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12
제 912화
전쟁.
전쟁은 이기든 지든 그 뒤도 전쟁일 수밖에 없다.
행정의 전쟁.
기껏 대승을 했는데 ‘내일 당장 먹을 밥이 없어요’란 소리를 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못 할 일은 아니지.’
현령을 굴리고, 관군들을 굴리고, 청도의 양민들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도왔다.
“일단 대로변부터 치우세. 잔해를 치워야 수레가 지나갈 수 있을 테니!”
“아이고, 여기 시신이 또 발견되었네!”
“언가분들 아무나 부르게나!”
강호인들도 나서서 함께 돕고 있다.
그중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진주언가.
집단을 다시 뭉치게 하는 데에 장례식의 역할은 크다.
출신이야 어떻든 청도를 위해 싸우다 죽은 분들.
그들을 홀대하게 되면 다음에는 누구도 청도를 위해 싸우지 않게 될 터.
진주언가는 시신을 정중히 수습하기 시작했다.
물론 혈사이니 만큼 개개인의 장례가 아닌 합동 장례식을 치르게 되겠지만.
타지 출신 무인들은 고향에 묻힐 수 있게 강시로 만들어 먼 길 떠나보내고.
청도에서 태어난 자들은 강시로 만드는 대신 시신을 한곳에 모아 부패하지 않도록 막고 있다.
“크윽……! 사람… 사람 있소?”
“여기 사람이 깔려 있네!”
“건드리지 말고 백린의각 의원을 부르세!”
아직 명이 붙어 있는 사람은 백린의각이 치료한다.
근처 분타에 있는 모든 상, 중, 하의원이 달려와서 환자들을 보고 있다.
임시 진료소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재앙과도 같은 전투.
허나 비극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전투 속에서 괴어인 갑주는 찌그러지는 법이 없으니 참 괴이하구려.”
“그뿐인가? 병장기는 얼마나 튼튼한지, 강호인의 검기를 막아냈는데도 날 한 번 상하지 않더군.”
그랬다.
괴어인들이 쓰던 무구들은 지나칠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
동네 대장장이들은 어디에 쓰는 무기인지 알 수 없다 고개를 저었고.
사천당가 출신 무인이 뜬금없이 이 철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흑괴철이라고 부르오.”
흑괴철?
모두가 그의 말을 경청했다.
무인은 흑괴철로 만든 검을 손가락으로 탕탕 튕기고는 무게를 재고, 햇빛에 비춰 보길 반복하더니 말을 이었다.
“철의 일종임에도 녹슬지 않소. 특히 해풍에도 강한 게 바로 흑괴철이지. 만년한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강철보다 훨씬 더 단단한 데다 날이 나가는 법도, 녹이 스는 법도 없어 귀물로 통하오.”
“그런 건 어디서 나오?”
“예전에 광산이 있긴 하였으나 귀물 몇 개를 만들고 씨가 마른 후요. 아마 괴어인들만 아는 광산이 있는 모양인데……. 혹시 위치를 알 방법 없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있어도 바닷속에 있지 않겠소? 뭍에 있다면 진즉에 걸렸겠지.”
사천당가 무인은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재산이오. 팔면 유가족들에게 전달할 재물은 될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진천희는 그 흑괴철 병장기를 비싼 값에 사주기로 약속했다.
백린의각 입장에서는 앞으로도 이런 괴어인들을 상대해야 할 터이니 이런 병장기가 특히나 필요했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유가족들은 돈이 필요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지옥 같은 허기는 매일 돌아온다.
여기에 세금도 면제해주니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터.
매우 현실적인 불행 중 다행.
가족을 잃은 것은 아프고 슬프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가야 하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뒤처리를 하는 데 제법 시간을 잡아먹고 나니.
드디어 백린의각에 돌아갈 수 있을 만한 상황이 되었다.
다만 그 전에.
‘제독태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만.’
아무 동창이나 불러 흑패를 돌려주어야 하니 만나자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얼마 후 서신이 도착했다.
간단한 암호.
가볍게 풀고는 읽어 내려가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촌부, 지난번 뵈었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습지요.
능글맞은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역시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럴 것 같긴 했지.’
그래서 동창 놈들을 떠본 거고.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갈 양반이 아니긴 하니까.
그래도 당시에는 순순히 말을 들어주는 척을 하지 않았던가.
바로 부르니 쓱 답장을 날리는 게 정말 백 년 묵은 너구리다.
그리고 이 동창 놈들은 제독태감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고 존명을 외쳤다 이거지?
‘눈 뜨고도 코 베이는 게 황궁이라더니.’
이럴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청도를 지킬 수 있었으니 그걸로 좋다.
서신대로 군영 뒤쪽 천막으로 가니 탁자 하나에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그중 하나는 제독태감의 것.
그는 차를 홀짝이며 의원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오셨습니까요.”
“진 태수, 제독태감님을 뵙습니다.”
일부러 격식 있게 인사했다.
“아이고, 예를 표하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러면 이 촌부, 진 태수님을 뵙습니다.”
그렇게 짓는 미소에서 서운함이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너무 격식을 갖추진 말았으면 하는 것이겠지.
진천희도 이해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청도의 차가 참 맛있긴 하죠.”
“네. 덕분에 앞으로도 청도의 차를 계속 마실 수 있게 될 것 같아 이 촌부,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진천희는 그의 인도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가 건네준 흑패를 내려놓고는 다른 서책도 차례로 내려놓았다.
“이것은……?”
“괴어인들을 처리하기까지의 보고서들입니다. 저들은 완전히 근절된 것도 아니고, 바다는 저들의 영역이니까요.”
제독태감은 앞부분 몇 장을 읽더니 물었다.
“괴어인은 늙지 않는다고 쓰여 있는데 참입니까?”
“네. 놀랍게도 인간의 기준으로 거의 영원을 살아가는 족속들이지요. 대신 일기를 보아하니 스스로 번식하여 자손을 낳는 숫자는 적어서 손이 귀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축복’을 내려 수를 늘리는 것 같고요.”
“그러고 보면 괴어인 시신 중에 어린 괴어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성장 속도도 엄청난 모양이군요.”
황궁은 거기까지 파악한 건가.
“네. 일기에 따르면 태어난 지 고작 한 달 만에 걷고 말하기를 시작하고, 일 년이 되면 이미 성체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물론 괴어인끼리 낳은 자식들에 한해서지만요. 거기다 ‘축복’은 보통 장성한 성인 인간이 받으니 더더욱 즉시 전력으로 쓸 거고요.”
“…….”
제독태감은 생각에 잠긴다.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왠지 너무 불공평합니다요. 왜 인간은 이리 약한 건지.”
“대신 독에는 약하지만요.”
“인간도 독에 약하지 않습니까?”
“그으……렇죠. 독공을 따로 익히는 게 아니면.”
“그러면 괴어인이 독공을 익히면 어차피 인간보다 더 내성이 생길 거 아닙니까.”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타하파는 확실히 독에 내성이 있는 놈이었다.
현경지독에 당해도 재생력이 좀 막히던 게 전부였던 놈이니까.
진짜로 강한 상대에게는 독공은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타하파 같은 상대는 그 도시 다 뒤져서 그놈밖에 없으니까 그건 다행이려나.
진천희의 말에 제독태감이 한숨을 쉬었다.
“어찌하여 하필 폐하께서 치세하시는 대에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인지.”
말세니까.
골드&실버가 개미 손톱만큼 불쌍해졌다.
그동안 새외에서 실컷 부려 먹었던 걸 생각하면 개미 손톱보다 더 동정하기는 좀 그렇고.
골드&실버의 죄는 그러니까.
제비뽑기를 잘못한 죄다.
뽑아도 하필 말세를 뽑아버린 게 죄인 거지.
그건 꽝보다 더 나쁘다.
‘백성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고.’
만약 선황이 이 시기에 즉위했다면 이미 세계는 끝나지 않았을까?
일단 숙신족은 못 막을 거고.
행정도 선황 때 자료가 얼마나 소실되었는지 생각하면 뭐, 제대로 행정 역할을 했을지도 의문.
여기에 보타문 콜레라랑 오독문 장티푸스도 돌아다닐 거고.
천연두도 극성일 거고.
거기에 우역까지 범람해서 가축은 떼죽음일 거고.
관리들 부정부패는 아주 끝내줄 거고.
여기에 가뭄이나 홍수까지 겹치면……?
‘음, 이 중에서 최소 절반은 나를 굴리거나 내가 알아서 굴러가서 막은 거 같은데?’
정정한다.
골드&실버가 제비뽑기를 개같이 망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보너스 뽑기에서 ‘진천희’를 뽑긴 했다.
그래서 좌 제독태감, 우 진천희 양손에 들고 제국 팔가를 상대로 승리하고 말세에서 아득바득 살아남는 거지.
뭐, 그런 황제도 해저 도시에 있는 멸망의 빅 레드 버튼까지는 어떻게 못 한다는 게 참 엿 같은 거고.
이딴 세상에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다.
진천희가 말을 이었다.
“보고서에도 적었지만, 수공과 독공을 익힌 무인들을 대량으로 양성하는 게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괴어인들도 세력이 여럿이니 그 일부라도 회유가 된다면…….”
“인간이 닭이랑 외교를 맺어 오리를 친 일이 있습니까?”
“없지요.”
진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독태감이 말했다.
“망설임이 있으시군요.”
진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냐, 괴어인이냐 한다면 저는 천 번, 만 번이고 인간의 편을 들 겁니다. 허나, 살생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괴어인의 도시를 박살 내고, 그들의 지도자인 타하파를 무찔렀다.
군을 이끌고 청도를 지켜냈다.
‘어려운 문제였지.’
자신은 철학자는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의지로 인간을 먹기를 바라고, 그것을 거부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락샤샤 때와는 또 다른 양상이었어.’
백천군은 사기꾼이다.
본인은 아니라 하지만 놈은 사기꾼이 맞다.
괴물로 살게 되면 이성은 어떻게 되는지, 사람을 어떻게 잡아먹는지 설명을 하질 않았으니까.
반면 이쪽은 거래보다는, 훈장에 가까웠다.
헌신에 대한 훈장.
애초에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그들에게 헌신해야 하니까.
헌신을 한다는 뜻은 인간을 계속 바쳐야 한다는 뜻.
물론 축복을 원하는 사람들도 변명할 거리는 있을 거다.
불치병 때문에, 늙어가는 게 두려워서, 가족을 지키려고.
그렇게 남의 아이를 팔고, 남의 가족을 팔고, 괴물이 되기를 염원하고.
그들 속에 들어가면 함께 그 고기를 먹고.
‘어려운 문제지.’
허나, 의원은 칼을 들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을 상처 입히는 짓이었다.
지키고, 무찔렀다고는 해도 그게 살생이 아닌 것은 아니었으니까.
평생 고뇌해야 할 문제.
‘협(俠)의 본질이지.’
지키는 것도 무찌르는 것도, 결국 칼을 들어야 한다.
피로 긋는 협의 길, 그 끝에 우리는 무엇에 다다르게 될까?
제독태감은 진천희를 바라본다.
‘말이 통하는 적이라는 게 참 어려운 일이지요.’
자신 같은 사람들이야 명이 내려오는 대로 해결할 뿐이지만, 이 의원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안다.
그 고뇌를 제독태감은 모르는 척 넘긴다.
“여기서부터는 극비입니다만. 괴어인뿐이 아니라 제국 여기저기에서 기이한 것들이 목격되기 시작했습니다.”
“관은 무시하고 있겠군요.”
“네. 으레 그렇듯 양민이 헛것을 보았다 취급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황실에 보고조차 하지 않는 자들이 대부분인 상황이지요. 물론 이번 청도 사태로 달라지는 관도 있겠습니다만…… 그들도 직접 본 것은 아니니까요.”
“황상께서는 걱정이 많으시겠군요.”
“네. 물밑에서 많은 것들을 준비 중이십니다.”
그 엄청난 화탄을 비롯해서 말인가.
제독태감이 말했다.
“언제 한번 황궁에 들러 진맥을 부탁드립니다.”
“황명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말은 하신 적은 없으십니다. 그냥 이 촌부의 노파심이지요.”
말세를 앞두고 두 황제는 죽어라고 싸우고 있다.
어찌 보면 부질없는 저항일 수도 있겠다.
진천희가 만난 해선은.
‘그래. 세상을 바다에 잠기게 하겠다고 했지.’
그런 세계에서 아무리 치세를 잘한들 무슨 의미인가.
제아무리 태평성대를 구가한다고 해도 천지만물이 물속에 잠길 텐데.
그러나. 그럼에도.
‘아락바락 나아가는 게 두 사람이지.’
진천희 자신도 그렇지 않던가.
그리고 청도에서 잔해를 수습하고 있는 양민들도.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보내주고 있는 진주언가도.
이번 전투로 내상을 입은 무인들도.
그 상처를 치료하는 의원들도.
차를 마시던 진천희는 문득 발아래 개미들의 행렬을 발견했다.
당과 냄새를 맡고 가루라도 주워 먹으려고 달려온 모양이다.
흙바닥에 천막을 쳤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 모습이 어쩐지 인간과 같아서 당과 부스러기를 나누어주었다.
삶은 유한하다.
의원이라면 모두가 처절하게 깨닫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것.
제아무리 노력해도, 제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도.
결국 죽음은 언제든 온다는 것.
허나,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지.’
* * *
제독태감과 작별을 하고는 동생들과 함께 백린의각으로 돌아왔다.
백린의각에 도착하니 스승님께서는 외출 중.
‘음, 그래도 유호는 남아있군.’
토용 시계를 잘 써먹었기에 가장 먼저 만나러 갔다.
“뭡니까. 주인님 볼 때는 목욕부터 하더니, 저는 그냥 봐도 된다 이겁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는 유호에게 진천희가 깊이 예를 표했다.
“고맙다는 말부터 하려고 왔어.”
“고마우면 상이나 차리십시오.”
팔도, 다리도, 눈도, 내장도, 피도, 살도.
그 어떤 것도 빼앗기지 않고 시간만을 돌렸다.
그걸 고작 상 하나 차려서 퉁 치라니 실로 말도 안 되는 대가 아닌가.
“정말 그거면 돼?”
의원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되물었다.
“술도.”
“……알았어.”
거기까지 답하고는 다시 돌아가려는 진천희에게 유호가 되물었다.
“그래서, 인간을 먹는 자들과 조우해 보니 어떻습니까. 양립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습니까?”
“…….”
진천희는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괴어인의 질문이 아닌 유호 자신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도 괴어인처럼 사람을 먹었다고, 유호는 그리 암시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
유호가 앞으로 사람을 먹을까?
모르겠다.
일단 지금의 유호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있다.
‘만약 유호가 사람을 먹는다면 우리 관계는…….’
왜인지 지금의 대답이 앞으로 유호와의 관계를 결정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몇 번이나 죽어본 자, 특유의 감.
허나 거짓도 안 되고 가식도 안 된다.
이런 이야기에 거짓으로 답했다가는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니.
약간의 침묵.
이윽고 진천희는 청도에서 얻은 해답을 입을 열어 말했다.
“……그걸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야. 그들이지.”
“먹는 한에는 싸우겠군요.”
“그래. 의외로 간단한 기준이야. 포식자와 피식자는 친구가 될 수 없어. 포식자가 먹기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피식자가 그 이상으로 강해지든가 해야겠지. 하지만 인간은…….”
“네. 백 년도 살지 못하죠.”
그것은 어찌 보면 두 사람의 관계를 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그 사이에서는 그 어떤 타협도 없다고 의원은 말한다.
“죽이는 것은?”
“강호에서는 인간도 인간을 죽이지. 거기서부터는 법과 은원이 판단할 일이야.”
냉정한, 아니 어찌 보면 지독하게 원칙주의적인 답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여우는 눈을 감는다.
“…….”
그것을 신호로 진천희도 더는 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되었을까?
알 수 없다.
허나, 두 사람의 관계를 정하기에는 충분했으리라.
기묘한 공기.
이윽고 의원은 곧바로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쪽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화선지를 물들이듯 퍼져나가는 어둠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걸음을 뗀다.
“콜록.”
밤공기가 차가웠다.
마치 심해 속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