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67
제 867화
눈을 뜨니 주변이 빨갛다.
‘아니, 붉은 건 내 시야인가.’
과다 출혈로 죽지 않은 게 기이할 정도의 상황. 그럼에도 피는 땅을 적시지 않고 사라진다.
이게 무엇인지 안다.
대가.
유적 한가운데에는 빛이 달처럼 떠 있다.
영혼.
이름 모를 그녀의 영혼.
정확하게는 백(魄).
강호에서 백(魄)이란 혼이 빠져나가고 난 기억 같은 찌꺼기라고 한다.
영혼의 정수는 결국 혼(魂)이라고.
혼이 사라지고 남은 백은 구천에 떠돌다가 흩어진다고.
허나, 그녀의 거대한 백은 그 자리에 남아서 잘게 분해되고 있었다.
예전에 삶을 민들레에 비유하는 책을 본 적 있다.
그래서일까.
마치 민들레 깃털이 바람에 흩어지듯 그녀의 백이 어딘가로 흩어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 한 줌의 바람에도 사라질 터인데.
이런 거대한 존재는 흩어지는 것조차 오래 걸려서 진천희는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했던 짓은 사람의 생사를 가지고 노는 짓.
본인은 자손을 지키기 위해 했다 하나 자손들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잔혹한 짓이었는지는 부정할 수 없다.
허나, 그런 자도.
왜 그런 거대하고 잔혹한 존재도 사라져가는 것은 이다지도 아름다운 걸까.
‘어째서……?’
진천희의 대가는 자신의 피, 그리고 머리카락의 일부, 나머지는 유호가 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적의 힘을 사용하는데도 대가가 모자란 모양이었다.
그 대가는 백(魄).
자신.
그녀가 말했다.
아니, 말이라는 표현이 맞는 걸까?
동시에 쏟아지는 사념은 합창과도 같고 소음과도 같다.
-어차피 둘 중의 하나였어.
-종말까지 남아 아이들의 뒤를 닦아주거나, 아니면 무(無)로 돌아가서 푹 쉬거나.
-나는 종말을 건널 선물을 주었을 뿐인데 모두가 싫어하더라고.
-그런데 언젠가 곧 사라질 네가 너무 예뻐서. 네 영혼이 너무 예뻐서 나도 너처럼 언젠가 사라졌으면 했어.
무슨 소리인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백(魄)밖에 남지 않은 그녀가 영원을 살아가며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아이처럼 천진했다.
-정무가, 언정무가 울더라. 돌려달라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계속 빌었어.
-호흡 한 번에 열 번을 넘게 빌더라.
-나는 그저 선물을 주려고 했을 뿐인데. 응. 이대로면 정무는 말세를 넘지 못할 텐데.
-내 말은 잘 들으면서 그럼에도 후회했어.
그녀는 모르고 있다.
자신 같은 거대한 존재에 닿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손가락으로 개미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과 같다.
자신은 악수를 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그 힘에 개미가 쓱 밀려나는 것과 같다.
언정무가 그녀의 말에 저항하지 못하면서도 지르는 절규를 한참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백은 결국 혼이 아니다.
그저 살아있을 때를 흉내 낼 뿐.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거대한 존재도 마찬가지.
그녀는 자신이 주고 있는 것이 ‘선물’인지 죽음으로 가는 ‘절망’인지조차도 구분할 수 없다.
거대해도. 결국은 백(魄)일 뿐.
이윽고 그녀가 진천희를 바라본다.
-네가 어떻게든 해준다고 했으니까. 그래. 응. 그리고…….
그녀는 깨진 토용 파편을 바라본다. 유호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유호의 정체를 알고 있다.
유호 역시 그녀를 알고 있었다.
-응원? 계속 네 곁에 있는 거지?
‘네. 아마도.’
그녀가 웃는다.
-그러면 나 이제 좀 자러 갈래. 말세 너머에서 먼저 기다릴 테니 너도 언젠가…….
빛이 흩어지고 흩어진다.
그 순간.
피이이잉-
마치 실 하나가 끊어지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대가는 모두 바쳐졌다.
오래된 유적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그그극-
진천희는 죽을 것처럼 피를 한 번 더 토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형?”
“혀어어엉!”
아우들의 비명 섞인 고함이 울린다.
다시 한번 의식이 멀어져갔다.
* * *
“형! 형!”
사마현은 쓰러진 진천희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 조금 더 느릿한 움직임으로 천우가 다가온다.
“막내야. 형은?”
“맥은 괜찮은데……. 자세한 건 올라가서 알아봐야지.”
그렇게 답한 사마현은 문득 진천희의 머리카락 일부가 사라진 것을 보았다.
마치 칼로 자른 듯 짧아져 있다.
전투 중에 머리카락이 잘리는 일은 있지만 이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잘라서 가져간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거기다 형이 쏟아낸 혈액도 바닥에 닿자마자 어딘가로 흩어져 사라졌다.
영리한 그는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바로 눈치챘다.
근거도, 증거도 없는 비약적인 추리지만 그저 추론의 씨실과 날실을 교차하며 재미있는 쪽으로 그림을 그려 나간 것.
“쯧. 형이 또 뭔가 주술 비슷한 것을 하고 대가를 치른 모양인데……. 우리를 구하려고 한 모양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천우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옛날 일인데… 형이 어느 날…… 갑자기 손가락 하나가 사라졌거든. 그때 목격자의 말로는 그다음 바로 미래를 안다면서 앞장섰다고.”
“…….”
“그다음은 피를 엄청나게 흘렸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이상하게 그 핏물이 전부 사라졌다고.”
형이 허공에서 나타난 직후에 생긴 일.
금혈방에서 입수한 정보는 여기까지.
얼기설기 띄엄띄엄 나누어져 있는 정보를 오로지 직관만으로 사마현은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형은 어떠한 조건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대신 무언가를 잃는 그런 설계 아닐까? 사채업도 대충 그렇게 흘러가잖아? 이쪽은 돈으로 하는 기적이지만.”
“그렇다면.”
“응. 그렇다면 셋째 형. 만약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기적을 일으켜야 할 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천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탈진한 형을 내려다볼 뿐.
“주술은 필히 대가를 동반하지. 그러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것일세. 오히려 신기하군. 이만한 기적에 고작 머리카락의 일부와 피? 유적과 백(魄), 그리고 내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일부 부담을 했다 해도 너무 남는 장사군.”
뜻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주술적인 가치가 저 육체에 담겨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천우가 즉시 기수식을 취하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과감하게 일 보 앞으로 내딛는다.
그동안 사마현은 뒤에서 진천희를 몸으로 가리며 시선을 돌렸다.
“언권 가주!”
“언정무처럼 무슨 조각 맞추기 하듯 재생한 걸까나~?”
언권.
그가 시체 같은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의복은 걸레짝이 된 상태였지만, 그 육신은 멀쩡해 보인다.
그런데 강시인가? 사람인가?
대체 어느 쪽인가?
“그런 식으로 재생된 건 아닐세. 본가의 유적은 이미 망가져 버렸으니까.”
언권 가주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가 나를 비롯해서 본가의 사람들을 전부…… 살려 주었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간단히 말하지. 그가 유적의 힘을 반전시켰어.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들어 강시로 탄생시키는 그 힘을 역천시켜서 이번에는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들었지. 허헛… 아무리 반대라고는 하나, 그게 가능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거늘…….”
언권 가주의 말에 사마현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그래서 형이 각혈을 하고 머리카락 일부도 같이 사라졌다… 이거구나?”
“그 부분이 더욱 놀라운 것이라네. 본래라면 몸뚱이 전체, 영혼까지 전부 대가로 치르고도 모자랄 수 있거늘…… 겨우 혈액과 머리카락이라니.”
“와아……. 이 아재가 나 빡치게 하네.”
사마현은 이미 언권에게 최소한의 예를 표하는 걸 놨다.
주먹부터 불끈 쥐는 것이 개패고 싶은 모양이다.
“막내야. 진정해라.”
“셋째 형은 화도 안 나쇼~?”
“큰형 아직 정신 안 차렸다. 진정해.”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다.
드드드드드-
땅이 갈라지고,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그것은 거대한 종.
사람보다 커다란 종이다.
여기저기 금이 가 있는 종을 보는 순간 의형제 둘 모두가 불길함과 신성함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허헛. 역시 거의 부서졌군. 허면…….”
언권 가주가 다가간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손을 뻗어 본가의 종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콰르릉!
종은 산산조각이 났다.
먼 옛날 후손을 위해서 만들어진, 염원을 담은 종은 이제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이 유적의 지배에서 해방이 되었네.”
유적과의 소통이 끝난다.
자연스럽게 알았던 진리들이 다시 잊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일까?
동시에 광기와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진천희를 돌아보는 언권의 눈은 맑기 그지없었다.
* * *
“으음…….”
몸이 흔들린다.
천천히 눈꺼풀을 뜨니 왜인지 시야가 높고, 천우의 뒤통수가 엄청 가까웠다.
“형, 정신 차렸어?!”
사마현의 말에 진천희가 말했다.
“어……. 그래. 나… 왜 업혀 있는 거야?”
“정신 잃어서 옮기느라 그랬지, 뭐. 그래도 오래 정신을 잃은 건 아니네.”
“응. 아까 기절하기 전에, 백(魄)이 흩어지기 전에. 뭔가… 본 거 같은데.”
작고 노란 것들을 봤다.
원래라면 귀여웠을 텐데 왜인지 엄청 무서웠다.
악몽인가 싶을 정도로.
‘뭔지 기억이 안 나네. 작고 노란색이면 병아리인가? 병아리가 악몽으로 나오나?’
유호가 끌고 나온 것까지는 생각났다.
거기까지.
‘아, 광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했지.’
그렇다면 나는 내 광기와 마주했던 걸까.
진천희는 스스로 반문한다.
깊이 생각해 봤지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질 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마치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얼마나 정신을 잃은 거야?”
“일각쯤? 이미 출구까지 다 왔어요. 형.”
천우의 말에 진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려줘.”
“아직 이러고 있어요. 형. 많이 힘들었나 보던데.”
“맞네. 계약의 반동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을 터이니 푹 쉬게나.”
언권 가주의 목소리.
진천희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다.
“어……. 살아 계셨네요?”
“자네가 살려주었지 않은가?”
“머리는 알고 있어도, 마지막까지 확신은 없더라고요.”
“그런 엄청난 짓을 하고 나서도 확신이 없다니. 자네답군. 그래도 잘되었지 않은가.”
언권 가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목소리… 차분해지셨네요.”
“광기가 사라졌으니 그렇지. 이제 우리는 유적의 지배에서 풀려났네.”
“기억은……?”
“악몽을 꾼 것 같은 기분이지. 기억이 나는 것도 있고 나지 않는 것도 있고 왔다 갔다 하니 원. 어찌 되었건 자네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네. 그리고 선조께서는 어째서 이런 짓을…….”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일생 동안 가문을 지키고 선조를 깊이 공양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그의 믿음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말세에도 모두 살아남기를… 아이들이 부디 말세 너머까지 갈 수 있기를…….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름도 모르는 여인.
말세는 대체 무엇일까.
그런 몸이 되는 게 구원이고 축복이 되는 세계란 대체 어떤 세계인 걸까.
진천희는 눈을 감는다.
“글쎄요. 원래 부모 사랑이라는 게 그렇잖습니까. 정작 자식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는 부모는 많지가 않으니까요.”
먹고, 마시고, 숨을 쉬고, 사랑하는 것을 끌어안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의 정의가 이다지도 다를진대.
그 선물 또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드디어 계단을 다 올라왔다.
눈이 부셔서 진천희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벌써 밖은 아침이었다.
쨍한 시야 속에서 가장 먼저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 울먹이는 소리, 그리고 외치는 소리.
이윽고 그 소리가 멈춘다.
시야가 돌아와 주변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언가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이 진천희를 보더니 소리쳤다.
“언가의 은인을 뵙습니다.”
한 사람이 부복을 하며 예를 취한다.
그러자 모든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따라 예를 표하기 시작했다.
“언가의 은인이신 진천희 대협을 뵙습니다!”
“언가의 은인이신…… 진천희 대협을 뵙습니다!”
“언가의 은인 진천희 대협을 뵙습니다!”
모두가 부복을 하는 와중에도 부산한 것 없이 매끄럽고 단정되어 있었다.
목소리는 비록 격양되어 떨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많은 사람들이 부복을 하는데도 잡티 하나 없이 일사불란하다.
그 모습을 보며 진천희는 생각했다.
‘아, 진주언가는 원래 이렇게 차분했구나.’
강시라서 차분한 게 아니었네.
파도처럼 그들은 깊고 무겁게 은인을 대한다.
이윽고 가주 언권이 진천희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마지막 예를 표했다.
“진천희 대협. 저희의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왠지 부끄러워졌다.
진천희가 말했다.
“아, 저……. 그만하시죠. 괜찮습니다. 저 진짜 괜찮습니다.”
귀까지 빨개져서 손을 내젓는 모습에 그만 사마현도 천우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많은 일이 있고, 그 모든 일이 있음에도.
형은 형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진천희가 다시 울컥 토혈을 하더니 천우의 몸에서 떨어져 내린다.
“형, 형!”
“역시 몸에 부담이 컸던 모양이오. 의원! 의원 없느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진천희는 생각했다.
‘유적 복원 서비스 왜 이리 쓰레기 같냐.’
일 쳤으면 알아서 복구해주면 안 되는 건가.
‘아, 내가 그래도 재생공으로 버티는 거구나.’
이렇게 피를 많이 쏟는데도 죽지는 않는 걸 보니 이게 다 재생공 덕인 것 같다.
위대한 kiii의 힘이다.
천룡공이 황궁 비고에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사람은 뭐든 배워야 해. 과연 나다. 크으……! 쩔어.’
혼자 미친 소리를 하는 것도 찰나.
그대로 다시 의식을 잃었다.
눈앞이 붉다.
“으아악! 형! 형! 정신 차려 봐요!”
“의원, 의원 어디 없느냐! 은인이! 은인이 쓰러지셨다!”
“이런 미친, 형, 괜찮아? 제발 정신 차려봐. 형. 제발.”
마찬가지로 진주언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방금 전에 강시였던 자신들을 구해준 은인.
그분께 고맙다고 말하자마자 혼자 각혈하더니 고대로 쓰러진 상황.
“으아악! 괜찮으십니까! 은공께서 의식이 없으시다!”
“허어어어억!”
모두의 경악과 절규를 뒤로한 채.
쓰러진 진천희의 표정은 어째 뿌듯하다.
‘이러고도 사람이 안 죽다니, 천룡공 익힌 내가 승리자다.’
미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