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03
제 803화
병법의 절반은 지형과 날씨.
진천희는 그동안 스승님이 어떤 식으로 싸워왔는지 이해했다.
‘역시 그렇구나. 땅을 알고 하늘을 알면 이미 계책의 반은 성공하는 것이었어.’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어릴 때부터 배운다.
그리고 스승님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고 들었다.
‘그러니 스승님에게는 동료도 세력도 필요치 않았던 것이겠지.’
백린의각은 스승님께서 임종을 준비하며 만든 곳이라고 했다.
그래도 살아날 가능성이 없나 의술을 모색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 흘러가지 않을까 생각은 하셨던 모양이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고.
지금이야 백린의각이 무력으로도 뛰어나지만 당시에는 백린의각 자체만 지키면 될 소수의 검무대 정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거추장스러워하셨겠어.’
천하경영에 이르게 되면 세상 모든 것들이 흡사 조각 맞추기처럼 느껴지고 그 쾌감은 그 어떤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현대인 진천희가 느끼기에는 젊을 때 했던 테트리스가 주는 쾌감과 비슷했다.
요즘 애들이야 그것보다 재미있는 게임이 많겠지만, 진천희가 젊을 적에는 디스크에 구멍이 뚫려 있고 자석 한번만 쓱 긁어 줘도 파일이 날아갔다.
얼마나 파일이 잘 날아가던지 그냥 자석 없어도 왜인지 파일이 날아가 있을 때도 많았다.
그 당시의 얼리어댑터들은 도스와 베이직을 공부했다.
전화선으로 죽어라고 PC 통신을 연결했었고. 통신비를 십만 원 넘게 받은 사람도 있었지.
진천희는 대학에서 그걸 먼저 만났다.
모니터는 얼마나 두꺼운지 사람 머리통보다 컸다.
그런 시절에 테트리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임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블록을 쌓아서 터트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블록이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블록을 쌓는 게 더 힘들어지고, 힘들어지다가 나중에는 죽는 게임.
그리고 점수를 합산하여 높은 쪽이 혹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쪽이 이기는 게임이니까.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다음에 떨어질 블록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다음 블록, 다다음 블록, 다다음 블록.
타악. 타악. 탁-
그다음부터는 블록 터뜨리는 데 훨씬 여유가 생긴다.
블록이 떨어지는 속도를 생각의 속도가 따라잡은 것.
인지 속도의 향상.
그 후부터는 테트리스의 블록은 총 일곱 가지이고, 무작위로 떨어지는 것 같아도 사실 패턴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어, 슬슬 긴 블록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그렇게 느끼는 순간 다다음 즈음에 긴 블록이 나타나면 무의식이 이미 그 패턴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뜻.
마침내 일곱 가지 블록으로 테트리스를 그려내기 시작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밀려온다.
생각의 속도가 블록 떨어지는 속도를 앞선 셈이다.
거기까지 가면 블록이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블록이 나오는 순간, 위에서 자리를 잡고 회전시킨 후, ↑버튼을 눌러 바로 아래로 정착시켜 버리니까.
그 과정은 지극히 빨라서 보는 사람도 블록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밑에 하나 깔려 있는 것만 보인다.
중간 과정이 생략된 상태.
이 블록을 왜 거기에 얹어놨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가끔씩 마지막에 회전이 필요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블록은 나타나는 순간 아래에 도착해있다.
탁, 탁, 탁, 탁, 탁.
더 빨라지기 시작하면 어느 블록을 쓰고 있는지조차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뭔가가 깜빡이며 점멸하고 있다고 느낀다.
플레이어의 인지 속도를 관전하는 사람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
‘그래. 그다음은 피지컬이지.’
인지가 컴퓨터 A,I.를 뛰어넘는 그 속도를 계속해서 뇌가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리고 뇌가 인지한다고 해도 원하는 속도만큼 손가락이 계속 움직여 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
판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한계까지 다다른 인지가 만들어낸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게 또 익숙해지면 더 빠르게, 더욱 빠르게.
타다다다다다닥- 다락, 타다다다닥-
제갈세가의 천하경영은 그런 감각이다.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테트리스.
계산대로 모든 것이 들어맞았을 때 느껴지는 쾌감은 그 어떤 술이나 도박, 성교보다도 강렬하다.
진천희는 판이 흘러가는 것을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아마 스승님도 같은 감각이겠지.
지금은 제자와 그 주변을 굴리시면서 어떤 감각이실까.
어찌 되었건 진천희 자신은 천기를 어그러뜨리는 재능이 있는 자이니 다루기 쉽지 않은 말일 터였다.
오싹, 오싹-
그런 진천희를 보며 남궁운은 소름을 참아낸다.
죽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 많은 이들을 책략으로 상대하면서도 거의 죽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진법에 휘말려 서로의 칼에 찔리는 수준.
혈사라기보다는 애들 장난 같다.
그리고 눈앞의 천하일광이자 벽안광의는 분명 즐거워하고 있다.
오독오독 밀곡단을 씹으며.
그나마 남궁운이 수통을 건네주자 씹으면서 물이라도 마신다.
“와아, 계획대로 잘 돌아가서 기쁘네요. 남궁 형.”
그의 본능은 여기서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다.
저 푸른 눈이 안 닿는 곳으로 어서 가버리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적어도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자가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발을 붙잡았다.
아마 여기서 도망친다면 진천희는 두 번 다시 방금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터였다.
이것은 저 천재가 깊이 믿는 자들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니까.
진천희가 즐거워하는 사이, 모여든 이들 절반이 당했다.
살수들은 이제 각기 따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 다들 모이기 시작했다.
“와아, 반으로 줄어도 그래도 천 명 가까이네.”
진천희가 푸른 눈으로 헤실헤실 웃었다.
그 모습에 남궁운은 다시 공포가 밀려왔지만 억누르며 진천희에게 수통 하나를 더 건넸다.
“물이나 더 마시게. 진 아우.”
“아, 수분 공급은 중요하죠.”
* * *
삽시간에 절반이 당했다.
문제는 어쩌다가 당했는지 정확하게 설명조차 하기 어렵다는 것.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니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있었다.
‘더는 각기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경쟁이었으나, 이제는 협력이다.
마지막 현상금을 어떻게 가를지는 협의를 해야겠지만, 죽이기만 해도 기본 성공 보수는 각기 지급되지 않나.
이는 매우 기본적인 살수들의 마음가짐이었다.
강호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게 살수이나, 역설적으로 그 어떤 분노나 악의 때문이 아닌 그저 위에서 내려온 명령과 돈 때문에 죽이는 게 그들의 업이다.
그러니 이 이상 각개격파를 당하면 밑지는 장사가 될 터.
그렇기에 모두가 모여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사도팔문 중 하나, 살검루의 문주.
문주가 직접 다른 살수들을 불러모았다.
삐이이익-
앞니 사이로 내보내는 날카로운 고음은 보통 이는 들을 수 없다. 허나, 살수라면 모두 들을 수 있는 소리.
그저 길게 내뻗은 이 소리에 큰 의미는 없다.
아주 간단한 의미.
[주목].그것만으로 각 살수들이 떨어진 매미 본 개미 떼들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각 살수들의 조장과 때로는 돈 때문에 온 문주들까지 자리에 모여든다.
중간에 목이 마른지 수통으로 핥듯이 수분만 보충하는 자도 있다.
살행 중이니 깊게 마시지는 않는다.
원래라면 살행이 끝날 때까지 물 한 방울도 마셔서는 안 되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신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지친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이들도 목이 바짝바짝 타는지 수통을 아주 조금씩만 삼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서로가 곁눈질로 알아본다.
‘그만큼 강대한 적이라는 것인가.’
여기까지 와서 체면을 차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일단은 어떻게든 살행을 성공해야 한다.
때문에.
본래 사도팔문의 하나이자, 천하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거대 살문인 살검루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나서서 모두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대로면 남은 반도 전멸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네.”
“잠깐. 너는 어디 소속이지?”
살검루주는 결코 복면을 벗지 않는다. 얼굴을 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하니까.
그것은 다른 살수들도 마찬가지.
대신 살검루주는 새카맣게 무늬가 박혀 있는 검집을 들어서 보여줄 뿐.
살검루의 징표!
그걸 본 이들의 눈빛이 흔들린다.
살검루는 살수 조직 중에서는 강호 최대이며, 최강의 세력이니까.
살검루주만 해도 사파의 거물이지만, 그의 무위는 십 대 고수에 들어갈 만하다고 소문이 퍼져 있었다.
“음… 살검루의 루주께서 직접 오시다니……. 우리 월살문은 살검루의 권위를 존중하겠소.”
월살문이 먼저 이야기를 하자 다른 살문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월령산문도 이에 동의하오.”
“혈암각도 인정하겠소.”
앞다투어서 서로가 상대의 권위를 인정하고 나니, 이제는 대화를 할 차례.
“이제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하니, 내가 진두지휘를 하고자 하네. 불만 있나?”
곧바로 직론만 말하는 것은 살수들의 습관이다.
그때 바로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살검루주님의 위명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우리를 소모품으로 쓰지 않겠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내 이름과 살검루의 이름을 걸고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거기다, 진법을 보고서 사도련에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이곳에 도착해 있다. 교뇌자. 이리 오시구려.”
교뇌자(狡腦子) 안석.
교활한 뇌를 가진 자라는 별호를 가진 자.
목소리를 듣고 살문의 조장급들은 곧바로 생각했다.
‘사도련의 군사부에 속한 자 중 한 명으로, 총군사인 사뇌(邪腦) 북궁산산의 사제이기도 하지.’
‘제갈세가와 비슷한 문규를 유지하는 북궁산산의 사문은 여러모로 비밀에 싸여 있다……. 그 문파의 일원인가.’
그러나.
북궁산산의 군사로서의 능력은 진짜배기이듯. 그의 사제인 이 교뇌자 안석도 마찬가지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진법에 해박하다고 알려진 자가 바로 이자다.’
‘살검루가 아주 작정을 했군.’
하지만 곧바로 심계를 눈치챈 조장들도 있었다.
‘처음부터 데려왔다면 피해가 적었을 터. 다른 살수들 중 절반이 줄 때까지 이러고 있었다는 것은 살검루가 마지막 공을 가져가기 위해서이겠군.’
‘살검문과 본인의 이름을 건다고 한들 과연 믿을 수 있나?’
허나, 제갈세가의 소가주인 저 일광 진천희가 상상 이상으로 진법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꼬인 이상 진법에 뛰어난 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교뇌자 선생이라면 믿을 만하지. 좋소. 살검루주의 지휘를 받아들이리다.”
몇몇 조장은 안색을 바꾸고 바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다른 조장들도 그 말에 동의했다.
“알겠소. 살검루주를 믿도록 하겠소.”
“처음 경쟁했던 우리가 한배를 탄 셈이군……. 마땅치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뒤에서 칼을 찌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해야 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그때. 단 한 명만이 목소리를 냈다.
“나는 반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