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85
제 885화
‘신생아 사망률이 줄어들어 이제는 사망 원인을 얼추 구분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으니.’
그뿐이 아니었다.
‘배달 신공 덕분에 아침에 두유를 보내줄 수 있는 망도 이제 완성했고, 슬슬 때가 되었지.’
드디어 그 기반이 갖추어졌다.
“그래서…… 두유를 만들자, 이겁니까?”
제갈린에게 차를 우려주고 난 이후 집무실을 나온 유호.
그런 유호의 옆에는 여전히 진천희가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렇지! 우리 다섯째는 바로 두유로 하는 거야!”
그놈의 다섯째.
숫자가 맞긴 맞나?
자잘한 것들까지 더하면 더 되지 않나?
‘어휴. 미친놈.’
깊이 생각해서 뭐 하나.
“설마 발음 못 할 이상한 이름으로 또 한동안 부를 겁니까?”
진천희가 웃었다.
“아. 그렇지. 이름은 뭐……. 금호두유로 하자!”
금호신단에 이어서 금호두유.
이번에도 유호,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다.
“하아…. 그래. 그럽시다. 그래서 뭘 만들어 드려야 하는 겁니까?”
유호는 진천희의 끈질김에 항복을 표시했다.
콩을 갈아 즙 내는 정도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허나 진천희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수동 믹서기.”
진천희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 * *
믹서기.
mixer+機의 두 단어가 합쳐진 일종의 콩글리시.
하지만 지구 별 한국인들은 이게 뭔지 전부 알아듣는다.
사실 한국어로 번역을 한다면 분쇄기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영어로는 보통 블렌더(blender)라고 부르는 이 요리 기구와 비슷한 것이 이 세계에도 있다.
바로 맷돌이다.
맷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석기 시대부터 여기저기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의 무림 별에서도 아주 잘 쓰이는 요리 기구.
이걸 이용해서 두유를 만들면 된다.
사실 만드는 법도 간단하다.
콩을 푸욱 삶은 다음 그 껍질을 깐다.
그다음 맷돌로 갈아 버린 다음, 그렇게 나온 콩물을 일정한 비율로 물과 섞어 끓인 다음 채로 거르면 된다.
여기에 영양을 위해 멸치를 가루로 내서 넣는다든가, 설탕을 조금 첨가하기도 한다.
이것이 두유.
콩으로 만든 우유라고 해서 두유(豆乳)다.
이걸 대량생산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믹서기가 필요하다.
맷돌도 삶은 콩을 갈아버릴 수 있으나 무겁고, 또한 대량생산을 하기에는 제법 버겁다.
그러나 수동 믹서기라면 어떨까?
‘사실 원심분리기도 이미 만들었던 전적이 있으니 그걸 살짝 개조해서 수동 믹서기를 만들 수 있겠지.’
다만 이 정도 복잡한 장치를 빠르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유호뿐!
다른 장인들도 시간을 들이면 만들 수야 있으나 지금은 환자에게 빠르게 두유를 먹여야 하기 때문에 유호에게 매달린 진천희였다.
그렇게 완성된 수동 믹서기를 직접 드륵드륵 돌려댔다.
“크하하핫! 수동 믹서는 이 맛이지. 크하하하하하!”
애 목숨 살리는 모습치고는 광기에 차 있다.
그렇게 막 만든 따끈따끈한 두유를 가지고 진천희는 만파곡과 함께 산모와 아이를 찾았다.
그리고 지금.
산모는 아이에게 조심조심.
두유를 먹이기 시작했다.
도기로 만든 젖병의 일종으로 먹이고 있는데, 주먹만 한 크기에 작은 대롱이 달려 있는 형태다.
작은 찻주전자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이것을 사용한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참 신기하단 말이지.’
옛날에 박물관에서 본 청동기 시대에 출토되었다는 토기와 유사했다.
그거보다는 더 개량된 형태지만.
굳이 고무 젖병이 없더라도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인류는 이런 방식으로 아이와 환자에게 유동식을 먹여 왔나 보다.
사람이 사람을 걱정하는 데 기술의 발전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거지.
아이의 작은 입 안으로 두유가 흘러 들어간다.
쇠약한 아기는 아주 느릿하게 두유를 받아 마셨다.
조심조심.
아주 세심하게 아이에게 두유를 먹이고 등을 두드려 준다.
그리고 소화가 된 건지, 아니면 다시 토하는 건 아닌지 지켜본다.
기다림의 시간은 제법 오래 걸린다.
‘신기해. 인간은 처음에는 무엇 하나 능숙하게 하는 법이 없구나.’
먹고 삼키는 것조차도 혼자 할 수 없는 존재.
처음에는 스스로 목을 가누는 것도 못 한다.
그게 바로 인간인가 보다.
먹는 법도, 기는 법도, 말하는 법도.
결국 모든 것은 무수한 실패와 노력 끝에 이루어지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꺼억.”
세워서 안고 있으니 마침내 아이 입에서 트림이 나왔다.
“징조가 좋군요.”
약재당주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끼니를 몇 번 먹이니 황금색 똥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맥을 해보니 건강하다.
제대로 두유를 소화시키고 있다는 뜻.
‘요즘 지구였으면 특수 분유를 먹였겠지만……. 두유도 충분히 좋은 식품이지.’
다행이다. 다행이야.
진천희가 손을 떼자 산모가 걱정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깊었지만 몹시 떨리고 있었다.
진천희는 뻔뻔하게 웃었다.
“와, 살 금방 찌겠는데요? 애 체질이 장군감이야.”
“아아…….”
산모의 얼굴이 무너져내린다.
얼마나 긴장했던 걸까.
긴장과 공포가 사라지니, 그 자리를 눈물이 채운다.
한두 방울 봄비처럼 떨어지던 눈물이, 울음이 되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제가 한 것보다 아기가 진짜 대단한 거죠. 애가 조그매도 살려는 의지가 있어요. 그 많은 일이 있는데도 여전히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좀 있으면 더 달라고 보채겠네요.”
아기들 중에는 유독 잘 안 먹는 애들이 있다.
혹자는 배가 불러 그런 소리 한다고.
배고프면 먹을 거라고 이야기하는데, 소아과 친구들 말로는 안 먹는 아기는 배가 고플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안 먹는단다.
엄마 젖 싫다는 애도 있고, 젖병 싫다는 애도 있고.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다 싫다는 애도 있고.
아픈 애가 이러면 아주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고.
특히나 이번에는 엄마 젖도 아니고 도기로 만든 젖병이니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먹어줬다.
“아가, 고맙다. 고맙다.”
산모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진천희도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잘 먹어서 다행이야.’
이제 이유식 넘어갈 때까지만 두유로 버티면 된다.
* * *
아이에게 두유를 먹게 하자 차차 건강을 되찾았다.
아기와 함께 산모의 얼굴도 살아났다.
드디어 그녀도 밥을 제대로 먹기 시작한 것.
아기가 살고자 하니, 엄마도 어떻게든 이 강호에서 살아남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결국 두유를 먹은 지 한 달째.
아기는 산모와 함께 건강하게 퇴원했다.
두유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돈도 제법 있는 집안이니 하인을 시켜서 만들어 먹이면 될 일이니까.
얼마 후 백린의각에 익명으로 막대한 기부금이 온 것도 당연하려나.
다음에는 진짜 본명을 밝히고 오겠다고 했는데, 그건 아마 은원을 정리한 후가 되겠지.
남편을 노렸으니 그다음은 아기를 노리려고 할지 모른다.
‘그게 강호니까.’
유당불내증인 아기.
아기는 치료했지만, 앞으로의 과제가 남아 있다.
현실적으로 아기가 유당불내증인지 아니면 다른 병인지 알아내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위생 자체가 현대와 다르고.
천연두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예방접종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대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 강호에서는 애초에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의원을 찾아가는 일도 흔치 않았다.
소아과 자체가 없는 이 상황에서는 모든 신생아를 만나서 검진할 인력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진단하는가.
산파가 있다.
“그래도 산파 정도면 천형(天刑)은 금방 알아봅니다. 의원과는 길이 다르다 하여도, 그분들도 날로 일하는 게 아니지요.”
그 마을에서 가장 산모와 아기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다.
“아이가 천형을 앓고 있으면 산파가 백린의각 분타나 의방에 이야기를 해서 진맥을 받고, 두유를 받아 먹이는 것까지는 가능할 겝니다.”
이것은 약재당주 만파곡의 생각이다.
“괜찮네요. 그러다 만약 다른 병일 경우 진단하기도 쉬울 거고요.”
“소각주님은 애초에 이러려고 큰 그림을 그린 것 아니십니까.”
아픈 사람을 가까운 의방으로 호송하고.
약을 배달하고.
때로는 이렇게 두유를 보내기도 한다.
배달 신공이 이것을 위해 만든 것 아니냐는 의미.
진천희는 완전히 부정하진 않았다.
“직접 콩을 사다가 해 먹는 집도 있겠지만 여건상 힘든 집도 많으니까요. 그래도 산파를 통하는 것은 약재당주님의 생각이십니다.”
“두유를 대량 생산하시니 저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유호가 만들어 준 수동 믹서기는 이제 각 공방으로 가서 제작되고 있다.
맷돌과 원심분리기의 원리에서 착안한 그것은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면 콩물이 잘 갈려 나오신다.
그뿐이 아니었다.
“원시 빙정이 개꿀이죠.”
빙정을 계속 생산하는 화수분 같은 놈이라니.
어찌 보면 목숨값 한 걸지도?
“그리고 돈도 왕창 벌고 싶네요.”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용으로도 판매를 시작했다.
금호두유밀(金狐豆乳蜜)!
꿀 밀 자.
보통 꿀 그 자체를 뜻한다.
즉 금호두유밀은 꿀과 조청이 조금 들어가서 달달하다.
아이도 좋아하고. 성인도 좋아할 두유!
‘데워 먹으니까 더 맛있는데, 이거?’
스팀 밀크처럼 만들어서 먹어도 일품이다.
진천희는 귀한 열양기와 귀한 풍양기를 스팀 밀크 만드는 데 쓰고 있다.
‘크으, 꿀맛.’
* * *
그리고 이 두유 판매에 대해서 평가하는 자들이 당연히 있다.
바로 강호의 확성기.
놀러 다니면서 입방아를 찧고 다니는 사람들.
삼학사!
심 학사, 장 학사, 만 학사, 세 명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 많은 집안의 한량들인 삼학사는 최근 백린군에서도 중추라고 할 수 있는 백린의각 주변에 만들어진 부호들의 별장 거리에 집을 하나 마련했다.
백수 아들이어도 아들은 아들.
애가 공부할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며 엄마가 별채를 지어주었다.
백린의각이면 아파도 바로 치료받을 수도 있고.
온천도 좋으니 공부에 집중이 될 거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현대에서 애가 공부에 필요하다고 콤-퓨타를 사준들 애가 그걸로 공부를 하던가.
음식 맛있지. 온천도 있지.
백린의각에서 치료도 받을 수 있지.
사람이 몰리다 보니 공연을 하는 유랑극단 같은 이들도 자주 들어오고.
아예 고정적으로 대형 객잔에 고용되어 공연을 하는 자들도 널렸지.
게다가 백린군에는 금혈방에서 운영하는 비무장이 있는 것도 한몫했다.
강호인들이 비무를 겨루는 곳으로, 누가 이길지 돈을 걸고 내기를 벌일 수 있다.
내기 도박은 화 제국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로 불법도 아니라고 하지만.
대다수의 도박장의 경우 그 운영자들이 사기를 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백린군 하오문 직영 공개 도박 비무장의 경우에는 사기 치는 경우가 없다고 해서 인기 만점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곳에 나오는 이들이야 명문 대파의 무인들보다는 낭인들이 대다수지만, 개중에는 초야에 숨어 있던 고수가 올라오는 경우도 있어서 더욱 인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세 명은 특별 관람석(높은 망루 같은 데에 따로 마련된 공간. 일반석에 비해서 열 배 높은 가격.)에 앉아서 비무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비무장은 흙바닥에 지름 이십 장 정도의 원형 공간.
그 원형 공간을 둘러싸고 일 장 정도 높이의 벽이 세워져 있고, 그 벽 위쪽 사선으로 좌석들이 들어차 있다.
진천희는 이걸 보더니 ‘소형 콜로세움이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콜로세움이 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삼학사에게는 강호의 최신 유행.
금호두유밀(金狐豆乳蜜).
그것도 강호인을 시켜 열양기로 데운 후에 풍양기로 돌렸다는 특별한 두유 세 잔이 놓여 있었다.
두유 위에는 거품이 풍성하다.
거기다 더욱 사치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기 위해 위에 금가루도 살며시 뿌려놓았다.
“오오오! 새로운 음료가 생겼군!”
“하지만 어지간한 술보다 비싸다네. 금혈방 놈들 아주 그냥 돈독이 올랐어.”
“강호인 부려 먹어서 만든 거니 그 값을 받겠다 이거지.”
삼학사는 비록 백수지만 유행의 선두 주자였다.
“자, 그러면 다들 한잔하세!”
강호의 백수 인플루언서들은 건배하듯 두유 잔을 부딪치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한입씩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