것만으로도 내가 아는 미래는 많은 부분이 달라지겠지. 괜찮을까?’
진천희의 가장 큰 무기는 정보다. 미래에 대한 정보.
방주님이 살고, 그의 제자인 설견이 차기 방주직에 올랐다.
나비효과가 되어 많은 게 변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그래. 결국 나는 또 눈앞의 목숨을 살리겠지.’
의원이란 참 박복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기에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픈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 외의 다른 걸 생각할 겨를 같은 건 없었다.
‘그래. 그래서인지 내가 생각도 못 한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잖아.’
이번에는 그래도 성공했다. 노사님은 계속해서 무공을 쓸 수 있을 거고, 그 제자는 심마에 사로잡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투닥이는 모습을 떠올리자니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건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래.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다시 살릴 거야.’
답은 변하지 않았다.
진천희는 후원 너머 가장 구석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각을 운영한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강호의 은원에 얽혀야 함을 뜻한다.
원수지간의 두 무인이 서로 칼침을 놓고 동시에 실려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아무리 의각은 해검지(解劍地)라고는 해도 사람 마음이라는 어떻게 돌아 버릴지 모르는 거고, 무기가 없어도 이미 강호의 무림인 자체가 인간 병기 아닌가.
그러다 보니 처음부터 서로 볼 일 없게 병실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고 동선도 최대한 분리시키도록 구조를 만들어 놓는다.
겉보기보다 꽤나 복잡한 구조다.
연차가 쌓인 베테랑 의원도 가끔 길을 잃곤 하는데, 그렇게 길을 잃다가 숨겨진 비밀 병실을 발견하기도 한단다.
특히나 여기는 그냥 의각도 아니고 백린의각.
제갈가는 기관식과 진법의 명가다.
본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방 분타들도 제갈린이 직접 구조를 설계해서 만들었다.
진천희는 후원의 뒤뜰, 길을 몇 번 빙글빙글 돌아가다가 마침내 원하는 곳에 도착했다.
자그마한 별채다. 나무의 배치가 절묘해서 다른 각도에서는 별채가 보이지 않는다.
기밀을 요하는 환자가 머무는 곳이다.
진천희가 문 앞에 다가가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왔어?”
왕각연이다. 계속 지키고 있다가 진천희를 알아보고는 경계를 푼 모양이다.
“응. 왔어. 그리고 고마워.”
“넌 늘 고맙다는 말만 하더라.”
왕각연의 말에 진천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 외에는 할 말이 없는걸.”
“백린신단값은 아직 못 했어, 바보야. 그런 걸 줬으면 날 더 부려 먹으라고.”
백린신단.
왕각연에게 쥐여 주고 너 안 먹을 거면 황구 준다고 협박했었다.
당시만 해도 다친 친구에게 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녀에게는 의미가 큰 모양이었다.
“염증 가라앉았으면 다행이지, 뭐.”
“상처가 다 나은 건 둘째 치고 내공이 올랐어. 대체 뭐야? 그 신단.”
응, 페니실린.
지구에서는 흔하디흔한 항생제인데 무림에 와서 만드니 신단(神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지구에서 사용하는 전기 모터 대신 고급 인력을 갈아야 해서 만드는 건 죽을 맛이지만 효과 하나는 직빵이다.
진천희가 말했다.
“그래도 고마워.”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진천희는 그런 왕각연에게 대답 대신 눈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주렴 안에는 침상이 놓여 있었다.
침상 안쪽에는 한 소년이 잠이 들어 있다.
리틀 천마, 여하륜.
‘각연이에게 부탁한 건 참 잘한 일이었어.’
진천희는 약 기운에 잠든 여하륜의 곁으로 다가갔다.
개방을 도와주는 동안 왕각연은 여하륜을 수색했다.
그러다가 동굴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놈을 발견해 옷을 갈아입히고 의각 분타에 은밀히 옮겨 놨다.
마침 여하륜이 쓰러지기 직전, 곰을 잡아 죽인 터라 말을 둘러대기는 쉬웠다.
여하륜은 겁도 없이 곰에게 덤벼든 어린 삼류 무인으로, 다만 부각주인 진천희와 관계가 각별하여 비밀리에 별채를 빌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놈을 옮긴 직후, 왕각연은 이렇게 전했다.
‘걔 미쳤더라. 그 몸으로 곰도 때려잡았어.’
칼날도 부러진 터라 주먹으로 팼단다.
그렇게 여하륜을 옮기고, 일차 치료가 끝난 개방의 선대 방주님도 의각으로 옮기고.
진천희는 양쪽을 왔다 갔다 오가면서 함께 치료를 한 셈이다.
‘스승님은 진짜 대단해. 제갈가의 진법은 개방의 눈도 속이니.’
물론 선대 방주는 요양 중이고, 신임 방주는 그 선대 방주를 간호하는 중이니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긴 하다.
그래도 진천희는 자신의 사부님을 향해 원 따봉을 날려 주었다.
진천희는 리틀 천마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고는 진맥을 시작했다.
약 기운 때문인지 녀석은 손목이 붙잡혔는데도 푹 자고 있다.
“크으, 이 정도면 거진 다 나았네. 후, 나도 참 대단해. 선대 개방주를 구하고, 아무도 모르게 이놈도 치료했으니.”
스스로 자화자찬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울렸다.
“그랬구나, 희야. 몰래 치료를 했구나. 이 스승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익숙한 목소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스승님……?”
그와 동시에, 분명 약에 취해 잠들어 있어야 할 여하륜이 눈을 떴다.
“야, 어……!”
진천희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여하륜은 손에 집히는 것을 던졌다.
카앙!
나무 원앙 조각이다.
대체 나무를 던졌는데 어째서 금속성의 소리가 울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스승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런 여하륜의 공격을 막아 냈다.
‘으아아!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패닉이다.
스승님 뒤에서 왕각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퍼덕였다.
“본 적 있는 아이로구나.”
“어, 스승님, 잠시만요!”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뭔가 해야 했다.
진천희가 여하륜을 감싸려고 하자 여하륜이 도리어 진천희의 팔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숨겼다.
‘이 자식 왜 이리 힘이 세?’
주인공다운 우악스러운 힘이었다. 거기다 마공까지 익혔으니 그 힘은 더했다.
팔이 아플 정도였다. 그럼에도 여하륜은 전혀 힘을 준 기색 같은 게 느껴지지 않으니 기이했다.
이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백린의선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진다.
“천살성의 기세구나. 그때는 어려서 몰랐는데 지금은 확연하군. 희야, 정말로 ‘저것’을 치료하려고 그 고생을 했던 거니?”
스승님은 여하륜을 ‘아이’에서 ‘저것’으로 바꿔 불렀다. 그게 무슨 뜻인지 진천희는 알고 있었다.
‘사람으로 안 보겠다는 건데?’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진천희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스, 스승님! 비록 천살성을 갖고 있지만 착한 애예요!”
“하하하, 늑대가 초식을 한다는 말도 이것처럼 허황되진 않겠구나.”
스승님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희야, 어째서 천살성이 무림의 공적이 되는지 아니? 천살성은 살인으로써 삶의 감각을 찾고, 의미를 찾고, 목표를 찾는단다. 그렇기에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천살성의 별 아래에 태어난 이들은 늘 추살되어 왔지.”
스승님의 긴 은발이 한순간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래도 진천희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승님이 말했다.
“희야. 저것한테 말 좀 전해 주렴? 내 제자님을 붙잡고 있는 그 더러운 손 좀 놔 달라고?”
하필 그 천살성이 자신의 제자를 붙잡고 있으니 미칠 노릇인 모양이었다.
이 상황을 진정시켜야 했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분위기에 진천희는 침착하게 운을 뗐다.
“손 놔 달래. 하륜아.”
그 말에 여하륜이 기가 막혀서 답했다.
“형은 왜 그걸 곧이곧대로 전해?”
그게 또 여하륜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하륜이 말했다.
“형 스승이 백린의선인 건 알고 있었는데 안 되겠어. 형, 나랑 교에 가자. 나 기반도 잘 쌓아 놔서 괜찮아. 혈고 안 먹어도 잘 입교할 수 있어.”
대체 이놈은 마교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일단 소설에 나온 마교 정식 승진 코스를 밟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옛날이야 모르고 넘어갔지만 이제는 알겠어. 대체 무림의 의선이 마교 노괴들보다 냉혹한 안광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뭔데?”
진천희는 그 말에 문득 과거 궁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궁귀는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들며 이렇게 말했었다.
-궁사로서의 내 오랜 감으로, 의선께서는 이것과, 사람 모두에게 똑같은 미소를 지을 것 같더구나. 그래서 조급해졌지.
그는 그래서 진천희를 인질로 잡았다.
제갈린에게 있어 진천희는 유일하게 돌이 아닌 존재였으니까.
비슷한 이야기가 여하륜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네 착각이야.”
“그래? 내가 보기에는 어지간한 미친 마두들보다 손에 피를 묻혀 본 것 같은데?”
“…….”
분위기만으로 그런 걸 알 수 있는 걸까.
스승님이 과거 제갈가의 원수를 갚았다는 건 알고 있다.
피는 피로써 갚는 법.
백린의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벌인 건지는 소설에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 결과, 강호의 원로들이 백린의선을 아직도 두려워한다는 건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멸문지화의 혈채를 갚기 위해서였을 뿐.’
진천희는 가슴이 답답했다.
개 같은 상황이었다.
천마와 스승님은 진천희를 가운데에 두고 서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서로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라고 할 수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위가 따끔따끔하다.
진천희는 염불을 외는 마음으로 말했다.
“우선 스승님, 하륜이는 나쁜 아이가 아닙니다. 비록 천살성이지만 나름대로 금욕적으로 살고 있고요, 개방의 방주님, 아니, 이젠 선대 방주님이지. 하륜이는 선대 방주님을 결국 죽이진 않았어요.”
“희야.”
“진료서는 이미 본각으로 보냈으니 이미 오면서 보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아니면 이 분타를 찾지도 않으셨을 거니까.”
그리고 이다음은 여하륜이다.
“하륜아, 저분은 형 스승님이시다. 네가 대체 뭘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늘 같은 스승님께 감히 그런 소리를 하면 형 절대 안 참을 거야.”
“형?”
“널 치료할 수 있었던 것도 스승님께 배운 의술 덕분이었어.”
옛날부터 무협지를 읽으며 늘 생각했다.
‘너희들 좀 대화란 걸 해 봐라!’
쉽게 풀릴 가벼운 갈등도 말 한마디를 서로 안 해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걸 볼 때마다 속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진천희는 우선 대화를 시도했다.
소통은 소중한 것.
특히 스승님과 천마 놈이 살기를 풍기고 있는 판국에 이보다 중요한 게 어디에 있을까.
진천희의 시도가 통했는지 여하륜은 살기를 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