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79
제 79화
“아니, 형은 굳이 저 사람 아니었어도 형의 방식으로 충분히 잘했을 거야. 하지만…….”
여하륜은 진천희의 팔을 놓았다.
“……하지만 형이 그리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진천희의 팔에 여하륜의 손자국이 크게 찍혀 있었다.
제자의 팔에 찍힌 천살성의 손자국. 스승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
백린의선이 말했다.
“희야. 저것이랑 왜 의형제를 맺었는지 이해할 수 없구나.”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누르며 스승님은 한마디 더 뱉었다.
“어쩌겠느냐. 다 네가 너무 착해서 그런 것을…….”
이 와중에도 웃는 얼굴로 여하륜을 긁는 백린의선이었다.
* * *
“왕 소저, 경솔하셨습니다. 이번 일을 궁귀님께서 아신다면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스승님은 왕각연에게 잔소리를 하셨다.
쉴 새 없이 날아가는 잔소리에 왕각연의 표정이 해쓱해진다. 그러나 그 표정은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나 반성 같은 게 아니었다.
진천희를 향한 걱정이었다.
‘천희야. 나까지 가면 넌 이제 죽을 텐데 어쩔래?’
이런 눈빛으로 진천희를 쓱 보는 게 아닌가.
잔소리 좀 듣는다고 해도 왕각연은 결국 남이다. 잔소리 좀 듣고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되는 일이다.
거기서 아버지도 좀 잔소리를 하겠지만 영단 먹은 값을 해 준 거니 그녀의 인생에 한 점 후회는 없었다.
문제는 왕각연이 가고 난 후 진천희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는 것.
“자, 그러면 나가 보시죠. 이 일은 나중에 한 번 더 다룰 것입니다.”
왕각연은 깊게 예를 표하고는 진천희에게 눈짓했다.
‘나 간다. 힘내라.’
진천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왕각연이 나가고 나서 이제 자리에는 스승님과 리틀 천마 여하륜, 그리고 진천희 셋이 남았다.
정적이 밀려왔다. 진천희는 급하게 말했다.
“이 제자, 차를 끓여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스승님과 여하륜이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빠르게 부엌으로 향했다.
‘미치겠네. 어쩌다가 이런 관계가 된 거지?’
원작 소설에서 둘의 관계는 무협 소설에 나오는 생명을 구해 준 은인과 주인공의 관계였다.
‘물론 그때도 좀 사무적이긴 했지.’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기에 할 도리를 했던 것뿐이고, 백린의선도 여하륜이 필요할 때 이런저런 것들을 부탁하거나 돕기도 했다.
그렇다고 여하륜이 백린의선의 생명을 구할 방도를 찾는다거나 그의 안부를 걱정한 적은 없었다.
‘다시 생각하니 뭐랄까, 정말 메마른 관계이긴 했네.’
여하륜이 무협 소설의 주인공답게 은원이 확실했을 뿐이지, 그렇다고 감정을 나누는 일은 또 없었다.
스승님도 뭐, 초반에 죽는 조연이기 때문에 조금 등장했을 뿐이지 여하륜의 인생에 깊게 엮이는 일 같은 것도 없었고.
‘생각해 보면 둘이 원래 성격이 안 맞았구나.’
그나마 생명의 은인, 지나가는 의선 관계도 이제는 없으니 보자마자 살기를 풍기고 있다.
진천희는 생각했다.
‘내…… 내가 어떻게든 이 관계를 조금이나마 낫게 만들어야 해.’
진천희는 생각에 잠겼다.
‘원작에서 돌아가신 스승님은 내가 살릴 거고, 여하륜은…… 그래도 원작보다는 조금 덜 원수를 만들고, 그때보다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지존천마의 여하륜은 주인공으로서 부족하지 않았지만, 사람의 삶으로서는 무척이나 빈 곳이 많은 인물이었다.
주인공답게 여하륜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갔다.
여하륜 때문에 가족을 잃은 이들도 함께 지옥 속에 끌려갔다.
주인공이 나쁜 이가 아니라는 것을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안다.
비록 천마지만 그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움직였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전지적 3인칭 시점 덕분이지, 주인공과 원수진 정파와 사파와 마교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작 소설과는 많이 달라졌어.’
진천희와 보냈던 짧은 시간 동안 여하륜은 그래도 사람 생명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형으로서 나누었던 약속 덕분에 두 번은 참게 되었다.
원수의 숫자를 상당히 줄인 셈이다.
원작의 여하륜은 힘을 가졌지만 덕을 가진 건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두 번은 참아 준다는 원칙 덕에 원수가 되었을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증거가 진천희의 손목에 감겨 있는 팔찌, 흑천혈사다.
스승님의 건강도 호전시키고, 여하륜의 살기도 좀 누르게 되었지만 공짜는 없는 법.
‘둘은 진짜 남이 되었지.’
진천희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자신의 뺨을 한 번 짝 소리 나게 때렸다.
‘괜찮아! 내가 잘하면 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차를 끓여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스승님! 차 끓여 왔어요!”
드르륵-
* * *
진천희는 두 사람에게 차를 따라 주고는 열심히 자신이 사는 이야기들을 여하륜에게 말해 주었다.
틈틈이 스승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고 자신에게 잘해 주는지 추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대로 스승님께는 여하륜이 얼마나 착한 놈인지, 두 번은 참아 준다는 것, 의동생이라는 점,
자신에게 귀한 팔찌를 선물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말했다.
“…….”
둘은 차갑게 서로를 노려보다가 한마디씩 말했다.
“희야, 그렇게까지 ‘저것’을 지킬 필요 없단다.”
“형에게 스승님은 참 큰 존재구나.”
심지어 여하륜의 목소리에서는 질투마저 풍겨 왔다.
자신은 사지에서 죽을 둥 살 둥 구르고 있는데 즐거운 추억은 백린의선이라는 자와 다 만든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낀 모양이다.
‘아이고. 애는 애구나.’
그래도 스승님의 표정이 전보다는 누그러졌다.
“두 번은 참는다라…… 천살성이 그 정도의 인내심을 갖는다는 건 문헌에서도 본 적이 없거늘 참으로 신기하구나.”
스승님은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한마디 덧붙였다.
“희야.”
“네, 스승님.”
“몇 번이나 누누이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너보다 소중한 것은 내게 없단다. 그렇기에 원래라면 ‘저것’은 내 눈에 띄는 순간, 이미 죽었을 거란다.”
“…….”
“하지만 네가 저것을 아우라 부르고, 저것은 너를 형이라 부르니 내 마음대로 하긴 쉽지 않겠구나.”
저 말에서 진천희는 함정을 찾았다.
마음대로 하긴 쉽지 않겠다고 했지, 마음대로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희야.”
“네…… 스승님.”
“저것이 만약 네 털끝이라도 해를 끼친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거란다.”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며 여하륜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평소 같은 미소였으나 뒷맛이 따끔했다. 살기다.
“스승님,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네가 그리 말하니 나도 한 번은 믿어 볼 생각이란다. 물론 약간의 조사를 좀 하고서 말이다. 이 스승은 마교에도 친구가 있거든.”
……있으시지. 천하의 백린의선 아닌가.
스승님은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여하륜은 그런 백린의선이 떠난 자리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진천희는 여하륜의 곁에서 정양을 도왔고, 스승님은 이따금씩 왔다 가셨다.
둘은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전부 진천희를 통해서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안 싸운 건 네 덕분 아니냐. 가슴을 펴.”
왕각연은 그렇게 말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잔소리 좀 듣고 나온 모양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성질머리가 어디 갈 일도 없다는 것을 아버지도, 왕각연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궁귀를 가장 많이 닮은 것은 그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서로에게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진천희는 끓고 있는 탕약을 향해 부채를 파닥파닥 부치며 말했다.
“내가 가운데에 없었으면 싸울 일도 없었을 거야.”
“인생 비관적으로 살면 좋냐?”
각연의 말에 진천희는 쓰게 웃었다.
‘원작에서는 이러지 않았으니까.’
지존천마의 애독자로서 참 복잡한 심정이다.
각연이 말했다.
“천희야.”
“응?”
“전부터 느꼈지만 너는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해. 스승님도 봉양하고, 친우도 살렸으면 이미 다 한 거야. 거기다가 개방 방주님도 사지 멀쩡하게 살려 냈잖아? 넌 거기에 더 완벽하기를 바라고 있어.”
“…….”
그것은 같은 완벽주의자로서 하는 충고였다.
왕각연 본인이 그런 기질이 있기에 진천희를 이해했다.
“친부모도 그렇게 못한다. 우리 아빠 봐라. 딸까지 살려 낸 대단한 아빠지만 사고만 치는 불효녀 때문에 고생하고 계시잖아.”
“아니, 이 세상에 너 같은 애가 또 어디 있다고 그래?”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일단 눈앞에 있는 걸 해. 그 외에는 흘러가는 대로 놔둬. 옥황상제님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
진천희는 답을 하지 못했다. 각연은 그런 진천희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자신감 좀 가져. 어깨 펴고 다니고. 난 간다.”
“벌써 가?”
“아빠가 벌로 어마어마한 수련을 내렸거든. 해 지기 전에 끝내 놔야 해.”
그녀는 활을 어깨에 메고 일어났다.
한번 진심으로 싸우는 모습을 본 덕분일까.
어쩐지 그녀가 멋있어 보였다.
‘그래. 원작과 달라졌지만 그래도 너란 친구를 살려서 참 다행이야.’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했을 거라고. 진천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진천희는 각연을 보내고는 불을 끄고 약사발을 들었다.
별채로 돌아가니 여하륜이 가부좌를 하고 운공을 하고 있었다.
몸이 많이 회복되어서 이제는 운공을 할 단계까지 돌아온 것이다.
진천희는 운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탕약을 놓고는 자신도 함께 운공을 했다.
죽림 사이로 바람 소리가 울렸다. 행인도 없는 별채에서는 대나무 잎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렸다.
눈과 비 냄새가 함께 밀려왔다.
진천희는 주천을 끝내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 계절이 또 바뀌어 가는구나.’
또다시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었다.
“형. 끝났어?”
“먼저 운공을 끝냈나 보구나.”
“그래. 탕약도 먹었어. 사과도 깎았고.”
그렇게 말하고는 진천희 앞에 사과 접시를 내려놓았다.
“나 먹으라고 주는 거야?”
“치료하느라 내내 고생했잖아. 고작 사과 가지고 무슨.”
여하륜이 건넨 사과는 어쩐지 참 기묘했다.
깎았다기보다는 껍질을 벗겼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표면이 매끈했다.
‘칼자국이 보이질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깎아 낸 거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높은 경지. 그것을 저 나이에 이루어 낸 셈이다.
그리고 그걸 고작 사과 깎는 데 쓰고 있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이럴 때는 모르는 척하자.’
진천희는 사과를 씹으며 여하륜을 진맥했다.
“거의 다 나았네. 이제 돌아가면 되겠다.”
“고(蠱)는?”
혈고를 뜻한다.
마교는 처음 입교할 때 몸속에 혈고를 심는다. 중원에서 가장 악독하기로 유명한 혈고다.
진천희는 이 혈고에서 벗어날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전부 다 제거되었어.”
“결국 그걸 적출해 냈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미친 짓이라고 했을 거다.”
그랬다.
왕각연도 모르고, 스승님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