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7
제 97화
스승님이 말했다.
“만년화리의 살도 채취해 온 것은 잘한 일이란다. 내단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이것도 내공 증진에 큰 도움이 되지. 특히 본가의 약선 요리법이 합쳐지면 효과는 배가 된단다.”
진천희가 먹다 말고 배울 태세를 갖추려고 하자 제갈린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우선은 먹자꾸나.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우리 둘 다 쉬자꾸나.”
진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밥을 삼키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랬다.
생애 가장 맛있는 아침이었다.
* * *
진천희를 포함한 의각원들이 하루를 푹 쉬었다.
‘푹 쉬었다고는 해도 근무 순번인 응급 의원들은 일했지.’
그랬다. 현대의 병원이든 무림의 의각이든 완전한 휴식은 또 없다. 모두가 쉬는 공휴일이 온다고 해도 그날이 순번이면 일해야 한다.
대신 그날 근무한 의원들은 다음 날 쉬게 된다.
어찌 되었건 그래도 그날만큼은 의각이 조용했다. 진천희는 누각에 올라가 술을 따랐다.
알코올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 지방에서는 감주(甘酒)라 불리는 놈이다.
자신의 육체의 나이가 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정신은 이미 불혹이 넘은 성인.
환골탈태를 통해 외견으로는 10대 후반으로 보인다. 이 시대 기준으로 성인이다.
‘이런 날 한잔하지 아니면 언제 하나.’
이 와중에서도 알코올이 들어간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역시 술은 맛이 없기 때문이다.
어릴 때도 술맛을 몰랐는데 커서도 술맛을 모르겠다.
인생 이 회차까지 왔는데도 역시나 술은 맛이 없었다.
감주 같은 말만 주(酒)가 들어간 알코올 없는 음료수가 좋았다.
약재당에서 약용으로 만든 감주를 홀짝이며 지붕에 몸을 뉘었다.
‘끝났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또 졸렸다.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동안 쌓여 왔던 피로가 일이 끝나니 둑 터지듯 밀려왔으니까. 육체적 피로는 아니었다. 정신적인 피로감이었다.
푸른 하늘을 보던 진천희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스승님의 외투가 몸을 덮고 있었다.
잠깐 왔다 가셨나 보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 * *
“희야, 일어났구나.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단다.”
스승님이 해사하게 웃으셨다.
“이게 다 뭐예요?”
악사에 예인들까지 초청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본격적인 연회다.
스승님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 대 당주들이 기다렸다는 듯 연회를 열더구나.”
뭐?
진천희가 놀라서 돌아보니 사 대 당주들이 상기된 얼굴로 술잔을 흔들었다.
이미 제법 술이 들어갔는지 모두 얼큰하게 취한 얼굴이다.
심지어 가장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침구당주 사마병까지 벌게진 얼굴로 술을 홀짝였다.
“그도 그렇죠. 주인님의 몸은 백린의각의 한 아닙니까. 그 한을 드디어 풀었으니까요.”
“유호.”
“왜 그러십니까.”
유호는 의각원들과 당주들에게 술병을 나르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은 유호만큼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지도 않았고 주향도 풍기지 않는다는 점.
약재당주 만파곡이 술병을 흔들었다.
“유호 총관도 그만 일하고 한잔 받으시게!”
그 말에 유호는 고개를 저었다.
“술 싫어합니다.”
“어째 이런 경사에 입도 안 대누. 독하다. 독해.”
만파곡은 혀를 차더니 진천희에게 다가왔다.
“우리 소각주는 한잔 하겠나?”
만파곡은 ‘소각주’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동안 공무에서는 소각주라고 불렀지만 사적일 때는 도련님이나 소공자라고 불렀던 분이었다.
“하하하. 편한 자리이니 낮춰 불러 주세요.”
“이제 어떻게 그러겠나. 하늘 같으신 소각주님이신데.”
진정으로 소각주로 인정함을 의미했기에 진천희는 잠시 말을 잃었다.
만파곡이 말했다.
“뭐 하나! 사 대 당주들이 소각주님께 한 잔씩 따르지 않고!”
그 말에 사 대 당주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진천희의 잔에 술을 따른 건 의외로 침구당주 사마병이었다.
쪼르륵-
“소각주님께 이 침구당주가 한 잔 올립니다.”
꼬장꼬장한 영감이라며 만파곡이 투덜거리는 걸 본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남에게 잘했다 칭찬을 하는 일이 거의 없는 노인네라고 추나당주 주단하가 욕을 했었다.
웃는 일이 거의 없는 분이었다.
달고 독한 술에서는 대나무와 약초 향이 났다.
백린의각의 향이다.
놀랍게도 침구당주 사마병은 술을 삼키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주름진 노인장의 얼굴이 더욱 주름졌다. 행복의 골짜기였다.
그다음은 추나당주 주단하가 진천희의 잔을 채웠다.
“저 노인장에게 첫 잔을 빼앗겼네요. 추나당주 주단하가 소각주님께 올립니다.”
그렇게 한 잔.
“본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침구 영감도 줄은 가장 먼저 섭디다? 무력당주 독고중후가 소각주님께 한 잔 올립니다.”
다시 한 잔이 찼다.
마지막 약재당주 만파곡이 진천희 앞에 섰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사 대 당주님들 중에서 이 노파, 가장 먼저 소각주님을 받들었다는 걸 꼭 기억해 주실거라 믿습니다. 후후후.”
그녀는 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능글맞게 웃었다.
제갈가의 가신다운 능청스러움이었다.
농담처럼 너스레를 떨었지만 실제로도 진천희에게 가장 많은 힘을 실어 준 건 바로 만파곡이었다.
진천희의 수술 후 처치, 백린신단 제작부터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진천희를 보조해 왔다.
고마운 분이었다.
쪼로록-
잔이 가득 찼다.
그것을 신호로 사 대 당주들이 동시에 말했다.
“각주님, 소각주님. 경하드립니다! 이제 만수무강하소서!”
와아아아-!
의각원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울렸다.
사 대 당주들이 먼저 잔을 따르자 이제 다른 의각원들이 저마다 진천희의 잔을 채웠다.
이번에는 도수가 없는 감주다.
진천희가 좋아한다고 하니 그걸로 권하는 모양이다.
“유 총관께 소각주님이 환골탈태에 성공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소각주님이십니다! 백린신단을 제작하신 것도 대단하신데 각주님의 치료에 성공하시다니 백린의각의 홍복입니다!”
“배울 때는 힘들었는데 덕분에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천희는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이윽고 구석에 있던 왕각연이 진천희에게 다가갔다.
“야, 나만 보리차 주는 이유가 뭐냐? 아빠 때문인지 감주도 안 주더라.”
그녀는 툴툴거리며 진천희에게 다가왔다. 진천희가 의뭉스럽게 답했다.
“나도 보리차가 더 좋아.”
“하여간 얄밉기는.”
그녀는 큭큭큭 웃었다. 진천희가 물었다.
“너도 꽤 키가 컸다?”
“응. 한창 클 때니까. 다 크면 어지간한 내 또래 여자애들보다 근골이 장성하게 되겠지.”
생각해 보니 주왕도 공손영도 모두 꽤 키가 큰 편이었다.
팔다리도 길었고 뼈도 굵은 편이었다. 근육 역시 탄력이 있고 탄탄했다.
“키 작은 무인들도 있던데.”
“타고나는 것까지는 완벽하게 못 바꿔. 그저 한 척만큼 클 거, 한 척 반만큼 크게 해 주는 거지.”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크지 않나.
“궁귀 아저씨가 꽤 키가 크지?”
“응. 엄마도 커. 그러니 나도 크겠지. 너 나중에 나 올려다보지 않으려면 환골탈태했다고 방심하지 마라.”
왕각연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 꼭 진천희를 내려다보고 말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고 보니 궁귀 아저씨는?”
“아빠는 무력당주 대신해서 호위 서고 있어. 누군가는 의각을 지켜야 하니까.”
“고생이 많으시네.”
“고생은 무슨. 옛날보다 위험한 일도 아니고, 돈은 따박따박 잘 들어오고, 백린의각 이름으로 하는 일이니 무림에 은원 만들 일도 적고. 얼마나 편한데. 거기다가 옛날처럼 가족이 한두 달 떨어져 있을 일도 없잖아. 퇴근하면 매일 봐.”
직업 만족도가 높으신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요즘 궁귀 아저씨 표정이 밝았다.
“다행이다.”
“다행은 무슨, 고맙지. 아빠가 소백룡을 만난 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라. 나보고 너한테 잘하라고.”
“크크크크.”
“그런데 이미 알아서 잘하고 있어서 이 누님이 도와줄 게 있는지 모르겠네.”
“있지.”
컹!
황구가 진천희의 다리 사이로 기어 나왔다.
“엇, 황구 일어났어?”
황구는 연회 내내 먹고, 배부르면 자기를 반복하고 있다.
저래 보여도 개방 방주님의 전서견이다 보니 주는 음식도 하나같이 때깔이 좋다.
개 팔자가 상팔자.
왕각연이 황구의 뒷목을 긁어 줬다.
“우리 황구. 나 보고 싶었어?”
헥헥헥헥.
황구가 왕각연의 얼굴을 마구 핥았다.
왕각연이 까르르 웃으며 황구를 꽈악 끌어안았다.
“귀여워. 귀여워. 너도 어째 좀 커졌다? 괜찮아. 괜찮아. 커져도 귀여워. 왕 크니까 왕 귀여워!”
황구와 왕각연은 흡사 이산가족처럼 부둥켜안고 놀았다.
둘이 노는 것을 진천희는 술을 홀짝이며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째 도련님은 세상 다 산 노인네 같습니다?”
유호다.
그는 진천희 옆에 새 술병을 들고 왔다.
“이제 도련놈이라고는 안 부를 거야?”
“원한다면 소각주님이라고도 불러 드리죠.”
“도련놈만 아니면 돼.”
진천희는 술을 따랐다.
그러다가 문득 빈 술잔을 하나 더 집어 유호에게 건넸다.
“어때요, 유 총관도 한잔?”
“술은 싫습니다.”
“왜요?”
“맛이 없잖습니까. 대체 왜 인간들은 저 맛없는 걸 먹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감주도?”
“싫습니다.”
업무상 미루는 게 아니라 진짜로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보리차라도?”
왕각연이 들고 온 물병을 흔들었다. 그 말에 유호가 답했다.
“그것도 됐습니다.”
“보리차 싫어요?”
“…….”
유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새 술병을 딱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진천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멀어졌다.
“이상한 녀석.”
진천희는 유호가 가져다 둔 술을 한 잔 따랐다.
따르는 순간 진한 향기가 밀려왔다.
“와, 소각주님, 그건 무슨 술이래요?”
“모르겠네요. 유 총관이 놓고 가 버려서.”
한 잔 삼키니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깊고 달콤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삼키고 나니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 알 정도로 독했다.
오래된 술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명장이 오랫동안 담근 술.
꽃향기가 비강을 가득 채웠다.
“이 술 이름이 뭔지 나도 궁금하네.”
악사들의 연주가 밤공기를 채웠다.
진천희 옆에 앉아 있던 스승님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 이 제갈 모의 쾌유를 축하해 준 의각원들과 제자 소백룡에게 작은 답례를 할까 합니다.”
스승님은 연회장 한가운대로 향했다.
의각주의 등장에 악사들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스승님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젓자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지잉-
이번에는 분위기 있는 음악이 홀을 가득 채웠다.
스승님이 손을 들고 내력을 집중하자 그의 긴 백은빛 머리카락이 호를 그리며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어딘가 꽂혀 있던 철검이었다.