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66
제 866화
울컥-
두 번째 토혈.
그때 응답하듯 수없이 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울렸다.
-말세란 말 그대로 세상의 끝. 하지만 시작.
-진주언가의 아이들은 말세 너머로 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어.
-육신이란 그저 혼을 담아둔 그릇일 뿐. 그 그릇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
-심장이 뛰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배고프지 않고, 아픔을 느끼지 않고, 늙지 않아.
-고독해도 괜찮아. 살아있으니까.
-그리고 가족들까지 모두 함께할 거니까 그리 외롭지 않을 거야.
-우리 아이들은 살아남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종(鐘)을 만들 거야.
-말세 너머까지 울리는 종을.
동시에 말하는 소리가 합창과도 같다.
만약 진천희가 현원전단신공으로 시간을 쪼개지 않았다면 이 소리를 제대로 듣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리라.
그녀와 이렇게 접촉하고 미치지 않은 것도 현원전단신공 덕분이고.
중첩되고 중첩된 목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아아, 왜 이리도 자애로울까.’
잔혹한 짓을 하면서도 목소리는 따뜻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언젠가 먼 훗날에 고통받을 아이들을 위해서.
그렇기에 이제는 사라진 지식으로 이곳을 만들었고, 그녀 자신도 이 안에 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왜냐니? 나는 진주언가를 사랑하는걸. 미래까지 지켜주고 싶을 정도로.
말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자애로움 안에 말세에 대한 걱정과 공포가 함께 느껴졌다.
‘으윽…….’
귀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그저 그 감정의 편린을 조금 느끼는 것만으로도 뇌를 휘젓는 기분이다.
가주 언권은 이런 걸 겪은 건가.
진천희가 다시 물었다.
‘그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몸이 되기를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고요! 거기다 설명도……. 이리될 줄 누구도 몰랐습니다.’
-가문의 위기가 닥쳐오면 종을 울리라고 했잖아.
-내 아이들에게 위기가 올 리가 없지. 말세가 아니라면.
-적어도 말세에 관련된 무언가일지도.
-현세에 우리 아이들에게 ‘위기’를 줄 만큼의 존재는 존재치 않으니까.
자부심을 넘어 일종의 오만함까지 느껴진다.
그녀는 언가의 아이들을 사랑했다.
이 땅을 사랑했다.
이 대지에 살아갈 미래를 지독하게 사랑했다.
기묘했다.
절망으로 가는 길이 어째서 이리도 따뜻하고 반짝이는지.
그것은 마치 깨진 유리 조각의 단말마 같았다.
사람을 다치고 죽게 만드나 그 빛만은 어찌나 영롱한지, 홀릴 것만 같다.
그리고 사람은 거기에 찔려 핏방울을 내어주고 말지.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건 말세에 열릴 것이라는 것.
진천희는 천기를 흐트러뜨리는 자고, 원작에서 여하륜이 왔을 때는 어찌 보면 말세…… 직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확실하진 않다.
여하륜이 우화등선하고 끝나는 소설이니까.
혈선교는 살아있었으니까.
‘왜 이런 짓을…….’
-사랑하니까.
이윽고 그녀는 고장 난 테이프처럼 반복했다.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 귀여우니까. 불쌍하니까. 그래도 사랑하니까.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니까. 소중하니까. 좋아하는걸. 지켜주고 싶으니까. 사랑하니까.
이윽고.
진천희는 대화를 하고 있는 이자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 여기 남아 있는 건 이 사람의 백(魄)이었어.’
혼백(魂魄).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남아서 떠돌다가 흩어진다고 했다.
백은 기억을 담당하지만 혼이 없기 때문에 결국 흉내 내기밖에 하지 못한다고.
그때 그 관에 돈을 넣어둘 뿐 쓰지는 못하는 강시처럼.
다만 그 존재가 너무나도 거대하기에 바로 알기가 어려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칠공으로 피를 뿜고 미쳐서 죽을 정도로.
옛 시대, 수백 년을 살고 마침내 우화등선하는 자라면 그런 존재이겠지.
하지만, 백(魄)을 설득할 수 있나?
‘침착하자. 일단 아예 말이 안 통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보통 사람의 혼백은 아득히 넘은 무언가고.’
애초에 이 유적을 관리하고 있는 존재이지 않나.
거기다 가주 언권을 조종해서 착실하게 모두에게 ‘축복’을 나누어주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긴 말은 듣지 않을 수도 있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윽고 진천희가 입을 열었다.
‘아직 말세가 오지 않았습니다.’
-아니야. 이미 오고 있어. 느꼈는걸. 만약 말세가 아니었다면 종은 지금처럼 영롱하게 울리지 않았을 거니까.
나름대로 안전장치인가.
그러나 지금 울렸다는 건 그녀의 말대로 말세가 오고 있다는 뜻.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원하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 어떤 동의도 없이 사람이 죽었다고요!’
-하늘이 세상의 동의를 받고 멸망을 집행하진 않잖아. 그런 거야.
꽉 막혔다.
설득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 상태가 옳은 것이며, 진주언가 아이들을 위한 선물이라 믿고 있다.
이윽고 진천희는 입을 열었다.
‘저는 이게 미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
‘멸망을 막을 거니까요.’
-네가?
‘만약 멸망이 오지 않는데 몸이 강시면 불쌍하지 않습니까?’
마치 어린아이를 설득하듯 하나하나 쉽게 말해본다.
-…….
그녀의 백(魄)은 말이 없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네가 멸망을 어떻게 막을 건데?
‘잘! 잘! 이요!’
울컥, 눈에 피가 흐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어쩔 수 없다.
멸망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오는지 필멸자는 알지 못한다.
천기란 놈은 말해주는 법이 없고.
인간은, 인간은 마치 눈을 가린 말처럼 마부의 채찍을 맞으며 앞으로 전진할 뿐.
-잘? 하하하하! 재미있네.
‘어라? 그런데 단순 우기기인데 먹힌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괜히 잔머리를 쓰는 것보다 솔직한 답변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진천희가 말했다.
‘응룡께서 멸망의 때가 되는 해에 오라고 했습니다.’
-음? 그분이…….
다행이다. 이자도 응룡에 관해서는 아는 모양이다.
과거 황궁 지하에서 자고 있던 응룡이 진천희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함이지. 그러나, 과연 때가 왔을 때에 마지막 기회를 가진다 해도.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이야기를 하니 확실히 동요하는 기색이다.
그녀는 진천희를 바라본다.
물론 눈으로는 그녀의 형상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살갗으로 시선이 느껴질 뿐.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상하구나. 너는 우리와 같은 존재일진대 어찌하여 말세를 두려워하는 거지?
‘같은 존재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네 육신은 이미 ■은 자의 것이고, 네 영혼은 거기 붙어 있지 않느냐. 그게 우리들 ■■와 다를 게 뭐지?
그 순간 지끈, 두통이 밀려온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억지로 듣지 않아도 돼. 괜찮아.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돼.
손이 느껴진다.
그녀가 두 귀를 막았다.
보이지 않지만 손가락의 감촉이 느껴진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진천희를 진정시킨다.
신기하게도 두통이 점점 가시기 시작했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 것 같다. 손님이 무대 뒤를 보면 안 되듯. 원래라면 여기까지 와서는 안 되는데. 그래……. 이 또한 필연일 수도 있겠지.
이윽고 천천히 손을 뗐다.
-네가 가진 본질과 이 유적에 축적된 힘이 함께하면 원래대로 돌릴 수 있어.
‘돌린다고요?’
그녀가 작게 ‘응’이라고 답한다.
그러고는 진천희가 일전에 들어본 적 있던 말을 본인의 방식대로 뱉는다.
-시간과 공간. 어느 쪽?
진천희는 그 말을 듣고 순간 숨이 컥 막혔다.
다시 피가래를 뱉는 진천희를 그녀가 토닥인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상냥한 손길은 헷갈릴 수가 없었으니까.
그녀가 말을 이었다.
-공간을 택한다면 유적은 파괴되고 너희들은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게 돼.
‘시간은?’
-죽은 이들을 전부 되살릴 수 있어. 강시가 된 이들을 다시 사람으로 되돌리는 셈이지. 그 사람들의 시간만 되감는 거야.
‘그렇게 편리한 능력이…….’
-응. 가능해. 이 유적과 나의 백(魄) 그리고 너라면.
‘대가는……?’
-역시 알고 있구나, 너는. 순진하지 않네. 그래, 그래야지. 너 같은 존재는 마땅히 그래야 해.
그녀는 작게 미소 짓더니 입을 열었다.
-네 팔 한쪽 전부. 팔 전체를 대가로 바쳐 줘.
그 순간…… 진천희의 품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것은 유호 토용.
못생긴 토용이 떠오르더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대가, 제가 좀 낄 수 있겠군요.
유호의 목소리.
-아, 너구나. 아직 살아있었네.
그녀는 왜인지 유호를 알고 있는 듯했다.
-유감입니다만. 제 것입니다, 저놈. 제 유일한 신관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토용이 깨진다.
콰창!
토용 안에 있던 붉은 기운이 사방으로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응원’입니다. 망할 도련놈아.
* * *
‘그래. 알고 있어.’
‘응. 사람들을 외면하고 공간을 택한다면 더 쉬워질 거라는 걸.’
‘하지만 그걸 고르지는 못할 거라는 걸 유호는 알고 있던 거지.’
‘아니야. 대가가 비쌌다면 고르지 않았을 거야.’
‘정말? 진짜 그랬을까?’
‘모르겠어. 어쨌든 최선을 다하긴 했겠지.’
‘저 녀석은 팔의 가격을 얼마라고 생각할까?’
‘사람 목숨보다 가볍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아니야. 사람 목숨보다 자신의 팔이 더 중하다고 생각할지도.’
‘과연 그럴까?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작은 진천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속삭였다.
‘그런 성격이었으면 천기를 뒤틀지 못했을 거니까.’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니까.’
‘그래. 지금의 ■는 우리랑 달라.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뛰어난 ■야.’
‘하지만 가장 어리석은 ■이기도 하지.’
이건 꿈일까.
아니면 현실?
알 수 없다.
흐려진 의식 속에서 진천희는 작은 진천희들이 속닥이는 소리를 듣는다.
눈꺼풀을 천천히 여니 그곳에는 작은 진천희들이 모여서 무언가 대화하고 있었다.
‘어라? 너희들 내 현원전단신공으로 생긴 목소리들 아니야?’
일순간, 꼬마 진천희들이 동시에 진천희를 바라본다.
푸른색과 어두운 색 눈동자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아이들은.
금색 눈동자.
그 눈빛을 마주하니 소름이 돋았다.
이윽고 꼬마 진천희들이 서로를 바라보다 씨익 웃었다.
‘우리가 무서워?’
‘무서울지도. 그건 본능이니까.’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했던 기억을 두려워하니까.’
‘하지만 이건 네 기억이 아니야.’
그 순간, 마지막 말을 진천희는 깨달았다.
■■.
실■.
실패.
‘실패? 내가?’
진천희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목이 막힌다.
컥, 커헉. 다시 피를 토한다.
‘금제 때문이지?’
‘응. 금제 때문이야.’
꼬마 진천희들이 말했다.
‘너는 실패하지 않았어.’
‘너는 아니야. 너는 괜찮아. 그건 ■■가 지고 있으니까.’
작은 진천희들이 다가온다.
‘우리는 네 육체에 남아 있는 ■■이야.’
‘동시에 가장 가서는 안 되는 말로이긴 하지.’
‘우리는 ■야.’
왠지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없이 많은 진천희들이 다가온다.
금색 눈동자.
내가 그런 색을 한 적이 있던가?
현원전단신공은 분명 푸른빛인데…….
깊이 생각하기가 어렵다.
마치 공황이 온 것처럼 머리에 공포가 가득 찼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그조차도 어려웠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그리고, 그 순간, 목소리가 울렸다.
-내 살다 살다 여기까지 와서 본인 자아가 알아서 붕괴되는 건 또 처음 봅니다.
유호? 유호야?
토용을 준 것도 유호였잖아.
-대가도 알아서 대신해 줬는데 그러면 뻔뻔하게 고개나 들고 살 것이지.
유호. 어어,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당연히 이상하지요. 원래라면 그 유적에 정신을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미쳐야 정상이니까. 할 말 다 하고, 일 처리 다 하고 뒤늦게 정신이 나가는 건 또 뭡니까.
유호. 내가 뭘 봤는지 유호도 알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잊으십시오. 광기란 그냥 광기일 뿐이니까요.
그 순간.
커다란 손이 진천희를 당긴다.
크고 단단한 근육질 팔.
이건 유호가 맞다.
-참, 피와 머리카락 끝은 천룡공으로 재생시키십시오. 당신이라면 얼마 안 걸릴 테니.
응?
-팔을 지킨 것을 고마워해라. 인간.
그 말을 끝으로 진천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의식이 돌아오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