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20
제 920화
일이 끝날 때쯤.
드디어 스승님께서 돌아오셨다.
돌아오신 스승님은 지난번에 봤던 것과 똑같은 옷차림에, 소매에 구김 하나 없다.
마치 스승님 옷만 매번 스팀 다림질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
거기다 땀 냄새까지 나지 않아서, 이쯤 되면 사람이 아니라 로봇인가 싶을 정도였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이 불초 제자, 스승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천희가 예를 표하자 스승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본 것 같지만 어째서인지 어제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 바닷가 여행은 즐거웠느냐?”
“즐겁기는요. 끔찍했는걸요.”
진천희는 그리 말하며 곧바로 차와 다과를 내온다.
원래라면 유호가 하는 일이지만, 지금 유호는 바쁘다.
그것도 아주 미치게 바쁘다.
조로록-
연녹색 찻물이 다기 안을 가득 채운다.
제갈린은 봄의 싱그러움을 차로 느꼈다.
“최상급 백차구나.”
“네. 봄의 새순을 따서 만들었지요. 천우가 보내주었더라고요.”
“…….”
스승님은 향을 잠시 음미하다가 한 모금 삼켰다.
딱히 대답이 없으시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차가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거나, 너무 오래 끓였거나, 또 반대로 너무 덜 우렸으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으니까.
조금도 더하거나 덜한 것이 없이 딱 맞다는 뜻.
이윽고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차 끓이는 솜씨가 많이 늘었구나.”
“뭘요. 좋은 스승님을 둔 덕에 이 제자, 날로 성취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림으로 본 듯한 제자의 표상 같은 놈이다.
모든 세가, 아니 모든 도가와 불가에서도 바라 마지않는 그런 제자의 모습.
그런 이상적인 제자가 다과를 꺼냈다.
드르륵-
“이것은 무엇이지?”
“아, 유자 미니 컵케이크요. 이번에 만들었거든요. 한입에 들어가기 좋게 완전 작게 만들었어요.”
……그래. 이런 것만 빼고.
‘이제는 숨길 생각도 안 하는구나.’
치즈를 건락이라고 바꿔 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강호식으로 번역하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그렇게 제갈린은 강호에서 유자 미니 컵케이크를 다과로 먹게 되었다.
폭신한 질감과 함께 크림 위에 얹어있는 유자의 향이 비강을 가득 채운다.
맛있다.
이 녀석이 강호에서 숙수로 이름이 높은 것은 아마 이 때문이겠지.
이런 음식은 이놈 말고는 먹을 일이 없으니까.
어쨌든 봄의 향을 담은 백차와 유자 미니 컵케이크 조합은 그야말로 천국.
인세에 이런 호사가 있나 싶을 지경이다.
“그래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말해 보거라.”
제자의 눈동자가 푸른빛을 반사한다.
그러고는 도로록 굴러 창밖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자신의 발밑을, 그리고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과거를 회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어쩐지 아파 보였다.
“……결국 전쟁이더라고요.”
“흠?”
“제국과 숙신족의 전쟁. 서로의 영역을 놓고 이루어진 전쟁이요.”
“전쟁이라.”
“하지만 인간들끼리의 전쟁과는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포식자와 피식자의 전쟁.
괴어인 종족은 애초에 인간을 먹이로 삼고, 인간들을 자신들의 동족으로 만드는 자들.
먹이로도, 번식으로도 착취하는 관계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축복’을 원하는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일단 종(種)의 관점에서 보면요.”
“틀린 말은 아니지.”
“사실 괴어인도 인간을 먹지 않으려면 먹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요. 물고기만 먹는 괴어인도 있고요. 하지만…… 인신 공양은 멈출 수가 없는 모양이더라고요. 걔들도 걔들이 믿는 신이 있으니까요.”
진천희는 선택지를 주었으나, 타하파는 최소한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인신 공양으로 여러 기적을 만들어낸다.
혈선과 같은 존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신은 괴어인 편이다.
당장 봉인되어 있던 해선도 괴어인을 ‘아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마치 친자식을 일컫는 듯한 말이었다.
그랬다.
‘그녀’가 진주언가를 사랑하듯, 해선도 괴어인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해선은 괴어인들을 위해 인간을 잘 다져서 먹이겠지.
어미 새가 벌레를 잡아 아기 새들의 입 속에 넣어주듯이.
당장 우리도 자식에게 돼지고기를 먹이지만, 그 돼지가 얼마나 불쌍한지는 잘 생각하지 않으니까.
“인간이 그들의 자원인 이상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 그리고…….”
진천희는 차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비정할 때는 비정해져야 한다는 것도요.”
목소리에는 결의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고뇌도 느껴졌다.
“그래도. 네. 공존할 수 있는 종족이 있다면 언제든지 손을 내밀 생각입니다.”
유호도 있고, 그때 그 화학하는 원숭이도 있지 않던가.
연원왕.
뒷조사를 해봤지만 놈이 산채 두목이었을 적에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물론 먼 옛날에는 그렇게 잡아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최근은 과일과 술을 즐겨 먹는 모양.
‘백방으로 그 화학하는 원숭이 놈을 찾고 있지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고 있지.’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으려나.
생각해보면 민증 있는 시대도 아니고. 녹림도 짓 안 하겠다고 튀어버리면 잡을 방법이 없다.
하지만 왜인지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스승님이 말했다.
“그렇구나. 하지만 한 가지 더. 네가 가늠하지 못하는 위험이 언제든지 네 앞에 나타날 수 있음을 인지하거라. 시계를 이미 한 번 사용했지 않느냐?”
‘아, 역시 알고 계셨구나. 하긴, 유호가 준 시계인데…….’
그러고 보니 스승님은 외유를 나가서 무엇을 하고 오신 걸까?
진천희가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스승님, 지저 도시에 복희의 피가 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거기에 멸망의 시발점이 하나 있는데…….”
“……희야. 지저 도시라니? 그런 건 없단다.”
“네?”
“도시 전체가 토사에 잠겼는데 무슨 수로 거기를 들어가겠니?”
“어……?”
그냥 입구가 막히고 천장이 내려앉아 도시가 박살이 난 수준이 아니고, 무슨 물에 잠기듯 완전히 토사 자체에 잠겨버렸다고?
이러면 백린현 단위의 토목공사를 수년 하지 않으면 도시에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
단순히 산을 밀어버리는 것과 차원이 다른 노동력이 필요할 테니까.
“네가 폭탄으로 도시를 무너뜨린 후, ‘원인 불명’의 지진이 한 번 더 덮쳐서 이제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또한 지진이 날 때 ‘원인 불명’의 화재도 있었으니 주변 사람들은 접근조차 못 했지.”
그렇게 빅 레드 버튼은 봉인되었다.
이것을 봉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보통은 봉인이라고 하면 비밀통로 끝에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도사가 주문을 외우면 그제서야 풀리는 구조 아니던가.
수십만 토목의 힘이 아니면 부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봉인이라 할 수 있나?
‘역시 봉인 중의 최고는 물리 봉인인가?’
하긴, 악의 결사대가 지하 던전 끝에 있는 마왕을 부활시키려면 수많은 함정을 뚫고 가야 하지 않던가.
거기에 함정을 배치하기보다는 그냥 콘크리트를 부어버리면 더 손쉬울지 모른다.
어쨌든 악당들이 거기서 삽질을 하고 있으면 마을 사람들과 용사들이 발견하겠지.
토목이란 그런 법이니까.
“……!”
‘원인 불명.’
진천희는 소름이 돋았다.
이 단어가 이렇게 무섭게 들릴 줄은 몰랐다.
스승님은 백차를 삼키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또한 근방의 괴어인들도 ‘원인 불명’의 적조 현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적조요? 보통 물고기라면야 적조 현상이 위험하기야 하겠지만 걔들은 괴어인이잖아요.”
“하지만, 이번 적조는 신기하게도 물고기는 멀쩡한데 개구리나 괴어인들에게만 유독하다더구나.”
“바다에 개구리는 안 살잖아요.”
“잘 아는구나. 그래서 괴어인만 당한 거지. ‘원인 불명’의 적조 현상은 금방 흩어져서 해소되었지만 괴어인들이 많은 타격을 입었단다.”
괴어인이야 당하는 모습을 봤다손 쳐도.
애초에 거기에 살지도 못하는 게 개구리.
그런데 개구리한테 안 좋은 건 어떻게 아신 거야?
“워, 원인 불명의 일이 많네요.”
후릅-
스승님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답했다.
“사람이고 괴어인이고 착하게 살아야 한단다. 강호의 은원이란 이런 것이지.”
……스승님, 진짜 뭐 하고 오신 거예요?
* * *
계절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봄을 지나 여름으로.
한결 후끈해진 날씨에 모두가 옷깃을 퍼덕였다.
진천희는 천우에게 적당한 답례품을 보내주었다.
백린의각에서 만든 내상약과 주정(酒精)이다.
쉽게 말해 의료용 에탄올.
강호인들 중에는 이걸 보내면 독주인가 싶어 진짜로 마셔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천우가 그럴 리는 없겠지.
그리고 유자로 만든 잼.
강호 월드에는 설탕이 조청보다 많이 비싸긴 하지만 존재한다.
그런 설탕을 졸여서 만든 호화롭기 그지없는 요리.
잼이 뭔지는 몰라도 유자청이 뭔지는 알 테니 알아서 잘 해먹지 싶다.
‘권제님이 보고 싶네.’
살아계셨다면 권제님을 위한 술을 보낼 텐데, 이제는 묘소에 바칠 것밖에 없다.
그렇게 바리바리 선물을 싸서 보내니 문득 사마현에게 연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지금쯤이면 서신이 서너 번은 왔다 갔을 텐데 조용하다.
지난번에 보낸 서신도 답장이 없고.
‘장기 임무 때는 금혈방 밖에 있으니 답이 없을 때가 있긴 하다만.’
진천희는 그리 생각하고는 다시 서신을 썼다.
두 번째.
이번에도 답장이 안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
어디 가서 죽을 놈은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하륜이인가.’
하륜이에게도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
매운 사탕도 함께 동봉해서.
하륜이는 그래도 다시 답장을 주고 있다.
누군가 서신을 약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뭘 하고 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만 건강하다고 하니 그건 다행이다.
다만.
‘음……. 글씨가 전보다 더 각이 지고 있네.’
이 세계는 타자기도 폰도 없다.
글씨가 그 사람의 됨됨이로 여겨지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글씨체가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진천희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몸을 일으켰다.
백린군은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다.
우선 확실한 건, 이 넓은 농지가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에는 대풍년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것.
질소 고정법을 되는 대로 시행했더니 농작물이 무럭무럭 자랐다.
물론 뇌진, 천진, 난만.
거기에 뇌공을 익힌 사람들까지 다 해도 모든 농지에 번개 찜질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질소 고정법을 시행한 비료를 뿌리고 있다.
파종 전에 직접 밭에다가 뇌공을 꽂아 넣는 것보다야 효과는 떨어지지만, 이 또한 잘 자랐다.
‘좋네. 좋아.’
거기에 양질의 농기구가 보급되었다.
농민에게 있어 농기구는 소모품.
밭을 하나 다 갈고 나면 농기구가 이가 나가기 마련이다.
그걸 수리를 하든, 날을 갈든 하면서 버텨나가야 하는데.
양질의 철로 만든 농기구는 그야말로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특히 소나 말을 이용해서 경작을 할 때 쟁기가 제대로 버티고 있어서 예전에 비해 세 배나 더 밭을 갈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농업혁명!
‘나중에는 철이 남았지.’
그래서 외부로 철기를 수출하기 시작.
농기구에서부터 요리칼, 솥, 그리고 각종 장신구까지.
백린군.
나아가 강소성 전체가 크게 부흥했다.
‘이게 게임이었으면 황금기 표시가 떴겠군.’
옛날에 운명 5를 미친 듯이 했던 기억이 난다.
운명 5는 확실히 시간 잡아먹는 타임머신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플레이어들과 게임을 하는 게 아니니 세이브, 로드를 하기가 쉬웠다.
그러니까 한 턴만 찍고 세이브하고, 다시 와서 한 턴 찍고 세이브하기 좋은 거지.
‘세종대왕도 업데이트되고 진짜 재미있었는데.’
지금쯤이면 지구는 운명 9 정도는 나오지 않았을까?
그립다.
고향도 가족도 없으니 그건 그립지 않다.
하지만 그냥 순수하게 지구에서 즐겼던 것들이 그리웠다.
영화, 웹소설, 게임, 음악들도.
콘서트의 후끈한 열기와 내장을 울리는 록의 에너지.
목구멍을 긁고 지나가는 콜라의 맛.
망향(望鄕).
어째서 이 두 글자가 떠오른 걸까.
진천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백린군 생각이나 마저 하자.’
이제는 못 돌아가는 지구를 그리워해 봐야 아무런 의미 없지 않나.
자신은 죽은 사람이니까.
‘철기 생산량이 늘어나니까 백린군에도 공방이 엄청 들어서기 시작했지.’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거울 공방.
금혈방과 같이 협업해서 만들었던 거울 공방이 성의 외곽 쪽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
사람 없는 외곽에 놓은 건 다른 게 아니다.
땅값이 싼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서.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정보를 좀 빼가는 자들도 있는 모양인데…….
‘생각보다 소득이 별로 없는 모양이야.’
플로트 공법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겉모습만 보면 쉬워 보이는데 막상 따라 하려면 힘든 게 바로 플로트 공법이다.
겉핥기가 아닌 제대로 된 내부 정보와 숙련된 장인들이 필요하다.
장인들이라고 처음부터 잘했던 게 아니다.
깨먹은 거울 숫자만 세 자리는 되지 않았을까?
덕분에 승승장구하며 확장이 되고 있을…… 것 같지만 금혈방도 고민이 크다.
‘생산량을 늘리기가 어렵지.’
기밀 유출이라는 게 그렇다.
기밀을 지키려면 자연히 소수 정예가 되는데.
또 생산량을 늘리려면 결국 기밀 유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 이렇게 겉핥기 수준만 유출된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이번에 철기 생산량이 늘어난 백린군에 확장 공방을 열기 시작한 것.
‘현이가 나를 너무 믿는군.’
이러다가 발등 찍히는 거 아닌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