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
제 9화
툭.
화르르륵!
최고급 비단 이불에 불이 붙었다.
흠칫.
소년 여하륜이 잠시 멈칫했다.
“불?”
그리고 그 시선이 이불에 붙은 불길로 갔다.
자세를 풀면 진천희는 도망간다. 그러나 이 자세를 유지하면 불에 당하는 건 자신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하륜의 눈동자가 천천히 원래의 묵빛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광기가 가라앉고, 정신이 차분해지는 모양.
그렇다. 방금 전까지의 여하륜은 차갑고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어서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천살성의 광기가 그를 움직인 것.
‘소설처럼 진짜 눈빛이 변하잖아? 위험했다아…….’
“여긴…… 어디지? 분명 나는…….”
전쟁터에서 살아나온 병사가 가까이에 있는 자를 공격하는 건 의외로 흔한 일이다.
여하륜이 주변을 바라보면서 정신을 차리는 그 순간, 그의 손이 느슨해지는 것과 동시에 진천희는 발로 놈의 배를 후려쳤다.
빠악!
“큭!”
혼란스러운 와중에 당한 일격이다.
그 짧은 틈에 진천희는 곧바로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후. 이제야 살 거 같네.’
이불은 불타고 있다. 녀석은 아직 침상에 누운 채로 불타는 이불을 덮은 채다.
녀석이 이불을 홱 젖히면서 침상 옆으로 빠져나와 일어섰다.
그러나 분노했기 때문일까. 여하륜의 망막은 아까보다 더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피가 날뛰면 파괴 욕구가 강해지는 것도 소설과 똑같아.’
그가 정신을 잃거나 목숨이 위험해지면 언제나 피에 사로잡히게 된다.
천마 여하륜이 이 피를 제어하기까지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린다.
비인외도의 마교에서는 그의 목숨을 여러 번 살리게 되지만 그 대가로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될 터.
‘출생의 비밀과 통제가 되지 않는 광증은 무협 소설의 감초지.’
그러나 그런 놈이 눈앞에 있는 건 또 이야기가 다르다.
책 속에서야 편당 100원 주고 결제하는 유희거리지만 현실에서는 통제되지 않는 살인마가 아닌가.
거기다 그 피가 발현될 때마다 눈 색이 변하다니.
‘이게 무슨 중2병…….’
색도 하필 붉은색이다.
그나마 봐줄 만한 건 이놈이 그간 보았던 무협 소설 주인공답게 잘생겼다는 설정 덕분이겠다.
일단 저 살인마 놈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실제로 여하륜은 몸을 살짝 낮추고 호랑이 비슷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뭔가 무공을 써서 공격하기 직전의 자세!
‘젠장. 이놈을 진정시키려면…… 그래. 그게 있었지!’
아주 짧은 순간.
진천희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여하륜을 진정시킬 아이디어가 바로 떠오른 탓이다.
‘침착, 침착하자.’
감정을 다스리는 건 외과의의 기본 소양이다.
수술대에서 이런 감각은 늘 느껴 왔다.
이번에 집도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목숨. 어떻게 보면 타인의 목숨보다 더 가볍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덕분일까.
“강호의 은원은 마치 칼날의 양면 같다.”
아직은 작은 소년인 여하륜이 멈칫했다.
“……?”
‘좋아. 먹혔어!’
그의 눈이 살짝 멈추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습은 진천희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방금 한 진천희의 말. 그것은 바로 여하륜의 어머니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었으니까.
-륜아. 강호의 은원은 마치 칼의 양면과 같단다. 은이든 원이든 결국 피를 부르기 마련이니, 부디 얽매이지 말거라.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거라.
여하륜에게 있어 어머니는 하나뿐인 피붙이다.
그녀는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아들에게 출생의 비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은혜든 원한이든 얽히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이후. 여하륜은 자신이 천살성인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억누르고자, 그리고 몇 가지 이유로 마교로 향하게 된다.
‘자. 어쩔 거냐?’
진천희는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여하륜을 바라보았다.
피붙이의 유언이 입에서 나오자 여하륜의 눈이 커졌다.
진천희는 한마디 덧붙였다.
“마교에 가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혈고(血蠱)를 품게 되면 제아무리 네놈이라도 놈들의 꼭두각시가 될 뿐이다. 정신 차려. 여하륜.”
마교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자 여하륜의 망막은 더욱 또렷한 검은빛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와 다른 표정이 되었다.
경계. 혼란.
그런 감정이 얼굴을 물들인다.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아는 것이지……?”
마교.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워서 도망쳐야 할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자신의 발로 마교로 향하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가는 곳에는 피의 궤적이 이어졌다.
납치를 당하면 모를까, 직접 마교의 문을 두드리는 자치고 사연이 기구하지 않은 이는 없으리라.
그게 아이라면 더더욱.
그건 지금의 여하륜. 그리고 짐작하기로는 아마 진천희의 원래 육체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마교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지?”
혼란스러워 하는 여하륜을 보면서 진천희는 계속 말했다.
“가르쳐 줄까? 마교에 입교하기 위해서는 혈고를 먹는 수밖에 없어. 그건 누구라도 예외가 없지.”
혈고(血蠱).
몸속에 기생하며 몸을 갉아먹는 기생충이다.
마교에서 주는 환단을 복용해야 하는데, 열흘에 한 알이면 된다. 그러나 기간 내에 먹지 않게 되면 혈고는 몸속에서 알을 낳고 폭발한다.
죽는 건 둘째 치고, 그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책에서 묘사하기를 불에 타는 고통을 10이라 한다면, 혈고가 터지며 느끼는 고통은 80~100 정도 된다고 했었다.
그가 마교의 소교주가 되어 다른 소교주를 죽이기 전까지 있을 첫 번째 시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혈고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어쩔 거냐.”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지?”
“글쎄. 내가 어떻게 알고 있고, 누구냐는 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지. 나는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진천희와 여하륜.
겉으로 보면 둘 다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하륜은 천살성이 가져다주는 천재성과 기구한 운명 덕에 정신만은 빠르게 성숙해져야 했고, 진천희는 전생에 성인이었던 기억이 있어 서로의 대화가 전혀 어색한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제3자가 본다면 이상하기 짝이 없고, 기괴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이불은 점점 타올라서 이제는 침대를 집어삼켜 크게 타오르고 있다.
그 사이에 대치한 두 소년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이 녀석…… 조금 고민 중이긴 한가 본데?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녀석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지?’
진천희는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후. 여하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놈도 신교가 목적인가? 어디 가문의 녀석이지?”
‘아항. 나를 마교의 팔 대 가문으로 오해하는 건가 본데? 하긴. 마교의 팔 대 가문의 자식들은 어렸을 적에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수행도 하고 첩자질도 하는 게 보통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여기서는 오해를 굳이 풀 필요는 없으려나?’
“그 표행에 어른도 없이 어린애가 혼자 탔으면 짐작되지 않아?”
화르르륵-
대화하는 사이에도 불길은 점점 더 크게 번져 갔다.
마침내 밖에 있던 호위 무사가 알아차릴 만큼.
그러나 진천희는 문에 빗장을 내리고는 도리어 막아섰다.
쾅쾅쾅!
호위 무사가 문을 두드린다.
여하륜이 물었다.
“무슨 짓이지?”
“선택에 도움이 될까 하고.”
“뭐?”
‘X발. 여기서는 크게 질러야지. 모 아니면 도다!’
진천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불혹의 나이를 거친 자신이라고 해도 무서운 것은 무서운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새끼와 확실하게 관계를 다져 놓지 않으면 영영 기회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와 손을 잡을래? 아니면 죽을래.”
“널 때려눕히고 밖으로 나간다는 선택지도 있지.”
“그래? 그러면 나는 여기서 네가 마교의 간자라고 소리칠 거다.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맞은 흔적도 있겠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을까. 네 말을 믿을까? 설령 반만 믿더라도 조사하다 보면 뭔가 나오지 않겠어?”
“……네놈…….”
녹슨 목소리가 불길 사이를 긁었다.
호위 무사가 소리치자 가솔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이 문은 열린다.
하지만 그 전에.
“선택해.”
진천희의 강한 목소리에 여하륜이 작게 뇌까렸다.
“……기억났다.”
뭐가 기억이 난 걸까.
“내가 쓰러졌을 때 날 옮겨서 치료한 게 네놈이었군. 의식이 오락가락할 때라 꿈인 줄 알았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거기다가 다른 속셈까지 있었던 모양이고.”
진천희는 생각했다.
네놈이 주인공인 줄도 몰랐고, 그냥 의사로서의 호의라고 말해 봐야 믿어줄 리가 없다.
차라리 납득할 만한 그럴듯한 목적 하나를 이야기하는 게 좋으리라.
“겸사겸사지. 어쩔 거야?”
연기가 매캐했다. 향초들이 들어 있던 장식장에도 불이 붙었다.
쾅!
검격이 진천희의 뒤를 스쳐 날아갔다.
귀빈용 방인 만큼 문도 꽤나 튼튼한 모양이다. 첫 검격에 날아가지 않는 걸 보면.
여하륜이 입술을 비틀며 미소 지었다.
“손을 잡도록 하자.”
그 미소가 도무지 아이의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심연 밑바닥의 무언가가 그 대신 웃는 것만 같았다.
‘저게 아직 한 번도 살인을 안 한 여하륜이라 이거지.’
저게 그나마 여하륜의 가장 순진한(?) 시절의 웃음이라 할 수 있겠다.
진천희는 그런 여하륜과 정반대의 표정을 지었다.
“살려 주세요오오오! 으아아아앙! 엄마아아아아아~~!!!”
누구라도 심금이 울릴 법한 가장 순수하고 착한, 겁먹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어린아이가 불난 곳에 갇혀서 소리를 지르니 그 효과는 배가 되었다.
“네놈……?”
180도로 급변하는 얼굴에 여하륜이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문이 열린다. 진천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눈물 맺힌 눈으로 가장 산적 같아 보이는 무사를 끌어안고는 엉엉 우는 시늉을 했다.
“문을 잠그는 건 잘했는데 열 줄은 몰랐나 보오.”
“설마 아이한테 문 여는 법 안 가르쳐 준 거요?”
그 말에 산적 같은 호위 무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밖에 무서운 일이 있을지 모르니 문단속 잘하라고 잠그는 법을 가르쳐주긴 했다. 하지만 여는 법을 가르쳐주는 걸 깜빡 잊은 것도 사실이다.
호위 무사가 큰 소리로 말을 돌렸다.
“어, 어서 불부터 끕시다! 애가 얼마나 놀랐겠소!”
가솔들은 불을 끄면서 호위 무사에게 몹시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이곳에 온 내내 착하고 귀여운 짓만 골라 했던 진천희다.
그런 아이가 저놈 때문에 큰일 날 뻔했다.
“앞으로 잘하쇼!”
“맞아. 거 못 믿을 사람이네!”
그때 여하륜은 놓치지 않았다.
진천희가 호위 무사의 뒤에서 슬쩍 웃는 것을.
그것은 영락없는 사기꾼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