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68
제 868화
“……”
그 뒤로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걸까.
눈을 뜨니 언가의 문양이 보였다.
‘아, 진주언가 침상이구나.’
얼룩 하나 없는 정갈한 천장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기력도 돌아왔고, 정신도 또렷한 것이 더는 탈진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는 스스로를 돌아볼 정신도 생겼다.
목뒤가 허전하다.
‘음. 역시 머리카락 일부가 없어졌군.’
의각 몇몇 의원들이 보았으면 피눈물을 흘렸을 일.
허나 진천희는 담담히 생각했다.
팔 한쪽보다는 나으니까.
그리고 머리카락은 천룡공을 운기하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터.
문득 거울을 보니 역시 지구에서의 모습과 묘하게 닮았다.
물론 지금이 훨씬 더 피부도 좋고 이목구비도 또렷하지만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예전이었으면 못 느꼈을 것을 이런 기회에 깨닫다니 사람 눈 참 얄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걸까. 역시 혼이 같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쨌든.
‘후. 머리카락이라 다행이야. 대가가 모근이었으면 그날로 대머리행이니.’
유호가 다시 기르면 된다고 했으니 아마 다시 자라는 형태의 대가인 것 같다.
그건 다행이다.
‘이 강호에서 긴 머리카락을 유지한다는 건 어찌 보면 나름대로 강함의 증거일 수도 있겠구나.’
그 격한 전투를 하면서도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유지하려면 보통 실력으로 부족할 테니까.
‘이번에는 내 실력이 부족했던 거지.’
몸을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무식하게 둘둘 감겨 있는 붕대를 보니 아마 현이가 감은 것 같다.
중요한 처치는 의원들이 하더라도, 드레싱은 본인이 하겠다고 우겼겠지.
그 녀석 혜아 덕에 이런 건 어지간한 의원보다 더 빠삭하게 배워놨으니까.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형. 깨어났어요?”
“천우야! 아……. 천우도 감아놨구나. 현이가.”
그랬다. 천우도 반쯤 미라가 되어 있다.
사마현의 작품이다.
거기에 목발도 끌고 다니는 것이 어디 부러졌었나 보다.
천우가 쿵쿵 커다란 몸을 끌고 왔다.
“형, 그거 머리 묶은 거라고 묶은 거예요?”
“반만 묶었다. 하나로 묶는 건 사실 쉽거든? 그냥 꽉 조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반묶는 건 은근 힘드네.”
반묶음이 아니라 사과 머리 아닌가.
과거 어디서 배워 왔는지 현이가 가르쳐 준 머리다.
생각해 보니 형한테 배운 게 아닐까.
‘형 나이에 사과 머리라니…….’
아닌가, 생각해 보니 강호 노괴분들이 팔 척 장신 근육질에 사과 머리를 하신다.
물론 그런 귀여운 느낌은 아니고 봉두난발에 그냥 위로 머리 반만 묶은 형태지만.
보통 광인들이 그렇게 많이 한다.
형의 미모에 잠깐 속은 것 같다.
봉두난발 사과 머리가 약간 마공에 심취한 불혹의 광인 머리 같지 않나.
이른바.
미친 사과 머리.
천우는 자신이 묶어주려고 하다가 벙어리장갑마냥 붕대 감긴 손을 내려다본다.
형의 손도 마찬가지.
천우는 뭘 해도 망할 것을 직감했다.
“어……. 그냥 지금은 풀죠.”
“그래. 응.”
진천희는 머리를 풀었다.
“빨리 천룡공이나 운기해야겠다. 생각보다 금방 복구해. 들어 봐 봐. 타고나기를 장발로 태어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꺾여도 다시 기르는 인간의 의지다.”
또 미친 소리를 중얼거리는 형.
“형, 지금 머리카락 길이가 중요해요?”
천우가 황당하다는 듯 말하더니 형이 깨어난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단 알려야겠다고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진천희는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내공을 주천시켰다.
크게 주천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건드리지야 않겠지만 몸 안을 살피는 정도면 충분하니까.
* * *
눈을 뜨고 나니 언가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기억을 잃은 모양이네만 그 유적 근처에 있던 자들은 모두 기억이 남아있으이.”
“오오, 신기하군요.”
“어째 자네는 붕대 감은 손으로도 진맥을 할 수 있군그래.”
“진기진맥도 아니고 그냥 살아 계시는지만 맥을 본 거니까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리 말하며 이빨로 붕대를 뜯더니 검지를 꺼내서 다시 맥을 잡았다.
“오……. 진짜 제대로 사람이군요.”
“그런 셈이지.”
언권은 진천희를 한참 바라보았다.
유적과 접촉해 절망과 광증에 시달리면서 봤을 때도 참 같이 연구하기 좋은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그놈이 은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환자를 대하듯 하고 있다.
정작 본인이 환자면서.
이윽고 언권이 말했다.
“소가주, 그러니까 언정무는 단전을 폐하고 평범한 양민으로서 살아가기로 했네.”
“역시 그리되었군요.”
“그래. 결과적으로 죽은 이들이 돌아오고, 유적의 지식 대부분을 잊어버렸다고는 해도. 본인이 저지른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닌 법이지. 마음이 꺾였으니 애초에 더는 무공을 하긴 힘들었네.”
“…….”
참 기묘하게도 마음은 일류 절학보다도 강력하고, 삼류 무공보다도 연약하다.
제아무리 화경의 고수라 하더라도 마음이 꺾이면 삼류 무인조차 당해내기 어려워지는 게 바로 무학의 세계니까.
언권이 말했다.
“그리고 나 역시 단전을 폐하고자 하네.”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진천희가 즉답했다.
‘아니, 후계도 없이 가주까지 단전을 폐하면 혈선교 밥 되기 딱 좋거든요?’
남궁세가야 남궁세가의 아이들, 그리고 할아버지인 태상장로까지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으니 가주 하나 단전을 폐해도 세가가 휘청일 리가 없겠지만 진주언가는 다르다.
‘이야, 이러나저러나 혈선교 남는 장사였네.’
만약 오래전 그녀가 했던 계획대로 모두가 강시가 된다면 그거대로 멸망이 다가왔다는 뜻이니 이득이다.
그리고 잘 해결된다 하더라도 진주언가 가주와 소가주는 스스로 단전을 폐해 은둔할 터이니 진주언가를 먹기 딱 좋은 기회이고.
진천희는 제3의 선택지를 내밀었다.
“죄에서 도망치시는 겁니까? 살아서 갚으셔야지요.”
이것도 다행히 죽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이긴 했다.
시간 돌린다는 건 미친 권능이었다.
심지어 진천희 일행이 부숴버린 강시도 모두 시간을 돌려 없던 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종이 울리기 시작한 후에 강시가 된 사람들만 적용.
이미 강시였던 것들은 그냥 부서진 채였다.
그건 뭐 재산 손실이지.
그것까지는 후손이 알아서 하라는 선조의 의지일까?
아니면 그냥 대가 낭비라 내버려 둔 걸지도.
‘고대 유적은 그야말로 인간의 지식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무언가였구나.’
운이 좋았다.
그 이상 할 말이 없다.
마지막 유적의 핵과 접촉한 것도 결국 운이었고, 그럼에도 정신이 부서지지 않은 것도 운이었다.
스승님 잘 만난 운.
‘물론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뼈를 깎아 수련한 무공과 현원전단신공, 양의심공이 함께한 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진천희는 자신의 광기를 조우해야 했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작고 노란 게 무척 무서웠다는 감정만이 남았다.
‘역시 병아리 떼가 나온 건가. 식인 병아리, 뭐 그런 거?’
자기 안에 그런 B급 호러 영화 같은 게 있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그런 광기라도 광기니까.
반면 언권은 진천희의 말에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는지 눈물을 참는 기색이다.
“자네는…… 사람이 참 좋구만. 물론 그러니 의원을 하는 거겠지만. 그래, 살아야지. 살아서 갚아야지. 죽으면 결국 아무런 속죄도 하지 못하는 것일 테니.”
‘아, 혹시…? 일 끝나고 자결하시려고 했던 건가.’
유적에 정신이 물들었을 때도 가문과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양반이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곤 한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세가의 명예를 자결로 갚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싶다만.
죽는다고 ‘아, 그 사람 억울해서 죽었대.’라고 모두가 알아줄 리가 없다.
인간이란 남의 무덤에도 침을 뱉는 족속 아닌가.
‘역시 뒤가 구리니까 죽었나 보다.’하고 손가락질이나 하겠지.
타인이란 생각보다 잔혹해서, 그들에게 죽음이란 속죄의 방편도 아니고 불명예를 명예로 바꾸는 마법의 수단도 아니다.
그냥 도피.
어찌할 줄 몰랐을 때 하게 되는 도피.
의원은 이제 그러다가 실려 온 환자들을 그만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주님께서 이대로 돌아가시면 그 똥은 제가 치워야 합니다요.’
뭔가 가슴에 던질 말이 필요했다.
진천희는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길에서 객사한 자들을 집에 안전히 보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강호 끝에서 끝까지. 가족들 품에 돌려줄 수 있는 건 세상천지에 진주언가밖에 없지요.”
“내…… 그동안 쌓아온 선업이 헛된 게 아닌 모양이군.”
“악업이 사라지지 않았듯, 선업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아들을 잘못 키웠네.”
“네. 그렇기에 단전을 폐했지요.”
“나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지. 광기에 물들었다고는 하나 그 점은 변함이 없으이.”
참 결벽적인 사람이었다.
과거 무공 비급을 노릴 때야 강호 개싸움이니 죽자고 달려들었으면서, 이런 면은 또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 게 참 사람이 입체적이구나 싶다.
“살아서 갚으셔야 할 겁니다.”
죽지 마라.
제발.
“…….”
언권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후계를 다시 키우고, 그 아이에게 가업을 물려줄 때. 그때 내 스스로 단전을 폐하겠네.”
다행히 죽을 마음은 거둔 모양이다.
안정이 된 후일 단전의 문제는, 거기까지는 진천희 자신도 뭐라 할 생각은 없다.
“네. 그러시지요.”
“자네에게 많은 걸 받았으니, 본가에서 십분지 일이라도 갚고자 하네.”
언권의 눈이 빛났다.
빚지고 사는 성격은 또 아니었다.
* * *
같은 시간 백린의각.
백린의선 제갈린은 집무실에 앉아 있다.
심기가 불편한지 턱을 괴고는 부채 끝으로 탁, 탁 책상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저 새어 나오는 기백만으로도 심장에 안 좋은지라 의원들이 백린의선 집무실은 빙 돌아 피하고 있다.
사회생활 특급 전문가인 당주들도 지금은 핑계를 대고는 의각 어딘가로 튀었다.
그만큼 제갈린이 내뿜는 기백은 보통을 아득히 뛰어넘는 무서운 것이었다.
진천희가 보았다면 스승이 부채로 책상을 두들기는 걸 보며 ‘마치 거대한 범이 기분이 나빠 꼬리를 탕탕 두들기고 있는 모양새’라 하겠지만.
유호는 생각했다.
‘그놈은 기이하게도 제갈린을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니까.’
물론 가끔은 치밀어 오르듯 두려움을 깨닫는 걸 보면 그냥 무의식 차원에서 억누르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윽고 제갈린이 입을 열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고대 유적까지 나오시는군. 미리 준비를 해두기를 잘했군그래.”
“이럴 줄 알고 액(厄)을 대신 받을 토용을 같이 보낸 겁니까?”
“내가 신선도 아니고 진주언가에 그런 고대 유적이 있어서, 그게 뜬금없이 나타난 것을 어찌 알겠나.”
“그러면……?”
“하늘을 짚은 게 아니라 사람을 짚은 게지. 그 아이가 또 죽음을 강요당할 것 같기는 했네. 그리고 양민들의 목숨을 앞에 두고 그 아이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겠지.”
“…확실히 그런 놈이지요.”
“그러니까 앞으로 올 미래는 몰라도 그 아이의 미래는 알고 있으니 대비한, 일종의 유비무환인 게지.”
“그렇군요.”
“자네의 힘이 담겨 있으니 대가가 필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완화를 시킬 수 있겠지. 거기까지는 자네도 할 수 있지 않나? 그 아이는 자네의 유일한 ‘신관’이니.”
“편법이긴 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면서 인과율을 억지로 속이는 거죠.”
“땅이나 하늘이나 사람 돌아가는 곳은 똑같군.”
그걸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인간은 댁뿐일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어찌 되었건 성공했으니.’
눈앞의 사내는 하늘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그 같은 신격을 가진 불멸자들조차도 두려워하는 게 바로 인과율이다.
하늘의 절대 법도.
그것의 허점을 찾아 아무렇지도 않게 뒤틀어놓고서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부채 뒤축으로 탁탁 책상이나 두들기고 있으니 원.
“그래서. 지금은 어떤가?”
인과율을 상대로 사기 치고, 그걸 성공한 놈이다.
그런데 그런 놈도 제자 단속은 안 되는 게 놀랍다.
‘일광이 미친놈이지.’
대답이 느려지자 제갈린의 한쪽 눈썹이 구겨진다.
“유호?”
그야말로 더러운 성질머리.
심기가 불편한지 한기가 순간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